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혁은 손이 허공에 굳어버린 채 한참을 머물다가 힘겹게 거두었다.“난 네가 다쳤는지 궁금해서.”“괜찮아요.”안서희가 말했다.“가서 안유진 씨나 챙겨요. 전 친구들 왔어요.”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권진아와 고유준이 도착했다.권진아는 안서희에게 다가가 부축해 주며 피를 흘리지는 않았는지 먼저 땅바닥을 보고 나서야 조금 안심했다.그녀는 위아래로 안서희를 살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안서희는 고개를 저었다. “진아야, 오늘 밥 못 먹을 것 같아.”“밥은 안 먹으면 그만이지... 네 말대로 오늘 이 시끄러운 곳에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안 그럼 이런 역겨운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응.”“걸을 수 있어?”“...조금 힘들어.”고유준은 그 말에 곧바로 쪼그려 앉아 그녀의 다리를 확인했다.오늘 그녀는 발목까지 오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치마가 흘러내리자 다리를 다 가려서 안쪽의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실례할게요.”고유준은 나지막이 속삭이며 손을 뻗어 치맛자락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아뇨.”안서희가 그를 말렸다.“일단 가요. 여기서 길 막으면 안 되잖아요.”고유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두 팔로 그녀를 안아 든 채 성큼성큼 인도로 향했다. 권진아도 잔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김주혁은 인도로 들어선 뒤에도 고유준이 안서희를 내려놓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낮은 목소리로 권진아에게 한마디 했고 권진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차장 방향으로 재빨리 달려가 이내 붉은 색 작은 승용차를 몰고 왔다.고유준은 안서희를 껴안고 조심스럽게 뒷좌석에 앉힌 뒤 자신도 덩달아 올라탔고 붉은색 승용차는 그렇게 현장을 떠났다.“저기 손님.” 웨이트리스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달려왔다.“사모님이 배가 아프다며 선생님을 불러달라고 하셨어요.”정신을 차린 김주혁은 웨이터 여러 명에 둘러싸여 소파에 앉아 있는 안유진을 돌아보았다.그녀는 배를 움켜잡은 채 물 한 잔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전혀 아픈 기색이 없
김주혁은 그 말에 의아함을 느끼며 안유진을 돌아보았다.“배 아프다고 하지 않았어? 가자, 내가 병원에 데려다줄게.”“주혁아!” 안유진은 신이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방금 들었어? 바로 룸 잡아준대. 게다가 오늘 음식값도 무료래.”김주혁은 차갑게 웃었다.“배 안 아파?”“조금 전까지 아팠는데 이제 좀 나아졌어.”“저 웨이터들한테 또 뭐라고 했어?”“아니, 그냥 법 좀 알려줬어. 내가 오늘 식당에서 무슨 일 생겼으면 영업할 생각 말라고. 인기 많은 식당이라 하루에 다녀가는 손님이 얼마나 많은데, 영업 정지되면 엄청난 손해를 볼 거야.”김주혁은 들뜬 표정으로 자신이 쟁취한 ‘권리’에 대해 늘어놓는 안유진을 보며 낯설게만 느껴졌다.“주혁아, 밥 먹으러 가자.”안유진이 말하며 팔짱을 끼려고 다가오자 김주혁은 그녀의 손을 피하며 말했다.“너 먹어, 난 입맛 없어.”“왜 그래?”안유진은 입을 삐죽거렸다.“안 선생님 보러 병원에 가고 싶어서 그러지? 그럴 줄 알았어, 너 아직도 그 여자 잊지 못한 거지. 휴대폰은 내가 포맷했지만 마음 속엔 아직 있는 거였어.”김주혁은 콧방귀를 뀌었다.“사람을 길로 끌고 간 건 너잖아. 당연히 내가 병원 가봐야 하는 것 아니야?”“하지만 이미 데려다준 사람 있잖아, 방금 못 봤어?”“그게 무슨 상관이야, 잘못했으면 책임져야지.”안유진의 얼굴이 싸늘해졌다.“난 그냥 겁 좀 줬을 뿐이야, 너랑 일찍 이혼했으면 좋겠어서. 그렇게까지 걱정할 일이야? 임산부인 나도 멀쩡한데 건강한 그 여자가 무슨 일이 있겠어?”옆줄에 있던 한 여자가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그 여자가 나서서 앞을 막아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지금 멀쩡히 서 있기나 했겠어요?”안유진은 즉시 뒤돌아보며 반박했다.“대체 어딜 봐서 그 여자가 내 앞을 막았다는 거야? 우리 둘은 같이 나갔어. 임신한 내가 걸음이 느려서 뒤에 있었을 뿐인데 그게 어떻게 그 여자가 막아준 게 돼? 당신 말에 법적 책임져야 할 거야!”여자 또한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난 잘못한 것 없어. 안서희가 마음 접지 못한 거야 지난번 병원에서도 잘 얘기하고 내가 배즙까지 보내줬는데 내 말을 못 알아듣잖아. 그래서 한 달 동안 이혼 미루고 오늘 다시 만나러 온 거고. 허, 내가 그 속셈 모를 줄 알고. 그런 여자는 질리도록 봤어! 제대로 혼내줘야지 안 그러면 날 만만하게 본다니까?”“그래.”김주혁은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넌 여기서 먹어. 난 갈 거니까.”“김주혁, 거기 서!”김주혁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바로 발걸음을 돌려 주차장으로 향했다.“김주혁! 한 발짝이라도 더 앞으로 가면 지금 당장 도로로 뛰어나가서 차에 치여 너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내가 감히 못 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이거 놔, 갈 거야!”안유진의 소란으로 인해 막 꺼지려던 소동이 다시 시작될 기미가 어렴풋이 보였고 옆에 있던 누군가가 설득했다.“잘생긴 남자분, 얼른 아내 좀 달래요. 원래 여자가 임신하면 감정 기복이 심해요.”“그래요, 당신 아이까지 임신했는데 그쪽 탓도 있어요. 안 그러면 여자가 왜 이렇게 사사건건 남에게 뺏길까 봐 불안해하겠어요?”“그래요, 그쪽이 평소에 다른 여자들과 거리를 두지 않은 거죠? 그래서 여자가 이렇게 불안해하는 거죠? 이성 친구, 여사친 이런 건 다 끊어요. 아내랑 아이로 충분하지 않아요?”“가끔 그런 여우들이 있어. 친구라는 이름으로 남자한테 들러붙으려는 것들. 말만 그럴듯하게 우린 친구야, 형제야 하면서 사실 속으로 딴 속셈을 차리고 있잖아.”“아, 그게 제일 싫어! 차라리 그냥 나도 좋아하니까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게 낫지, 굳이 친구라는 핑계 대면서 선 넘으려 하고 사람 위하는 척 입바른 소리만 해대는 여자는 정말 어이가 없어. 당신 아내가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해요, 그런 고단수 여우를 만났나 보지.”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렸고 뒤에서 안유진은 그가 마음이 변했고, 잡은 물고기라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20년 감정을 배신했다며 속상하게 울었다.김주혁은 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지
김주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래.”그렇게 말하며 그는 식당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잠깐만.” 안유진이 그를 불렀다.“하기 싫으면 하지 마.“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잖아.”“마지못해하는 거지, 진심으로 내 말 들어주는 게 아니잖아.”“그럼 내가 뭘 더 어떻게 해, 웃을까?” 김주혁은 손을 내밀어 주위를 가리켰다.“봐,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휴대폰 들고 우릴 찍고 있어. 이대로면 곧 너는 뉴스에서 날 보게 될 거야. 지난번 음주 운전 사건도 안 끝났는데 지금 내가 대놓고 돌아다니면서 식당에 들어가 봐, 곧 경찰이 날 찾아올걸? 넌 임산부라 경찰차 타고 집에 가면 되겠지만 난 경찰서 가서 경찰이랑 커피나 마시고 있겠지.”안유진은 살짝 당황했다.“난...”“한솔그룹에 요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네 사촌 동생 때문에 돈도 잃고, 큰 거래처도 잃고, 주가도 계속 내려가고 있어. 이 일까지 뉴스에 나오면 한솔그룹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아?”“주혁아.” 안유진이 다가와서 손을 잡으려 했지만 김주혁은 손을 뒤로 뺐다.“밥 먹겠다며? 가자, 룸에서 공짜로 음식을 먹는데 안 변호사님 고생하셨네. 오늘 덕 많이 보겠어.”“...”“가.”“...”“가자고!”안유진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눈시울을 붉혔다. “주혁아, 나 놀랐잖아!” 김주혁은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비웃었다.“안유진, 난 원래 이래. 네가 다정한 거 좋다고 해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됐지!”“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위해 참아주고 희생해야 하지 않아?”“그러는 넌, 날 사랑해?”안유진은 갑자기 차갑게 돌변했다.“너 지금 후회하는 거지?”김주혁은 부정하지 않았다.“우리 사이가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것 같아.”“너 후회하는 거야!”김주혁은 심호흡한 뒤 물었다.“밥 먹을 거야? 먹으면 들어가고 안 먹으면 집으로 가.”“김주혁, 20년 넘게 날 쫓아다닌 건 너야. 나 안유진은 너 없이도 살 수 있어!”얼마 떨어지
안서희는 센트럴 병원으로 보내졌다.담당 외과 의사는 평소 친분이 있던 유 교수였는데 진찰을 한 뒤 이렇게 말했다.“뼈에는 문제가 없으니 걱정 마요. 살짝 발목을 삐끗했고 찰과상이 있으니 혈액순환을 촉진하고 어혈을 제거하는 약을 처방해 줄게요. 일주일 동안 물에 닿지 않게 하세요.”“고마워요.”“별말씀을, 약 가지러 가야 하는데 누가 가요?”권진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고유준이 더 빨랐고 그가 권진아에게 말했다.“넌 안 닥터 곁에 있어, 내가 갈게.”안서희가 근무하던 병원이었기 때문에 외과 진료실로 가지 않고 곧장 그녀의 사무실로 향했다.권진아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그녀의 종아리에 난 찰과상을 보며 혀를 찼다.“너도 진짜, 그 여자가 죽겠다고 널 끌고 가는데 왜 살려줘?”안서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구할 생각 아니었어.”“구할 생각이 없었다고? 나 사람들한테 다 들었어. 너 건너편 갈 수 있었는데 그 여우 구하겠다고 앞을 막아섰다며.”“그 여자 앞을 막아선 게 아니라... 내 물건이 떨어져서.”“그렇게 중요한 물건이 뭐가 있어?”권진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그럴 땐 목숨을 구하는 게 우선이지 왜 다른 걸 신경 써?”안서희는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이거.”“이건...” 권진아는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리고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이거 왜 아직도 갖고 있는 거야?”“급하게 나오느라 주는 걸 깜빡했어.”안서희가 웃으며 말했다.“이 결혼반지 몇천만 원짜리야. 혼인신고하고 산 건데 공동 재산이라 안유진이 나보고 배상하라고 하면 난 배상할 여력이 없어.”권진아는 어이가 없었다.“그 여자한테 휘둘리지 마. 잃어버리더라도 뭐 어때? 법원에 고소하면 전처 결혼반지로 싸울 텐데 김주혁이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녀?”“더 이상 그 여자랑 엮이고 싶지 않아. 그냥 깨끗하게 헤어지고 아무 약점도 잡히고 싶지 않아.”권진아는 콧방귀를 뀌었다.“하긴, 오늘 그 난리를 부리는 걸 봐서 엮여서 좋을 일 하나 없더라. 그
시어머니와의 통화가 끝나기도 전에 휴대폰이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낯선 번호였다.급한 환자가 온 줄 알았던 안서희는 황급히 시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전화를 받았다.하지만 상대방의 말에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안서희 씨, 안녕하세요. 여긴 해성 경찰서입니다.”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안서희는 여전히 다리를 절고 있었다.한 경찰관이 그녀의 상태를 보고 얼른 달려와 부축했다.“왜 그러세요, 괜찮으세요?”“괜찮아요, 김주혁 씨 때문에 왔는데요.”“그쪽은...?”안서희는 현재 김주혁과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법적으로는 아직 이혼 절차를 밟지 않았기에 법의 보호를 받는 부부였지만 현실적으로 두 사람은 남남이나 다름없었다.얘기를 나누는데 김주혁이 옆방에서 남자 경찰관과 함께 나왔고 절뚝거리는 안서희를 보자 옆에 있던 여자 경찰이 물었다. “사건 신고하러 왔어요?”“김주혁 씨 석방 때문에 왔는데요.”남자 경찰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김주혁에게 물었다. “가족 맞죠? 동생이신가?”“...제 아내요.”남자 경찰관과 여자 경찰관 모두 약간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아까 저보고 돌려보내라고 한 임산부가 아내 아니었어요? 이분도?”안서희가 먼저 말했다.“제가 전처이고 그 임산부가 현재 아내죠.”“그래요?” 남자 경관은 헛웃음을 지었다.“그런데 석방은 반드시 가족이 와야 해요. 전처면 법적으로 관계가 없기 때문에 안 돼요.”“아직 이혼 접수 안 했어요.”남자 형사가 말했다.“이혼 접수 안 했으면 아직 부부죠.”여자 경찰은 더욱 경악했다.“이쪽에서 이혼도 안 했는데 저쪽에 애가 생겼다고?”안서희는 더 이상 설명하기 싫은 듯 한숨을 쉬었다.“실례지만 어디에 서명해야 하나요?”여경이 서류를 건넸다.“여기요.”안서희가 벽을 붙잡고 천천히 책상 쪽으로 걸어가자 김주혁은 무의식적으로 달려와 도와주려 했고 안서희는 정중히 거절했다. “괜찮아요, 김주혁 씨. 그냥 좀 다친 거라 혼자 걸을 수 있어요.” 안서희는
김주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그 여자를 구해줄 줄은 몰랐어.” 그가 말하자 안서희가 웃으며 답했다.“구해줄 생각은 아니었어요.”김주혁은 알아듣지 못했다.“넌 의사라 아무래도 아픈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미 뼛속 깊이 박혀 있는 거겠지. 우리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큰 태풍이 왔을 때도 넌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병원으로 달려갔잖아...”“잊어요, 왜 그런 쓸데없는 일을 기억해요.”“안 잊어.” 김주혁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오늘... 웃긴 모습을 보였네.”“안유진이요?”“...그래.”“안 웃겨요, 하나도.”김주혁은 입꼬리를 당기며 헛웃음을 지었다.“요즘 여기저기 창피당할 일이 많아.”안서희가 말했다.“당신 인생에 대해 내가 뭐라 말할 입장은 아니네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축복뿐이죠.”“무슨 축복?”“백년해로하고 일찍 아이 낳길 바라는 거?”김주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날 때리는 말 같은데.”“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알아, 너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날 의심하는 거야.”“20년 넘게 좋아했는데 뭘 의심할 게 있겠어요?”김주혁이 말했다.“그래, 20년 넘게 좋아했지만 실제로 만나고 나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안서희는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그건 당신 일이니까 난 할 말 없어요.”“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러던데 오늘 너 아니었으면 안유진이 차에 부딪혔을 거래. 미안하다는 말은 듣기 싫으니까 안 할게.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는 하고 싶어.”안서희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여기요.”“뭐야?”안서희는 결혼반지를 그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당신이 산 거라 난 가격 몰라요. 진아 말로는 해성에서 집 한 채 살 만큼 비싼 명품이라고 하더라고요.”김주혁의 펼친 손이 허공에서 얼어붙었다.“안서희...”“됐어요,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필요 없다면 이건 그냥 버릴게요. 제 생각 잘 알 거예요. 우린 부부도, 친구도 될 수 없고 그냥 남남으로 사는 게 제일
안서희가 말했다.“집을 사고 싶어요.”김주혁은 이해했다.지금 집을 사면 부부 공동 재산으로 간주할까 봐 두려운 거겠지.“...안유진이 했던 헛소리는 듣지 마.”“헛소리 아니죠. 저도 혼인법 찾아봤는데 사실이던데요.”김주혁이 말했다.“나는... 만나는 남자가 있는 줄 알았어.”“법적으로는 난 아직 결혼한 상태고 이혼 후 바로 찾아갈 첫사랑도 없어요.”김주혁은 또 한 번 쓴웃음을 지었다.“전에는 네가 유난히 부드럽고 여린 여자여서 지켜주고 비바람 막아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너도 꽤... 날카롭네.”“인정할게요, 비아냥거리는 거예요. 당신 첫사랑이 예의 바르고 도덕적인 사람이었다면 나도 아무 말 없이 그 사랑 응원했을 거예요. 날 괴롭히지 않고 한 번이라도 좋게 대화를 이어가면서 당신들 지난 사랑에 대해 말해줬으면 나도 원망하지 않고 알아서 물러났을 거라고요. 그런데 하필 날 제일 괴롭히는 방식을 택하잖아요. 우리가 헤어지기 전이든 후든 상관없이.”“사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어. 어렸을 때도 걔도 굉장히 상냥하고 마음이 따뜻한 아이였는데...”“예전에? 언제요?”“네 살 전에.”안서희는 어이가 없었다.“참도 예전이네요.”네 살이면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시기일 텐데.“사람이 크면서 변하는 건 당연하죠.”“그래, 네살 전엔 무척 귀여웠는데 나중에 한동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을 때 이미 7, 8살이었어. 그때부터 지금이랑 비슷해졌다. 다른 아이들이 교과서 들여다볼 때 걘 나무에 올라가서 부모님도 자주 학교에 오셨지.”안서희가 중얼거렸다.“두 사람 참 잘 어울리네요.”“왜 그런 말을 해?”“그쪽 동창들이 하는 말 들으니까 중학교 때 쉽게 다가가지 못할 사람이었다면서요.”김주혁은 조금 놀란 듯했다.“내 동창을 알아? 누구?”“최민재요. 지난번에 날 동창회에 데려갔을 때 얘기하는 거 들었어요.”김주혁은 묵인하듯 고개를 숙이고 입꼬리만 올렸다.“우리 학교에도 그런 일진이 있었는데 나름대로 원칙이 있어서 먼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