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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리고 싶은 결혼
되돌리고 싶은 결혼
작가: 김찬

제1화

“손화영 씨, 그래도 제때 응급조치를 해서 동생분 목숨을 구할 수 있었어요. 병원비는 언제쯤 납부할 생각이죠? 벌써 한참이나 밀렸는데 더 내지 않으면 동생분 약도 중단될 거예요. 지금 상황에서 약까지 중단하면 언제든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데 수술도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에요.”

손화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바쁘게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최선을 다해 평정심을 유지하며 그녀는 고개를 들어 말했다.

“선생님, 최대한 빨리 납부할 테니 죄송하지만 조금만 더 시간 끌어주세요.”

단승철은 동정 어린 눈으로 손화영을 바라보았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얼굴에 옷과 장신구도 화려하고 값비싼 것들로 가득해 재벌가 사모님처럼 보이는데 동생의 병원비조차 낼 형편이 안 되는 상황이라니.

“이미 최선을 다해 시간을 끌고 있지만 약값뿐만 아니라 수술비도 준비해야 합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알다시피... 기증자가 언제 나타날지 모릅니다.”

“알아요.”

손화영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녀는 누구보다 초조해하고 있었다.

“손화영 씨, 정말 안 되면 박 대표님한테 가서 빌어요. 그래도 부부인데 죽는 걸 뻔히 보고 있지만 않겠죠.”

단승철은 손화영을 힐끗 쳐다보다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한 달여 전, 박연준은 갑자기 손화영 남동생의 병원비를 끊고 세계적으로 뛰어난 실력의 의료진까지 철수시켰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손씨 집안에 큰일이 생겨 손화영의 아버지가 횡령 혐의로 피소됐고 손화영의 남동생은 그 일로 누군가와 갈등을 빚다가 혼수상태에 빠졌다.

단승철은 손화영이 대체 남편에게 뭘 잘못했길래 그가 이토록 매정하게 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리 비밀 결혼이라고 해도 부부 싸움은 말로 잘 달래면 될 것 같았다.

강성 최고의 부호이자 부승그룹 대표인 그의 손 틈에서 흘러나온 돈으로도 남동생 병을 치료하기엔 충분했다.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손화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최대한 빨리 돈 가져올게요.”

그녀와 박연준 사이가 말 몇 마디로 풀릴 거였으면 이 지경까지 되지도 않았다.

박연준...

그는 항상 손화영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 나 있었다.

단승철은 연민과 동정이 담긴 눈빛을 보내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사모님 노릇이 쉬운 자리가 아니란 걸 알고 있다.

박연준은 젊고 능력이 뛰었지만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예전에는 손우영을 도와 최고의 의료진까지 찾아주었지만 지금은 앞뒤 가리지 않고 철수시켜 버렸다.

“손화영 씨, 동생한테 가 보세요. 전 바빠서 이만.”

병실 안에는 손우영이 깊은 잠을 자고 있었는데 속눈썹이 길고 하얀 얼굴이 아주 잘생겼다.

손화영은 스무 살밖에 안 됐지만 어릴 적부터 심장이 좋지 않아 너무 많은 고통을 겪어온 손우영을 가슴 아파하며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우영의 손목에 닿았고 맥박은 가늘고 느리게 뛰고 있었다.

그녀와 손우영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손화영은 멍하니 있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보였다.

“우영아, 무슨 일이 있어도 누나가 꼭 구해줄게!”

곧 손화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단호한 걸음으로 병동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날이 어두워지고 손화영은 클라우드 칸타빌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사모님, 돌아오셨어요? 도련님은 괜찮으세요?”

한쪽에서 나이 지긋한 도우미 윤미숙이 앤티크 꽃병을 닦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일단 위기는 넘겼어요.”

손화영은 슬리퍼를 갈아 신고 문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그 사람 오늘도 안 들어왔어요?”

“네.”

손화영을 힐끗 쳐다보며 머뭇거리는 윤미숙의 눈에 안쓰러움이 담겨 있었다.

손화영은 피곤한 몸을 끌고 소파로 걸어가 앉은 뒤, 고민 끝에 휴대폰을 꺼내 박연준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아무리 늦은 시간이 되어도 집으로 돌아와 그녀를 괴롭히던 그는 임청아가 귀국한 뒤로 아예 나타나지 않더니 이제는 전화도 받지 않는다.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전화기 너머에서 남자의 낮고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또 무슨 일이야?”

손화영은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느낌과 함께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

“연준 씨, 아빠랑 우영이...”

“연준 씨, 나 너무 무서워...”

손화영의 말을 기다릴 새도 없이 전화기 너머로 한 여성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손화영은 잠시 침묵했고 전화기 반대편에서 박연준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게 옆에 있는 여성을 달래고 있었다.

그는 여자를 달래고 나서 다시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잘 안 들려. 손화영, 나 지금 바쁜 거 알잖아. 원하는 거 다 해줬는데 사소한 일로 귀찮게 하지 마!”

손화영은 심장이 저릿하며 목구멍에는 유리 조각이 박힌 듯 아려왔다.

“난...”

“사모님 된 지 5년이 지났는데 작은 일 하나도 못 해결해?”

남자는 성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손화영은 눈시울을 붉히며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곤 피식 조롱 섞인 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들어 TV를 보니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또다시 박연준의 스캔들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 여자는 그녀도 알고 있는 그의 첫사랑이었다.

박연준은 첫사랑을 데리러 해외까지 갔고 돌아와서는 리무진에 별장에 꽃까지... 도시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모두들 박연준이 역시나 잠깐 데리고 노는 줄 알았지만 아무도 임청아가 그의 첫사랑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를 배신하고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여자였다.

손화영은 문득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10년 동안 그를 좋아했고 오랫동안 쫓아다녔고 박건형의 고집 덕분에 결국 그의 아내가 되었다.

박연준이 그녀와 결혼한 건 박건형의 압박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첫사랑과 닮아서였지만 그를 사랑했기에 그녀는 기쁘기만 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기꺼이 5년 동안 그에게 모든 걸 내어주며 아내로서 본분을 다했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5년 내내 남편 곁에서 빨래하고 요리하고 가정부처럼 떠받들었다.

그러면서 늘 조금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박연준은 그녀가 해준 요리를 좋아했고 그녀가 옷을 골라주고 정리해 주는 걸 좋아했으며 그녀가 자신을 돌봐주고 자신은 침대에서 그녀를 괴롭히는 걸 즐겼다.

그래서 남편이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감정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왜 5년 동안 이혼하자는 말 한마디 없었겠나.

그런데 이제는 정신을 차렸다.

참 멍청하지.

대역은 영원히 대역일 뿐, 주인의 자리를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는걸.

...

벨리브 가든.

“대표님, 사모님께 무슨 일 있나요? 제가 처리할까요?”

진태원은 창가에 서 있다가 방금 전화를 끊은 박연준을 힐끗 쳐다봤고 그의 눈가엔 어렴풋이 찔리는 기색이 엿보였다.

“무슨 일이 있겠어, 손씨 집안 쪽 일은 네가 처리하고 있잖아. 손우영도 기증자가 나타났고...”

진태원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는 박연준이 이런 것들에 관해 묻지 않을 줄 알았고 손우영의 주치의와 진료비를 빼돌린 사실에 대해서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손화영에 관해서도 관심이 없을 거다.

이 또한 그가 무모하게 일을 벌인 이유이기도 했다.

박연준의 마음속엔 손화영이 없었다.

박연준은 방 안 가득 쌓여 있는 장미꽃과 그 속에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임청아를 흘깃 쳐다보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민 교수님 쪽에 이미 사람 보내서 연락했으니까 소식 들리면 알려줄게.”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돌아서서 집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박연준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 비서, 앞으로는 멋대로 일 벌여서 사람들 오해하게 하지 마.”

“전 대표님께서 임청아 씨 기쁘게 해드리려는 줄 알고... 그래도...”

진태원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안 그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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