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5화 그냥 사모님이라고 불러요

김주혁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역주행하여 달려오는 스쿠터를 본 순간 다급하게 핸들을 꺾으면서 급브레이크를 밟고 길가에 멈춰 섰다.

다행히 스쿠터와 부딪치지 않고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안서희는 놀란 나머지 얼굴이 다 하얗게 질렸다.

“운전할 때는 딴 데 정신 팔지 말아요.”

“알았어.”

김주혁도 놀라서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는 휴대전화를 안유진에게 돌려주었다.

“스스로 해제해.”

그런데 안유진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로 거절했다.

“나 지금 메이크업 수정하잖아. 휴대전화 쥘 손이 없어.”

“나 운전해야 하는데...”

“지금 안 하잖아.”

안서희는 한숨을 내쉬고는 김주혁에게 말했다.

“그럼 휴대전화 나 주고 비번 말해요. 내가 해제할게요.”

“알았어.”

김주혁은 휴대전화를 안서희에게 건넸다.

“비번은 ryx2...”

“주혁아, 뭐 하는 거야?”

안유진이 갑자기 화를 내더니 거울을 옆에 던지고는 안서희가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확 빼앗은 후 김주혁에게 던졌다.

“내 비번 남한테 얘기해선 안 돼.”

난감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김주혁과 안서희와 달리 안유진은 난감한 기색이라곤 없었고 심지어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안유진은 뒷좌석의 안서희를 돌아보며 웃었다.

“미안해요, 선생님. 임신해서 호르몬 변화 때문에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해요. 선생님은 이해하죠?”

“네...”

안유진이 말했다.

“현대 사회라 휴대전화에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많잖아요. 난 그저 내 사생활을 지켰을 뿐이지, 선생님한테 화를 낸 게 아니에요.”

안서희가 웃으며 말했다.

“변호사는 역시 다르네요.”

그러자 안유진이 대답했다.

“직업병이에요.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선생님.”

“그럴 리가요. 그나저나 그냥 사모님이라고 불러요. 여긴 병원도 아니고 유진 씨 주치의도 아니에요. 그때 그냥 임시로 수술해줬을 뿐이에요.”

하지만 안유진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수술해줬으면 당연히 선생님이죠. 주치의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그리고 어제 만났을 때부터 선생님이라 불러서 적응했는데 호칭 갑자기 바꾸는 것도 이상하고요.”

“이상할 거 없어요. 원래 사모님이니까요.”

“네. 그렇긴 하죠.”

안유진의 얼굴에 나타났던 미소가 살짝 굳어졌다.

“근데 사모님이라고 부르면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아요? 사오십대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래도 선생님이라 부르는 게 더 젊어 보여요.”

안서희가 빤히 쳐다보자 안유진은 승리의 미소를 짓고는 다시 돌아앉아 명령하듯 말했다.

“주혁아, 가자. 이러다 늦겠어.”

...

의사인 안서희는 평소 동창 모임에 나갈 시간이 별로 없었다. 전에 권진아가 몇 번 불렀었지만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어 항상 완곡하게 거절했었다.

차에서 내린 그들이 칵테일 바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안서희의 휴대전화가 또 울렸다. 김주혁이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또 병원이야?”

안서희가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병원 전화가 맞았다.

“네. 위급한 산모가 있나 봐요. 안 그러면 휴일에 나한테 전화 안 하는데.”

김주혁이 말했다.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혼자...”

“주혁아.”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안유진이 그를 불렀다.

“민재가 전화 와서 빨리 오래.”

김주혁은 난감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안서희의 전화가 끊임없이 울리자 그녀는 멀리 가서 전화를 받았다.

“일단 전화 받아보고요. 여보세요?”

“선생님, 저 수경이에요. 방금 교수님이 다음 달에 해외 연수 기회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선생님 가실래요?”

안서희는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

“그 일로 전화한 거였어요? 난 또 응급 상황인 줄 알았어요.”

“하하. 응급 상황이 맨날 있을 리는 없죠. 일반 상황은 제가 대처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네. 알았어요.”

“그럼 해외 연수 갈 거예요? 정말 좀처럼 없는 기회예요. 제가 필요한 자료 다 프린트했거든요. 선생님 가실 의향 있으시면 지금 바로 자료를 제출할게요.”

“아니에요.”

안서희는 다정하게 말하면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나도 아이를 해외에서 낳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아이는 한국 국적이어야죠.”

“선생님도요? 가족 중에 임산부가 또 있어요?”

“우리 남편 친구요...”

“알았어요.”

임수경이 아쉬워하며 말했다.

“아이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일을 포기하는 건 항상 여자라는 게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요. 선생님은 젊은 나이에 벌써 산부인과에서 권위가 있는 분이라 해외에 몇 년만 다녀오면 엄청 발전하실 텐데...”

임수경이 그녀의 조수이긴 하지만 사실 두 살밖에 어리지 않았고 아직 대학원생이었다.

산부인과에서 차갑고 따뜻한 인심을 자주 느껴서 그런지 임수경은 최근 들어 임신과 출산이 여자의 인생에 아주 큰 영향을 준다는 걸 깨달았다. 하여 비혼주의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안서희는 임수경을 몇 마디 위로한 후 전화를 끊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김주혁과 안유진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아무래도 들어간 모양이다.

칵테일 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칵테일 바 홀에 거의 백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는데 전부 김주혁의 또래였다. 하지만 그녀는 인파 속에서 김주혁을 단번에 찾아냈다.

훤칠한 키에 우아하고 점잖은 분위기가 흘러넘쳤고 얼굴도 눈에 띌 정도로 잘생겼다. 그런데 풍기는 분위기와 달리 얼굴은 사납고 오만했으며 선이 굵었다. 만약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거칠고 무서운 사람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김주혁이 진짜 안유진이랑 결혼했어?”

“진짜지, 그럼. 경제 채널 인터뷰 못 봤어? 걔가 직접 얘기했어. 와이프 성이 안 씨라고. 그럼 안유진밖에 더 있어?”

“설마... 둘이 친구로 지낸 지 엄청 오란데 만나면 진작 만났겠지, 지금까지 기다릴 필요 있었겠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갑자기 눈이 맞았겠지, 뭐. 그나저나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안유진은 최민재처럼 점잖고 다정한 남자를 좋아했지, 거친 남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그럼 유진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변했나? 주혁이 학교 짱이라 주혁이한테 아무도 못 덤볐잖아.”

“유진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변한 게 아니라 주혁이가 바뀌었을 수도 있어. 쟤 양복 딱 차려입고 금테 안경 끼면 엄청 다정하고 점잖아 보여. 중학교 때 사납고 거칠던 김주혁이 지금 이런 모습으로 변했을 줄 누가 알았겠어?”

툭...

안서희가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떨구고 말았다. 그 소리에 수군거리던 두 사람이 화들짝 놀랐다. 그중 파란 양복 차림의 한 사람이 휴대전화를 주워 건넸다.

“괜찮아요?”

안서희는 고마움에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몇 반이에요?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난 동창이 아니라...”

“아니라고요? 오늘 동창 모임 때문에 칵테일 바 전체를 다 빌려서 다른 손님 안 받아요. 술 마시러 온 거면 미안한데 다른 데로 가주세요.”

“술 마시러 온 게 아니고 사람 찾으러 왔어요.”

“누구요?”

“김주혁 씨요.”

남자가 화들짝 놀랐다.

“김주혁요? 주혁이랑 어떤 사이시죠?”

관련 챕터

최신 챕터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