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경은 곧바로 표정이 굳어졌다.“네? 흉터가 남아요? 유 선생님, 방법 좀 생각해 주세요. 우리 안 선생님 요즘 너무 고생했는데 흉터라도 생기면 정말 안 되잖아요.”유 교수는 호랑이 같은 얼굴로 말했다.“이제야 겁이 나요? 의사는 자기 자신을 먼저 지켜야 남을 살릴 수 있다고 대학에서 처음 배운 걸 잊었어요?”안서희는 이를 악물고 소독수의 따끔거림을 견뎠다.“환자가 뇌졸중이었어요. 흉터와 뇌졸중 후유증에서 전 흉터를 택했죠.”유 교수는 이 말을 듣자마자 이해했다.뇌졸중이 더 심각한 병이고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그래서인지 그는 한결 움직임이 부드러워졌고 안서희도 조금은 견딜 만했다.다시 붕대를 감은 후 유 교수가 진지하게 당부했다.“다시는 함부로 움직이지 마요, 알겠어요?”안서희는 유 교수가 자신을 위해 그러는 줄 알았기에 순순히 응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그... 남편이랑 할 때도 조심하라고 해요. 너무 거칠게 해서 상처 건드리지 않게... 흠흠...”안서희가 당황한 채 입술만 축였다.“... 아, 네.”외과 진료실에서 나오고 임수경이 천천히 걸어 나오는 그녀를 부축하며 돌아갔다.“안 선생님, 왜 이혼했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유 선생님 저 나이에도 얼굴이 붉어지시네요, 하하하.”안서희는 그녀를 노려보았다.“이혼이 뭐 좋은 일이라고요? 온 세상에 내 남편 바람났다고 알려줄까요?”임수경이 혀를 홀라당 내밀었다.“하긴... 엇, 고 선생님!”안서희는 고개를 들어 저 멀리서 흰 가운을 입은 고유준이 빠르게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그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무슨 일이야?”안서희는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고 선생님, 안녕하세요.”“어쩌다 이렇게 됐냐고?”안서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채혈하고 있는데 병원에서 응급처치가 필요한 환자가 있다는 전화를 받았는데 응급실에 인력이 부족해서 마침 한가해서 119 따라갔어.”“상처는 치료받았어?”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유 교수님이 직접 치
이 목소리는...안서희가 뒤를 돌아보니 출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김주혁이 이마를 잔뜩 찡그린 채 서 있었다.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뻗어 안서희를 안으려 했다.“서희야, 내가 왔어.”고유준이 더 빨랐다. 그는 그녀를 안은 채 몸을 살짝 돌리며 김주혁의 손을 피했다.“김주혁 씨, 뭐 하는 거예요?”김주혁의 얼굴은 끔찍하게 차가웠다.“고 선생님.”고유준은 살짝 웃었다.“네, 김주혁 씨 저 아세요?” “저번에 식당에서 봤잖아요.”고유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 생각났어요. 김주혁 씨와 동행한 임산부가 식당을 한바탕 난장판으로 만들었죠.”김주혁의 얼굴은 서리처럼 차가웠다.“고유준 씨, 남의 아내를 남편 앞에서 안는 건 신사가 할 짓이 아니죠?”고유준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콧방귀를 뀌었다.“아내?”“물론이죠.”“안 선생님이 아내라면 그 임산부는 뭐죠? 애인인가요, 아니면 불륜녀인가?”김주혁의 얼굴이 완전히 싸늘해졌다.“고 선생님, 일단 사람부터 내려놓고 말씀하시죠.”“안 선생님이 다리를 다쳐서 걷지 못합니다.”“제가 남편이니까 제가 챙길게요.”“김주혁 씨, 그런 말 할 때마다 뭐 찔리는 거 없어요?”김주혁의 표정이 확 바뀌며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기세였다.안서희는 황급히 고유준을 밀어냈다.“고 선생, 챙겨줘서 고마워. 그만 내려줘.”고유준은 움직이지 않았다.“왜, 날 때리기라도 할까 봐?”“내가 못 할 것 같아요?”안서희는 상황을 심각하게 만들기 싫어 단호하게 말했다.“고 선생님, 내려주세요.”안서희의 고집을 본 고유준은 결국 그녀의 말에 순순히 따르며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김주혁은 다가가 안서희를 뒤에 숨긴 채 고유준과 대치하며 입꼬리만 씩 올렸다.“고 선생님, 제 아내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 되면 차나 한잔하시죠?”고유준은 그가 뻗은 손을 보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주고받았다.“물론이죠.외과는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조금 전 이미 꽤 큰 소동을 벌여서 사람들의 이목을
김주혁은 쓴웃음을 짓다가 얼굴에 난 상처를 건드리자 고통에 숨을 들이켰다.“긁혔어.”누가 한 짓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안서희는 그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아주머니 상황이 좋지 않아요. 내가 신경외과 의사는 아니지만 학부 전공이 임상의학인데 지금 꽤 심각한 상황이에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알려주는 거예요.”김주혁의 얼굴이 창백했다.“이렇게 된 이유가 뭐야?”“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감정 기복이 심하거나 나이가 들어서 혈관에 혈전이 생겼을 수도 있죠.”김주혁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아마 우리 이혼 때문일 거야. 그리고... 아이 일로 충격이 컸던 것 같아.”안서희는 과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 말을 돌렸다.“이번에 아주머니 위기 넘기면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 봐요. 절대 자극을 줘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정말 큰일 나요.”김주혁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안유진이 엄마 귀찮게 하지 않게 해야지.”“그래요.”김주혁의 두 눈에 분노가 스쳐 가며 무언가 결심한 듯했지만 안서희는 궁금하지 않았다.김주혁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일렁거렸다.“안서희, 나한테 더 하고 싶은 말 없어?”“있어요. 시간 나면 바로 이혼 서류 접수하러 가요.”김주혁은 멈칫하며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고유준 때문이야?”안서희가 차갑게 말했다.“집을 사야 하니까요. 다시는 누군가에게 함부로 쫓겨나는 인생 살고 싶지 않아요.”김주혁이 쓴웃음을 지으며 다소 넋이 나가 있었다.“재산 분할 때문에 그래? 내가 그렇게 비열하지는 않아.”“김주혁 씨, 이혼 후 집을 사는 건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지만 혼인 중에 사면 당신이 협조해야 해요. 알아들어요?”김주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돌아가서 시간 확인해 보고 연락할게.”“서둘러요, 그 부동산 인기 많아서 늦게 가면 좋은 층 못 골라요.”김주혁이 물었다.“어딘데? 내가 알아볼 수도...”“그럴 필요 없어요.”“...”“됐어요, 할 말 다 했으니까 이제 가도 돼요.”“...”
직원은 그 말에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예상하고 시선을 들어 안서희를 바라보았지만 안서희의 얼굴은 의외로 평온했고 입가에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직원이 자신을 올려다보자 안서희가 정중하게 물었다.“왜요, 혹시 추가해야 할 내용이 있나요?”“아뇨, 충분합니다.”“네, 다행이네요. 그럼 부탁드릴게요.”“참, 자녀 양육권 문제도 있는데 그것도 상의하셨나요?”“저희는...”아이 얘기가 나오자 안서희의 안색이 어두워졌고 김주혁 역시 말을 하지 않으려는 듯 얼굴을 돌렸다.안서희가 말했다.“우리는... 아이가 없어요.”“아, 잘됐네요. 그러면 더 수월하겠어요, 걸릴 게 없으니까.”“맞아요.”“좋아요, 그럼 바로 접수해드릴게요.”“네.”직원은 김주혁에게 물었다.“남성분은요? 계속 여성분만 얘기하시는데 더 질문 있으세요?”김주혁은 고개를 들고 가로저었다.“이 사람 말대로 해요.”직원은 웃으며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알았어요, 집 사려고 이혼한 척하는 거죠?”김주혁은 얼굴을 찡그렸다.“네?”“됐어요, 다 알았으니까 연기하지 마세요.”안서희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물었다.“뭘 아셨는데요?”직원은 그들의 뒤로 알아서 보라는 듯 턱을 까딱했다.그들 뒤에는 이혼을 앞둔 부부 몇 쌍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누구는 목까지 벌게진 채 다투고 있었고 누구는 등을 돌린 채 모르는 사람처럼 서로 쳐다보지도 않았으며 누구는 여자가 남편이 어리고 젊은 여자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에 대성통곡했다.“봤죠? 저게 진짜 이혼하러 온 사람들이에요. 두 분은 아무런 갈등도 원한도 없어 보이는 게 관계가 깨진 것 같지 않아요. 그렇다면 왜 이혼하겠어요? 빈틈을 노려서 집을 장만하려는 거죠.”안서희는 이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아니에요, 저희 정말 이혼하러 왔어요.”직원은 여전히 믿지 않았다.“두 사람 대화도 아주 정상적으로 흘러가고 감정을 소진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안서희는 힘없이 웃었다.“애초에 금이 갈 감정조차 없어서 그렇다는 생
“서희야, 서희야...”그의 낮고 부드러운 중저음이 귓가에 맴돌았다.결혼한 지 3년이 되었지만 안서희는 여전히 침대 위에서의 김주혁과 침대 밖에서의 김주혁은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평소 김주혁은 다정하고 매너도 있었지만 밤마다 부부 관계를 할 때면 안서희는 그의 체력을 따라가지 못해 힘에 부칠 정도였다.겨우 버티다가 끝났을 때 안서희는 온몸이 쑤셨고 팔도 들지 못했다.김주혁이 그녀의 팔을 갑자기 덥석 잡았다. 지쳐버린 안서희는 눈을 뜰 힘도 없어 부탁하면서 애교를 부렸다.“그만 해요. 내일 우리 출근해야 하잖아요.”요즘 승급 준비에 안서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보고서를 다 작성했을 때 이미 새벽이 되었지만 또다시 김주혁에게 끌려 잠자리를 가졌다. 안서희는 너무도 힘들어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김주혁이 가볍게 웃었다.“뭔 생각 하는 거야?”안서희의 두 볼이 발그스름해졌다.“그럼...”김주혁은 가늘고 긴 커다란 손으로 안서희의 어깨를 잡고는 욱신거리는 곳을 마사지해주었다.힘이 셌고 또 마침 아픈 곳만 꾹꾹 눌러 시원한 느낌이 순식간에 온몸에 퍼졌다. 안서희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시원해?”김주혁의 매력적인 중저음이 귓가에 들려왔다. 변치 않은 다정함에 안서희의 두 볼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산부인과 의사인 그녀는 사실 이쪽 지식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론은 빠삭했지만 실전은 서툴기 그지없었다. 진짜 관계를 할 때면 그녀 자신이 봐도 심하게 모를 정도였다.다행히 김주혁은 참 젠틀한 사람이었다. 평소 다른 신혼부부들처럼 깨가 쏟아지진 않아도 그래도 서로 존경하며 사이좋게 지냈다.사실 안서희도 보수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맞선을 통해 알게 된 사이라 연애는 건너뛰고 바로 결혼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지금 이렇게 지내는 것도 꽤 잘 지내는 정도였다.“지금 움직여 봐. 어때? 좀 나았어?”안서희는 다시 어깨를 움직였다. 마사지 덕에 확실히 많이 가벼워졌다.“고마워요. 많이 나았어요.”
조수 임수경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선생님, 산모님 남편분이랑 아는 사이였어요?”안서희는 눈앞의 익숙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에 경악과 놀라움, 그리고 불안이 섞여 있었지만 안에 누워있는 여자에 대한 걱정이 가장 많았다.지금 충분히 억제하고 있는데도 두려움과 다급함은 숨기지 못했다.“당신이 저 환자...”안서희가 수술실 안을 힐끗거렸다.“남편이에요?”임수경이 한발 먼저 말했다.“네. 아까 수술 동의서에 사인한 가족이 바로 이분이에요.”안서희는 온몸이 으스스해졌고 안색도 별로 좋지 않았다.“그래요...”김주혁이 이를 꽉 깨물었다.“서희야, 나중에 내가 다 설명할게.”안서희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의사라면 의사답게 행동해야 하기에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말했다.“수술 아주 성공적으로 잘됐고 산모와 아기 모두 무사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근데 아직 유산기가 있으니까 며칠 병원에 입원해서 주사 맞아야 해요. 입원해서 아무 문제 없다면 주말에 퇴원해도 됩니다.”김주혁도 그제야 시름을 놓은 듯했다.“알았어.”그러더니 잠깐 멈칫하다가 이어 말했다.“고생했어, 서희야.”“아니에요. 저분이 누구 아내든 의사로서 최선을 다해 살려냈을 거예요.”안서희는 사무실로 들어와 찬물 한잔을 들이마셨다. 한참이 지나서야 마음이 겨우 진정되었다.그러다가 십여 분 후,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밖에서 김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서희야, 나야.”안서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김주혁의 낯빛이 아까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눈시울은 여전히 붉어 있었고 미간 사이의 걱정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조금 전 수술실 밖에서 너무 놀라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김주혁의 흰 셔츠에 핏자국이 묻어있었고 옷도 잔뜩 구겨져 있었으며 옷소매가 다 젖어 있었다.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여자를 안고 병원에 오다가 양수가 묻었거나 아니면 조금 전 병실에서 그 여자가 흘린 눈물이거나.안서희는 의자로 돌아가 덤덤하게 물었다.“가서 봤어요?”
의외냐고?사실 그리 의외는 아니었다.안서희와 김주혁은 자연스럽게 만나 연애해서 결혼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3년이나 함께 살았기에 김주혁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김주혁은 그래도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대표처럼 상대를 숨 막히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말도 다정하게 했고 무슨 일이든 꼼꼼하게 처리하는 점잖고 듬직한 남자였다.그런 김주혁을 이성을 잃게 만든 여자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안서희는 헤어졌던 연인이 서로 울며불며 다시 만나는 상상을 하며 마음의 준비까지 다 마쳤지만 현실은 늘 생각과 많이 달랐다.그녀가 본가로 들어갔을 때 집에 임신부 한 명이 있었다.그런데 임산부는 안서희의 시어머니인 백금희와 나란히 앉아있었고 김주혁은 홀로 싱글 소파에 앉아있었다. 안서희를 본 김주혁은 평소처럼 빠르게 일어나 외투와 가방을 받았다.“내가 걸어줄게.”시어머니도 아주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서희 왔어? 얼른 와서 앉아.”“어머님.”안서희는 시어머니에게 인사한 후 옆에 앉은 임산부를 보며 물었다.“이분은...”그러자 백금희가 웃으며 말했다.“소개할게. 얘는 유진이라고 옆집 안승호 씨네 딸이야. 얼마 전까지 남편이랑 해외에서 살다가 최근에 귀국했어. 유진아, 쟤는 주혁이 와이프야. 방금 얘기했었지?”임산부는 배를 만지면서 천천히 일어났다.“안녕하세요. 안유진입니다.”안서희가 놀라며 대답했다.“안녕하세요.”“우리 다 안 씨네요?”백금희가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그러게. 주혁이 안 씨랑 인연이 있나 봐.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가장 친한 친구랑 와이프가 안 씨인 걸 보면.”안유진이 말했다.“그러게요. 이모가 모르는 게 하나 더 있어요. 내 수술도 안 선생님이 해주셨어요.”백금희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정말?”“네.”안유진이 안서희에게 먼저 악수를 건넸다.“아직 선생님한테 살려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네요. 그때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저랑 아이 지금 이렇
안서희는 지갑에 넣은 검사서를 떠올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준비 안 했어?”김주혁이 가볍게 웃었다.“됐어. 우리 안 선생님이 얼마나 바쁘신 분인데 시간 내서 밥 한 끼 해준 것만 해도 엄청 좋은 선물이지, 뭐.”“주혁 씨, 다음 주에 휴가 냈는데 우리 나가서 며칠 놀다 와요.”김주혁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요즘 보고서 쓰느라 바쁘지 않아? 그럴 시간 있어?”“시간 조절할 수 있어요.”김주혁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우리 신혼여행도 못 갔는데 이참에 다녀오자.”“그래요.”안서희가 되물었다.“주혁 씨 일에 지장 주는 건 아니죠?”“다음 주에 가잖아. 이번 주에 일 다 미리 처리하면 돼.”“그럼 다행이고요.”김주혁이 말했다.“내일은 낮에 출근해? 아니면 당직이야?”“다른 사람이랑 바꿔서 내일 휴식이에요.”김주혁이 또 말했다.“내일 고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어. 나랑 같이 가자.”3년 동안 김주혁의 아내로 살면서 안서희는 그의 친구들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바쁜 이유도 있었지만 굳이 만나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이번에 생일 선물을 주겠다던 약속을 갑자기 어긴 바람에 이 부탁은 들어주기로 했다.“알았어요.”...1박 2일 동안 뜬 눈으로 보낸 안서희는 그날 밤에 아주 푹 잤다. 깨어났을 때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사실 이런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의사 특성상 환자가 위급할 때 언제든지 병원에 나가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김주혁과 한 침대에서 자긴 하지만 말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다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백금희가 말했다.“서희 깼어? 주혁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안서희가 재빨리 나가보니 익숙한 하얀 카이엔이 세워져 있었다. 다가가서 조수석 차 문을 열고 차에 타려는데 눈앞의 상황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안에 있던 사람도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안 선생님?”“안유진 씨?”안유진은 오늘 특별히 치장까지 했다. 배가 나오긴 했지만 빨간 원피스에 검은 머리를 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