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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오랫동안 참아온 분노

안유진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되받아쳤다.

“나랑 주혁이 20년 넘은 친구라는 거 알 사람은 다 알아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 몰아가야겠어요? 그럼 앞으로 그냥 동성 친구만 만나야겠네요. 이성이면 오해하니까.”

안서희가 바로 대답했다.

“이성 친구가 당연히 있을 순 있죠. 근데 남녀유별이라는 말 몰라요?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결혼했잖아요. 조심할 건 조심해야죠.”

안유진이 코웃음을 쳤다.

“의학을 배운 선생님이 이렇게 자질구레한 것까지 따질 줄은 몰랐네요. 지난주에 날 수술해줄 때 수술실에 남자 의사도 들어왔었어요. 그때 내가 싫다고 했었는데 선생님이 뭐라 했죠? 의사는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 남자 의사는 마취과 의사였어요.”

“그런데요? 난 여자고 그분은 남자잖아요. 게다가 산부인과 수술인데 이럴 때는 남녀유별 따지지 않나요? 앞뒤가 너무 안 맞는 거 아니에요?”

안서희는 힘 빠진 모습으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안유진 씨, 완전히 다른 두 개념을 비교해선 안 되죠. 그때 유진 씨 출혈이 심했고 또 한밤중이라 당직을 선 마취과 의사가 남자 의사밖에 없었어요. 만약 그때 수술하지 않았더라면 아이를 잃을 수도 있었다고요. 아이 목숨이 중요한가요, 남자 여자를 따지는 게 중요한가요?”

안유진은 팔짱을 낀 채 불만을 드러냈다.

“아무튼 선생님은 의사니까 의사가 뭐라 하면 그런 거겠죠. 그때 내 아이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누가 알겠어요?”

안유진이 그녀의 실력을 의심하자 안서희도 드디어 분노가 끓어올랐다.

“유진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른 뜻은 없고 그때 선생님이 갑자기 병원으로 불려와서 수술을 한 거면 왜 여자 마취 선생님은 안 되냐는 거예요.”

“당신...”

“남자 마취 선생님도 내 수술실에 들어오는데 주혁이 바지 주머니에서 키 꺼내는 게 뭔 큰일이라고 그래요?”

“그만들 해!”

김주혁은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더니 한참 후에야 똑바로 섰다. 그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안서희에게 건네고는 다정하게 위로했다.

“유진이 임신해서 자주 흥분하는 거니까 네가 이해해줘.”

안서희는 차 키를 받고 김주혁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 진짜 친구 맞아요?”

김주혁이 거친 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안서희는 마치 그의 눈에 들어가기라도 하듯 빤히 쳐다보았다. 김주혁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돌아가자.”

안서희는 그를 부축하여 뒷좌석에 앉힌 후 안전벨트까지 해주었다. 그러고는 운전석에 타서 시동을 걸었다. 안유진도 뒷좌석에 올라타더니 양복 외투를 김주혁에게 덮어주었다.

“유진 씨 멀미한다면서요? 왜 앞에 안 타요?”

안유진은 당황한 기색이라곤 없이 여유롭게 안전벨트를 했다.

“오늘 컨디션이 괜찮아서 멀미 안 해요.”

안서희는 피식 웃으면서 차에 시동을 걸었다.

김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 백금희는 이미 자고 있었다. 건강을 무척이나 신경 쓰는 그녀는 저녁 9시만 되면 잠자리에 들었다.

안서희는 김주혁을 부축하여 안으로 들어간 후 곧장 2층에 있는 그들의 방으로 향했다. 안유진이 뒤에서 불렀다.

“이봐요.”

안서희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안유진이 말했다.

“주혁이 외투 버릴 거예요? 와이프라는 사람이 이렇게 덜렁거려서야, 원.”

“먼저 거실 소파에 놔요. 내일 내가 정리할게요.”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하는 거 아니에요? 정리할 시간이나 있어요?”

안서희가 입술을 깨물고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외투는 몇 분이면 정리하니까 출근하는 데 지장이 없어요. 그리고 어머님이 주무시고 계세요. 예민해서 쉽게 깨시는 분인데 계속 거기 서서 큰소리로 나랑 싸울 거예요?”

안유진이 놀란 듯 말했다.

“선생님은 의사인데도 말을 엄청 잘하네요?”

“칭찬해줘서 고마워요. 아무튼 어머님 방해하지 말고 목소리 좀 낮춰요.”

안유진은 턱을 쳐들고 오만하게 말했다.

“이모 날 얼마나 예뻐하는데요. 절대 나한테 뭐라 하지...”

“그만해, 안유진!”

김주혁이 안유진의 말을 가로채고 한숨을 내쉬더니 난간을 붙잡고 얼굴을 찌푸렸다.

“옷은 아무 데나 놔. 시간도 늦었고 얼른 들어가서 쉬어.”

김주혁이 말을 가로채자 안유진은 기분이 언짢은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잠이 안 와.”

“넌 잠이 안 와도 나랑 서희는 피곤해. 내일 또 일찍 출근이라 6시에 일어나야 해서 빨리 쉬어야 한다고.”

그러자 안유진이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김주혁, 결혼했다고 날 완전히 버리겠다는 거야? 오늘 난 계속 널 도와줬었어. 애들이 너한테 술 주지 않게 막아줬고 옷도 들어줬었어. 그런데 이딴 식으로 날 대해?”

“그럼 어떻게 대해야 하는데? 나랑 평생 살 사람은 와이프지, 친구가 아니야.”

“...”

김주혁은 다시 돌아서서 안서희와 함께 올라갔다.

“올라가자.”

술을 마신 탓인지 늘 다정하던 그가 오늘따라 손목 힘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마치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참아왔던 분노가 터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방으로 들어온 후 안서희가 먼저 샤워하러 들어갔다. 그녀의 손목에 손가락 자국 다섯 개가 선명했고 뜨거운 물이 닿으니 살짝 붓기도 했다. 다행히 잠옷이 긴 팔이라 가릴 수 있었다.

안서희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김주혁은 방에 없었다. 베란다로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거기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김주혁은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고 오늘 입었던 양복 차림이었다.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이로 깨물면서 한 모금 빨고는 하얀 연기를 내뱉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을 보면 오래전부터 담배를 피운 듯했다.

“주혁 씨?”

정신이 번쩍 든 김주혁은 본능적으로 담배를 껐다. 담배꽁초를 손에 들고 재떨이를 한참 찾아도 보이지 않자 그제야 없다는 걸 깨닫고 휴지통에 버렸다.

“다 씻었어?”

“네.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요?”

김주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술 많이 마셔서 베란다에서 정신 좀 차리고 있었어.”

“예전에도 담배 피웠었어요?”

“응.”

“나중에 왜 끊었는데요?”

김주혁이 웃으며 말했다.

“담배가 몸에 안 좋잖아.”

“그렇긴 하죠.”

담배가 몸에 안 좋다라... 참 허울 좋은 이유였다.

김주혁이 방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일찍 자. 난 샤워하러 갈게.”

“네.”

김주혁은 잠옷을 챙긴 후 안방의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 담배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윙윙.

티테이블 위에 놓인 김주혁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안유진의 문자였다.

[주혁아, 자?]

곧이어 여러 통이 이어서 도착했다.

[네 와이프는 의사라면서 말 왜 그렇게 잘해? 변호사인 나한테도 전혀 밀리지 않아.]

[주혁이 너 앞으로 힘들겠다. 사나운 와이프를 만나서 평생 잡혀 살 수도 있겠어.]

[나 잠이 안 와. 우리 마당에서 별이나 볼까? 어렸을 때처럼.]

[왜 말이 없어? 정말 잠든 거야?]

[자는 거야, 아니면 와이프랑 하고 있는 거야? 와이프 생겼다고 친구는 뒷전이면 안 되지. 우린 가장 친한 친구잖아. 계속 답장 안 하면 친구도 안 할 거니까 잘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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