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아는 얼떨결에 그 남자에게 끌려서 소파 쪽으로 가더니 앞에 내민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한편 그 남자는 마침 권진아의 자리, 바로 안서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한편 매너를 지키며 일정한 거리를 두었고 이에 안서희도 썩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서로의 말소리가 적당히 들리는 딱 그 정도의 거리였다.노래가 시작되고 쓸쓸한 이별 장면의 뮤비가 재생됐다.한때 이별의 잔잔한 미련을 담은 노래, 아직도 여전히 노래방 애창곡으로 꼽히는 그 유명한 노래였다.안서희는 눈에 띄게 어여쁜 외모는 아니지만 참하고 단아한 모습이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고 우아하면서도 청순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권진아는 그녀를 보면 덩달아 마음이 차분해지고 온화해지는 기분이라고 했었다.“자, 시작해요...”안서희는 마이크를 잡고 리듬을 타는 그 남자와 함께 천천히 노래를 불렀다.“아직도 너의 소리를 듣고, 아직도 너의 손길을 느껴, 오늘도 난 너의 흔적 안에 살았죠... 길을 지나는 어떤 낯선 이의 모습 속에도, 바람을 타고 쓸쓸히 춤추는 저 낙엽 위에도, 뺨을 스치는 어느 저녁의 그 공기 속에도,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에 네가 있어 그래...”남자 가수의 노래라 음역이 낮은 덕인지 안서희의 목소리와 유난히 잘 어울리고 듣는 이에게 매우 편안하고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이때 옆에서 누군가가 권진아의 팔을 툭툭 쳤다.“진아 뭐야? 네 친구 노래 엄청 잘하잖아. 못 부르긴?”권진아도 한창 수박을 한 입 깨물다가 그녀의 노랫소리를 듣고 멍하니 넋을 놓았다.“나도 몰랐어. 서희 노래방 온 적이 없어서 나도 지금 처음 듣거든.”“야 뻥 치지 마. 다들 20대 중반인데 노래방이 처음이라고?”“진짜라니까. 널 속여서 뭐해? 우리 서희는 그 귀하다는 의느님이야. 의대 다니랴, 병원 출근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쳐요. 어디 너처럼 종일 빈둥거리는 줄 알아?”상대가 살짝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장담하는데 서희 씨 무조건 와봤어. 단지 너랑 안 온 것뿐
안서희는 머쓱한 듯 웃으며 티슈를 건네받았다.“고마워요.”“가사 참 좋죠?”“네, 그러네요.”“이래서 옛날 노래가 좋은가 봐요. 늘 마음속 깊이 담아뒀던 그 감정을 끌어내주고 저도 몰래 눈물이 흐르죠.”안서희는 순간 마음에 따뜻한 전류가 흘렀다. 고유준은 지금 그녀가 울음을 터트린 걸 난처해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수습해주고 있었다.실례를 범한 건 옛날 노래의 짙은 호소력 때문이라고 책임을 돌리고 있었다.“만나서 반가워요, 고유준이에요. 저랑 진아는 집안 대대로 친하게 지내왔어요.”“아 네. 저는 안서희예요.”“얘기 많이 들었어요. 센트럴 병원의 최연소 산부인과 전문의이자 H시 의료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분이시죠.”안서희는 그의 말을 듣고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유준 씨도 의사에요?”고유준이 대답했다.“네. 다만 저는 해외에서 의대 나왔고 올해 막 귀국했어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동종업계였네요.”“그러게요. 그럼 우리 편하게 말 놓을까? 노래 너무 잘 들었어.”고유준이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허례허식이 아니라 진짜 잘 불렀어. 네 목소리가 이 노래랑 완전 찰떡궁합인 것 같아.”“그래? 고마워. 아마도... 감정 몰입이 돼버렸나 봐.”이때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툭 걸쳤다. 화들짝 놀란 안서희가 고개를 돌리자 권진아가 한창 뒤에 서 있었다.그녀는 원래 가운데 자리에 앉아 수박을 먹고 있었는데 언제 이리로 달려온 걸까?권진아도 안서희의 눈빛을 마주하고 배시시 웃었다.“무슨 얘기하고 있었어?”이에 고유준이 대답했다.“노래 가사랑 일적인 얘기 중이었어.”“서로 꽤 잘 통하나 봐. 유준이 너 말수 적은 거로 아는데 오늘은 좀 한다?”안서희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 말뜻을 이해 못할 리가 없다.그녀는 권진아의 손등을 두드리며 미간을 찌푸리고 눈치를 줬다.“함부로 나오지 말자.”이에 권진아가 아무렇지 않은 척 되물었다.“내가 뭘?”“그 입 다물고 있어 제발 좀.”권진아는 입술을 삐죽거렸
고유준이 어깨를 들먹였다.“아쉽게도 귀국할 때 짐을 잃어버려서 가져오지 못했어.”권진아가 다급하게 물었다.“그럼 그 연애편지에 뭐라고 적혀있었는지 기억나?”“오래전인데 기억 날 리가 있겠어?”안서희가 말했다.“그리고 연애편지니까 당연히 고백하는 내용이겠지. 아니면 좋은 시 같은 게 있을 수도 있고.”“유준아, 네가 직접 말해봐.”가십거리가 노래보다 훨씬 더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권진아는 사람들을 일고여덟 명 정도 불러왔다. 과일을 먹던 사람, 술을 마시던 사람, 노래를 부르던 사람까지 전부 몰려들었다.사람들에게 물 샐틈 없이 둘러싸인 안서희는 마치 동물원의 동물이 된 것만 같았다.고유준이 덤덤하게 말했다.“그 연애편지 똑똑히 기억나. 첫마디가 바로...”그는 잠깐 멈칫하다가 계속 말했다.“남대문이 열렸는데.”현장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고유준이 또 말했다.“커 보여였어.”쨍그랑.누가 걷어찼는지 테이블 위의 과일 접시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유리그릇이 산산조각이 났고 과일도 여기저기 널브러졌다.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권진아가 안서희의 어깨를 힘껏 내리쳤다. 그러더니 마치 자식을 다 키운 어머니처럼 뿌듯해했다.“안서희, 너 대박인데?”고유준이 한마디 보충했다.“글재주가 있더라고. 라임도 맞췄던 것 같고.”안서희의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목까지 다 빨개졌다.“아니, 그게 아니라.”안서희가 다급하게 설명했다.“내가 쓴 게 아니라 내 룸메이트가 쓴 거야. 그때 걔가 어떤 사람을 좋아했었는데 그게 너인 줄 몰랐어. 그냥 나한테 가리키니까 연애편지를 네 폴더 안에 넣었던 거야. 근데... 그때 주변에 사람이 없었는데 내가 넣은 거 어떻게 알았어?”고유준의 두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하늘의 뜻인가 봐.”허무맹랑한 해명에 룸 안의 분위기가 다시 설렘으로 변했다.안서희는 지금까지 이런 상황을 마주해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남학생들이 고백한 적은 있었지만 다 학교를 다닐 때라 거의 무시해도 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녀를 좋아한
안서희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이쪽 경험이 부족했던 탓에 얼버무리다가 그냥 웃어 보였다.“아니야, 괜찮아.”“그래서 넌?”“내가 뭐?”“어떤 스타일 좋아해?”말문이 막힌 안서희 대신 권진아가 대신 대답했다.“다정하고 매너 있고 또 집안 조건이 괜찮아야 해. 자기가 하는 일이 있고 얼굴도 잘생기면 더 좋고.”권진아가 얘기한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사람은 김주혁이었다.그 얘기를 들은 고유준이 덤덤하게 웃었다.“잘생긴 거 말고 다른 건 내가 다 만족하는 것 같은데? 물론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르겠지만.”권진아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을 삐죽거렸다.“너도 잘생기긴 했어. 조금 다른 잘생김이야.”고유준이 그녀의 뜻을 알아챘다.“서희 씨... 좋아하는 사람 있어?”그때 뒤에서 누군가 고개를 빼꼼 내밀면서 가볍게 말했다.“이미 헤어졌어.”안서희가 권진아를 쳐다보자 권진아는 바로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내가 말한 거 아니야. 진짜로.”그러고는 한 남자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입 좀 다물라고 하니까 왜 이렇게 사람 말을 못 알아들어? 사과해!”남자는 고개를 움켜쥐고 깨갱 했다.“미안, 미안.”고유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급할 거 없어. 헤어지는 것도 과정이 필요하니까. 일단 자신부터 챙기고 그다음에 다른 사람 만나든 해야지.”안서희는 고유준이 참 정서가 안정된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만약 진짜로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칠팔 년 동안 짝사랑만 하고 전혀 티를 내지 않은 건 물론이고 매너도 있고 다정한 사람이라면 멘탈이 엄청 강한 사람일 것이다.안서희는 또 저도 모르게 김주혁이 떠올랐다.평소 다정하고 젠틀했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만난 순간 거칠고 사납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면서 거의 통제 불능이 돼버렸다.함께한 후에는 행복한 모습을 바로 자랑하기도 했다. 마치 어제 병원 문 앞에서 부들부들 떨던 사람이 다른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안 닥터.”안서희는 꿈에서 깬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서희가 말했다.“주혁 씨도 없어.”줄곧 안유진에게 친한 친구라는 명분에 갇힌 나머지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유준이는 김주혁이랑 달라. 잊지 못하는 첫사랑도 없고 바깥세상의 일에 관심이 없어서 공부만 했어. 해외에서도 옆에 성인 가게가 있어도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대.”“진아야.”“왜?”“고3 때 연애하다가 헤어진 다음에 만약 이튿날에 바로 누가 고백하면 받아줄 수 있어?”권진아는 아무 말이 없다가 몇 분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하긴. 아픔에서 빨리 벗어나긴 힘들지.”“응...”“근데 괜찮아. 유준이가 칠팔 년이나 기다렸는데 조금 더 기다리는 것쯤은 아무 문제 없지. 아무튼 걔 괜찮은 애니까 한번 생각해 봐.”안서희는 두 눈을 꼭 감고 쉬는 척했다.‘생각해 보라고? 내가 어떻게?’권진아네 집과 대대로 친분이 있는 집안이라면 해성시에서 나름 체면이 서는 집안일 것이다. 그렇다면 김주혁을 알 가능성이 컸다. 잘 아는 사이는 아니더라도 만난 적은 무조건 있을 것이다.그런 집안에서 한 번 다녀온 그녀를, 그것도 김주혁의 전처였던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게다가 아이를 지운 경험까지 있는데?고유준은 초혼인 데다가 젊은 인재였다. 그런 그가 배경도 없고 순결도 잃은 돌싱과 결혼하려고 할까?권진아가 반박했다.“김주혁은 받아들였잖아. 게다가 남의 애까지 키울 생각인 것 같던데. 안유진 배 속에 있는 아이 이미 받아들인 거나 마찬가지야.”안서희가 말했다.“이 세상에는 주혁 씨처럼 일편단심인 바보가 별로 없어.”권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현실과 많이 달랐다.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은 이혼 후에도 잘 생기고 돈 많은 남자와 결혼했지만 현실은 마주해야 하는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권진아는 조금 전 갑작스러운 소식에 잠깐 이성을 잃어서 자기 마음대로 생각한 거지, 일일이 따진 후에는 그녀도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그 후 안서희는 나름 잘 지냈다.센트럴 병원에 출근해서부터 휴가를 신청
안서희는 김씨 가문과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그녀가 휴가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 집으로 몸에 좋은 것들을 보낸 사람이 많았다. 동료, 친구, 전 시어머니, 그리고 김주혁도 있었다.그중에서 김주혁이 보낸 게 가장 많았다. 권진아가 문을 열자 사람 키 높이만큼 쌓인 선물 박스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쏟아지면서 하마터면 맞을 뻔했다.그녀가 대충 훑어보고 말했다.“우와, 다 좋은 것들이야. 어떤 건 국내에서도 살 수 없는 거고. 이거 다 어떻게 처리할 거야?”안서희가 대답했다.“다시 돌려줘.”권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전 시어머니가 보낸 건? 남겨둘 거야?”“그것도 그대로 돌려줘.”안서희가 계속하여 말했다.“노인분들한테 좋은 영양제 같은 거 더 살 테니까 같이 돌려보내.”권진아는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안서희가 생각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백금희는 그녀를 진심으로 예뻐했었다. 이건 지금까지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또한 김씨 가문의 돈으로 산 것이기에 그녀는 받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돌려보내기엔 백금희가 상처를 받을까 봐 다른 선물까지 더 보내면서 백금희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택배 기사가 왔을 때 권진아는 소파 위에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옆에서 주택 매물 소식을 보고 있던 안서희는 그 소리를 듣고 물었다.“뭘 보고 그래?”그러자 권진아가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주호민이라고 알아?”안서희가 고개를 내저었다. 안서희의 친구는 대부분 학교 동창이거나 동료였고 권진아는 재벌 2세 친구들이 많았다. 서로 사는 게 다르다 보니 권진아의 친구 중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권진아도 자주 얘기하진 않았다.“주씨 가문의 셋째인데 얘네 집이 지금 한솔 그룹과 손잡았어.”안서희는 딱히 관심이 없는 듯했다.“그래?”“이 자식 평소 나랑 연락도 하지 않거든. 근데 갑자기 캡처 사진을 보냈는데 뭔가 해서 봤더니 내 SNS 캡처 사진이었어.”안서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월말에 휴가도 끝났고 안서희의 몸도 거의 다 회복되었다. 그녀는 다시 출근하기 시작했다.병원의 동료들과 입원한 임산부들이 그녀에게 아주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서희의 사정을 알고 있는 임수경만 그녀를 보고 우물쭈물하면서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회진을 마치고 돌아온 안서희는 계속 참고 있는 임수경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할 얘기 있으면 해요. 그러다 답답해 죽겠어요.”임수경이 물었다.“선생님, 진짜 남편이랑 이혼하려고요?”“네. 이혼도 마지막 절차만 남았어요. 법원에 가서 마무리하면 돼요. 30분이면 될걸요?”임수경이 할 얘기가 많은 듯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안서희가 임수경의 어깨를 다독였다.“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가서 일이나 해요.”안서희는 심사숙고 끝에 해외 파견 기회를 포기하기로 했다.몸조리를 마치고 나니 마지막 신청일도 지나갔다. 그녀가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자 원장이 특별히 물어보기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지금 산모 몇 분이 상태가 좋지 않아서요. 제가 자리를 비울 수 없어요.”원장은 아주 자애롭고 다정한 할아버지였는데 평소 가십거리를 좋아했다. 안서희의 대답을 듣고는 눈을 깜빡이면서 말했다.“남편이랑 헤어지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알아. 핑계는. 괜찮아. 사람은 각자 선택이 다르니까. 가정과 일 중에 하나는 포기해야지. 서희 씨가 알아서 잘 결정하면 돼.”안서희가 덤덤하게 웃어 보였다.“네. 감사합니다. 원장님.”이틀 후, 병원에서 다른 사람을 정했고 곧 출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근데 요 며칠 무슨 일인지 갑자기 임산부들이 많이 몰려왔다. 안서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그 일을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차라리 바쁜 게 더 나았다. 적어도 충실하게 산다고 느껴지니까.오후 시각, 임수경이 대문 쪽으로 달려가더니 두리번거렸다. 금방 수술을 마치고 나온 안서희는 너무도 힘이 들었다. 그런데 아직도 달릴 힘이 남은 임수경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물었다.“뭘 봐요? 밖에
“저 사람 제 차를 보고 있는 것 같은데요?”운전기사도 뭔가를 알아채고 놀란 표정을 짓자 안서희가 대답했다.“설마요.”“맞아요. 우리 차 보고 있는 거. 내가 저 사람 차를 긁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나 운전 잘하는데...”안서희가 물었다.“기사님, 아까 도착했을 때부터 저 사람 저기 있었어요?”“네. 아까부터 비를 맞고 있었어요. 손님 태우고 유턴했는데도 계속 맞고 있으니까 바보라고 한 거죠.”안서희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시선을 거두었다.“기사님, 저 사람 그만 보고 운전에 조심하세요.”“어머머!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그 순간 안서희는 병원 문 앞의 교통 체증 때문에 짜증이 났다.‘와서 뭐 하려고 그러지? 유리창을 두드릴까, 아니면 차 문을 열까? 그나저나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해? 이미 다 깔끔하게 끝난 사이인데 병원에는 왜 찾아오고 저래?’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안서희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기사님, 앞에 차 피해서 돌아서 갈 수 있나요?”“안 돼요. 너무 막혀서 아예 돌 수가 없어요...”김주혁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졌다. 안개 사이로 그가 택시 앞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안서희는 표정을 싸늘하게 바꾸고 김주혁을 마주할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생각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김주혁이 택시 앞으로 돌아서 반대쪽으로 가더니 다른 택시 옆에 멈춰 섰다.그는 허리를 숙여 차 문을 열었다. 안유진이 배를 부여잡고 차에 내린 다음 김주혁이 건네는 손을 잡았다.“깜짝이야. 와이프 기다리는 거였군요.”그 택시가 길 가운데 서 있었고 행인이 끊임없이 오갔다. 마음이 급한 운전자들이 클랙슨을 울렸다.안서희는 시선을 거두고 자신을 비웃었다.“아가씨, 왜 웃어요?”안서희가 대답했다.“기사님, 아까는 왜 저 사람이 올까 봐 무서워했어요?”“분위기가 무섭잖아요. 안 무서워요?”안서희가 고개를 내저었다.“무서운 사람 아니에요.”김주혁은 무서운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결혼한 3년 동안 김주혁이 화내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