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은 그 말에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예상하고 시선을 들어 안서희를 바라보았지만 안서희의 얼굴은 의외로 평온했고 입가에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직원이 자신을 올려다보자 안서희가 정중하게 물었다.“왜요, 혹시 추가해야 할 내용이 있나요?”“아뇨, 충분합니다.”“네, 다행이네요. 그럼 부탁드릴게요.”“참, 자녀 양육권 문제도 있는데 그것도 상의하셨나요?”“저희는...”아이 얘기가 나오자 안서희의 안색이 어두워졌고 김주혁 역시 말을 하지 않으려는 듯 얼굴을 돌렸다.안서희가 말했다.“우리는... 아이가 없어요.”“아, 잘됐네요. 그러면 더 수월하겠어요, 걸릴 게 없으니까.”“맞아요.”“좋아요, 그럼 바로 접수해드릴게요.”“네.”직원은 김주혁에게 물었다.“남성분은요? 계속 여성분만 얘기하시는데 더 질문 있으세요?”김주혁은 고개를 들고 가로저었다.“이 사람 말대로 해요.”직원은 웃으며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알았어요, 집 사려고 이혼한 척하는 거죠?”김주혁은 얼굴을 찡그렸다.“네?”“됐어요, 다 알았으니까 연기하지 마세요.”안서희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물었다.“뭘 아셨는데요?”직원은 그들의 뒤로 알아서 보라는 듯 턱을 까딱했다.그들 뒤에는 이혼을 앞둔 부부 몇 쌍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누구는 목까지 벌게진 채 다투고 있었고 누구는 등을 돌린 채 모르는 사람처럼 서로 쳐다보지도 않았으며 누구는 여자가 남편이 어리고 젊은 여자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에 대성통곡했다.“봤죠? 저게 진짜 이혼하러 온 사람들이에요. 두 분은 아무런 갈등도 원한도 없어 보이는 게 관계가 깨진 것 같지 않아요. 그렇다면 왜 이혼하겠어요? 빈틈을 노려서 집을 장만하려는 거죠.”안서희는 이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아니에요, 저희 정말 이혼하러 왔어요.”직원은 여전히 믿지 않았다.“두 사람 대화도 아주 정상적으로 흘러가고 감정을 소진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안서희는 힘없이 웃었다.“애초에 금이 갈 감정조차 없어서 그렇다는 생
“서희야, 서희야...”그의 낮고 부드러운 중저음이 귓가에 맴돌았다.결혼한 지 3년이 되었지만 안서희는 여전히 침대 위에서의 김주혁과 침대 밖에서의 김주혁은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평소 김주혁은 다정하고 매너도 있었지만 밤마다 부부 관계를 할 때면 안서희는 그의 체력을 따라가지 못해 힘에 부칠 정도였다.겨우 버티다가 끝났을 때 안서희는 온몸이 쑤셨고 팔도 들지 못했다.김주혁이 그녀의 팔을 갑자기 덥석 잡았다. 지쳐버린 안서희는 눈을 뜰 힘도 없어 부탁하면서 애교를 부렸다.“그만 해요. 내일 우리 출근해야 하잖아요.”요즘 승급 준비에 안서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보고서를 다 작성했을 때 이미 새벽이 되었지만 또다시 김주혁에게 끌려 잠자리를 가졌다. 안서희는 너무도 힘들어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김주혁이 가볍게 웃었다.“뭔 생각 하는 거야?”안서희의 두 볼이 발그스름해졌다.“그럼...”김주혁은 가늘고 긴 커다란 손으로 안서희의 어깨를 잡고는 욱신거리는 곳을 마사지해주었다.힘이 셌고 또 마침 아픈 곳만 꾹꾹 눌러 시원한 느낌이 순식간에 온몸에 퍼졌다. 안서희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시원해?”김주혁의 매력적인 중저음이 귓가에 들려왔다. 변치 않은 다정함에 안서희의 두 볼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산부인과 의사인 그녀는 사실 이쪽 지식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론은 빠삭했지만 실전은 서툴기 그지없었다. 진짜 관계를 할 때면 그녀 자신이 봐도 심하게 모를 정도였다.다행히 김주혁은 참 젠틀한 사람이었다. 평소 다른 신혼부부들처럼 깨가 쏟아지진 않아도 그래도 서로 존경하며 사이좋게 지냈다.사실 안서희도 보수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맞선을 통해 알게 된 사이라 연애는 건너뛰고 바로 결혼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지금 이렇게 지내는 것도 꽤 잘 지내는 정도였다.“지금 움직여 봐. 어때? 좀 나았어?”안서희는 다시 어깨를 움직였다. 마사지 덕에 확실히 많이 가벼워졌다.“고마워요. 많이 나았어요.”
조수 임수경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선생님, 산모님 남편분이랑 아는 사이였어요?”안서희는 눈앞의 익숙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에 경악과 놀라움, 그리고 불안이 섞여 있었지만 안에 누워있는 여자에 대한 걱정이 가장 많았다.지금 충분히 억제하고 있는데도 두려움과 다급함은 숨기지 못했다.“당신이 저 환자...”안서희가 수술실 안을 힐끗거렸다.“남편이에요?”임수경이 한발 먼저 말했다.“네. 아까 수술 동의서에 사인한 가족이 바로 이분이에요.”안서희는 온몸이 으스스해졌고 안색도 별로 좋지 않았다.“그래요...”김주혁이 이를 꽉 깨물었다.“서희야, 나중에 내가 다 설명할게.”안서희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의사라면 의사답게 행동해야 하기에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말했다.“수술 아주 성공적으로 잘됐고 산모와 아기 모두 무사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근데 아직 유산기가 있으니까 며칠 병원에 입원해서 주사 맞아야 해요. 입원해서 아무 문제 없다면 주말에 퇴원해도 됩니다.”김주혁도 그제야 시름을 놓은 듯했다.“알았어.”그러더니 잠깐 멈칫하다가 이어 말했다.“고생했어, 서희야.”“아니에요. 저분이 누구 아내든 의사로서 최선을 다해 살려냈을 거예요.”안서희는 사무실로 들어와 찬물 한잔을 들이마셨다. 한참이 지나서야 마음이 겨우 진정되었다.그러다가 십여 분 후,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밖에서 김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서희야, 나야.”안서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김주혁의 낯빛이 아까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눈시울은 여전히 붉어 있었고 미간 사이의 걱정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조금 전 수술실 밖에서 너무 놀라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김주혁의 흰 셔츠에 핏자국이 묻어있었고 옷도 잔뜩 구겨져 있었으며 옷소매가 다 젖어 있었다.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여자를 안고 병원에 오다가 양수가 묻었거나 아니면 조금 전 병실에서 그 여자가 흘린 눈물이거나.안서희는 의자로 돌아가 덤덤하게 물었다.“가서 봤어요?”
의외냐고?사실 그리 의외는 아니었다.안서희와 김주혁은 자연스럽게 만나 연애해서 결혼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3년이나 함께 살았기에 김주혁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김주혁은 그래도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대표처럼 상대를 숨 막히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말도 다정하게 했고 무슨 일이든 꼼꼼하게 처리하는 점잖고 듬직한 남자였다.그런 김주혁을 이성을 잃게 만든 여자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안서희는 헤어졌던 연인이 서로 울며불며 다시 만나는 상상을 하며 마음의 준비까지 다 마쳤지만 현실은 늘 생각과 많이 달랐다.그녀가 본가로 들어갔을 때 집에 임신부 한 명이 있었다.그런데 임산부는 안서희의 시어머니인 백금희와 나란히 앉아있었고 김주혁은 홀로 싱글 소파에 앉아있었다. 안서희를 본 김주혁은 평소처럼 빠르게 일어나 외투와 가방을 받았다.“내가 걸어줄게.”시어머니도 아주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서희 왔어? 얼른 와서 앉아.”“어머님.”안서희는 시어머니에게 인사한 후 옆에 앉은 임산부를 보며 물었다.“이분은...”그러자 백금희가 웃으며 말했다.“소개할게. 얘는 유진이라고 옆집 안승호 씨네 딸이야. 얼마 전까지 남편이랑 해외에서 살다가 최근에 귀국했어. 유진아, 쟤는 주혁이 와이프야. 방금 얘기했었지?”임산부는 배를 만지면서 천천히 일어났다.“안녕하세요. 안유진입니다.”안서희가 놀라며 대답했다.“안녕하세요.”“우리 다 안 씨네요?”백금희가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그러게. 주혁이 안 씨랑 인연이 있나 봐.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가장 친한 친구랑 와이프가 안 씨인 걸 보면.”안유진이 말했다.“그러게요. 이모가 모르는 게 하나 더 있어요. 내 수술도 안 선생님이 해주셨어요.”백금희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정말?”“네.”안유진이 안서희에게 먼저 악수를 건넸다.“아직 선생님한테 살려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네요. 그때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저랑 아이 지금 이렇
안서희는 지갑에 넣은 검사서를 떠올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준비 안 했어?”김주혁이 가볍게 웃었다.“됐어. 우리 안 선생님이 얼마나 바쁘신 분인데 시간 내서 밥 한 끼 해준 것만 해도 엄청 좋은 선물이지, 뭐.”“주혁 씨, 다음 주에 휴가 냈는데 우리 나가서 며칠 놀다 와요.”김주혁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요즘 보고서 쓰느라 바쁘지 않아? 그럴 시간 있어?”“시간 조절할 수 있어요.”김주혁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우리 신혼여행도 못 갔는데 이참에 다녀오자.”“그래요.”안서희가 되물었다.“주혁 씨 일에 지장 주는 건 아니죠?”“다음 주에 가잖아. 이번 주에 일 다 미리 처리하면 돼.”“그럼 다행이고요.”김주혁이 말했다.“내일은 낮에 출근해? 아니면 당직이야?”“다른 사람이랑 바꿔서 내일 휴식이에요.”김주혁이 또 말했다.“내일 고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어. 나랑 같이 가자.”3년 동안 김주혁의 아내로 살면서 안서희는 그의 친구들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바쁜 이유도 있었지만 굳이 만나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이번에 생일 선물을 주겠다던 약속을 갑자기 어긴 바람에 이 부탁은 들어주기로 했다.“알았어요.”...1박 2일 동안 뜬 눈으로 보낸 안서희는 그날 밤에 아주 푹 잤다. 깨어났을 때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사실 이런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의사 특성상 환자가 위급할 때 언제든지 병원에 나가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김주혁과 한 침대에서 자긴 하지만 말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다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백금희가 말했다.“서희 깼어? 주혁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안서희가 재빨리 나가보니 익숙한 하얀 카이엔이 세워져 있었다. 다가가서 조수석 차 문을 열고 차에 타려는데 눈앞의 상황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안에 있던 사람도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안 선생님?”“안유진 씨?”안유진은 오늘 특별히 치장까지 했다. 배가 나오긴 했지만 빨간 원피스에 검은 머리를 풀어
김주혁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역주행하여 달려오는 스쿠터를 본 순간 다급하게 핸들을 꺾으면서 급브레이크를 밟고 길가에 멈춰 섰다.다행히 스쿠터와 부딪치지 않고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안서희는 놀란 나머지 얼굴이 다 하얗게 질렸다.“운전할 때는 딴 데 정신 팔지 말아요.”“알았어.”김주혁도 놀라서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는 휴대전화를 안유진에게 돌려주었다.“스스로 해제해.”그런데 안유진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로 거절했다.“나 지금 메이크업 수정하잖아. 휴대전화 쥘 손이 없어.”“나 운전해야 하는데...”“지금 안 하잖아.”안서희는 한숨을 내쉬고는 김주혁에게 말했다.“그럼 휴대전화 나 주고 비번 말해요. 내가 해제할게요.”“알았어.”김주혁은 휴대전화를 안서희에게 건넸다.“비번은 ryx2...”“주혁아, 뭐 하는 거야?”안유진이 갑자기 화를 내더니 거울을 옆에 던지고는 안서희가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확 빼앗은 후 김주혁에게 던졌다.“내 비번 남한테 얘기해선 안 돼.”난감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김주혁과 안서희와 달리 안유진은 난감한 기색이라곤 없었고 심지어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안유진은 뒷좌석의 안서희를 돌아보며 웃었다.“미안해요, 선생님. 임신해서 호르몬 변화 때문에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해요. 선생님은 이해하죠?”“네...”안유진이 말했다.“현대 사회라 휴대전화에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많잖아요. 난 그저 내 사생활을 지켰을 뿐이지, 선생님한테 화를 낸 게 아니에요.”안서희가 웃으며 말했다.“변호사는 역시 다르네요.”그러자 안유진이 대답했다.“직업병이에요.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선생님.”“그럴 리가요. 그나저나 그냥 사모님이라고 불러요. 여긴 병원도 아니고 유진 씨 주치의도 아니에요. 그때 그냥 임시로 수술해줬을 뿐이에요.”하지만 안유진은 완곡하게 거절했다.“수술해줬으면 당연히 선생님이죠. 주치의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그리고 어제 만났을 때부터 선생님이라 불러서 적응했는데 호칭 갑자기 바꾸는 것도 이상하고요
“그 사람 와이프입니다.”앞에 있던 두 남자가 놀란 두 눈으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당신이...”“안서희입니다.”넋이 나간 두 사람을 보며 안서희가 웃으면서 물었다.“오늘 동창 모임이라고 들었는데 가족을 데려오면 안 되나요?”“아, 그건 아닌데...”“그럼 들어갈게요.”안서희는 가방을 들고 칵테일 바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모임에 온 사람이 정말 많았다. 동창들 속에서도 주목을 받은 김주혁은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인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안서희는 그들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아 아무 자리나 잡고 앉았다.칵테일 바가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김주혁은 더운지 양복 외투를 벗어서 팔에 걸었다. 그런데 누군가 양복을 받으면서 말했다.“내가 들어줄게.”김주혁은 그녀의 손을 피해 버렸다.“괜찮아. 내가 들고 있으면 돼.”안유진이 가볍게 웃었다.“오늘 네가 취해서 쓰러지기 전까지는 애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데. 양복 나 주고 애들이랑 편하게 마셔.”김주혁은 잠깐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안유진은 양복을 받고 옆에 내려놓는 게 아니라 계속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김주혁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면서 고개를 숙이라고 했다.김주혁은 고분고분 상체를 숙이고 그녀의 키에 맞게 귀를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안유진이 뭐라 속삭였는지 김주혁의 두 눈이 반짝이면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둘이 무슨 귓속말 했어?”활발한 성격의 안유진이 바로 말했다.“미리 얘기하는데 오늘 내가 주혁이 옆에 있을 거니까 적당히들 해. 술 너무 많이 주지 마. 알았어?”“아이고, 유진이 너 주혁이 걱정하는구나?”그러자 안유진의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걱정은 무슨.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김주혁도 눈살을 찌푸렸다.“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마. 유진이 결혼했어. 임신한 거 안 보여?”친구들은 김주혁을 두려워하기라도 하듯 김주혁이 한마디 한 후 더는 농담을 건네지 않았다. 김주혁의 옆에 있던 남자도 한마디 거들었다
남녀 사이에 순수한 우정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주혁이 지금 좀 취했다는 건 안서희는 알고 있었다.술 대신 물을 담았던 작은 병은 진작 사라지고 없었는데 아무래도 물을 다 마신 듯했다. 몇몇 친구들이 김주혁을 둘러싸고 자꾸 술을 권했다.안유진은 임신한 상태라 술에 취한 남자들을 말릴 수가 없었다. 옆에서 한참 동안 소리를 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결국 강제로 몇 잔을 마신 바람에 김주혁은 비틀거리면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그 모습에 안서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미안한데 주혁 씨한테 가봐야겠어요.”최민재는 더는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가봐요.”안서희는 재빨리 다가가 금방 따른 김주혁의 술잔을 가로챘다.“어머, 저 여자는 누구야?”안서희는 다른 걸 신경 쓸 새도 없이 김주혁의 팔을 잡고 물었다.“주혁 씨, 괜찮아요?”김주혁은 한참 동안 그녀를 빤히 보고서야 누군지 알아보고 고개를 저었다.“괜찮아.”두 사람의 목소리가 하도 낮아서 사람들은 듣지 못했다. 안서희가 종업원인 줄 알고 다가와 잡아당기려 했다.“당신이 뭔데 우리 주혁이 옆에 와? 팔자 좀 바꾸겠다고 못 하는 짓이 없네...”김주혁은 남자의 손을 밀어내더니 안서희를 뒤쪽으로 당기면서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건드리지 마.”“주혁아, 저런 여자를 왜 감싸고 돌아? 딱 봐도 너한테 잘 보이려고 저러는 거잖아. 저런 여자 나 많이 봤어...”“우리 와이프야.”남자는 갑자기 술이 다 깨면서 정신이 번쩍 드는 것만 같았다. 김주혁의 뒤에 있는 안서희와 안색이 창백해진 안유진을 번갈아 보면서 의아해하며 물었다.“저 여자가 와이프면 유진이는?”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안유진에게 쏠렸다.안유진은 아직도 김주혁의 양복 외투를 들고 있었는데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고 눈시울도 붉어졌다.“내가 말했잖아. 그냥 친구라고.”얼굴의 웃음이 어찌나 부자연스러운지 누가 봐도 억지로 짜낸 미소였다.바보가 아닌 이상 안유진의 표정을 보면 다른 복잡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