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여자의 촉

조수 임수경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선생님, 산모님 남편분이랑 아는 사이였어요?”

안서희는 눈앞의 익숙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에 경악과 놀라움, 그리고 불안이 섞여 있었지만 안에 누워있는 여자에 대한 걱정이 가장 많았다.

지금 충분히 억제하고 있는데도 두려움과 다급함은 숨기지 못했다.

“당신이 저 환자...”

안서희가 수술실 안을 힐끗거렸다.

“남편이에요?”

임수경이 한발 먼저 말했다.

“네. 아까 수술 동의서에 사인한 가족이 바로 이분이에요.”

안서희는 온몸이 으스스해졌고 안색도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요...”

김주혁이 이를 꽉 깨물었다.

“서희야, 나중에 내가 다 설명할게.”

안서희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의사라면 의사답게 행동해야 하기에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말했다.

“수술 아주 성공적으로 잘됐고 산모와 아기 모두 무사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근데 아직 유산기가 있으니까 며칠 병원에 입원해서 주사 맞아야 해요. 입원해서 아무 문제 없다면 주말에 퇴원해도 됩니다.”

김주혁도 그제야 시름을 놓은 듯했다.

“알았어.”

그러더니 잠깐 멈칫하다가 이어 말했다.

“고생했어, 서희야.”

“아니에요. 저분이 누구 아내든 의사로서 최선을 다해 살려냈을 거예요.”

안서희는 사무실로 들어와 찬물 한잔을 들이마셨다. 한참이 지나서야 마음이 겨우 진정되었다.

그러다가 십여 분 후,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밖에서 김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희야, 나야.”

안서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김주혁의 낯빛이 아까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눈시울은 여전히 붉어 있었고 미간 사이의 걱정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조금 전 수술실 밖에서 너무 놀라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김주혁의 흰 셔츠에 핏자국이 묻어있었고 옷도 잔뜩 구겨져 있었으며 옷소매가 다 젖어 있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여자를 안고 병원에 오다가 양수가 묻었거나 아니면 조금 전 병실에서 그 여자가 흘린 눈물이거나.

안서희는 의자로 돌아가 덤덤하게 물었다.

“가서 봤어요?”

김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잠들었어.”

“그 여자...”

김주혁이 먼저 말했다.

“내 아이 아니야.”

안서희는 갑자기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것만 같았고 힘 빠진 모습으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교통사고가 났는데 상황이 하도 급해서 내가 병원에 데려왔어. 수술하려면 수술 동의서에 가족만이 사인할 수 있다더라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안서희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다른 선생님더러 가족한테 사인받아오라고 했어요.”

“이제 알겠어.”

김주혁이 말했다.

“아까 수술실 앞에 보는 눈이 많아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어. 만약 남들이 내가 환자 남편이 아니라는 걸 알면 사인하지 못하잖아. 일단 사람부터 살리고 봐야지.”

그제야 자초지종을 알게 된 안서희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김주혁처럼 다정하고 점잖은 사람이 바람을 피울 리가 없었다.

아마 김주혁이 회사로 가는 길에 마침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했는데 아무도 임산부를 도와주지 않는 걸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병원에 데려왔을 것이다.

“회사 일은 다 해결됐어요? 여긴 내가 있으니까 산모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김주혁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서희야, 나...”

안서희가 물었다.

“왜 그래요?”

김주혁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회사는 아무 일 없어. 일 끝났어? 밖에서 기다릴게. 같이 집 들어가자.”

수술을 마쳤으니 산모는 간호사가 보살필 것이기에 안서희가 할 일은 딱히 없었다. 가운을 벗고 옷을 갈아입은 후 서랍에서 임신 검사 결과서를 잘 접어 가방에 넣은 다음에야 사무실을 나섰다.

김주혁의 하얀 카이엔을 한눈에 알아본 안서희는 익숙하게 차 쪽으로 걸어갔다.

멀리서 풍겨오는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밤하늘의 어두운 빛 아래에서 김주혁은 유리창에 기대어 있었고 누런 불빛이 깜빡였다.

안서희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다가가 물었다.

“언제부터 담배 피우기 시작했어요?”

화들짝 놀란 김주혁이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안서희는 그제야 바닥에 있던 십여 개의 담배꽁초가 전부 그가 피운 것이라는 걸 알았다.

오늘의 김주혁은 평소와 참 많이 달랐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김주혁의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매너 있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

“회사 일이야. 타.”

“심각해요?”

“별거 아니야.”

안서희는 조수석에 올라탄 후 안전벨트를 했다. 김주혁은 한참이 지나서야 차에 올라타더니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았다.

“잠깐만요!”

안서희가 소리를 지르자 김주혁도 화들짝 놀랐다.

“왜 그래?”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밖에서 욕설이 들려왔다.

“눈멀었어? 무슨 운전을 이따위로 해? 사람이 지나가는 거 안 보여? 사람 쳐놓으면 책임질 수 있어?”

김주혁은 예전에도 퇴근하는 안서희를 데리러 자주 왔었다. 조심성이 많아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평소 같지 않았다.

다행히 행인은 더는 따지지 않고 욕만 몇 마디 한 후 가버렸다.

김주혁은 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 시동을 걸었다. 안서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정말 괜찮아요?”

그러자 김주혁이 짜증 섞인 얼굴로 대답했다.

“괜찮다니까.”

안서희는 멈칫하다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분 후, 김주혁이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서희야. 요즘 일이 많아서 예민해서 그래. 너한테 일부러 화낸 게 아니야.”

안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운전에만 집중해요.”

“알았어.”

“...”

“서희야.”

“왜요?”

“아까 그 여자...”

김주혁은 입술을 핥더니 힘겹게 물었다.

“아까 네가 수술한 그 환자 혼자 병원에 있어도 괜찮겠지?”

안서희가 웃어 보였다.

“그 환자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니, 생각한 건 아니고 그냥 물어본 거야.”

“병원에 간호사들이 보살펴줄 거예요. 그리고 병원에서도 환자 가족한테 연락할 거고요.”

“가족이 안 오면 어떡해?”

“안 올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김주혁은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꾹 참았다. 전방을 주시하면서 운전에 집중하는 것 같으면서도 귀는 그녀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했다.

김주혁은 차를 문 앞에 세우더니 내리지 않고 유리창으로 고개를 내민 채 말했다.

“들어가서 쉬어. 난 회사 가서 일 마저 처리해야 해.”

안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진짜로 회사로 가는 게 맞는지 안서희는 묻고 싶지 않았다.

여자의 촉이 너무 예민한 것도 가끔은 좋지 않았다. 건성건성 한 성격이었더라면 오늘 밤 평소와 다른 김주혁의 모습에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

이번 주 토요일은 김주혁의 31살 생일이었다. 안서희는 김주혁과 함께 본가로 가자고 미리 약속했었다.

전날 당직을 선 바람에 토요일 아침 8시 돼서야 퇴근했다.

집을 나서기 전 그녀는 지갑을 열어 보았다. 작게 접은 검사 결과서를 꺼내 확인하고는 다시 지갑에 넣었다.

이건 안서희가 오래전부터 준비한 생일 선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선물을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안서희가 지갑을 가방 안에 넣고 흰 가운을 갈아입은 다음 퇴근하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절친 권진아의 전화였다.

“서희야, 네 남편이 어떤 임산부랑 같이 집에 가는 거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