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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잘 아는 사이

의외냐고?

사실 그리 의외는 아니었다.

안서희와 김주혁은 자연스럽게 만나 연애해서 결혼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3년이나 함께 살았기에 김주혁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김주혁은 그래도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대표처럼 상대를 숨 막히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말도 다정하게 했고 무슨 일이든 꼼꼼하게 처리하는 점잖고 듬직한 남자였다.

그런 김주혁을 이성을 잃게 만든 여자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안서희는 헤어졌던 연인이 서로 울며불며 다시 만나는 상상을 하며 마음의 준비까지 다 마쳤지만 현실은 늘 생각과 많이 달랐다.

그녀가 본가로 들어갔을 때 집에 임신부 한 명이 있었다.

그런데 임산부는 안서희의 시어머니인 백금희와 나란히 앉아있었고 김주혁은 홀로 싱글 소파에 앉아있었다. 안서희를 본 김주혁은 평소처럼 빠르게 일어나 외투와 가방을 받았다.

“내가 걸어줄게.”

시어머니도 아주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서희 왔어? 얼른 와서 앉아.”

“어머님.”

안서희는 시어머니에게 인사한 후 옆에 앉은 임산부를 보며 물었다.

“이분은...”

그러자 백금희가 웃으며 말했다.

“소개할게. 얘는 유진이라고 옆집 안승호 씨네 딸이야. 얼마 전까지 남편이랑 해외에서 살다가 최근에 귀국했어. 유진아, 쟤는 주혁이 와이프야. 방금 얘기했었지?”

임산부는 배를 만지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안유진입니다.”

안서희가 놀라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우리 다 안 씨네요?”

백금희가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주혁이 안 씨랑 인연이 있나 봐.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가장 친한 친구랑 와이프가 안 씨인 걸 보면.”

안유진이 말했다.

“그러게요. 이모가 모르는 게 하나 더 있어요. 내 수술도 안 선생님이 해주셨어요.”

백금희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네.”

안유진이 안서희에게 먼저 악수를 건넸다.

“아직 선생님한테 살려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네요. 그때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저랑 아이 지금 이렇게 무사하게 여기 서 있지 못 할 뻔했어요.”

상대가 솔직하게 말하니 안서희도 움츠릴 필요가 없었다. 안서희도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별말씀을요. 의사로서 환자를 살리는 건 당연한 거죠. 그때 유진 씨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지만 사실 큰 문제는 아니었어요. 봉합술하고 며칠 쉬면 돼요. 근데 그래도 조심하긴 해야 해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명심할게요.”

도우미가 준비한 음식을 하나둘 내오자 백금희는 사람들에게 식사하자고 했다.

늘 겸손했던 김주혁은 떠벌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매년 오는 생일을 그렇게 떠들썩하게 보내고 싶지 않아 그저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간단하게 식사하기로 했다.

안서희는 말수가 적었기에 백금희와 안유진만 계속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옆에서 들으면서 상황을 대충 알게 되었다.

김씨 저택의 옆집에 안씨 가문이 살았는데 두 집안은 수십 년 동안 이웃으로 지냈다. 안유진과 김주혁은 한 해에 태어났고 안유진은 김주혁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났다. 두 사람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줄곧 같은 반에 다니다가 대학교에 가서야 헤어졌다.

김주혁은 국내 최고의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배웠고 안유진은 해외에서 법을 전공했다. 백금희가 말했다.

“유진이랑 주혁이는 네 거 내 거 가리지 않을 정도로 친해.”

백금희는 책도 내고 말도 교양 있게 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녀의 말은 김주혁과 안유진은 남녀 사이가 아니라 순수한 우정이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이과만 배운 안서희가 자기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봐 안서희의 손을 토닥이면서 말했다.

“그때 얘네 둘이 하도 가깝게 지내서 나도 연애하는 줄로 오해했다니까. 근데... 결국에는 그냥 해프닝이었어. 하하.”

백금희는 돌아서서 안서희에게 웃으며 설명했다.

“유진이는 주혁이 친구를 좋아했었어. 맨날 주혁이더러 그 남자애한테 쪽지를 전해달라고 했었어.”

김주혁의 얼굴에 실망감이 짙어졌고 자신을 비웃듯 말했다.

“맞아. 난 그냥 둘을 이어주는 도구였어.”

안서희가 웃으며 물었다.

“그럼 두 사람 마지막에 커플이 됐어요?”

줄곧 아무 말이 없던 안유진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

“됐긴 됐었는데 얼마 못 만나고 헤어졌어요. 어릴 때 한 연애잖아요. 다들 호르몬이 꿈틀거리기 시작할 때라 끝까지 이루어지는 경우가 아주 적죠.”

“하긴.”

백금희가 웃으며 농담했다.

“유진아, 그때 왜 우리 주혁이는 싫어했어? 그 남자애 주혁이보다 딱히 더 나은 것 같지도 않았는데.”

안유진이 두 손을 펼쳐 보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서로 너무 잘 아는 사이인데 어떻게 연애를 해요.”

백금희가 원하던 말이 바로 이거였다. 안유진의 말에 분위기도 한결 가벼워졌고 주방에 백금희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사실 안서희는 백금희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백금희는 안서희가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다는 걸 알고 그녀가 대신 말하면서 모든 걸 설명했다.

솔직히 말해서 안서희는 이 결혼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김주혁은 친절하고 다정했고 시어머니 백금희는 이해심이 많고 친해지기 쉬웠다. 그리고 다른 재벌처럼 결혼하자마자 아이를 낳으라고 다그친 게 아니라 되레 그녀가 일하는 걸 응원했다.

사랑이 없는 것 말고는 백 점 만점에 거의 백 점이었다. 하지만...

안유진이라는 존재가 있기에 괜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금희의 말에 따르면 안유진의 아버지 안승호는 몇 년 전에 아내와 함께 산속에 있는 요양원에서 지낸다고 했다. 아내의 몸이 안 좋아서 공기가 좋은 산에서 살면 회복에 좋다는 소리에 산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하여 옆집을 3년 넘게 비워 잠시는 사람이 지낼 수가 없었다.

안전 때문이든 이웃 간의 정 때문이든 임산부인 안유진은 그날 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김씨 저택에 머물렀다.

안서희가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왔을 때 김주혁은 침대에 기댄 채 금테 안경을 끼고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오자 그는 책을 내려놓고 수건을 건네받아 머리를 닦아주었다.

“피곤해?”

오늘 본가에서 김주혁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24시간 연속 출근했고 돌아와서도 쉬지 않고 낮 출근을 했다. 그러다 보니 벌써 36시간이나 뜬 눈으로 보냈다.

“괜찮아요.”

안서희가 대답했다. 김주혁의 행동도 충분히 다정한데 말투는 더 다정했다.

“그날 병원에서 너무 급해서 유진이 관해서 설명하지 못했어. 내 생일 축하해주겠다고 해외에서 날아왔는데 공항에서 나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한 거였어.”

“아, 그런 거였군요.”

그러니까 그날 저녁에 다급하게 나간 게 회사 일 때문이 아니라 공항에 마중하러 나간 것이었다. 김주혁이 말했다.

“유진이는 가장 친한 친구야.”

친구라는 말은 특히 더 늦게, 더 무겁게 말했다. 마치 일부러 강조하기라도 하듯 말이다.

안서희가 천천히 말했다.

“임신 6개월 된 몸으로 당신 생일 축하해주겠다고 그 먼 해외에서 날아온 거 보면 평범한 친구 사이는 아니네요.”

머리를 닦아주던 김주혁이 잠깐 흠칫하더니 귓가에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아 참.”

김주혁이 화제를 돌렸다.

“전에 나한테 생일 선물 주겠다고 했잖아. 오늘이 다 지나가는데 선물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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