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유진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되받아쳤다.“나랑 주혁이 20년 넘은 친구라는 거 알 사람은 다 알아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 몰아가야겠어요? 그럼 앞으로 그냥 동성 친구만 만나야겠네요. 이성이면 오해하니까.”안서희가 바로 대답했다.“이성 친구가 당연히 있을 순 있죠. 근데 남녀유별이라는 말 몰라요?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결혼했잖아요. 조심할 건 조심해야죠.”안유진이 코웃음을 쳤다.“의학을 배운 선생님이 이렇게 자질구레한 것까지 따질 줄은 몰랐네요. 지난주에 날 수술해줄 때 수술실에 남자 의사도 들어왔었어요. 그때 내가 싫다고 했었는데 선생님이 뭐라 했죠? 의사는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어요.”“그 남자 의사는 마취과 의사였어요.”“그런데요? 난 여자고 그분은 남자잖아요. 게다가 산부인과 수술인데 이럴 때는 남녀유별 따지지 않나요? 앞뒤가 너무 안 맞는 거 아니에요?”안서희는 힘 빠진 모습으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안유진 씨, 완전히 다른 두 개념을 비교해선 안 되죠. 그때 유진 씨 출혈이 심했고 또 한밤중이라 당직을 선 마취과 의사가 남자 의사밖에 없었어요. 만약 그때 수술하지 않았더라면 아이를 잃을 수도 있었다고요. 아이 목숨이 중요한가요, 남자 여자를 따지는 게 중요한가요?”안유진은 팔짱을 낀 채 불만을 드러냈다.“아무튼 선생님은 의사니까 의사가 뭐라 하면 그런 거겠죠. 그때 내 아이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누가 알겠어요?”안유진이 그녀의 실력을 의심하자 안서희도 드디어 분노가 끓어올랐다.“유진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다른 뜻은 없고 그때 선생님이 갑자기 병원으로 불려와서 수술을 한 거면 왜 여자 마취 선생님은 안 되냐는 거예요.”“당신...”“남자 마취 선생님도 내 수술실에 들어오는데 주혁이 바지 주머니에서 키 꺼내는 게 뭔 큰일이라고 그래요?”“그만들 해!”김주혁은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더니 한참 후에야 똑바로 섰다. 그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안서희에게 건네고는 다정
안서희를 믿어서인지, 아니면 켕기는 게 없어서 당당한 건지 김주혁은 휴대전화 잠금 비밀번호를 설정하지 않았다.안서희가 그의 휴대전화를 뒤질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설정하지 않았나?사실 안서희는 김주혁의 휴대전화를 뒤져보는 버릇이 없었다. 하나는 그동안 김주혁이 완벽한 남편이라서 뒤져볼 필요가 없었고 다른 하나는 안서희도 프라이버시를 존중했다. 아무리 부부라고 해도 성인이라면 자신만의 비밀이 있기에 지켜줘야 했다.그런데 휴대전화가 계속 진동한 바람에 안서희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여 결국 휴대전화를 들고 답장했다.[안서희예요. 주혁 씨 지금 샤워 중이라 휴대전화 나한테 있어요. 씻고 나오면 답장하라고 할게요.]이 답장을 보내자 휴대전화가 바로 조용해졌다.김주혁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안서희는 이미 잠이 든 듯했다. 안 좋은 꿈을 꿨는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그는 혹시라도 그녀가 깰까 살금살금 걸어가 베개 위의 휴대전화를 챙겼다. 한참 동안 뒤져보다가 다시 조용히 베란다로 향했다.안서희는 베란다를 등지고 누워있었는데 그가 나간 후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예민해서 누군가 가까이 오면 바로 깼다. 조금 전 김주혁이 베개 위의 휴대전화를 챙길 때 벌써 잠에서 깼다.베란다 쪽에서 옅은 담배 냄새가 풍겨왔다.김주혁은 능숙하게 담배를 피웠다. 아무래도 예전에 꽤 많이 피운 것 같았다.3년 동안 그는 한 번도 담배를 피운 적이 없어서 집에 재떨이도 없었다. 그런데 안유진이 돌아오고 나서부터 짧은 며칠 사이에 그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벌써 세 번이나 봤다.곧이어 베란다 쪽에서 김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방금 샤워하느라 인제 봤어.”“...”“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서희는 너한테 위세를 부리는 게 아니야.”“...”“아니야. 서희는 그런 사람 아니야. 사실 괜찮은 여자야. 평소 말수가 적어서 그렇지 나쁜 마음은 없다고.”“...”“알았어. 믿을게. 믿으면 되잖아. 그러니까 울지 마, 응? 산모가 울면 아이한테 안 좋아.”“...”“알았
권진아가 화들짝 놀랐다.“뭐?”“4주래. 검사한 지 얼마 안 됐어.”“...”안서희는 아랫배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이번 생일에 생일 선물로 알려줄 생각이었는데 지금 보니까 그 사람한테는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닐 수도 있겠어.”권진아가 마음 아파하며 그녀를 위로했다.“좋은... 소식일 수도 있지. 안유진도 임신했잖아. 주혁 씨가 아무리 안유진을 좋아한다고 해도 남의 자식을 키우려고 하겠어? 주혁 씨 그동안 너한테 잘해줬잖아. 어쩌면 진작 그 여자한테 마음이 식었고 너랑 행복하게 살길 원할 수도 있어. 그냥 이번에 안유진이 갑자기 돌아와서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올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것도 이해는 돼. 안유진이 떠나면 두 사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권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20년 넘게 짝사랑한 감정은 그냥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그 밑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숨겨져 있는지 그건 김주혁만 알고 있었다.권진아가 마지막으로 말했다.“애를 봐서라도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만약 그래도 안유진을 선택한다면 나랑 같이 가서 애를 지우자.”이튿날, 안서희는 아침 일찍 출근해야 했다. 김주혁이 집에 없어 홀로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다.의사의 아침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회진을 돌고 산모의 상태에 따라 지시를 내려야 했다. 안서희는 임수경에게 몇몇 산모의 특수 상황과 요구를 얘기한 후에야 사무실로 들어와 물을 마실 여유가 생겼다.문을 열자마자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김주혁인 걸 확인한 그녀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김주혁이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서희야, 병원 갔어?”“회진도 다 마쳤어요.”“미안. 아침에 일찍 와서 병원에 데려다주려 했는데 사정이 생겨서 못 갔어.”안서희는 가볍게 웃으면서 일부러 물었다.“사정이요?”“...”“회사 일인가요?”“응...”김주혁이 다급하게 말머리를 돌렸다.“오늘 다섯 시에 퇴근하지? 데리러 갈게. 같이 집에 가자.”본가에서
“응.”안서희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그리고... 당분간은 조심해야 해. 아직 임신 초기라서.”권진아는 어색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네가 산부인과 의사이니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겠지. 아무튼 조심해.”“알았어.”옆에서 운전을 하고 있던 김주혁이 웃으며 물었다.“누구랑 얘기하는데 그렇게 신났어?”“권진아요.”“권진아라는 이름은 부모님이 지어주신 건가?”“아니요. 열여덟 살 때 바꾼 이름이에요. 생일 다음 날 바로 구청에 가서 개명 신고 했어요.”“왜?”“고등학교 때 연애를 한 적이 있었는데 안 좋게 헤어졌었거든요. 상처를 많이 받은 건지 그 이후로는 남자를 거들떠보지도 않더라고요. 이름도 싹 바꾸고.”“그럴 필요까지 있어? 누구나 어렸을 때는 풋풋한 사랑이 있는 거지. 지나간 일에 뭐 하러 그리 신경 써? 앞을 보고 살아야지.”“당신한테도 그런 사람 있었어요?”그 물음에 그는 흠칫했다.“있었겠지... 근데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나.”“그래요?”“서희 넌?”“예전에 좋아하던 남자 있었어?”“있었죠. 그동안 바쁘게 살아왔던 것뿐이지 마음을 닫고 살지는 않았어요. 근데 내 기억으로 아주 어렸을 때였던 것 같아요.”“초등학교?”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아니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요. 네다섯 살 쯤? 그때는 좋아한다는 게 뭔지도 잘 모를 때죠. 그저 그 친구가 되게 좋은 사람 같아 보여서 짝사랑했던 거예요.”“그 나이면 남자 여자에 대해 알고도 남을 나이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고.”“경험이 있는 사람처럼 말을 하네요?”피식 웃던 그가 손을 뻗어 꽃가지를 바깥쪽으로 눌러주었다.“조심해, 눈 다치지 말고.”...아파트는 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차로 10분 정도의 거리였다.사실 이 집은 고급 아파트가 아니다. 다만 안서희의 병원과 가깝기 때문에 김주혁이 먼저 이곳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회사와는 거리가 조금 멀었지만 크게 상관없었다. 어차피 어디
“안서희 씨, 법에 따르면요. 결혼 중에 당신이 산 집은 부부의 공동 재산이에요. 당신한테는 소유권이 절반밖에 안 된다는 소리죠.”“주혁 씨의 집이기도 하니까 그쪽이 내 집에서 함부로 할 수 있다는 거예요?”안유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서희 씨가 솔로였을 때 산 집이라면 당연히 주혁이와는 상관없는 거겠죠.”“우리가 이혼을 하길 바라는 거군요.”“이혼이든 아니든 집의 소유권에는 큰 차이가 없어요. 그러니까 내 말 오해하지 말아요. 서희 씨한테 혼인법과 물권법에 대해 알려준 것뿐이니까.”피식 웃던 안서희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봤죠? 이렇게 논리적으로 나랑 말다툼하는 걸 보면 별 이상 없는 거예요.”“서희야...”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3천 원 잊지 말고 계좌이체 해요. 먼저 들어갈게요. 거실은... 주혁 씨 집이니까 원상복구를 하든 그대로 두든 당신이 알아서 해요.”그가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화내지 마.”“참, 집은 당신 거지만 커튼이랑 인형은 내 돈 주고 산 거예요. 영수증도 있으니까 안유진 씨가 파손한 물건들은 모두 가격대로 배상해야 할 거예요. 이 정도 법은 나도 잘 알고 있어요.”“서희야...”“장미는 현관에 놓아둘게요. 당신이 산 거니까. 잊지 말고 처리해요. 자리 차지하지 않게.”그녀는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그가 밖에서 한참 동안 문을 두드렸지만 그녀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녀는 이어폰을 끼고 드라마를 보며 밖의 상황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 후, 목이 마른 그녀는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갔다.방문을 여는데 안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김주혁... 너 왜 이렇게 변했어? 예전에는 그리 당당하던 애가 왜 결혼을 하고 나서는 이렇게 찌질해진 거야? 와이프한테 꼼짝도 못 하고. 정말 너답지 않아.”그가 피곤한 얼굴로 소파 한쪽에 앉아 팔을 눈 위에 올려놓고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가 서희랑 싸우길 바랐던 거야?”“최소한 지금처럼 비굴하지는 말았어야지. 결혼해서
안서희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잠은 항상 잘 자는 사람이었다.TV에서 나오는 여자 주인공들처럼 슬픈 일 때문에 밤새 잠을 못 이루는 일은 그녀한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이다. 네가 이성적인 사람이라서 그래. 내가 너처럼 이리 이성적이었다면 수능 전날 밤 제대로 자지 못하고 수능을 망치는 일도 없었을 거야.”권진아도 고등학교 때 공부를 잘했었다. 두 사람은 학년에서 성적이 1위, 2위를 하던 사람들이었다.그녀가 1위를 하지 않으면 권진아가 1위를 했고 성적이 3위인 사람과 크게 많이 차이가 났었다.그러던 중, 3학년 하반기에 성적이 3위인 남자가 권진아에게 고백했고 적극적으로 대시해왔다. 알콩달콩한 연애에 넘어가지 않을 소녀가 어디 있겠는가?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선생님들도 다 알고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라 선생님들도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이별을 통보했고 갑작스럽게 단호하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매정하게 굴었다. 권진아는 큰 충격을 빠져 공부할 정신이 아니었다. 안서희는 가장 친한 친구로서 그녀의 컨디션을 걱정하며 그녀를 돌보고 그녀에게 과외도 시켜주었다. 결국 권진아의 성적은 곤두박질쳤고 안서희 그녀도 성적이 학년에서 10위권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반면, 원래 3위였던 그 남자는 모의고사 시험에서 매번 1위를 차지했고 결국 서울대에 합격하게 되었다.거의 10년이 지난 지금도 매번 이 얘기를 할 때마다 권진아는 늘 그랬다.“그 남자애가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것 같아. 넌 이성적이고 마음이 확고하니까 쉽게 넘어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나 봐. 그래서 날 목표로 삶은 거고. 바보 같은 난 재수 없게 걔한테 걸리게 된 거지.”“우리가 오해했을 수도 있잖아. 그 당시에는 걔가 널 정말 좋아했을 수도 있어. 나중에 사귀고 보니 서로 안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고. 서울대에 합격한 건 우연일 수도 있어.”“그 말을 넌 믿어?”고
퇴근 후 그녀는 바로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 도착하자 입구에 있는 익숙한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차 문에 기대어 고개를 숙인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오늘은 양복 차림이 아닌 캐주얼한 옷차림이었다. 아마도 오늘은 회사에 가지 않았나 보다. 그 이유는 그녀 때문이 아닐 테고...그녀를 발견한 그가 담배를 끄고는 앞으로 달려왔다. “왔어?”고개를 들어 호텔 건물을 쳐다보며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아파트와는 정반대 방향에 있는 호텔, 1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이 호텔에 자신이 머물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이 호텔 우리 한솔에서 투자한 거야.”미간을 찌푸리던 그녀는 조금 후회가 됐다. 직업이 의사인 그녀는 비즈니스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고 회사의 일에 대해 거의 묻지 않았었다. 한솔 그룹 아래 어떤 회사들이 있는지도 그녀는 전혀 알지 못하였다. 이 호텔이 한솔 그룹 아래의 산업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안유진 씨는요?”“집에 있어. 걔가 있고 싶다고 하니까 그냥 내버려둬. 난 너랑 같이 호텔에 있을 테니까.”그녀는 고개를 저었다.“돌아가요. 임산부니까 누군가는 곁에서 돌봐줘야 할 거 아니에요. 난 괜찮아요.”돌아서서 호텔로 들어가 곧장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그가 빠르게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병원에 전화했더니 내일부터 휴가라고 하던데. 나랑 같이 나가자.”이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쉬고 싶어요.”“운길산에 가자. 산에 리조트가 하나 있는데 거기도 우리 한솔 그룹 호텔이야. 쉬고 싶으면 호텔에서 쉬고 구경하고 싶으면 나가서 산책해.”“그럼 안유진 씨는요?”“돌봐줄 사람 구했어.”“주혁 씨.”“응, 말해.”“나랑 계속 살 거예요?”이 상황이 불편했던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며칠 동안 깨달은 게 있어요. 당신 마음에 아직도 안유진 씨가 있는 거라면 당신 놓아줄게요. 절대 두 사람 방해도 안 하고 축복해 줄게요. 우리 그냥 좋게 헤어져요.”그의
한동안 세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안유진과 그녀는 한 남자를 가운데 두고 양쪽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마치 다른 여자와 한 남자를 놓고 경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게 궁중 여인들의 암투극이었다. “이게 누구야? 주혁이 아니니?”휠체어를 탄 할머니와 휠체어를 밀고 있는 중년 여인이 김주혁을 알아본 듯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할머니, 아주머니.”그가 안서희에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이 두 분은...”김주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안유진이 앞으로 다가와 다정하게 노인네의 손을 잡았다.“할머니, 정말 오랜만이에요. 더 젊어지신 것 같은데요.”“유진이는 어렸을 때부터 참 예쁜 짓만 골라서 해.”뒤에서 휠체어를 밀던 중년 여인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어머님, 알아보시겠어요? 얼마 전에는 저도 알아보지 못하시더니...”“주혁이 색시 아니야. 내가 어떻게 알아보지 못할 수가 있겠어? 예전에 주혁이가 맨날 따라다니면서 가방도 들어주고 간식도 사주고 했잖아...”중년 여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멀리 있는 안서희를 가리켰다.“어머님, 아니에요. 저기 저 아가씨가 주혁의 아내예요.”문화영은 갑자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네가 잘못 본 거겠지. 난 저 아가씨가 누군지도 모른다. 얘가 주혁이 색시야. 안 그러니?”안색이 어두워진 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설명하려고 입을 열었다.“주혁아.”바로 이때, 안유진이 갑자기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의 주의를 자신에게로 돌리듯 말이다.“기억나? 한 번은 네가 자전거에 날 태우고 가는데 갑자기 큰 비가 내렸잖아. 그때, 비를 피해서 할머니 댁 처마 밑에서 갔었는데.”“그래, 맞다.”문화영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기억하고 있어. 주혁이가 교복을 벗어서 유진이의 머리를 가려줬었는데. 온몸이 흠뻑 젖어있으면서도 유진이 생각만 했어. 그걸 보고 어린놈이 자기 여자는 끔찍이 생각한다고 했었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