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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가장 친한 친구

안서희는 지갑에 넣은 검사서를 떠올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준비 안 했어?”

김주혁이 가볍게 웃었다.

“됐어. 우리 안 선생님이 얼마나 바쁘신 분인데 시간 내서 밥 한 끼 해준 것만 해도 엄청 좋은 선물이지, 뭐.”

“주혁 씨, 다음 주에 휴가 냈는데 우리 나가서 며칠 놀다 와요.”

김주혁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요즘 보고서 쓰느라 바쁘지 않아? 그럴 시간 있어?”

“시간 조절할 수 있어요.”

김주혁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신혼여행도 못 갔는데 이참에 다녀오자.”

“그래요.”

안서희가 되물었다.

“주혁 씨 일에 지장 주는 건 아니죠?”

“다음 주에 가잖아. 이번 주에 일 다 미리 처리하면 돼.”

“그럼 다행이고요.”

김주혁이 말했다.

“내일은 낮에 출근해? 아니면 당직이야?”

“다른 사람이랑 바꿔서 내일 휴식이에요.”

김주혁이 또 말했다.

“내일 고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어. 나랑 같이 가자.”

3년 동안 김주혁의 아내로 살면서 안서희는 그의 친구들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바쁜 이유도 있었지만 굳이 만나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생일 선물을 주겠다던 약속을 갑자기 어긴 바람에 이 부탁은 들어주기로 했다.

“알았어요.”

...

1박 2일 동안 뜬 눈으로 보낸 안서희는 그날 밤에 아주 푹 잤다. 깨어났을 때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 이런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의사 특성상 환자가 위급할 때 언제든지 병원에 나가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김주혁과 한 침대에서 자긴 하지만 말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다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백금희가 말했다.

“서희 깼어? 주혁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안서희가 재빨리 나가보니 익숙한 하얀 카이엔이 세워져 있었다. 다가가서 조수석 차 문을 열고 차에 타려는데 눈앞의 상황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안에 있던 사람도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안 선생님?”

“안유진 씨?”

안유진은 오늘 특별히 치장까지 했다. 배가 나오긴 했지만 빨간 원피스에 검은 머리를 풀어헤쳤고 메이크업도 연하게 하니 단아하고 예뻤다.

그런데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시울이 붉어 있었고 코맹맹이 소리도 섞여 있었다.

“오늘 나도 동창 모임에 가는데 주혁이가 태워주겠다고 해서요.”

안서희는 그제야 김주혁과 안유진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은 반에 다녔다는 게 생각났다. 동창 모임이니 안유진도 당연히 참석했다.

태워주는 건 괜찮지만 조수석 자리는 일반적으로 와이프 자리가 아닌가?

안서희가 서서 한참이나 기다렸지만 안유진은 뒷좌석에 탈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안서희가 귀띔했다.

“유진 씨, 뒷좌석이 널찍해서 더 편할 거예요.”

그러자 안유진이 갑자기 환하게 웃더니 머리를 뒤로 넘겼다.

카이엔은 SUV라 지상고가 높았다. 안유진은 조수석에 앉아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 멀미해서 뒤에 못 타요.”

웬일인지 오늘의 안유진은 어제와 사뭇 달랐다. 안서희에게 약간의 적대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안서희는 속으로 뭐지 싶었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럼 유진 씨 뜻은...”

“미안하지만 요즘은 선생님이 뒤에 앉으면 안 될까요? 임산부 배려 좀 해주세요.”

“요즘?”

“네.”

안유진은 별다른 뜻이 없는 척 말했다.

“몇 년 만에 귀국한 거라 이번에 국내에 좀 오래 있으려고요. 그리고 외국에서 애를 낳기 싫어요. 애는 그래도 한국 국적 가져야죠.”

지금 임신 6개월이라 출산과 산후조리까지 마치려면 적어도 반년은 걸렸다. 그럼 그동안 쭉 김씨 저택에 머무르겠다고?

“그럼 산후조리도 김씨 저택에서 할 건가요?”

“부모님 두 분 다 요양원에 계셔서 주혁이네 본가에서 일단 지내야죠. 근데 본가가 시 중심과 멀어서 병원 다니기 힘들어요. 서희 씨랑 주혁이 지금 시 중심에서 살고 있다면서요? 거기 병원이랑 가까우니까 출산 전부터 산후조리 끝날 때까지는 서희 씨네 집에 있으려고요.”

이번에는 지내도 되냐는 질문이 아니라 안서희네 집에서 지내겠다는 통보를 내렸다. 마치 이 일이 이미 결정된 것처럼 안서희에게는 그저 알려주는 것처럼 들렸다.

안서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운전석의 김주혁을 쳐다보았다.

“주혁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김주혁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집이 병원이랑 가깝긴 하잖아.”

“그러니까 두 사람 이미 다 상의를 마쳤다는 거네요?”

“서희야, 유진이는 임산부야. 그리고 내 가장 친한 친구고...”

‘가장 친한 친구라...’

3년 동안 안유진과 전화 통화를 한 번이라도 했거나 안유진이라는 이름을 꺼내기만 했어도 가장 친한 친구라는 말을 믿었을 것이다. 입으로는 가장 친한 친구라고 하면서 3년 동안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가장 친한 친구라는 두 사람이 3년이나 연락을 끊었을까?

그리고 그때 안서희의 사무실에서 친구라고 당당하게 밝혔어도 됐었지만 김주혁은 숨기는 것을 택했다.

김주혁이 그녀를 다그쳤다.

“서희야, 시간 거의 다 됐어. 출발하자.”

안유진을 다그친 게 아니라 안서희를 다그쳤다. 그리고 안유진에게 뒷좌석에 앉으라고도 하지 않았다.

안서희는 고개를 숙이고 실소를 터트리고는 차 문을 열어 뒷좌석에 올라탔다.

모임 장소는 어느 한 칵테일 바였는데 낮에는 손님이 별로 없고 공간도 넓어서 동창 모임을 하기에 딱이었다.

차에 임산부가 타고 있어서 그런지 김주혁은 아주 조심하면서 운전했다. 안유진은 조수석에 앉아 작은 거울을 들고 메이크업을 수정했다.

“주혁아, 나 괜찮아?”

김주혁이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힐끗 보았다.

“응. 예뻐.”

안유진은 불만이 있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임신해서 풀메이크업도 못하고. 지금 생얼이랑 거의 다를 바가 없어.”

“넌 생얼도 예뻐.”

“아니야. 동창 모임에 갈 때는 엄청 예쁘게 꾸미고 가야 한단 말이야.”

안유진은 거울을 내려놓고 김주혁에게 자연스럽게 물었다.

“내 휴대폰 어디 있어?”

김주혁은 아주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넌 참 예전이랑 달라진 게 없어. 아직도 휴대전화를 아무 데나 두고 쓸 때만 찾아. 자.”

안유진이 휴대전화를 받으면서 크게 웃었다.

“우리 학교 다니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아. 그때 내 휴대전화는 항상 네가 챙겨줬었는데.”

김주혁도 추억에 잠긴 듯했다.

“그러게. 남학생들이 너한테 고백 문자 보냈을 때도 내가 다 답장해줬었지.”

“하하. 걔네들 정말 너무 귀찮았어. 아 참, 방금 진동한 것 같던데 누가 문자 보냈는지 확인해봐 봐.”

그러더니 운전 중인 김주혁에게 휴대전화를 던져주고는 계속 메이크업을 수정했다.

김주혁은 이 모든 게 익숙한 듯 아무 불만도 없이 그녀의 요구를 다 받아주었다. 그는 한 손으로 휴대전화를 잡고 화면을 켰다.

“잠금 비밀번호가 뭐야?”

“예전 그거. 알고 있지?”

안서희는 뒷좌석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다. 김주혁은 화면을 한참 동안 터치하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비밀번호가 무슨 모스부호야? 꼭 이렇게 복잡하게 설정해야겠어?”

“복잡해도 넌 기억하잖아.”

안유진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채 입력 못 했어?”

“거의 다 돼. 기다려...”

“김주혁 씨!”

안서희는 고개를 들자마자 앞의 길 상황을 보고는 소리를 질렀다.

“앞 조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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