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아의 차는 빨간 포르쉐였다. 그녀의 집안은 김씨 집안만큼 큰 가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해성시에서는 꽤 유명한 가문이었다. 권진아는 집안의 외동딸이라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고등학교 3학년 때 그 일을 제외하고는 인생이 힘들었던 적이 없었다. “그 아파트로 돌아가지 말고 호텔에도 가지 마. 그냥 우리 집에 와 있어.”“병원에 데려다줘.”순간, 권진아는 어이가 없었다.“뭐야? 실연의 아픔을 일로 마비시키겠다는 거야?”“아니.”“근데 병원은 왜? 어렵게 휴가 낸 거잖아. 아니면 우리 여행이라도 갈까? T국에 가서 잘생긴 남자들이나 구경하자.”잠시 머뭇거리던 안서희가 입을 열었다.“아이 지우려고.”18살부터 의학 공부를 했고 대학에서는 임상의학을 대학원에서는 산부인과를 전공했었다.인턴으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의사 생활하면서 아이를 지우러 온 여자들을 수없이 봐왔다. 근데 어느 날 이렇게 의사에서 환자의 신분으로 바뀌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아직은 임신 초기라서 수술 없이 바로 약물을 투여할 수 있었고 그 절차에 대해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다른 사람한테는 알리지 않고 임수경을 찾았다.이 사실을 알고 임수경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서희 씨, 정말 결정한 거예요?”“수경 씨가 그랬잖아요. 임신과 출산이 일과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요. 난 수경씨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그녀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서희 씨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잖아요. 왜 지우려는 거예요?”“내가 행복해 보여요?”“서희 씨 정도면 행복하죠. 우리 병원 여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얼마나 서희 씨 부러워하는 줄 알아요? 남편이 잘생기고 다정하고 배려심도 많고. 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임산부를 병원까지 데려다주는 남자,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남자죠.”100년?2년 전 태풍이 몰아칠 때 뉴스에서 100년 만에 있는 태풍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산모가 아이를 낳는데 어디 시간을 정하고 낳는가? 그 당시,
김주혁은 서서히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에 있는 핏빛 휴지 뭉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손을 뻗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만져볼 수 있어?”그녀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바깥바람이 세게 분 탓인지 그의 손이 많이 떨렸다. 손뿐만 아니라 온몸이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고 손등의 핏줄이 솟아올라 마치 한 줄기 나무뿌리 같았으며 금방이라도 껍질이 벗겨질 것 같았다.그러나 그의 동작은 조심스러웠다. 죄책감과 후회와 그리고... 아픈 감정이 섞여 있었다. 점점 눈이 빨개지고 이를 악무는 그의 모습을 그녀는 담담하게 쳐다보았다.떨리는 손을 통제할 수가 없어서 한 손으로 손목을 꽉 잡은 채 조심스럽게 휴지 뭉치를 건드렸다. 바로 이때, 그녀가 재빨리 손바닥을 오므려 휴지 뭉치를 거두었다. 조금 전까지 악몽에 빠져있던 그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김주혁 씨.”그녀의 낯선 부름에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그를 부르는 호칭은 주혁 씨에서 김주혁 씨로 바뀌었다.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어?”“그렇지 않으면요?”“진작에 말했어야지. 네가 우리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았다면 난...”“말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예요.”그녀는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평생 누군가의 그림자로 사는 거 난 원치 않아요.”“그럼 아이는?”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내가 아이의 아빠잖아. 아이를 지울 생각이었으면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미리 말했다면요? 아이를 위해 당신이 안유진 씨를 포기했을까요?”“최소한 내 아이를 지우라고는 하지 않았을 거야.”“내 물음에 정확한 답이 없네요. 왜 피해요?”“당신은 당신 대로 안유진 씨와 함께하고 나는 나대로 아이를 낳으라는 말이에요? 아이 생각은 해본 적 있어요? 이 아이가 커서 나한테 아빠의 아내가 왜 안유진이라고 물으면요? 그땐 뭐라고 대답해요? 네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까요?”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아이가 아빠가 필요할 때 뭐라고 해요? 다른 아줌마랑
양쪽에 늘어뜨린 그의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조금은 낯설었다.“정말 이성적이군.”“이성적이고 잔인한 게 우리 세 사람 모두에게 좋은 일이겠죠.”“세 사람?”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난 김씨 가문과 얽히지 않고 이혼 후에 내 삶을 살 수 있을 거고 당신은 아이 때문에 발목 잡힐 일도 없을 거고요. 나중에 당신이랑 안유진 씨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이 아이 때문에 안유진 씨와 싸울 일도 없겠죠. 그리고 안유진 씨는...”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허구한 날 상속법을 뒤져볼 필요도 없을 거고 자신이 낳은 아이에게 재산을 더 물려줄 방법을 궁리할 필요도 없을 거예요.”그녀의 말에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으니 안유진이 어떤 성격인지 그녀가 어떻게 할지는 그가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난 내 아이가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태어나길 바라요. 최소한 아이의 아빠가 날 사랑하길 바라요. 난 사랑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고개를 들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그녀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여기까지만 해요. 당신은 당신 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잘 살아요. 이렇게 헤어지는 게 우리한테는 최선의 선택이에요.”그가 마침내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는데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었다. 남자는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프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그동안 산부인과에서 일을 하면서 남녀 사이의 별의별 일들을 다 봐왔었다. 아내가 안에서 죽을 듯이 아파하는데도 남편은 밖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장면을 너무 많이 봐왔었다. 처음에는 화가 나서 남편들한테 한 소리 했었다.근데 어느 날 누군가 그런 얘기를 했다.“우리 와이프도 뭐라 하지 않는데 당신이 무슨 상
김주혁은 31년 동안 살아오면서 아이에 관한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단지 이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말랑말랑한 아기가 품에 안겨있는 모습이거나 장난꾸러기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만 연상될 뿐이다.자신의 아이가 그 언젠가 작은 핏덩이가 되어 싸구려 휴지에 싸인 채 쓰레기통에 버려질 줄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 무덤에 함께 버려질 줄이야.안서희는 권진아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저 멀리 걸어갔다.권진아가 머리를 돌려 그를 힐긋 바라보자 안서희가 손등을 톡톡 치면서 더는 보지 말라고 곁눈질했다.김주혁은 그녀와 알고 지낸 지 3년이 넘었지만 이토록 냉정하고 단호한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다.안서희는 늘 얌전하고 매사에 열심히 노력하는 편이다. 학교 다닐 때 매번 전교 1등을 차지한 공부 천재였고 선배님들 앞에서 순순히 말을 잘 듣는 편이지만 뼛속에는 지기 싫어하는 아집을 갖고 있다.아쉽게도 김주혁은 온화하고 다정한 그녀의 겉모습만 봐왔을 뿐 이토록 단호하게 무언가를 결정하는 모습은 처음 겪었다.안서희가 방금 했던 말은 김주혁도 다 알아들었을 것이다.그녀는 모든 걸 꼼꼼하게 고려했다. 아이의 심신 건강과 두 사람 각자의 인생, 심지어 몇 년 뒤에 있을 재산 상속까지 철저하게 고려했다.애초에 이 아이의 거취를 고려할 때부터 지금까지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그녀는 줄곧 이해득실을 따지며 심사숙고해왔다.김주혁은 애써 회상해보았다. 도대체 그녀는 어떤 일을 계기로 이런 결심을 내린 걸까?안유진이 한사코 그들과 함께 리조트로 놀러 가겠다고 했을 때?아니면 오늘 아침 김주혁이 그녀를 찾아가 이혼을 언급했을 때?안서희는 심지어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김주혁에게 알릴 생각조차 안 했다.오늘 종업원이 마침 그녀의 지갑을 줍지 않았다면, 또 그가 마침 지갑을 열고 안에 담긴 임신 진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마 평생 자신에게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김주혁과 안서희는 종래로 서로의 물건을 뒤지는 습관이 없다. 각자의 사생
안유진은 그가 이토록 쌀쌀맞게 나올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듯싶었다.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였다. 지금은 일단 김주혁에게 화해를 구해야 하니 자세를 낮춰야 하는 수밖에 없다.나중에 좀 더 지내다 보면 주도권을 앗아올 수 있다. 그녀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김주혁으로 반드시 되돌려놓을 것이다.여기까지 생각한 안유진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목소리가 좀 다운됐네? 서희 씨는 찾았어?”“응...”“그럼 서희 씨가 아이 앞세우면서 협박한 거야? 아니면 이혼을 빌미로 재산을 노렸어? 걱정 마 주혁아. 이혼 소송은 내 전문이야. 이번 일은 나한테 맡겨. 걔 무일푼으로 나앉게 해줄게.”“안유진!”순간 김주혁이 나지막이 외쳤다.“서희 네가 말한 그런 사람 아니야! 그 애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김주혁마저도 원하지 않았다...그의 대답을 들은 안유진은 놀랍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근데 뭐가 걱정이야? 너무 잘 됐잖아.”안유진은 활짝 웃으며 말투도 홀가분해졌다.“안 닥터도 약속은 잘 지키는 사람이네.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말라고 해. 괜히 또 애 데리고 와서 아빠 찾아준다고 난리 피우면 안 되잖아. 지금은 법률상 그 아이가 네 재산을 분할 받을 수 있지만 별문제는 아니야. 미리 유서를 작성해서 전 재산을 우리 애한테 주겠다고 하면 돼...”김주혁은 저도 몰래 야유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안서희는 안유진이 상속법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걸 진작 귀신같이 예측했었다.전화기 너머로 안유진이 계속 입을 나불거렸다.“주혁아, 실은 나... 너랑 상의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는데.”“뭔데? 말해.”“우리가 직접 서희 씨를 만나서 의논할 수도 있어. 배 속의 아이를 지우고 더는 너에게 집착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일정한 금액의 돈을 건네는 거야. 서희 씨 집 한 채 장만하고 싶다고 했잖아. 계약금 우리가 대신 내주면 서희 씨 소원도 이루고 우리도 평생 후환을 제거하는 거야.”“...”“근데 이거 계약서처럼 확실하게 써놔야 해
안유진은 그가 오늘 왜 이토록 이상한 건지 드디어 알아챘다.그녀는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하지만 네가 사랑한 사람은 나잖아. 아니야?”“...”“우린 나중에 결혼할 사이야. 그 아이가 있으면 우리 행복한 삶에 방해만 될 뿐이라고. 아이 갖고 싶은 게 소원이면 그건 너무 쉽지! 우리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길 테고 너랑 같은 김씨 성을 따를 거잖아.”“...”“너도 너무 깊게 생각할 거 없어. 서희 씨 고작 임신 4주라며. 그건 아예 아이라고 할 수도 없지. 한 수정란, 세포, 아니 심지어 그냥 핏물일 뿐이야...”“됐어, 그만해.”김주혁의 머릿속에 핏물로 물든 종이 뭉치가 떠올랐다. 빨갛게 물든 종이가 그의 심장을 후벼 파는 것만 같았다.“그래서 대체 언제 올 거냐고? 이따가 함께 저녁 먹어.”“나 좀 혼자 있고 싶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산부인과에서 의료폐기물 처리센터까지 고작 200미터 남짓한 거리이다.수년간 의사로 지내오며 발이 닳게 다녔던 곳이라 평소에는 2분 안에 왕복으로 달려올 거리인데 오늘은 무려 20여 분 만에 도착했다. 그것도 권진아의 부축을 받으면서 말이다.간헐적 복통이 발작할 때면 너무 아파 식은땀이 마구 맺히고 하는 수 없이 멈춰 서서 숨을 깊게 몰아쉬어야 했다.권진아는 그 모습이 너무 속상해 고개를 돌리고 몰래 눈물을 훔쳤다.“진아야.”권진아는 얼른 눈물을 닦고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에게 물었다.“응? 왜 그래?”“라이터 있어?”“나 담배 안 피워서 당연히 없지. 라이터는 갑자기 왜?”“이거 태우고 싶어.”안서희는 손에 쥔 종이 뭉치를 쳐다봤다.“의료폐기물은 대부분 분쇄, 매립으로 처리되는데 이것까지 그 악취 나는 물건들이랑 함께 묻혀두고 싶지는 않아서.”권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바로 가서 빌려올게.”“누구한테 빌리게?”“물어봐야지. 여기서 잠깐만 쉬고 있어.”안서희가 그녀를 붙잡았다.“병원은 금연이라 경비원들도 없을 거야.”권진아는 문득 뭔가 생각났다.“주혁
시간이 지나면? 대체 얼마나 지나야 하는 걸까?한 시간? 하루? 한 달? 그것도 아니면 일 년일까?안서희는 이 남자가 과연 얼마 만에 고통에서 벗어날지 가늠이 안 됐다. 그가 무려 20여 년 동안 기다렸던 애인이 돌아왔으니 꿈에도 그리던 그 여인과 극적으로 다시 행복에 빠져들 테고 또한 아이에 관한 일은 금세 잊히겠지.일생에 있어서 가장 기쁜 일이 네 가지가 있다면 신혼 첫날밤, 대학 입시 통보를 받은 날, 오랜 가뭄 끝의 단비, 그리고 타향에서 옛 지인을 만나는 일일 것이다.‘대학 입시 통보를 받은 것’과 ‘타향’ 이 두 소재를 제외하면 김주혁은 무려 두 가지 일을 이루고도 절반을 더 이룬 셈이다.사업이 승승장구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으니 아마 요즘이 그의 삶에서 가장 기쁜 나날일 지도 모른다.한편 그 아기라면...아니 어쩌면 고작 수정란이겠지,. 이건 그가 31년 동안 살아온 인생에서 아주 희미하고 작은 유감으로 남을 것이다.사랑하는 여자가 옆에 있으니 나중에 둘만의 아이가 생길 테고 두 명, 세 명 낳아서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듯싶다.슬하에 귀여운 자녀를 두고 사랑하는 아내가 옆에서 지켜주는 더없이 아름다운 나날을 보낼 듯싶다...권진아는 그녀를 호텔에 데려가지 않고 본인 집으로 향했다.권진아의 부모님은 일찌감치 딸아이에게 집을 마련해줬는데 평수가 너무 크진 않아도 H시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매우 고급스러운 단지였다.눈부신 아침 햇살이 창문 사이로 흘러들어올 때 그녀는 한창 창가 옆에 앉아서 바깥의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일 년 중 가장 완연한 늦봄이라 아파트 단지에 수목이 푸르싱싱하게 자라서 생기가 차 넘쳤다.이때 교복 차림의 한 남자아이가 집 아래에 서서 돌멩이를 줍더니 위에 힘껏 내던졌다. 그 돌멩이는 결국 여자아이의 방 안에 있는 창문 유리에 부딪히고 말았다.여자아이는 재빨리 집 밖으로 내려가 배시시 웃으며 남자아이 앞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남자아이는 교복 지퍼를 열고 안에서 따끈따끈한 찐빵이
안서희도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됐다.26살은 완전히 성숙한 나이라 어른답게 이별을 대처할 수가 있다.권진아는 그해 한창 충동적인 나이 17살이었던지라 죽었다 다시 깨어난 경험이었을 것이다.안서희가 물었다.“넌 그때 어떻게 버텨냈어?”이에 권진아가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버티긴 뭘 버텨. 그냥 그렇게 지나온 거지. 이 세상이 너 하나 없다고 안 돌아가는 건 아니잖아? 시간이 약이란 말, 틀린 것 하나 없더라.”안서희도 머리를 끄덕였다.결국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줄 것이다.그녀는 힘든 시간이 두려운 건 아니지만 고통스러운 이 순간들이 좀 더 빨리 지나갔으면, 좀 더 많이 단축됐으면 하는 마음일 뿐이다.이때 권진아가 갑자기 야릇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눈을 깜빡였다.“이별을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거라는데. 내가 몇 명 소개해줘?”안서희가 고개를 연신 내저었다.“내가 지금 그럴 기분이야?”그녀는 단순히 이별만 겪은 게 아니었다. 안서희는 살며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어제 수술한 뒤로 너무 아파서 밤새 잠을 설쳤고 지금도 은은하게 배가 조여오는 느낌이다.권진아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서희야, 이 아이 지운 거 후회해?”안서희는 입술을 날름거리다가 머리를 흔들었다.이에 권진하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어제 네가 한 말 들었을 때 이미 알겠더라고. 넌 이 아이의 거취에 대해 일찌감치 결정을 내린 거였잖아.”“맞아.”“네 선택 존중해.”권진아가 말을 이었다.“그 선택이 잘못됐다고 해도 두려울 건 없어. 가장 두려운 게 뭔지 알아?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다는 거야.”그녀가 문득 철학적으로 변해버렸다. 안서희의 결혼 생활에서 영감을 받은 건지 요즘 따라 권진아는 SNS에 슬프고 감수성이 풍부한 문구와 이미지를 빈번하게 올리고 있다.안서희가 따분할 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그녀의 게시물을 보게 되면 몇몇 사람들이 이런 댓글을 남기곤 했다.[실연당했어?][실연은 개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