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오후, 김주혁과 안유진이 함께 찾아왔다.안유진은 한 손으로 허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볼록 나온 배를 어루만졌다. 널찍하고 편한 임산부 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도 살이 오른 모습이었다.임신하면 얼굴이 붓기 마련이었다. 원래 V라인이었던 안유진은 살이 오르니까 오히려 더 나아 보였다. 안색도 좋은 걸 보니 옆에서 잘 생겨준 모양이다.김주혁이 옆에서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그녀를 감싸주었고 왼손에는 여자 가방을 들고 있었다.그리고 보냉백도 들고 있었는데 도시락통 같은 게 들어있었다.임수경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면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어제 왔는데 오늘 왜 또 왔대요...”안서희는 병원에 온 그들을 내쫓을 수가 없었다. 이미 온 이상 상황에 맞춰 대책을 세우면 되었다.안유진은 배를 잡고 안서희의 앞에 앉더니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오랜만이에요, 선생님.”안서희는 그녀와 김주혁을 번갈아 보았다. 김주혁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컴퓨터에서 안유진의 진료 차트를 꺼냈다.“어디 안 좋아요?”“아니요. 주혁이가 잘 챙겨줘서 괜찮아요. 어제저녁에 검사했는데 나랑 아기 다 건강하대요.”안서희가 피식 웃었다.‘멀쩡한데 왜 왔대? 자랑하려고?’안유진이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선생님, 오늘은 사과하러 왔어요.”안서희가 문 쪽을 가리켰다.“사과는 필요 없고 불편한 데 없으면 나가주세요. 밖에 다른 산모들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다른 사람들 시간 지체해선 안 되죠.”“주혁이한테 접수하라고 했어요. 이거 영수증이에요.”“접수만 하고 검사는 받지 않고.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안유진 씨?”“선생님, 날 너무 적대하지 말아요. 선생님이랑 주혁이는 어울리지 않았을 뿐이에요. 그게 어디 내 탓인가요?”안서희는 피곤이 밀려와 김주혁을 보며 말했다.“계속 빙빙 돌리기만 하는데 주혁 씨가 말할래요?”김주혁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서희야, 난...”“내가 얘기할게요.”안유진이 가볍게 말했
안유진은 김주혁이 더는 말이 없자 다시 돌아앉아 안서희에게 말했다.“선생님,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 주혁이는 어릴 적부터 항상 그랬어요. 남을 걱정하기 좋아해서 오해도 많이 받았거든요. 내가 집에 가서 얘기 잘할 테니까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 주세요.”“오해요?”“주혁이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하더라고요.”안유진이 더 환하게 웃었다.“예전에 학교 다닐 때도 그런 적이 있었어요. 어떤 여학생이 우산이 없어서 주혁이가 우산을 줬는데 그 여학생은 주혁이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했지 뭐예요? 그 바람에 그 여학생이 아까운 청춘을 몇 년이나 낭비했어요. 좋은 마음으로 챙겨줬는데 결국에는 나쁜 결과뿐이고. 안 그래요, 선생님?”안서희가 고개를 숙이고 코웃음을 쳤다. 안유진이 또 이어서 물었다.“선생님,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죠?”“네.”“그럼 다행이고요. 역시 똑똑한 사람이랑 말이 잘 통해요. 한번 말하면 딱 알아들으니까.”안서희가 피식 웃었다.“얘기 다 끝났나요?”“네. 거의요.”“얘기 끝났으면 그만 가세요. 자, 다음 산모분.”안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도시락통을 안서희 앞으로 밀었다.“선생님, 따뜻할 때 얼른 마셔요. 식으면 효과 없어요.”안서희가 싸늘하게 말했다.“주혁 씨한테 언제 이혼할 건지 물어봐 줄래요? 얼른 사인해서 이혼절차 마무리하자고 해요.”안유진은 억울한 척 설명했다.“오해했어요, 선생님. 정말 단지 그냥 선생님 가져다주려고 온 거예요. 이혼을 다그치려는 뜻은 없었어요.”“그런 뜻인지 아닌지 유진 씨는 잘 알겠죠.”김주혁이 안유진을 잡아당겼다.“가자.”안유진이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자리에 앉자 안서희가 눈썹을 치켜세웠다.“할 얘기 더 남았나요?”안유진은 웃으면서 배를 가볍게 어루만졌다.“선생님 카톡 추가해도 될까요?”“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엄마는 처음이라서 그래요. 이 아이 전에도 큰일이 날 뻔해서 무섭단 말이에요. 혹시 무슨 상황이 생기면 바로 카톡으로 연락하고 좋잖아요.”안서희
“알았어요.”안서희는 큐알코드를 스캔하여 안유진의 카톡을 추가했다.프로필 사진이 김주혁의 사진이었다. 교복을 입고 있어 그런지 지금처럼 그리 성숙돼 보이지 않았고 풋풋한 소년미가 넘쳤다. 그런데 귀티는 여전했다.안서희의 카톡 닉네임은 그리움이었다.‘주혁 씨를 그리워한다는 건가?’안서희는 휴대전화 화면을 끄고 다시 가운 주머니에 넣었다. 안유진은 맞은 편에 앉아 안서희가 본 걸 확인하고는 웃으며 말했다.“주혁이 프로필 사진도 나예요. 커플 프로필 사진이 예쁜 게 없어서 서로의 사진을 하는 게 낫겠더라고요. 오랜만에 만나면 자꾸 상대가 보고 싶고 그러잖아요. 나랑 주혁이 이젠 30살인데도 같이 있을 땐 유치하게...”더는 참다못한 김주혁이 안유진을 잡아당겼다.“됐어. 그만 가자.”“잠깐만요.”안서희가 부르자 김주혁이 발걸음을 멈추고 달리 방법이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미안해, 서희야.”“미안해할 거 없어요. 이거 가져가요.”안서희는 테이블 위의 도시락통을 가리켰다.“병원에 환자가 주는 걸 함부로 받아선 안 된다는 규정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피해 주지 말고 가져가요.”김주혁이 머뭇거리는 사이 임수경은 도시락통을 김주혁에게 건네고는 진료실을 나가 줄을 서 있는 임산부에게 말했다.“그쪽 차례예요. 들어가 봐요.”그다음 임산부가 들어간 후 임수경은 문을 쾅 하고 닫았다.안서희는 그런 그녀를 힐끗거렸고 임수경이 문 쪽을 향해 눈을 희번덕거렸다.“미친 거 아니에요? 요즘 내연녀들은 다 저렇게 건방져요?”“콜록콜록.”안서희가 마른기침하며 귀띔했다.“수경 씨, 산모 있어요.”임수경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지만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되레 검사받으러 온 산모가 웃으면서 말했다.“산부인과 의사들은 어이없는 일 많이 보죠?”임수경의 두 눈이 반짝였다.“네! 산부인과 진료실이 막장 드라마 못지않게 난장판이에요.”“그만 해요, 수경 씨.”임수경이 입을 삐죽거렸다.“제가 뭐 틀린 말 했나요.”눈 깜짝할 사이에 바쁜 오후가 지났다. 요
안유진이 준비하고 온 건 물론이고 아주 단단히 준비하고 왔다. 카톡을 추가하자마자 보란 듯이 계속 올렸다.그녀가 SNS를 보는 몇 분 사이에도 안유진은 몇 개나 올렸다. 글은 없었고 그냥 사진뿐이었다.웨딩드레스, 한복, 청첩장 사진이 있었고 마지막에 이런 글을 보탰다.[골라주세요. 눈이 다 어지러워서 고르지 못하겠어요.]안서희는 결국 그녀의 SNS를 보지 않는 거로 설정해놓았다.권진아는 목적지에 도착한 후 차를 세웠다. 핫한 가게라 그런지 7시가 안 됐는데도 밖에 줄을 선 사람이 매우 많았다.그녀는 자리를 잡고 안서희에게 앉으라고 했다.“줄 선 거 보니까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옆에 슈퍼에 가서 빵 같은 거 사 올게. 배고프니까 뭐라도 먹어야지.”안서희가 말했다.“굳이 이 고생을 해야 해? 다른 식당에 가서 먹어도 되는데.”“그거랑 다르지.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갔다 오게.”권진아는 바로 휙 가버렸다. 달리 방법이 없었던 안서희는 결국 그곳에서 기다렸다.안서희는 평소 게임도 별로 하지 않았고 휴대전화를 봐도 뉴스나 보는 정도였다.그런데 그때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렸는데 임수경의 전화였다.“선생님, 집에 가셨어요? 병원에 다시 들어오세요. 큰일 났어요.”안서희가 병원에 달려갔을 때 문 앞에 익숙한 한 사람이 있었다.김주혁의 차가 병원 문 앞의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계속 그 자리, 그 사람이었다.하늘이 어둑해지면서 가로등이 밝아졌다. 김주혁은 가로등 밑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안서희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등이 좀 구분 것 같았다.김주혁도 안서희를 발견했는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인 걸 확인하고는 재빨리 담배를 끄고 다가갔다.안서희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병원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김주혁의 발걸음이 빨라 그녀를 쉽게 잡았다.“안서희!”담배를 얼마나 많이 피웠는지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고 술 냄새도 살짝 풍겨왔다.“술 마셨어요?”김주혁이 침을 꿀꺽 삼켰다.“술자리가 있
김주혁이 저녁 11시가 넘을 때까지 기다렸지만 안서희는 계속 나오지 않았다. 그가 한 간호사를 잡고 물었다.“산부인과 안서희 선생님 아직 병원에 있어요?”그러자 간호사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안 선생님 진작 퇴근하셨는데요?”“급한 환자가 있어서 병원에 온 거 아니었어요?”“아, 유산하신 그분이요?”간호사가 계속하여 말했다.“출혈 멈춰서 지금 중환자실로 옮겼고 중환자실 선생님이 계시니까 안 선생님은 퇴근하셨어요.”“문 앞에서 계속 기다렸는데 나오는 거 못 봤는데요?”“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아, 병원에 옆문이 있어요. 옆문으로 나갔나 보죠.”안서희가 진작 퇴근했다고 했다. 김주혁을 피하려고 일부러 옆문으로 돌아갔다.김주혁이 씁쓸하게 웃으며 두 눈을 감았다. 간호사가 그에게 물었다.“안 선생님은 무슨 일로 찾으시죠?”“그게...”김주혁이 멈칫하다가 물었다.“방금 임산부가 유산해서 큰 출혈이 생겨서 안서희 씨가 왔다고 했죠?”“네.”“유산하면 큰 출혈이 생길 가능성이 큰가요?”“크진 않아요. 사람마다 달라요.”“엄청... 아프겠죠?”간호사가 대답했다.“당연하죠. 살이 배 속에서 떨어져 나가는데 아프지 않을 리가 없죠.”김주혁은 무슨 정신으로 운전하여 집으로 왔는지도 잘 몰랐다. 돌아오는 길 내내 간호사의 그 한마디가 귓속에 맴돌았다.“살이 배 속에서 떨어져 나가는데 아프지 않을 리가 없죠.”산에서 병원까지 달려온 그날이 문득 떠올랐다. 안서희는 널찍한 환자복을 입고 있었는데 얼굴에 핏기라곤 전혀 없었다. 만약 권진아가 부축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어찌 아프지 않겠는가?안서희의 모습만 봐도 말할 힘이 없을 정도로 아프다는 걸 알 수 있었다.김주혁이 지문을 찍고 문을 열었다. 집 안에서 기름진 배달 음식 냄새가 확 풍겨왔다.안유진이 치킨을 먹으면서 소파에 앉아 TV 예능을 보며 크게 웃고 있었다.“왜 이렇게 늦었어?”그녀가 언짢아하며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안서희 씨가 또 너한테 연락했어?
안유진은 여전히 믿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휴대전화 줘.”김주혁이 두 눈을 감았다.“억지 좀 부리지 마, 응?”“달라고!”김주혁이 꿈쩍도 하지 않자 안유진은 바지 주머니에서 직접 꺼내려 했다. 김주혁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임산부라 힘을 세게 주지 못했다. 결국 안유진은 뜻대로 기름 범벅인 손으로 그의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보고 있어. 샤워하고 올게.”김주혁은 곧장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하니 술기운도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았다.그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미칠 지경이었다.오늘 전까지만 해도 안서희가 잘 살기를 진심으로 바랐었다. 어쨌거나 그가 잘못했으니까.그런데 아까 병원에서 안색도 밝고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병원으로 달려가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마치 이혼한 적이 없는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한 달 사이 안서희는 아이를 지웠고 이혼도 했으며 심지어 몸조리까지 했다. 권진아의 SNS를 통하여 대충 알게 되었는데 아이를 지우면서 몸이 많이 상한 바람에 가끔 배가 아프기도 했었다.그런데 최근 몇 번 만났을 때는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낮에는 다정하게 진료도 보곤 했다. 안유진이 찾아와서 귀찮게 굴어도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달인 배를 다시 돌려보내는 여유를 보여줬다. 그리고 저녁에 갑자기 불려와 야근해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한 달 전의 그녀와 비교하면 훨씬 더 덤덤하고 차분했다.김주혁은 이런 자신이 너무 모순적이라 생각했다. 안서희가 이혼의 아픔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길 바라면서도 잘 지내는 그녀를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오늘 오후 식사 자리가 있어서 술을 조금 마셨다. 원래는 대리운전을 불러 집으로 올 생각이었지만 알코올 탓인지 저도 모르게 병원의 주차장까지 와서 안서희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주차장에 잠깐 서 있다가 가로등이 켜진 걸 보고서야 시간이 늦었다는 걸 알아챘다. 이 시간이면 안서희가 진작 퇴근하고 집에 간 시간이었다.그러다가 또 만난 건 완전히 우연이었다
김주혁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지도 같았는데 그의 휴대전화가 아니라 안유진의 것이었다.그가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이게 뭐야?”“오늘 네 행적!”김주혁은 놀란 나머지 자리에 굳어버렸다.“내 휴대전화에 위치추적 앱 깔았어?”“흥.”안유진이 그를 째려보았다.“내가 모를 줄 알았어? 네가 퇴근하면 계속 센트럴 병원으로 가는 거? 거기 가서 뭐 해? 네가 계속 이러면 안서희가 포기하지 않는다고. 알아?”김주혁은 살짝 화가 났다.“유진아, 네가 원하는 거 최대한 맞춰주려고 노력하고 있어. 근데 나도 프라이버시가 있다고.”“프라이버시는 무슨. 우리 같이 살고 있잖아. 네가 이혼하면 우리가 결혼도 할 거고. 부부 사이에 무슨 프라이버시야? 혹시 바람피우고 싶어서 이래?”그러자 김주혁이 갑자기 웃었다.“난 이미 바람피웠어.”안유진이 입을 삐죽거렸다.“우린 바람 아니야. 진짜 사랑이라고.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내연녀야. 그리고 두 사람의 결혼은 결혼도 아니야. 기껏해야 같이 사는 동거인 정도지.”김주혁은 답답한지 한숨을 내쉬었다.“넌 혼인법을 그렇게 배웠어?”안유진은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이건 구체적인 예시로 분석한 거야.”“마음대로 해.”김주혁이 물었다.“내 휴대전화는?”“이따가 줄게.”“어디 뒀어?”“이따가 준다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안유진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그를 째려보았다.“경고하는데 앞으로 다신 안서희를 만나지 마. 알았어?”김주혁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답답한 말투로 말했다.“서희한테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서희한테 미안한 짓을 한 건 우리야. 그리고 아이도 금방 지웠는데...”“아이 지웠는데 뭐? 우리가 뭐 목에 칼 대고 지우라고 협박이라도 했어? 안서희가 혼자 결정해서 지운 거잖아.”김주혁이 말했다.“만약 아이를 지우지 않았다면? 9개월 후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 데리고 우리 집에 들어가서 살 수 있어?”“꿈 깨라고 해!”안유진이 눈을 희번덕거렸다.“애를 낳아서 김씨 가문의 재산
“아, 초기화했어. 그럼 안서희에 대한 모든 흔적이 지워지잖아. 너도 걔에 관한 거 더는 볼 수 없고.”김주혁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내가 서희랑 연락했다는 증거 찾았어?”안유진이 가볍게 웃었다.“아니. 잘하고 있어. 아주 칭찬해.”“없다면서 왜 초기화한 건데?”“다 널 위해서 그런 거야.”안유진은 김주혁의 등을 토닥이면서 경험자처럼 말했다.“전에 네 휴대전화에 계속 내 사진을 남겨뒀었던 건 날 잊지 못해서 그런 거잖아. 그래서 안서희에 관한 거 다 지웠어. 혹시라도 다시 마음이 생길까 봐.”김주혁은 휴대전화를 잡고 홈 버튼을 여러 번 눌렀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끄면 초기화를 멈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꺼보기도 했지만 다시 켜보니 96%에서 97%, 98%, 99%까지 갔다가 100%가 되었다.초기화가 완료되었다!그는 휴대전화 화면에 뜬 알림을 보면서 절망에 빠진 듯 두 눈을 감았다. 그런 그와 달리 안유진은 무척이나 좋아했다.“앗싸, 드디어 됐어. 너무 늦어.”“유진아, 내 휴대전화에 서희에 관한 거 별로 없었어. 다 네 사진이고 우리 둘 대화 기록에 메시지뿐이야.”안유진이 어깨를 들먹였다.“괜찮아. 내가 이젠 널 받아줬으니까 그런 거로 날 그리워하지 않아도 돼.”“근데 업무에 관한 파일도 많았고 연락처도 있었다고. 그게 다 얼마나 중요한 건데!”안유진이 말했다.“그것도 괜찮아. 비서한테 시키면 되지.”“그걸 다시 찾자면 업무량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그러자 안유진이 코웃음을 쳤다.“비서한테 월급 주면서 일을 시키는데 뭐가 잘못됐어? 비서는 대표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김주혁은 어이가 없었다.“그래. 그걸 다 할 수 있다고 쳐도 시간이 필요할 거 아니야? 그것 때문에 다른 일이 지체되는 건?”“야근하면 되지. 야근해서도 안 되면 밤새워서라도 하게 해. 비서가 하는 일이 그거 아니야? 일을 제때 하지 못한 탓에 대표의 일에 영향 줘서 회사가 손해를 보면 월급을 깎고 보너스를 깎아. 깎이다 보면 아까워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