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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남녀 사이에 순수한 우정이 있을까?

“그 사람 와이프입니다.”

앞에 있던 두 남자가 놀란 두 눈으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당신이...”

“안서희입니다.”

넋이 나간 두 사람을 보며 안서희가 웃으면서 물었다.

“오늘 동창 모임이라고 들었는데 가족을 데려오면 안 되나요?”

“아, 그건 아닌데...”

“그럼 들어갈게요.”

안서희는 가방을 들고 칵테일 바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모임에 온 사람이 정말 많았다. 동창들 속에서도 주목을 받은 김주혁은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인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안서희는 그들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아 아무 자리나 잡고 앉았다.

칵테일 바가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김주혁은 더운지 양복 외투를 벗어서 팔에 걸었다. 그런데 누군가 양복을 받으면서 말했다.

“내가 들어줄게.”

김주혁은 그녀의 손을 피해 버렸다.

“괜찮아. 내가 들고 있으면 돼.”

안유진이 가볍게 웃었다.

“오늘 네가 취해서 쓰러지기 전까지는 애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데. 양복 나 주고 애들이랑 편하게 마셔.”

김주혁은 잠깐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

안유진은 양복을 받고 옆에 내려놓는 게 아니라 계속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김주혁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면서 고개를 숙이라고 했다.

김주혁은 고분고분 상체를 숙이고 그녀의 키에 맞게 귀를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안유진이 뭐라 속삭였는지 김주혁의 두 눈이 반짝이면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무슨 귓속말 했어?”

활발한 성격의 안유진이 바로 말했다.

“미리 얘기하는데 오늘 내가 주혁이 옆에 있을 거니까 적당히들 해. 술 너무 많이 주지 마. 알았어?”

“아이고, 유진이 너 주혁이 걱정하는구나?”

그러자 안유진의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걱정은 무슨.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김주혁도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마. 유진이 결혼했어. 임신한 거 안 보여?”

친구들은 김주혁을 두려워하기라도 하듯 김주혁이 한마디 한 후 더는 농담을 건네지 않았다. 김주혁의 옆에 있던 남자도 한마디 거들었다.

“다들 적당히 해. 술 마셨다고 헛소리하지 말고. 주혁이랑 유진이 우정이 얼마나 단단한데.”

“그래, 그래. 두 사람 같이 호텔에 갔다 해도 아무 일도 없을걸? 너희들은 어쩜 헛소리밖에 안 해?”

그들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 안유진이 김주혁에게 작은 유리병을 건넸다. 안에 투명한 액체가 가득 담겨있었는데 얼핏 보면 고량주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안서희는 이 모든 걸 똑똑히 지켜보았다.

조금 전 사람들이 얘기할 때 안유진은 작은 병 안의 고량주를 전부 부어버리고 물로 바꿨다.

김주혁과 안유진의 호흡이 아주 척척 잘 맞았다. 김주혁은 작은 병을 받고 자기 술잔을 가득 채웠다.

“건배하자.”

“우리 학생 시절을 위하여!”

“우리 청춘을 위하여!”

동창 모임이라는 게 바로 이러했다. 같이 모여 학창시절 얘기를 하면서 예전에 어리석었던 그때를 추억하곤 했다.

모임이 끝날 무렵 다른 친구들은 거의 인사불성이 됐지만 김주혁만 얼굴이 살짝 빨갛게 달아올랐을 뿐 정신은 멀쩡했다.

그는 셔츠 옷깃의 단추를 풀고 소매도 걷어 올린 후 파란 암밴드로 고정했다.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금테 안경을 올리는 동작이 우아하면서도 오만스럽게 보였다.

그런데 그때 김주혁이 눈살을 찌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멀지 않은 곳의 한 남자에게 시선이 머무르더니 다가가서 다짜고짜 발길질해댔다.

“담배 꺼. 유진이 임신했잖아.”

그 남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한참이 지나서야 멋쩍게 웃으면서 담배를 끈 다음 휴지통에 버렸다.

“미안. 까먹었어.”

김주혁은 그를 무섭게 째려보았다.

“앞으로는 명심해.”

남자는 굽신거리면서 사과했다.

“그래. 알았어.”

“주혁이 저런 모습 본 적이 없죠?”

누군가가 안서희 앞에 앉아있었다. 언제부터 앉아있었는지 그녀도 알지 못했다.

안서희는 상대를 훑어보았다. 김주혁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걸 봐서는 동창인 것 같았다. 살짝 긴 머리에 검은 테 안경을 끼고 있었고 얼굴도 선한 게 성격이 좋아 보였다.

“누구시죠?”

“민재라고 합니다.”

안서희는 뭔가 생각난 듯했다.

‘점잖고 다정해 보이는데 설마 아까 두 사람이 얘기했던...’

“최민재 씨?”

최민재가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었다.

“날 알아요?”

“아까 친구들이 그쪽 얘기 꺼내는 거 들었어요.”

안서희가 말했다.

“왜 같이 술 안 마셔요?”

최민재가 손을 내저었다.

“주혁이가 있어서요.”

“주혁 씨가 왜요?”

최민재는 한숨을 내쉰 후 가볍게 웃었다.

“학교 다닐 때 유진이가 나 좋다고 쫓아다녔거든요.”

안서희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 최민재가 바로 백금희가 얘기했던 김주혁의 친구였다.

“주혁이 와이프죠?”

“네.”

“쟤는 참 복도 많아요. 이렇게 예쁘고 참한 여자를 만난 거 보면.”

안서희는 웃기만 할 뿐 뭐라 대답하지 않았다.

“주혁이 예전보다 참 착해졌어요. 예전에 학교 다닐 때는 어찌나 대단했는지 전교 남학생들이 다 무서워했다니까요.”

“그래요?”

“그 또래 여학생들은 싸움 잘하는 남자를 좋아하나 봐요. 그래서 거의 모든 여학생들이 주혁이를 좋아했었어요.”

최민재는 잠깐 멈칫하다가 또 한마디 했다.

“유진이만 빼고요.”

안서희가 말했다.

“유진 씨는 민재 씨를 좋아했다면서요.”

“날 좋아했다고요?”

최민재는 자신을 비웃듯 웃었는데 말속에 다른 뜻이 숨겨있는 것 같았다.

“글쎄요.”

“글쎄라니요?”

최민재는 살짝 취한 듯했다. 술잔을 들고 투명한 액체를 보면서 말했다.

“서희 씨, 남녀 사이에 순수한 우정이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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