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내가... 내가...”안유진은 좌우를 살피더니 장롱 위의 도자기 장식을 들고 배에 갖다 댔다.“안 보여 주면 이거 부숴 버릴 거야!”김주혁은 잠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꼭 보겠다는 거지?”안유진이 말했다.“그래!”“좋아.” 김주혁은 그녀에게 휴대폰을 건넸다.“봐.”김주혁의 휴대폰은 심플했다.이메일, 몇 가지 뉴스 앱, 그리고 카톡.안유진은 하나하나 훑어보았다.메일함에는 대부분 회사 부하 직원들과의 연락이 있었고 가장 빈번한 대화 상대가 그녀의 사촌 동생이자 현재 비서인 안우재였다.뉴스 앱에서는 볼거리가 많지 않았고 평소 금융과 경제 섹션만 읽던 그에게 알고리즘이 띄운 뉴스도 모두 금융과 경제 관련이었다.카톡은 맨 위에 김주혁의 어머니 백금희 연락처가 있었고 ‘엄마’라 저장되어 있었다.[주혁아, 나 요즘 두통이 심한데 어떤 약을 먹으면 좋을까?][두통의 원인은 다양한데 병원 가서 검사해 보실래요?]됐어, 그냥 진통제 좀 먹을게. 요즘 잠을 잘 자지 못하여서 그런가 봐.] [엄마, 요즘 잠을 잘 못 주무셨어요?][응, 근데 괜찮아.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히 일해. 한솔그룹 일로 바쁜데 엄마 걱정은 하지 마.]고작 메시지 몇 줄, 그게 다였다.김주혁이 물었다.“다 봤어?”안유진은 만족스러우면서도 민망했지만 꿋꿋이 턱을 치켜들고 오만하게 말했다.“괜찮네.”김주혁은 그녀의 손에서 가차 없이 휴대폰을 낚아채 갔다.“비켜.”안유진이 투덜거렸다.“똑바로 얘기할 수 없어? 나 임산부요, 말조심해.”“알았어. 존경하는 안유진 씨, 여기서 나가게 문 앞에서 비켜주시겠어요?”“김주혁, 비아냥거리지 마!”김주혁은 무시한 채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옆으로 당긴 뒤 문을 열고 나갔다.“김주혁!”“또 뭐야!!!”안유진은 삐죽거렸다.“왜 화를 내? 핸드폰 안 보여주니까 내가 의심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왜 무섭게 얘기해!”“할 말이나 해.”“갈 때 쓰레기 버려.”“그래.”김주혁이
안유진은 눈을 흘겼다. “내가 이 집 안 주인이야!”“법적으로는 안서희지.”“안서희가 발을 질질 끌면서 이혼을 거부해서 그런 거잖아!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이혼 서류 접수했지!”김주혁이 말했다.“이 물건들 말고 남기고 간 책들은?”“아, 책장에 있던 그 책들? 팔아버렸어.”“...뭐?!”“그 책들이 무겁고 공간도 많이 차지해서 이 물건들과 함께 버리려고 했는데 그럼 내가 직접 들고 내려가야 하잖아. 그래서 고물상 집으로 불러서 다 팔았어.”김주혁은 기가 막혔다.“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알아서 팔아버린 거야?”“너한테 왜 물어봐?” 안유진은 콧방귀를 뀌었다. “넌 어릴 때부터 내 말만 들었잖아?”“안유진!!!”딩동-초인종이 울리자 김주혁은 이를 악물고 걸어가 문을 열었다.고유현이었다.“좋은 아침이야, 형, 유진 누나!”김주혁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여기서 뭐 하는 거야?”“유진 누나한테 스피커 주려고!”김주혁은 안유진을 돌아보았다.“스피커?”안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나 태교 음악 들으려고.”고유현이 피식 웃었다.“유진 누나, 롹 음악으로 태교하려고? 애가 뱃속에서 드럼이라도 치면 어떡해.”안유진은 콧방귀를 뀌었다. “헛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가져와.”“알았어!”“잠깐.” 김주혁이 그를 말렸다. “가져가.”“왜?”김주혁이 말했다.“여긴 아파트고 위 아래층에 사람들 살고 있잖아. 빌라도 아니고 스피커로 롹 음악 틀면 층간소음이야.”고유현은 조금 망설였다.말하는 동안 안유진이 다가와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층간 소음은 무슨, 내 집에서 노래도 못 들어?”김주혁이 말했다.“스피커는 울림이 심해서 위 아래층 사람들이 다 들어.”“너무 시끄러우면 그냥 이사하면 되잖아.”“좀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어?”“내가 이성적이지 않다는 거야? 이성적일 뿐만 아니라 법에 대해 알려줄 수도 있어. 내 집에서 음악 듣는 건 죄가 아니야. 경찰서든 법원이든 얼마든지 가서 이르라고 해. 어차피 경찰도 날
“발코니에 있는 저 상자 내 차로 옮겨.”고유현은 말하며 소매를 걷어붙이기 시작했다. “알았어, 힘쓰는 일은 나한테 맡겨. 내가 제일 남아도는 게 체력이야!”“그리고... 스피커도 집에 두고 가지 말고 가져가.”고유현은 당황한 채 김주혁과 안유진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 김주혁의 말을 듣기로 하고 안유진을 설득했다.“유진 누나, 형 말이 일리가 있어. 우리 생각만 하고 이웃들한테 민폐가 되면 안 되잖아. 이렇게 해, 형한테 별장 사달라고 그래. 그럼 내가 별장에 스피커 가져갈게. 얼마든지 크게 틀어.”안유진은 싫은 기색이 역력한 채 여전히 꾸물거리고 있었고 김주혁은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유현아, 나 일하러 가야 하니까 서둘러.”“아, 알았어.”고유현은 발코니로 가서 세 번의 시도 끝에 상자를 들고 나갔다. “형, 내가 먼저 내려가서 아래층에서 기다릴게.”“그래.”김주혁은 대답하고는 고개를 돌려 안유진을 경고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임신했으면 얌전히 태교나 해, 자꾸 심술부리지 말고. 네 사촌 동생이 그렇게 큰 사고를 쳤는데 내가 뒤처리 다 하고 있잖아. 자꾸 선 넘으면 걔를 바로 경찰서에 보낼 거야.”사촌 동생 얘기에 안유진은 마침내 풀이 죽었다.“주혁아, 우재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그러자 김주혁은 곧장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나 일하러 갈 거야.”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고유현은 이미 차 옆에 상자를 놓아둔 상태였다.그는 차를 열어 상자를 트렁크에 넣었다.고유현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형, 박스에 죄다 여자 옷이던데?”김주혁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훑어봤다. “문제 있어?” 고유현은 두려움에 목을 움츠렸다.“아니, 아니야.”“앞으로 안유진이 너한테 부탁할 일이 생기면 나한테 먼저 말해.”“알았어, 형.”김주혁은 차 문을 열고 차에 올랐지만 바로 시동을 걸지 않고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드렸다.“유현아.”“형 왜 그래?”“내 이혼에 끼어들지 마.”“왜? 그 여자는 형 돈을 노리고 이혼을 질질 끌고 있
하지만 고유현은 오늘 계산을 잘못했다.불구덩이가 아니라 엄청난 미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미인은 의료종사자인지 헌혈 차 옆에서 바삐 맴돌고 있었고 하늘색 긴 드레스를 입었는데 날씬한 체형이 두드러지고 꼿꼿한 자세에서 우아한 분위기가 뿜어져 나왔다.그는 재빨리 사진을 찍어 단톡방에 보냈고 곧바로 거긴 난리가 났다.[대박, 저 여자 예쁜 것 같은데? 근데 왜 뒷모습만 있어?][그래, 유현아. 정면도 좀 찍어봐.]고유현이 크게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초상권은 지켜줘야지. 우리 유진 누나 법을 배운 여자라고. 유진 누나 말 안 들으면 주혁이 형이 때릴걸?]김주혁의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단톡방은 조용해졌다.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호르몬이 왕성한 젊은 남자들은 본능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유현아, 조심해. 뒷모습만 예쁘고 앞은 엉망일 수도 있어.][얼굴 사진 안 보냈다고 내가 못 본 게 아니거든? 멍청하긴.][어때, 얼굴도 예뻐?][내 생각엔...]고유현은 일부러 뜸을 들이면서 그들을 자극한 뒤 말했다.[끝판왕을 만난 것 같아.][끝판왕? 무슨 뜻이야?][10분만 기다려. 10분 뒤에 형수님 보러 오라고.][10분? 허세 적당히 부려!][이 고유현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고, 두고 봐!]고유현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채혈 차량이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사실 아무 대가 없이 헌혈하러 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안서희는 다리가 불편한 탓에 간호사 몇 명의 도움을 받아 테이블과 의자, 벤치 등을 정리한 뒤 옆에 앉아 책을 읽었다.그런데 갑자기 사람 모양의 그림자가 눈앞에 드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안서희는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물었다.“안녕하세요, 혹시 헌혈하러 오셨어요? 저쪽에 가서 먼저 접수하시고 저희 간호사가 검사를...”“예쁜 아가씨, 물어볼 게 있는데요.”고유현은 말하며 슬쩍 몸을 숙여 두 손으로 책상을 짚고 천천히 다가갔다.“무상으로 헌혈하면 정말 아무런 보상이 없나요?”고유현은 말을 하면서 아
그렇게 말하며 고유현은 옆에 있는 안서희를 가리켰고 이 선생님은 당황했다.“네?”“네는 무슨, 백 명이 한 사람당 400cc면 적지 않잖아요? 보통 헌혈하는 사람 100명 찾으려면 몇 번 나와야 해요? 연락처 하나로 그렇게 많은 피를 바꾸는 건데 합리한 거래 아닌가?”이 선생님은 다소 망설였다.“그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그게 뭐 어때서요? 안 되면 이백 명, 삼백 명도 괜찮아요.”이 선생님은 헛웃음을 지으며 안서희를 바라보았다.“안 선생님...”안서희가 물었다.“요즘 병원 혈액이 많이 부족하나요?”이 선생님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아주 부족해요. 요즘 산부인과에 수혈이 필요한 고위험 산모들이 몇 명 있는데 혹시나 수혈할 때 다른 병원에서 가져오다가 시간이 지체돼서 위험해질까 걱정이에요.”그녀는 몇몇 심각한 상태의 산모를 전부 담당하고 있었기에 잘 알았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고유현이 물었다.“어때요? 번호 하나에 500명, 거래할래요?”이 선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그건 규정에 어긋...”“해요.” 안서희는 고유현에게 말했다.“정말 오백 명 부를 수 있어요?”고유현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별거 아니죠.”“합법적인 건가요?”고유현은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날 뭐로 보는 거예요? 인신매매범? 걱정하지 마세요, 지극히 합법적인 일이고 헌혈하러 오는 사람들도 절대 자진해서 하는 거니까.”“좋아요, 그럼 지금 전화해요.”“그냥 불렀다가 사람 다 도착한 후에 그쪽이 말을 바꾸면 어떡해요?”안서희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테이블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 한 손으로 글씨를 쓰고 다른 손으로 글씨를 가린 뒤 다 쓴 종이를 책상 위에 거꾸로 올려놓았다.“제 연락처 적은 종이 여기 위에 둘게요. 우리 두 사람이 한 쪽씩 잡고 있다가 500명이 헌혈 끝내면 이 종이 가져가요.”고유현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
“이게 뭐예요?”“내 연락처요.”고유현은 종이를 거꾸로 뒤집고는 기가 막혀 웃음이 났다.“오픈 채팅?”안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전화번호나 카톡, 이메일은 없나요? 친구나 동료들과도 오픈 채팅으로 연락해요?”안서희는 가볍게 말했다.“어떤 연락처인지 말씀 안 하셨잖아요. 하지만 장담컨대 메시지 받으면 답장은 꼭 할게요.”...고유현은 화가 나서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김주혁은 이 불청객과의 대면이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고유현은 집안에 형이 한 명 있지만 그의 친형은 어렸을 때부터 외국에서 공부하느라 귀국한 적이 없었고 학창 시절부터 고유현은 그를 따라다니며 고유준보다 더 가깝게 지냈다.이 말을 들은 김주혁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네가 여자들한테 상처만 줬는데 이제야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났네. 잘됐어.”“뭐가 좋아? 날 갖고 노는 거잖아!”“그 사람 말도 틀린 건 없지. 오픈 채팅으로 연락할 수는 있잖아. 다만 그 확률이 너무 높지 않을 뿐이지.”“높지 않아? 차라리 바다에서 바늘을 찾으라고 해! 고씨 가문 도련님인 내가 여자 앞에서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안 되겠어, 형. 나 좀 도와줘.”김주혁은 팀장 몇 명이 보내온 보고서를 넘기며 대답했다.“내가 널 어떻게 도와줘, 그 여자를 납치해서 너희 집으로 보내?”“안 될 건 없지.”김주혁은 그를 노려보았다.“없기는 개뿔, 그건 범죄야!”법을 어긴다는 얘기가 나오자마자 고유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형은 진짜 유진 누나 골수팬이구나. 변호사라는 걸 알고 우리한테 나쁜 일은 전혀 못 하게 하네.”사인하던 김주혁의 펜이 멈칫했다.“...너희들이 불법적인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건 형으로서 내 책임이지 다른 누구와도 상관없어.”고유현은 피식 웃었다.“웃기네, 유진 누나에 대한 형의 마음을 우리 중에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형, 나 진짜 형이 부럽다.”“뭐가 부러워?”“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부러워. 난 연애를 많이 해봤지만 진심으로
“중학교 때 모습을 말하는 거야?”“아니, 아주 아주 어렸을 때. 아마 7, 8살 정도 됐을 때는 수줍음도 많고 아주 착한 아이였어. 처음 부모님과 함께 조상님께 제사 지내러 갔다가 가정부와 헤어지게 됐는데 그 숲에서 길을 찾도록 이끌어준 사람이 바로 걔였어.”그 말을 듣던 고유현은 두 눈을 크게 떴다.“유진 누나랑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네.”“응, 그때 평생 잘해주겠다고 맹세했지.”“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네.”“근데...”“근데 뭐?”김주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하지만 최근 며칠을 함께 보내면서 그는 친구와 연인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친구일 때는 자기 자리만 지키면서 그녀가 행복하면 자신도 행복했다.그녀도 지금처럼 손오공의 머리에 씌워진 금고아나 그의 목을 옥죄는 철조망처럼 숨이 막힐 정도로 그를 괴롭히지도 않았다....질식할 것 같았다.예전에는 퇴근 시간이 되면 안서희를 데리러 병원에 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안서희는 기뻐서 펄쩍펄쩍 뛰곤 했다.안서희는 다소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친해지고 나면 생각만큼 꽉 막힌 성격이 아니었고 오히려 재치 있는 언변을 가지고 있었다.시사나 가십거리, 주변 일화 등 어떤 이야기를 하든 항상 다채롭고 재미있게 풀어냈다.하지만 본업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의사처럼 엄격하고 진지한 태도로 돌아섰다.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임산부들을 늘 상대한 탓인지 그녀는 늘 상대를 배려하며 말했고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그의 삶에 나타난 여자는 많지 않았고 딱 이 둘이었기에 더 비교할 대상이 없었다.하지만 단순히 책임감과 선량함만 놓고 보더라도 안서희가 훨씬 나았고 안유진은...예전의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였다.“형, 아직 얘기 안 했어. 나 도와줄 거야, 말 거야?” 고유현은 초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다그쳤다.“형, 이 여자가 내 승부욕을 자극했어. 전에 여자들은 다 내 말이면 그대로 따라서 재미없었는데 갑자기 도발하는 상대를 만났으니까 절대 그냥
퇴근한 김주혁은 곧장 저택으로 돌아갔고 가정부가 문을 열어주었다.“도련님, 오셨어요?”“네, 엄마는 어디 계세요?”“여사님 지금 글 쓰고 계세요.”“...글이요?”“네.”김주혁은 서재로 갔지만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깜짝 놀랐다.한 달 넘게 보지 못한 어머니는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평소 자기 관리도 잘하고 건강하게 사셨던 어머니는 또래보다 젊어 보였다.하지만 지금 어머니는 심플한 잠옷을 입은 채 머리도 전보다 하얗게 세서 제법 초췌해 보였다.“엄마.”고개를 들어 아들인 것을 확인하고도 백금희는 반가운 기색 없이 덤덤하게 말했다.“여긴 왜 왔어?”“몸이 안 좋으시다고 해서 병원에 모셔다드리려고요.”백금희는 가볍게 웃더니 계속해서 글을 쓰면서 답했다.“괜찮아, 너 일하느라 바쁘잖아. 아줌마가 약 사줬고 먹고 많이 좋아졌어.”“아주머니가 무슨 약을 샀는데요, 어디 봐요.”“너 약에 대해 알아?”“...잘 몰라요.”“모르는데 봐도 무슨 소용이 있어?”김주혁은 어머니의 마음속에 분노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최근 들어 몸이 많이 쇠약해졌고 두통까지 느낀다는데 아마도 자신의 결혼 생활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 김주혁은 씁쓸함을 느꼈다.그가 다가가 말했다.“엄마, 제가 마사지해 드릴게요.”“그래.”그는 어머니 뒤에 서서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살살 문질렀다.“엄마 어때요? 좀 나아졌어요?”백금희는 눈을 감고 무기력하게 말했다.“네가 한의학까지 찾아가서 특별히 배운 마사지인데 안 좋을 리가 있겠어?”“...괜찮으면 됐어요. 앞으로 매일 찾아와서 마사지해 드릴게요.”“그럴 필요 없어, 날 위해 배운 것도 아니잖아.”김주혁의 손이 멈칫했다.백금희는 가볍게 그의 손을 떼어낸 뒤 문을 가리켰다.“됐어, 네 효심은 충분히 알았으니까 아무도 너 욕할 사람 없어. 이만 돌아가.”“여기가 내 집인데 어디로 돌아가요?”“안유진한테 가. 그 애 때문에 처자식도 버리고 죄까지 뒤집어썼잖아. 걔를 사랑한다며? 그럼 걔한테 가지 뭣 하러 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