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그녀는 바로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 도착하자 입구에 있는 익숙한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차 문에 기대어 고개를 숙인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오늘은 양복 차림이 아닌 캐주얼한 옷차림이었다. 아마도 오늘은 회사에 가지 않았나 보다. 그 이유는 그녀 때문이 아닐 테고...그녀를 발견한 그가 담배를 끄고는 앞으로 달려왔다. “왔어?”고개를 들어 호텔 건물을 쳐다보며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아파트와는 정반대 방향에 있는 호텔, 1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이 호텔에 자신이 머물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이 호텔 우리 한솔에서 투자한 거야.”미간을 찌푸리던 그녀는 조금 후회가 됐다. 직업이 의사인 그녀는 비즈니스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고 회사의 일에 대해 거의 묻지 않았었다. 한솔 그룹 아래 어떤 회사들이 있는지도 그녀는 전혀 알지 못하였다. 이 호텔이 한솔 그룹 아래의 산업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안유진 씨는요?”“집에 있어. 걔가 있고 싶다고 하니까 그냥 내버려둬. 난 너랑 같이 호텔에 있을 테니까.”그녀는 고개를 저었다.“돌아가요. 임산부니까 누군가는 곁에서 돌봐줘야 할 거 아니에요. 난 괜찮아요.”돌아서서 호텔로 들어가 곧장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그가 빠르게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병원에 전화했더니 내일부터 휴가라고 하던데. 나랑 같이 나가자.”이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쉬고 싶어요.”“운길산에 가자. 산에 리조트가 하나 있는데 거기도 우리 한솔 그룹 호텔이야. 쉬고 싶으면 호텔에서 쉬고 구경하고 싶으면 나가서 산책해.”“그럼 안유진 씨는요?”“돌봐줄 사람 구했어.”“주혁 씨.”“응, 말해.”“나랑 계속 살 거예요?”이 상황이 불편했던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며칠 동안 깨달은 게 있어요. 당신 마음에 아직도 안유진 씨가 있는 거라면 당신 놓아줄게요. 절대 두 사람 방해도 안 하고 축복해 줄게요. 우리 그냥 좋게 헤어져요.”그의
한동안 세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안유진과 그녀는 한 남자를 가운데 두고 양쪽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마치 다른 여자와 한 남자를 놓고 경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게 궁중 여인들의 암투극이었다. “이게 누구야? 주혁이 아니니?”휠체어를 탄 할머니와 휠체어를 밀고 있는 중년 여인이 김주혁을 알아본 듯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할머니, 아주머니.”그가 안서희에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이 두 분은...”김주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안유진이 앞으로 다가와 다정하게 노인네의 손을 잡았다.“할머니, 정말 오랜만이에요. 더 젊어지신 것 같은데요.”“유진이는 어렸을 때부터 참 예쁜 짓만 골라서 해.”뒤에서 휠체어를 밀던 중년 여인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어머님, 알아보시겠어요? 얼마 전에는 저도 알아보지 못하시더니...”“주혁이 색시 아니야. 내가 어떻게 알아보지 못할 수가 있겠어? 예전에 주혁이가 맨날 따라다니면서 가방도 들어주고 간식도 사주고 했잖아...”중년 여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멀리 있는 안서희를 가리켰다.“어머님, 아니에요. 저기 저 아가씨가 주혁의 아내예요.”문화영은 갑자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네가 잘못 본 거겠지. 난 저 아가씨가 누군지도 모른다. 얘가 주혁이 색시야. 안 그러니?”안색이 어두워진 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설명하려고 입을 열었다.“주혁아.”바로 이때, 안유진이 갑자기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의 주의를 자신에게로 돌리듯 말이다.“기억나? 한 번은 네가 자전거에 날 태우고 가는데 갑자기 큰 비가 내렸잖아. 그때, 비를 피해서 할머니 댁 처마 밑에서 갔었는데.”“그래, 맞다.”문화영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기억하고 있어. 주혁이가 교복을 벗어서 유진이의 머리를 가려줬었는데. 온몸이 흠뻑 젖어있으면서도 유진이 생각만 했어. 그걸 보고 어린놈이 자기 여자는 끔찍이 생각한다고 했었지.”중
화가 치밀어오른 그가 카드를 빼앗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그녀가 다시 한번 그의 손길을 피하며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안유진.”“왜?”그녀는 그를 흘겨보며 말을 이어갔다.“서희 씨는 이 리조트 처음이잖아. 그래서 내가 소개 좀 해준 것뿐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그만해.”그녀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2층 방의 키를 안서희의 손에 쥐여주었다.“서희 씨, 난 여기 많이 왔었거든요. 길 못 찾겠으면 나한테 물어봐요. 레스토랑은 오른쪽으로 가면 있어요.”안서희는 손에 있는 카드를 보고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허공에서 마주친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안유진은 그녀에게 김주혁에 대한 자신의 ‘전결권'을 자랑하고 있었고 안서희는 괜찮은 척 신경 쓰지 않는 척했다. 그녀는 카드를 흔들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고마워요. 근데 길은 직원에게 물어볼게요. 유진 씨한테까지 물어볼 필요 없을 것 같네요.”“그래요. 편한 대로 해요.”안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여행 오면서 안서희는 짐을 많이 챙겨오지 않았다.원래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옷도 그리 많지 않았다. 어차피 평소에는 출근해서 흰 가운만 입으니까 아무리 예쁜 옷을 사도 무용지물이었다. 속옷과 가벼운 옷들만 몇 가지 챙겨온 게 전부라서 모두 핸드백에 쑤셔 넣었다. “먼저 갈게요.”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자 온몸의 힘이 쭉 빠진 것처럼 괴로웠다. 그동안 권진아한테서 전화가 수십 통이 걸려 왔다. 아까부터 지금까지 계속 울리고 있던 핸드폰을 꺼내 통화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어떻게 된 거야? 여행 간다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이혼이라니?”안서희는 그녀에게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대충 이야기해 주었고 그 얘기를 들은 권진아는 차갑게 웃더니 단호하게 말했다.“이혼해. 친한 친구는 개뿔. 안유진 그 여자 김주혁 씨 뺏으려고 작정하고 돌아
연애는 실패했어도 일은 술술 잘 풀린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맞는 말인 것 같다. 두 달 넘게 그녀를 괴롭혔던 보고서를 하룻밤 사이에 완성해 낸 걸 보면.아침 5시 반, 권진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나 지금 출발해.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할 거야.”그녀는 조금 감동받았다.“이렇게 일찍 올 필요 없는데. 7시쯤 출발해도 돼.”“더 늦으면 출근 시간이라 차 막혀.”“그럼 수고. 나중에 내가 밥 사줄게.”“밥은 무슨. 우리 사이에 서먹하게 왜 그래? 얼른 준비나 하고 있어. 기다리는 거 딱 질색이니까.”사실 정리할 것도 없었다. 핸드폰 충전기랑 옷 몇 벌이 전부라서 벌써 짐 정리는 다 끝난 상태였다. 가방은 거실에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바로 챙겨서 출발하면 되었다. 이번 여행에서 보고서를 쓸 계획이 없어서 노트북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보고서를 다 쓰고 나니 눈이 빠질 것 같았다. 권진아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걸려서 그녀는 베란다로 향했다. 아침은 기온이 낮고 공기가 차가웠지만 왠지 모르게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몸 안의 탁한 공기를 모두 배출하듯 심호흡을 몇 번 했다.디럭스 스위트룸은 역시 좋았다. 넓은 테라스까지 갖춰져 있어서 산의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다만 1층에서 누군가 싸우고 있는 소리가 들려 조금 아쉬웠다. 아침의 산속은 고요했고 2층 테라스에 선 그녀는 8층의 말다툼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안유진의 목소리에 민감하기 때문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안유진이 아주 슬프게 울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지금 날 버리겠다는 거야?”“나 이미 결혼한 사람이야.”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다.“하지만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잖아.”...“너 안서희 씨랑 결혼한 게 나 때문 아니었어?”그가 차갑게 웃으며 조롱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네가 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 친한 친구?”“지금 내 탓 하는 거야?”차가운 그의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옅은 담배 냄
권진아의 차는 빨간 포르쉐였다. 그녀의 집안은 김씨 집안만큼 큰 가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해성시에서는 꽤 유명한 가문이었다. 권진아는 집안의 외동딸이라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고등학교 3학년 때 그 일을 제외하고는 인생이 힘들었던 적이 없었다. “그 아파트로 돌아가지 말고 호텔에도 가지 마. 그냥 우리 집에 와 있어.”“병원에 데려다줘.”순간, 권진아는 어이가 없었다.“뭐야? 실연의 아픔을 일로 마비시키겠다는 거야?”“아니.”“근데 병원은 왜? 어렵게 휴가 낸 거잖아. 아니면 우리 여행이라도 갈까? T국에 가서 잘생긴 남자들이나 구경하자.”잠시 머뭇거리던 안서희가 입을 열었다.“아이 지우려고.”18살부터 의학 공부를 했고 대학에서는 임상의학을 대학원에서는 산부인과를 전공했었다.인턴으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의사 생활하면서 아이를 지우러 온 여자들을 수없이 봐왔다. 근데 어느 날 이렇게 의사에서 환자의 신분으로 바뀌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아직은 임신 초기라서 수술 없이 바로 약물을 투여할 수 있었고 그 절차에 대해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다른 사람한테는 알리지 않고 임수경을 찾았다.이 사실을 알고 임수경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서희 씨, 정말 결정한 거예요?”“수경 씨가 그랬잖아요. 임신과 출산이 일과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요. 난 수경씨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그녀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서희 씨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잖아요. 왜 지우려는 거예요?”“내가 행복해 보여요?”“서희 씨 정도면 행복하죠. 우리 병원 여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얼마나 서희 씨 부러워하는 줄 알아요? 남편이 잘생기고 다정하고 배려심도 많고. 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임산부를 병원까지 데려다주는 남자,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남자죠.”100년?2년 전 태풍이 몰아칠 때 뉴스에서 100년 만에 있는 태풍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산모가 아이를 낳는데 어디 시간을 정하고 낳는가? 그 당시,
김주혁은 서서히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에 있는 핏빛 휴지 뭉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손을 뻗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만져볼 수 있어?”그녀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바깥바람이 세게 분 탓인지 그의 손이 많이 떨렸다. 손뿐만 아니라 온몸이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고 손등의 핏줄이 솟아올라 마치 한 줄기 나무뿌리 같았으며 금방이라도 껍질이 벗겨질 것 같았다.그러나 그의 동작은 조심스러웠다. 죄책감과 후회와 그리고... 아픈 감정이 섞여 있었다. 점점 눈이 빨개지고 이를 악무는 그의 모습을 그녀는 담담하게 쳐다보았다.떨리는 손을 통제할 수가 없어서 한 손으로 손목을 꽉 잡은 채 조심스럽게 휴지 뭉치를 건드렸다. 바로 이때, 그녀가 재빨리 손바닥을 오므려 휴지 뭉치를 거두었다. 조금 전까지 악몽에 빠져있던 그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김주혁 씨.”그녀의 낯선 부름에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그를 부르는 호칭은 주혁 씨에서 김주혁 씨로 바뀌었다.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어?”“그렇지 않으면요?”“진작에 말했어야지. 네가 우리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았다면 난...”“말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예요.”그녀는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평생 누군가의 그림자로 사는 거 난 원치 않아요.”“그럼 아이는?”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내가 아이의 아빠잖아. 아이를 지울 생각이었으면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미리 말했다면요? 아이를 위해 당신이 안유진 씨를 포기했을까요?”“최소한 내 아이를 지우라고는 하지 않았을 거야.”“내 물음에 정확한 답이 없네요. 왜 피해요?”“당신은 당신 대로 안유진 씨와 함께하고 나는 나대로 아이를 낳으라는 말이에요? 아이 생각은 해본 적 있어요? 이 아이가 커서 나한테 아빠의 아내가 왜 안유진이라고 물으면요? 그땐 뭐라고 대답해요? 네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까요?”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아이가 아빠가 필요할 때 뭐라고 해요? 다른 아줌마랑
양쪽에 늘어뜨린 그의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조금은 낯설었다.“정말 이성적이군.”“이성적이고 잔인한 게 우리 세 사람 모두에게 좋은 일이겠죠.”“세 사람?”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난 김씨 가문과 얽히지 않고 이혼 후에 내 삶을 살 수 있을 거고 당신은 아이 때문에 발목 잡힐 일도 없을 거고요. 나중에 당신이랑 안유진 씨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이 아이 때문에 안유진 씨와 싸울 일도 없겠죠. 그리고 안유진 씨는...”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허구한 날 상속법을 뒤져볼 필요도 없을 거고 자신이 낳은 아이에게 재산을 더 물려줄 방법을 궁리할 필요도 없을 거예요.”그녀의 말에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으니 안유진이 어떤 성격인지 그녀가 어떻게 할지는 그가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난 내 아이가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태어나길 바라요. 최소한 아이의 아빠가 날 사랑하길 바라요. 난 사랑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고개를 들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그녀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여기까지만 해요. 당신은 당신 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잘 살아요. 이렇게 헤어지는 게 우리한테는 최선의 선택이에요.”그가 마침내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는데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었다. 남자는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프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그동안 산부인과에서 일을 하면서 남녀 사이의 별의별 일들을 다 봐왔었다. 아내가 안에서 죽을 듯이 아파하는데도 남편은 밖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장면을 너무 많이 봐왔었다. 처음에는 화가 나서 남편들한테 한 소리 했었다.근데 어느 날 누군가 그런 얘기를 했다.“우리 와이프도 뭐라 하지 않는데 당신이 무슨 상
김주혁은 31년 동안 살아오면서 아이에 관한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단지 이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말랑말랑한 아기가 품에 안겨있는 모습이거나 장난꾸러기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만 연상될 뿐이다.자신의 아이가 그 언젠가 작은 핏덩이가 되어 싸구려 휴지에 싸인 채 쓰레기통에 버려질 줄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 무덤에 함께 버려질 줄이야.안서희는 권진아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저 멀리 걸어갔다.권진아가 머리를 돌려 그를 힐긋 바라보자 안서희가 손등을 톡톡 치면서 더는 보지 말라고 곁눈질했다.김주혁은 그녀와 알고 지낸 지 3년이 넘었지만 이토록 냉정하고 단호한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다.안서희는 늘 얌전하고 매사에 열심히 노력하는 편이다. 학교 다닐 때 매번 전교 1등을 차지한 공부 천재였고 선배님들 앞에서 순순히 말을 잘 듣는 편이지만 뼛속에는 지기 싫어하는 아집을 갖고 있다.아쉽게도 김주혁은 온화하고 다정한 그녀의 겉모습만 봐왔을 뿐 이토록 단호하게 무언가를 결정하는 모습은 처음 겪었다.안서희가 방금 했던 말은 김주혁도 다 알아들었을 것이다.그녀는 모든 걸 꼼꼼하게 고려했다. 아이의 심신 건강과 두 사람 각자의 인생, 심지어 몇 년 뒤에 있을 재산 상속까지 철저하게 고려했다.애초에 이 아이의 거취를 고려할 때부터 지금까지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그녀는 줄곧 이해득실을 따지며 심사숙고해왔다.김주혁은 애써 회상해보았다. 도대체 그녀는 어떤 일을 계기로 이런 결심을 내린 걸까?안유진이 한사코 그들과 함께 리조트로 놀러 가겠다고 했을 때?아니면 오늘 아침 김주혁이 그녀를 찾아가 이혼을 언급했을 때?안서희는 심지어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김주혁에게 알릴 생각조차 안 했다.오늘 종업원이 마침 그녀의 지갑을 줍지 않았다면, 또 그가 마침 지갑을 열고 안에 담긴 임신 진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마 평생 자신에게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김주혁과 안서희는 종래로 서로의 물건을 뒤지는 습관이 없다. 각자의 사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