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모습을 말하는 거야?”“아니, 아주 아주 어렸을 때. 아마 7, 8살 정도 됐을 때는 수줍음도 많고 아주 착한 아이였어. 처음 부모님과 함께 조상님께 제사 지내러 갔다가 가정부와 헤어지게 됐는데 그 숲에서 길을 찾도록 이끌어준 사람이 바로 걔였어.”그 말을 듣던 고유현은 두 눈을 크게 떴다.“유진 누나랑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네.”“응, 그때 평생 잘해주겠다고 맹세했지.”“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네.”“근데...”“근데 뭐?”김주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하지만 최근 며칠을 함께 보내면서 그는 친구와 연인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친구일 때는 자기 자리만 지키면서 그녀가 행복하면 자신도 행복했다.그녀도 지금처럼 손오공의 머리에 씌워진 금고아나 그의 목을 옥죄는 철조망처럼 숨이 막힐 정도로 그를 괴롭히지도 않았다....질식할 것 같았다.예전에는 퇴근 시간이 되면 안서희를 데리러 병원에 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안서희는 기뻐서 펄쩍펄쩍 뛰곤 했다.안서희는 다소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친해지고 나면 생각만큼 꽉 막힌 성격이 아니었고 오히려 재치 있는 언변을 가지고 있었다.시사나 가십거리, 주변 일화 등 어떤 이야기를 하든 항상 다채롭고 재미있게 풀어냈다.하지만 본업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의사처럼 엄격하고 진지한 태도로 돌아섰다.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임산부들을 늘 상대한 탓인지 그녀는 늘 상대를 배려하며 말했고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그의 삶에 나타난 여자는 많지 않았고 딱 이 둘이었기에 더 비교할 대상이 없었다.하지만 단순히 책임감과 선량함만 놓고 보더라도 안서희가 훨씬 나았고 안유진은...예전의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였다.“형, 아직 얘기 안 했어. 나 도와줄 거야, 말 거야?” 고유현은 초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다그쳤다.“형, 이 여자가 내 승부욕을 자극했어. 전에 여자들은 다 내 말이면 그대로 따라서 재미없었는데 갑자기 도발하는 상대를 만났으니까 절대 그냥
퇴근한 김주혁은 곧장 저택으로 돌아갔고 가정부가 문을 열어주었다.“도련님, 오셨어요?”“네, 엄마는 어디 계세요?”“여사님 지금 글 쓰고 계세요.”“...글이요?”“네.”김주혁은 서재로 갔지만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깜짝 놀랐다.한 달 넘게 보지 못한 어머니는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평소 자기 관리도 잘하고 건강하게 사셨던 어머니는 또래보다 젊어 보였다.하지만 지금 어머니는 심플한 잠옷을 입은 채 머리도 전보다 하얗게 세서 제법 초췌해 보였다.“엄마.”고개를 들어 아들인 것을 확인하고도 백금희는 반가운 기색 없이 덤덤하게 말했다.“여긴 왜 왔어?”“몸이 안 좋으시다고 해서 병원에 모셔다드리려고요.”백금희는 가볍게 웃더니 계속해서 글을 쓰면서 답했다.“괜찮아, 너 일하느라 바쁘잖아. 아줌마가 약 사줬고 먹고 많이 좋아졌어.”“아주머니가 무슨 약을 샀는데요, 어디 봐요.”“너 약에 대해 알아?”“...잘 몰라요.”“모르는데 봐도 무슨 소용이 있어?”김주혁은 어머니의 마음속에 분노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최근 들어 몸이 많이 쇠약해졌고 두통까지 느낀다는데 아마도 자신의 결혼 생활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 김주혁은 씁쓸함을 느꼈다.그가 다가가 말했다.“엄마, 제가 마사지해 드릴게요.”“그래.”그는 어머니 뒤에 서서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살살 문질렀다.“엄마 어때요? 좀 나아졌어요?”백금희는 눈을 감고 무기력하게 말했다.“네가 한의학까지 찾아가서 특별히 배운 마사지인데 안 좋을 리가 있겠어?”“...괜찮으면 됐어요. 앞으로 매일 찾아와서 마사지해 드릴게요.”“그럴 필요 없어, 날 위해 배운 것도 아니잖아.”김주혁의 손이 멈칫했다.백금희는 가볍게 그의 손을 떼어낸 뒤 문을 가리켰다.“됐어, 네 효심은 충분히 알았으니까 아무도 너 욕할 사람 없어. 이만 돌아가.”“여기가 내 집인데 어디로 돌아가요?”“안유진한테 가. 그 애 때문에 처자식도 버리고 죄까지 뒤집어썼잖아. 걔를 사랑한다며? 그럼 걔한테 가지 뭣 하러 늙
아이 얘기를 듣는 순간 김주혁의 가슴은 칼로 찌르는 것 같았고 고통의 흔적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백금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누구 보라고 그렇게 아픈 척하는 거야?”김주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엄마, 제 아이기도 해요.”“허, 그건 알고 있네?”“제가... 늦었어요. 조금만 더 일찍 갔으면 아이 살렸을 지도 모르는데...백금희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못 살렸을 거야. 서희가 독하게 마음먹고 절망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거니까. 너랑 모든 인연을 끊고 싶었던 거야. 그게 아니고서야 단호하게 그런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거야.”김주혁은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이 자기 심장을 잡고 찢고 비틀고 쥐어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그는 심장이 있던 자리를 주먹으로 치며 심호흡을 내뱉었다.그랬다, 그날 병원 문밖에서 안서희는 그에게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다시는 그를 보고 싶지 않다고, 그래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그때 그가 제때 도착해서 낙태를 막았다고 해도 안서희는 차갑게 마음이 식었고 언젠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백금희가 물었다.“하나만 물어볼게. 유진이 배 속에 있는 아이, 너랑 상관있어 없어?”“당연히 없죠!” 김주혁은 즉각 부인했다. “귀국했을 때 이미 임신 5개월이었고 걔가 출국한 뒤로는 만난 적도 없어요.”이 말을 들은 백금희는 기분이 나아지기는커녕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남의 자식 계부나 되려고 자기 친자식을 죽인 거야?”김주혁의 양옆으로 드리워졌던 주먹이 순식간에 꽉 쥐어졌다.백금희가 말을 이어갔다.“주혁아, 네가 스스로 내린 결정이니 너한테는 옳은 선택이길 바란다.”따르릉=전화벨이 울렸고 김주혁은 발신자 번호를 확인했다.“유진이지?”“...네.”“받아.”김주혁은 곧장 전화를 끊었다. “아침에 나올 때 다 준비해 뒀으니까 별일 없을 거예요.”말이 떨어지자마자 전화벨이 다시 울렸고 김주혁은 다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곧 세 번째 전화가 걸려 왔다.백금희는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솔직하게 얘기하면 그렇다.“안유진, 우리가 함께하고 나서의 삶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어. 요 며칠 엄마 몸이 안 좋으셔서 저택에서 엄마랑 지낼 생각이야. 우리 각자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자, 앞으로 어떻게 할지.”“그래서 지금 저택에 있어?”“그래.”“안 선생님과 함께?”“나 혼자.”안유진은 만족스러웠다.“그럼 왜 아까 나한테 거짓말했어? 내가 질투하는 걸 일부러 보려고?”김주혁은 콧방귀를 뀌었다.“맘대로 생각해.”“그래, 부부 사이에 질투도 해야 재밌지. 하지만 김주혁 경고하는데, 다른 여자랑은 절대 엮이지 마. 안 그러면 나 가만히 안 있어.”“이미 네가 내 주변의 여자 비서와 직원들 다 바꿨는데 내가 누구랑 엮여?”안유진이 말했다.“네 전처. 두 사람 이혼하기 전까지 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주혁아, 난 소유욕이 강해. 넌 이제 내 거야. 누구도 널 빼앗아 갈 수 없어.”김주혁은 순간적으로 경계했다. “무슨 속셈이야?”“뭐가 무서워, 네가 얌전히 있으면 내가 그 여자 건드릴 일은 없어. 안 그러면 철저히 망가뜨릴 거야!”“그 여자는 잘못한 게 없어. 안유진, 이성적으로 생각해!”“난 지금 아주 이성적이야. 참, 이따 우재한테 연락해서 데리러 오라고 할 거야. 나도 이젠 이모 며느리인데 몸이 불편하면 당연히 내가 찾아봬야지...”김주혁은 곧바로 말렸다.“엄마가 잠을 잘 못 주무시는데 오지 마.”“안 돼, 못난 며느리라도 시어머니는 만나야지. 오늘 꼭 갈 거야.”“안유진! 다른 사람 말 좀 들어! 엄마 지금 몸이 안 좋으셔서 푹 쉬어야 해. 네가 의사도 아닌데 와서 뭘 할 수 있다고 그래, 쉬는데 방해만 되지.”“방해 안 해. 이모가 날 얼마나 예뻐하시는데, 내 배 속에 있는 아이가 곧 손자가 될 텐데 그 생각에 기뻐서 쾌차하시지 않을까?”“하지만 넌...”“됐어, 그만해. 내 결정은 아무도 바꿀 수 없어. 지금 바로 우재한테 연락할 거야. 끊어”“여보세요...”뚜뚜뚜-안유진은 바로 전화를 끊었
진씨 아주머니는 앞치마를 벗어 던지며 서둘러 백금희의 방으로 달려가 짐을 챙겼다.김주혁이 어머니를 쳐다보니 백금희는 이미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염주 팔찌를 손으로 굴리며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그녀는 아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김주혁은 어쩔 수 없이 진씨 아주머니를 찾아갔고 진씨 아주머니는 재빠르게 옷가지와 생필품을 챙기며 이미 짐을 싸고 있었다.“진씨 아주머니?”“네, 도련님.”“제가 도와드릴게요.”“아뇨 아뇨, 그냥 앉아 계세요. 제가 할게요.”김주혁이 뻗은 손이 허공에서 멈추며 쓸쓸하게 손을 거두었다.“진씨 아주머니, 안유진을 무서워하시는 것 같은데요?”진씨 아주머니는 극도로 부자연스러운 표정이었다.“아, 아니에요.”“무슨 일 있으면 그냥 솔직하게 말하세요.”진씨 아주머니는 고개를 숙이고 덤덤하게 웃었다.“도련님, 저는 평생을 가정부로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모셨지만 진정으로 저를 가족으로 대접해 주는 사람은 오직 여사님 한 분뿐이었고 도련님도 제가 친아들처럼 챙기고 있어요.”“알아요.”“도련님이 듣기 싫을 수도 있겠지만 오늘 과감하게 얘기할게요. 사모님과 이혼하고 안유진 양을 선택한 걸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예요.”“...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도련님, 결혼은 평생 함께할 두 사람이 하는 건데 좋아하는 것과 늙을 때까지 곁에 있어 주는 건 별개예요. 안유진 양은... 어렸을 때부터 얌전한 사람이 아니었고 도련님과 만나면 적지 않은 사고를 일으킬 거예요. 게다가... 험담하는 건 아니지만 왠지 본성이 좋지 않은 느낌이 들어요.”김주혁은 얼굴을 찡그렸다. “뭐 알고 계신 건가요?” “별건 아니고 어렸을 때 학교 앞에서 병아리 팔던 거 기억나요?”“네.”“병아리 파는 장사꾼이랑 말다툼하다가 벽돌로 상자 안에 있는 병아리를 전부 때려죽이는 걸 제 눈으로 봤어요.”김주혁은 경악했다.“... 때려죽였다고요?”“네, 그 장면은 정말... 어른인 제가 봐도 무서웠는데 저렇게 어린 여자애가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진씨 아주머니는 이미 짐을 다 쌌다.“도련님, 그럼 저랑 여사님은 이만 가볼게요. 여사님 요즘 기분이 좋지 않으셔서 안유진 씨 만나면 며칠 동안 잠을 못 주무실 것 같아요.”밖에서 백금희가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씨 아주머니, 짐 너무 많이 싸지 마시고 얼른 가요. 부족한 건 사면 되죠.”“네 여사님, 바로 갈게요.”진씨 아주머니는 대답을 하고는 김주혁에게 나지막이 말했다.“도련님, 오늘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어쨌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진씨 아주머니는 가방을 들고 재빨리 걸어나갔다.“여사님, 가요.”“그래요, 가요.”김주혁은 뒤돌아 곧장 따라간 뒤 진씨 아주머니의 손에서 가방을 건네 받았다.“제가 모셔다 드릴게요.”백금희가 말했다.“신경 쓰지 마, 진씨 아주머니가 차를 부를 거야.”김주혁은 이미 두말없이 가방을 들고 문밖으로 나가 차 트렁크를 열었다.그런데...트렁크에 물건이 있었고 그건 안서희 것이었다.뒤이어 나온 백금희도 그걸 보고 단번에 알아보았다.“이거 안서희 옷 아니야? 왜 상자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어? 그리고... 이건 뭐야?”핏자국이다.끈적끈적하고 악취가 나는 액체로 변한 죽은 물고기의 핏자국이 연노란 니트에 묻어 있었다.다른 옷들도 정도는 다르지만 거의 모든 옷이 훼손되어 온전한 것은 거의 없었다.백금희는 한눈에 알아채고 차갑게 웃었다.김주혁은 입을 꾹 다물고 상자를 들어 조수석에 올려놓은 뒤 어머니의 여행 가방을 그 안에 넣었다.그리고는 뒷좌석 문을 열었다.“엄마, 진씨 아주머니, 차에 타세요. 며칠 동안 산에 있는 리조트 호텔에서 지내요. 거긴 공기 좋고 조용해서 쉬기 좋아요.”“...”김주혁이 다시 물었다.“엄마, 괜찮아요?”그런데 백금희가 되물었다.“주혁아, 너 정말 이혼하고 유진이랑 같이 살기로 마음 먹은 거니?”“전...”“사실대로 말해봐“...”백금희가 말했다.“정말 평생을 같이 살 생각이라면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단속
어머니와 진씨 아주머니를 쉬게 한 뒤 김주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지난 한 달 동안 이 방에 많은 손님이 머물렀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왠지 안서희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것을 떠올리자마자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특히...바로 이 방에서 그녀가 아기를 버리고 영원히 떠나기로 결심했다는 생각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그의 손에 들려 있던 산모 수첩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3년 가까이 안서희와 함께 먹고 자며 같이 살았지만 이 수첩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날이 어두워지는데도 휴대폰 화면은 여전히 켜져 있었고 안유진은 여전히 쉴 새 없이 전화를 걸고 있었지만 이미 그가 음 소거로 설정해 둔 상태였다.김주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똑같은 성을 가진 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부드럽게 성숙한 안서희에 비해 안유진은 극단적이었다.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20년 넘게 알고 지냈지만 안유진의 본성이 이럴 줄은 정말 몰랐다.전에는 단지 안유진이 활발하고 털털하다고 생각했는데 왜 정작 만나고 보니 이런 상황이 생긴 걸까?드디어 휴대폰 화면이 까맣게 변했다.배터리가 다 떨어진 거다.김주혁은 목에 걸린 올가미가 드디어 풀린 것 같은 안도감만 느꼈다.그는 심호흡을 내쉬며 침대 옆 스탠드 조명을 켜고 침대에 기대어 산모 수첩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첫 페이지를 넘기니 안서희의 예쁜 글씨가 적혀 있었다.[하늘이 당신을 순탄한 길로 인도하고운명이 당신을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길저 멀리 햇빛과 찬란한 불빛이미래의 모든 하늘을 비추길--내 아기를 위하여]그녀의 손 글씨는 우아함 속에 강인한 힘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글씨체였다.글씨가 사람을 닮았다는 말이 맞는지 그녀는 온화하고 사랑스러워 보이지만 내면에는 강한 자아를 지니고 있었다.다만 후자를 줄곧 그가 알아보지 못한 게 안타까울 뿐이다.첫 페이지를 넘기니 그녀의 글은 다소 흐트러져 있었다.[오늘 직접 검진을 받으러 갔는데 아이가 생겼단다
그러나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모두 공백 페이지였다.김주혁은 여러 번 확인하다가 마침내 뒤 페이지가 찢겼고 안쪽에 찢어진 종이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한눈에 봐도 규칙적이지 않고 흐트러진 모습이 극도로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찢어버린 것 같았다.김주혁은 안서희가 무엇을 썼는지 알고 싶었다.그는 노트를 불빛에 가까이 가져다 댔고 희미한 스탠드 불빛을 통해 뒷면의 빈 종이에 얕게 새겨진 자국이 희미하게 보였다.글씨를 쓰면서 남겨진 자국이었다!그는 즉시 호텔 전화를 들고 프런트에 전화를 걸었다.“당장 연필 가져다주세요!”직원은 지체하지 않고 재빨리 연필을 전달했다.김주혁이 연필을 기울여 종이에 슥슥 부드럽게 쓸어내리자 글씨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거창한 글은 아니었고 미안하다는 말만 적었다.종이 한 장에 뺴곡히...엄청난 무력감과 고통이 그를 사로잡았다.그녀가 아이를 지울 결심을 굳힌 날이겠지.발코니에서 안유진과 그가 나눈 대화를 들었던 그녀는 안유진이 나타난 첫날부터 뭔가 달라질 것 같은 예감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세 사람이 함께 있을 때 그녀는 명목상 사모님이었지만 안유진은 거듭 우정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시험하고 그녀의 일상에 침범하며 계속해서 그들 셋 중 제삼자는 안서희라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안서희도 자기 자리를 지키려 애를 써봤지만 그날 그녀는 자신의 두 귀로 안유진이 그 선을 넘는 것을 들어버렸다.그녀는 그날 밤을 어떻게 보냈을까?멍하니 절망한 채 날이 밝기만 기다렸을까, 아니면 끊임없는 내면의 갈등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워했을까?이 침대에 누워 뒤척이며 밤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는 울면서 수없이 많은 미안하단 말을 적었겠지.김주혁은 일기장을 덮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따르릉-호텔 전화가 울리고 전화기를 들어보니 리조트 프론트 데스크였다.“김주혁 씨, 방금 안유진 씨가 전화해서 여기 계시냐고 물었어요.”그는 여전히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멍하니 되물었다.“안유진 씨?”접수원은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