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초기화했어. 그럼 안서희에 대한 모든 흔적이 지워지잖아. 너도 걔에 관한 거 더는 볼 수 없고.”김주혁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내가 서희랑 연락했다는 증거 찾았어?”안유진이 가볍게 웃었다.“아니. 잘하고 있어. 아주 칭찬해.”“없다면서 왜 초기화한 건데?”“다 널 위해서 그런 거야.”안유진은 김주혁의 등을 토닥이면서 경험자처럼 말했다.“전에 네 휴대전화에 계속 내 사진을 남겨뒀었던 건 날 잊지 못해서 그런 거잖아. 그래서 안서희에 관한 거 다 지웠어. 혹시라도 다시 마음이 생길까 봐.”김주혁은 휴대전화를 잡고 홈 버튼을 여러 번 눌렀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끄면 초기화를 멈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꺼보기도 했지만 다시 켜보니 96%에서 97%, 98%, 99%까지 갔다가 100%가 되었다.초기화가 완료되었다!그는 휴대전화 화면에 뜬 알림을 보면서 절망에 빠진 듯 두 눈을 감았다. 그런 그와 달리 안유진은 무척이나 좋아했다.“앗싸, 드디어 됐어. 너무 늦어.”“유진아, 내 휴대전화에 서희에 관한 거 별로 없었어. 다 네 사진이고 우리 둘 대화 기록에 메시지뿐이야.”안유진이 어깨를 들먹였다.“괜찮아. 내가 이젠 널 받아줬으니까 그런 거로 날 그리워하지 않아도 돼.”“근데 업무에 관한 파일도 많았고 연락처도 있었다고. 그게 다 얼마나 중요한 건데!”안유진이 말했다.“그것도 괜찮아. 비서한테 시키면 되지.”“그걸 다시 찾자면 업무량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그러자 안유진이 코웃음을 쳤다.“비서한테 월급 주면서 일을 시키는데 뭐가 잘못됐어? 비서는 대표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김주혁은 어이가 없었다.“그래. 그걸 다 할 수 있다고 쳐도 시간이 필요할 거 아니야? 그것 때문에 다른 일이 지체되는 건?”“야근하면 되지. 야근해서도 안 되면 밤새워서라도 하게 해. 비서가 하는 일이 그거 아니야? 일을 제때 하지 못한 탓에 대표의 일에 영향 줘서 회사가 손해를 보면 월급을 깎고 보너스를 깎아. 깎이다 보면 아까워서라
안서희가 김주혁과 안유진의 소식을 다시 들었을 땐 한 달 후였다.권진아는 병원에 와서 접수까지 하고 안서희를 찾아왔다. 들어온 ‘환자’가 권진아인 걸 본 안서희는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너 임신했어?”권진아는 문을 닫고 배를 툭툭 치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러자 안서희가 더욱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진짜야?”“하하. 놀라지 마. 그런 거 아니야.”권진아는 안서희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말을 꺼냈다.“김주혁네 회사 큰 문제 생겼어.”안서희의 반응은 덤덤하기만 했다.“그걸 나한테 말해서 뭐 해? 난 사업에 관한 거 잘 몰라.”“왜 문제 생겼는지 알아?”안서희는 아무 말이 없었다.“안유진이 머리가 어떻게 됐는지 회사에 가서 한바탕 난리를 쳤대. 김주혁의 비서가 김주혁을 꼬셨다고 하면서. 지금 여기저기 소문이 다 퍼졌어.”안서희가 생각을 되짚어 보았다.“장 비서?”“성은 모르겠는데 그 비서가 여자 비서라는 것만 알아.”권진아가 이어 말했다.“장 비서라는 사람 김주혁이랑 ‘친구 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안서희가 고개를 내저었다.“장 비서님 결혼했고 애도 있어. 그리고 셋째를 임신했을 땐 나한테서 검사받기도 했다고. 장 비서님 됨됨이가 바른 사람이야. 부부 사이도 좋고 남편이 장 비서님을 많이 아끼셔.”“이럴 줄 알았어.”권진아는 예상이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안유진 그 여자 엄청 의심이 많구나? 그때 자기가 어떻게 그 자리에 앉은 거 아니까 다른 여자한테 똑같게 빼앗길까 봐 저렇게 경계하는 게 분명해. 어쩜 결혼해서 애까지 있는 비서도 가만두지 못하는지, 참.”“그래서 어떻게 됐어?”권진아가 두 손을 펼쳐 보였다.“임신한 몸으로 회사에서 울며불며 깽판 쳤는데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 봐 다들 부축하지도 못했대. 결국 그 장 비서가 알아서 사직서 내고 한 달 전에 퇴사했다고 들었어.”안서희는 장 비서를 만난 적이 있었다. 점잖고 일도 잘하는 여자였다. 김주혁과 오래전부터 함께 일했는지 안서희와 김주혁이 결혼할 때 이미 김주혁
김주혁과 안유진이 나중에 어떻게 사는지를 안서희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지금 갑자기 두 사람의 이름을 들어도 사실 별로 감정 기복이 없이 무덤덤하기만 했다.“잘 지내든 잘 지내지 못하든 그건 다 그 사람이 선택한 길이야. 그 사람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되지, 뭐.”“가치?”권진아가 코웃음을 쳤다.“김주혁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 최근에 적지 않은 일이 생기면서 김주혁 이 바닥에서 완전히 웃음거리가 됐어. 내가 천천히 얘기해줄게...”안서희가 손을 내밀었다.“그만. 일단 일부터 하고. 밖에 기다리는 환자가 많아.”권진아도 다른 환자의 진료 시간을 잡아먹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안서희에게 얘기하고 싶어서 입이 간지러워 일어서면서 말했다.“그럼 사무실에서 기다릴게.”그런데 오늘따라 환자가 특별히 더 많았다. 안서희는 7시가 넘어서야 사무실로 들어왔다. 권진아는 안서희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드디어 왔구나.”안서희는 허리가 아픈지 허리를 붙잡았다.“미안. 오래 기다렸지?”“미안하긴.”권진아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부축하면서 걱정스럽게 물었다.“왜 그래? 허리 아파?”“생리 왔어.”“예전에는 안 아팠잖아. 왜 갑자기...”권진아는 뭔가 알아차린 듯 멈칫했다.“아이 지운 후에 첫 생리야?”“응.”매번 아이 얘기를 꺼낼 때마다 안서희의 얼굴에 속상한 기색이 역력했다.권진아도 잘 알고 있었다. 아이를 지우는 게 가장 이성적인 선택이긴 하지만 그 아이는 안서희의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돼버렸다는 것을.“말해봐. 아까 하고 싶었던 얘기 많았잖아.”권진아는 걱정스럽게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았다.“진짜 괜찮아? 얘기하지 않아도 돼.”“괜찮아.”안서희는 허리를 곧게 펴고 의자에 기대앉았다.“쉬면서 들을게.”“그래도 되고.”권진아는 최근에 있었던 일을 안서희에게 다 말해주었다.“며칠 전에 한솔 그룹이 또 수십억 날렸대.”안서희가 물었다.“안유진의 사촌 동생이 실수해서?”권진아가 경멸스러운
“하하. 웃기지? 김주혁 같은 사람 처음 봤어. 어리석다고 하기엔 대기업을 아주 잘 경영하고 있고 똑똑하다고 하기엔 또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고.”안서희가 말했다.“사랑 때문이겠지.”권진아가 코웃음을 쳤다.“정말 이해가 안 가. 김주혁은 대체 안유진이 뭐가 좋다고 그래? 주권도 완전히 다 빼앗기고.”안서희의 평가는 이러했다. 한 사람은 매질하고 한 사람은 기꺼이 얻어맞았다.“아무튼 이 일 결국에는 김주혁이 책임지기로 했어. 네 전 시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나서 쓰러졌다고 하더라고. 이 바닥에 소문이 다 퍼졌어.”“그래...”“그게 끝이야? 기쁘지 않아? 가자, 나가서 제대로 축하해야지. 지난번에 그 식당도 먹어보지 못했잖아. 오늘 한 번 더 가자.”안서희가 고개를 내저었다.“거기 사람 너무 많아서 기다려야 하잖아. 그냥 아무거나 먹으면 돼.”권진아가 동의하지 않았다.“안 돼! 그 집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단 말이야.”안서희는 배가 아픈 게 많이 나은 듯했다. 권진아는 그녀가 괜찮아지자 차에 태운 후 직접 안전벨트까지 해줬다.안서희가 아직 눈살을 찌푸린 걸 보고는 배시시 웃으면서 두 눈을 깜빡였다.“걱정 마. 난 평생 연애 같은 거 안 하니까 이 조수석은 언제든지 앉아도 돼.”안서희가 실소를 터트렸다. 안유진에 관한 사소한 일까지 권진아에게 얘기한 게 살짝 후회되었다.권진아가 사람은 좋지만 가끔 독한 말을 내뱉었다. 안유진이 조수석에 앉은 그 일을 알게 된 후 매번 차에 탈 때면 조수석의 자리권을 한바탕 얘기하곤 했다. 그러고는 안유진을 욕하고 나서야 멈췄다.“안유진 그 여자는 정말 전형적인 여우야. 그때 물러서지 말고 끝까지 맞서 싸웠어야 했어.”안서희는 의자에 기댄 채 창밖을 내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맞서 싸운 다음에는? 주혁 씨는 분명 안유진을 감싸고 돌 텐데. 그럼 나만 화가 나고. 굳이 그럴 필요 있나?’권진아는 사정없이 욕했다.“있잖아. 무슨 일이든 좋게 좋게 해결하려고 하지 마. 그렇게
식당에 도착한 후 안서희와 권진아는 따로 움직였다. 안서희는 자리를 차지했고 권진아는 번호표를 뽑았다.이 가게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는데 인테리어가 유럽풍이었다.안서희는 이곳이 사진을 찍기 좋은 곳이라서 SNS에서 유명한 레스토랑이 되었기에 맛은 딱히 기대하지 않았다.중세기 유럽풍 건물에 바로크 지붕이었고 금빛이 반짝이는 게 연회를 여는 궁전을 방불케 했다.그리고 레스토랑 문 앞에 호박 마차가 있었는데 많은 여자애들이 예쁜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그런데 그때 호박 마차 주변에서 말다툼이 일어난 듯 사람들이 몰렸다.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안서희의 귀에 날카롭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애들은 다 이렇게 버르장머리가 없어? 임산부가 우선인 거 몰라?”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더욱 익숙한 모습의 그 사람이 서 있었다.못 본 사이 김주혁은 많이 수척해진 듯했다. 귀티가 나던 암밴드도 오늘은 착용하지 않았다. 안서희는 그의 옷소매를 힐끗 보았다. 늘어나서 착용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안유진이 앞에서 열 살 정도 돼 보이는 여자아이에게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김주혁은 뒤에서 난감해하며 안유진을 말렸다.“됐어. 그만해.”“말리지 마. 오늘 이 버르장머리 없는 애를 혼 좀 내야겠어. 노약자와 임산부는 취약 계층이라 어디서든 항상 양보해야 한다고.”여자아이가 울면서 말했다.“여긴 버스나 지하철이 아니잖아요. 사진을 찍는 곳일 뿐이라고요.”“공공장소면 취약 계층한테 양보해야 해. 그리고 왜 자꾸 우리 남편한테 달라붙어? 이미 가정이 있고 내가 임신한 게 안 보여?”“전 그런 적 없어요.”“없다고? 아까 우리 남편을 몰래 찍는 거 봤어.”“저...”여자아이는 법정에서 설전을 펼치던 변호사의 상대가 아예 아니었다. 단 몇 마디에 말문이 막혀 울면서 인파 속을 뛰쳐나갔다. 그러다가 실수로 안서희와 부딪히고 말았다.“죄송해요...”여자아이는 울면서 사과하고는 급하게 도망쳤다. 곧이어 김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기
듣고 있던 권진아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 남자한테 아내가 있는데도 그 여자는 사진을 찍어요?”“그 남자 아내 임신까지 했어요! 저기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남자는 번호표 받으러 갔어요. 그 아가씨는 아내가 있는 걸 몰랐고 알고 나서는 바로 사진 지우고 아내한테 사과까지 했어요. 태도가 정중한 걸 봐서 예의 바른 아가씨 같아요.”“그럼 끝난 거죠. 몰랐다잖아요. 알고 나서 바로 사과하고 사진도 지웠네요.”“네, 하지만 그 여자가 가만히 있지 않았죠. 대로변까지 쫓아가서 자기 남편 꼬드겼다고 욕설을 퍼붓더라고요. 사실 아가씨는 임산부 상대로 싸우기 싫어서 다른 쪽으로 가서 사진을 찍다가 잠잠해지길 기다리려고 했는데 그 여자는 자기가 임산부라는 걸 빌미로 굳이 그 여자가 약자를 괴롭힌다고 떠들어댔죠. 사실 줄 서는 것과 상관없이 그냥 아가씨를 욕할 핑계가 필요했던 거고 그렇게 욕해서 쫓아내려는 생각이었죠.”권진아는 그 말을 들으며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쫓아내요? 욕만 하면 됐지, 굳이 쫓아내기까지 해요?”여자는 어깨를 으쓱했다.“위기감을 느꼈나 보죠. 꽤 예쁘게 생긴 아가씨였는데... 엇, 그쪽이랑 좀 닮은 것 같아요.”여자는 안서희를 가리키며 말했다.“두 사람 다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에 머리는 포니테일로 단정하게 묶고 옷도 심플하게 입었어요... 언뜻 보면 그쪽이랑 많이 닮았네요.”그녀의 남자 친구도 옆에서 덧붙였다.“첫사랑 같은 얼굴이죠.”여자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네네네, 캠퍼스 여신 같은 느낌. 여보, 저 여자분이랑 닮지 않았어?”남자 친구는 안서희를 자세히 살펴본 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외모는 아닌데 분위기가 엄청 비슷하네요. 뒷모습만 보면 정말 닮았어요.”이 말을 들은 권진아는 웃음을 터뜨렸다.“갑자기 그 임산부가 이해되네요. 그 여자가 정말 내 친구처럼 예쁘면 남편 마음이 흔들릴까 봐 겁나는 것도 당연하죠.”안서희가 그녀를 툭 건드렸다.“적당히 해.”“난 진지해.”권진아가 주절주절 말
안서희는 권진아에게 거의 끌려가다시피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앞줄로 갔다.김주혁과 안유진을 본 권진아는 충격을 받은 듯 안서희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재밌는 구경이 저 두 사람이었어?”안서희는 할 말을 잃은 듯 고개를 끄덕였고 권진아는 차가운 비웃음을 터뜨렸다.“김주혁도 웃긴다. 20년 넘게 저 여자 좋아했다며? 왜 너랑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여자를 보고 움직이지도 못해?”안서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말할 틈이 없었다.안유진은 시종일관 기관총처럼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며 번호 확인을 담당하는 식당 종업원을 혼냈다.다행히 그 웨이터는 남자라서 울지 않았지만 옆에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여기 유명한 레스토랑이라 오기 전에 이미 사람 많이 올 걸 알아야 하지 않나? 줄 서기 싫으면 안 오면 되지, 굳이 새치기까지 하다니. 정말 웃겨.”“그러게. 임산부는 사회적인 약자라 보호받아야 한다지만 저렇게 가차 없이 욕설을 퍼붓는데 저게 어디 보호받아야 할 사람 모습인지.”“저런 사람들은 자기 능력 좀 있다고 다른 사람들 우습게 보잖아. 대중교통에서 젊은이들한테 자리 양보하라고 강요하는 노인들과 다를 게 뭐가 있어?”“어르신보다도 못해. 어르신은 그래도 정말 연세가 있긴 하잖아. 저 여자는 임신 한번 한 것 갖고 온 세상이 다 양보해 줘야 한다는 거야 뭐야. 아까 지나가는 아가씨도 한바탕 욕했잖아.”수군거리는 말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고 그 와중에 안유진이 소리치는 게 들렸다.“나는 임산부인데 당신들은 임산부 배려 안 해? 경고하는데 나 변호사야. 내가 당신네 가게에서 무슨 일 생기면 당신들이 책임져야 할 거야!”하도 욕설을 들어 이젠 익숙해진 웨이터가 조용히 설명했다.“저기요, 저기 기다리는 곳에 의자가 있어요. 제가 손님이 앉을 소파까지 내드렸는데 그걸로도 부족하세요?”“그냥 날 먼저 들여보내면 다 해결되지 않나?”“다들 줄을 서고 있어요. 저기 봐요,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분들, 어린 아기를 안고 있는 분들도
안유진은 차갑게 웃으며 조롱했다.“안 선생님, 포기 못 하면 못하는 거지, 진실을 말하는 게 수치스러운 것도 아닌데 왜 부정하세요?”“어딜 봐서 내가 포기 못 한 것처럼 보이죠?”안서희의 말투는 충동적이지 않았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말싸움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임수경에게 말했던 것처럼 상대가 자신을 괴롭혔을 때 결코 가만히 당하고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이는 안서희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거침없이 쏘아붙인 말이기도 했다.이전에도 대치한 적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예의 바르게 대했고 이렇게 직접적으로 맞받아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안유진은 잠시 얼어붙었다가 이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였다.“우리 한 달 넘게 못 봤죠? 전에 내 집 마련한다고 하시던데 집은 사셨어요?”“...”“아직 돈이 부족하죠?” 안유진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하긴. 안 선생님은 아직 나이도 젊으시고 내 집 마련에 필요한 돈이 한두푼이 아니라서 월급쟁이가 집 살 돈이 없는 것도 당연하죠. 주혁이랑 헤어지고 지낼 곳도 없는데 어디서 지내요? 호텔?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월급으로 호텔비가 감당돼요?”안서희가 차갑게 말했다.“전 친구가 있어서 안유진 씨가 걱정할 일은 아니네요. 길거리 노숙할 정도는 아니라서요.”“아, 친구 집에서 지내는 거였어요?” 안유진이 말했다.“그러면 남한테 빌붙어 사는 거네요. 왜요, 주혁이한테 불쌍한 척해서 돈이라도 좀 받아내려고요?”“걱정 마요. 집 사고 싶어도 내 노력으로 사는 거지, 그런 식으로 부자 될 생각은 없으니까.”“그럼 여긴 왜 왔어요, 주혁이랑 재회하려고?”“그만해!” 김주혁의 얼굴이 굳어지며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사람들도 많은데 그만하지 못해?”안유진은 곧바로 반박했다.“내 말이 틀렸어? 저 여자가 이런 레스토랑에 올 사람이야? 전에는 그렇게 고고한 척하더니 사실은 마음 편히 먹고 자는 생활이 그리웠던 것 아니냐고? 김주혁, 정신 차려. 저 여자는 너 노리고 온 거야.”“입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