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 며칠 현아는 수현이 준비한 곳에 있느라 회사 일을 마무리할 수가 없었다. 상황이 상황이니 도대체 며칠 휴가를 내야 할지 몰랐다.이 정도면 퇴사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하지만 이건 그녀에게만 해당하는 소리였다.현아를 따라온 주한은 회사 내 위치로 생각했을 때 이렇게 자주 자리를 비우면 회사에 큰 손실을 줄 것이다.윤아와 친한 현아는 손실을 봐도 괜찮지만 주한은 처음 윤아가 납치당한 걸 알고 피할 수 없는 책임감을 느꼈다.사실 수현이가 그들을 여기 데려오면서 그의 임무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하지만 시간이 오래 흘러도 주한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현아는 주한을 찾아갈 생각이었다.그녀는 주한 바로 옆방에 살고 있었기에 옆방의 문을 두드렸고 이내 주한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요.”문도 안 열어주고 들어오라니.현아는 약간 망설여졌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들어가 보니 주한은 컴퓨터 앞에 앉아 이어폰을 끼고 회의하고 있었다.현아는 이 모습을 보고 안으로 들어가던 발걸음을 멈췄다.회의하는데 가서 귀찮게 하면 살짝 예의가 없는 행동으로 보일 수 있다.현아는 걸음을 돌려 살금살금 도망가려 했다.하지만 이때 컴퓨터를 바라보던 주한이 그런 현아를 힐끔 쳐다봤고 그녀가 도망가려고 하자 입을 열었다.“이쪽으로 와요.”현아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잠깐 망설이더니 그녀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주한은 맞은편 위치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눈짓했다.직속 상사라 현아는 명령을 거스르지 않고 바로 자리에 앉았다.자리에 앉은 현아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주한이 회의하고 있긴 했어도 이 방에는 둘 뿐이었다.자리도 주한의 맞은 편이라 어딘가 더 불편해 보였다.그래도 처음엔 꽤 정상적인 자세로 앉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니 심심해진 현아는 핸드폰을 꺼내 게임하기 시작했다.다운한 게임을 하려고 켰는데 무음으로 설정하는 걸 까먹는 바람에 게임 음악이 흘러나왔다.현아는 순간 너무 난처해 얼른 핸드폰을 껐고 마침
아까 여기서 회의하는 모습을 보니 서준이 얼마나 업무적으로 닦달하는지 알 것 같았다.“귀한 분이 처리할 일도 많다라...”주한은 현아가 쓴 단어를 두어 번 곱씹더니 입꼬리를 당기며 말했다.“음, 맞아요. 요 며칠 회사 일에 영향 준 건 맞아요.”“그럼...”“그래서 어떻게 보상해 줄 건데요?”“?”현아는 할 말을 잃었다.뭔가 상황이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원래는 이 일로 회사 일에 영향을 미쳤다면 먼저 돌아가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주한이 대뜸 어떻게 보상할지 묻고 있다.현아는 막연한 표정으로 말했다.“저는 일개 사원일 뿐이에요. 제가 무슨 수로 보상하겠어요?”이를 들은 주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보상해 줄 게 없다? 본인한테 이렇게 자신이 없는 거예요?”“...”현아는 뭔가 이상한 느낌에 빨간 입술을 앙다문 채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대표님, 설마...”주한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뭐요?”“설마 이번 일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면 저 두 배로 부려 먹을 거 아니죠? 아니면 연말 보너스를 없애버린다든지. 어쩔 수 없죠. 무섭긴 하지만 이번에 이렇게 저를 도와줬으니 착취를 해도 달게 받을게요.”말은 이렇게 했지만 현아의 표정은 이미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주한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손으로 미간을 주무르며 현아의 단순함에 감탄했다.그러면서 천천히 다가가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주한은 이어폰을 빼고 이 화제를 건너뛰었다.“친구는 아직도 소식이 없어요?”“네.”이 얘기만 꺼내면 현아의 눈빛은 수심이 가득 찼다.“처음엔 수현이 윤아가 있는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냈다고 해서 믿음직스러웠는데 며칠이 지났는데도 못 찾으니 화가 나네요.”“사람을 찾는 데는 시간이 필요해요. 찾았다고 해도 경거망동하기보다는 천천히 방법을 생각하는 게 맞고요.”이를 들은 현아는 약간 놀란 듯 주한을 바라봤다.“대표님 말은 수현이 이미 윤아가 어디 있는지 알아냈지만 방법을 마련하고 있다는 거예
선우는 더는 윤아와 입씨름을 하지 않았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제일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분명 그녀에게 상처 주는 일을 하면서 그녀를 위한 일인 것처럼 위선을 떨고 있었다.윤아가 화를 내든 모진 말을 내뱉든 선우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이에 윤아는 더 싸울 의미를 못 느끼고 두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방에 돌아온 윤아는 창가에 서서 약 5분을 기다렸고 이내 선우의 차가 별장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선우뿐만 아니라 별장을 지키던 사람들도 절반쯤 빠진 것 같았다.윤아는 살짝 놀랐다. 우진은 오늘 그가 이럴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하지만 이내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녀를 여기 가둬두려고 결심한 그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빼가는 이유가 뭘까?설마 그녀를 이미 찾아낸 사람이 있는 걸까?하지만 누가 그녀를 찾았다면 빨리 그녀를 다른 곳에 옮겨야 할 텐데 말이다.똑똑.윤아의 사색은 노크 소리와 함께 멈췄다.얼른 달려가 문을 열었고 밖에 서 있는 우진을 발견했다.“윤아 님.”“비서님.”윤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우진이 이를 잘랐다.“윤아 님, 얼른 하윤이와 서훈이를 챙겨서 저를 따라오세요.”몇 분 뒤.우진은 하윤이를, 윤아는 서훈이를 안고 신속하게 빠져나갔다.가는 길은 매우 순조로웠고 막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윤아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벌렁거렸고 탈옥하는 기분이 들었다.우진은 그녀를 한 차 앞으로 데려갔다.윤아와 아이들을 안에 앉히더니 우진도 차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고는 고개를 돌려 그들에게 말했다.“윤아 님, 아이들과 함께 뒷좌석 밑에 누워야 할 것 같습니다.”이 제안에 윤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누워있는 것만으로 안 들킬 수 있을까요?”우진은 입을 앙다문 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저들이 문만 안 열면요.”이를 들은 윤아는 단번에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검사하는 사람이 문만 안 열면 그들의 존재를 모를 것이다.하지만 재수 없이 문을 열어 검사한다면...“제가 줄 수 있는 기회는 이 한 번이에요. 한번
“걱정하지 마. 나가면 괜찮아질 거야.”하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윤아와 아이들 모두 바닥에 엎드리자 우진은 윤아가 이미 결정을 내렸음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윤아 님, 꽉 잡으세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차에 시동이 걸렸다.우진의 시선은 앞으로 향했고 차를 운전하며 말했다.“약 2분 뒤 대문에 도착할 거예요. 사람이 절반 이상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남은 사람이 꽤 많아서 제가 혼자 상대하기엔 무리예요. 운이 좋으면 일단 다른 곳으로 데려다주고 오겠지만 그게 아닐 경우 저들이 차를 검사하려 한다면 아예 차에 속도를 올릴 거예요. 그러면 뒤에서 안전벨트를 하고 조심하세요.”우진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얘기했지만 윤아는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우진은 입꼬리를 당기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2분 뒤, 차는 대문에 도착했다.선우가 나갈 때와는 다르게 우진은 나갈 때 검사를 받아야 했다.차가 멈춰서자 윤아는 호흡이 가빠졌고 얼른 옆에 있는 녀석들에게 눈치를 줬다. 둘은 얌전하게 엎드린 채 꼼짝달싹하지 않았다.누군가가 창문을 톡톡 두드리자 우진은 창문을 절반쯤 내리고 아무 표정 없이 밖에 선 사람을 내다봤다.문을 지키던 사람은 선우를 보고 표정이 살짝 변했다.“진 비서님, 어디 나가시게요?”“네.”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대표님이 놓고 간 물건이 있어서 가져다줘야 해서요.”문 지킴이가 살짝 망설였다.“하지만... 대표님께서 진 비서님은 별장에 남아 심윤아 씨를 보호해야 한다고 하셨는데.”“심윤아 씨도 보호하고 있고 물건도 가져다줘야 해요. 아니면 그쪽이 나를 대신할 건가요?”“그게...”“길을 내주세요.”여기서 이렇게 대치하고 있자 다른 사람들도 달려와 무슨 일인지 확인했다.우진의 미간이 구겨졌다. 사람이 많으면 일이 복잡해진다.하필 이때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우진은 활짝 열린 대문을 보며 이대로 질주해 나갈지 고민되었다.하지만 그랬다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
“하지만 아까 진 비서님이 너무 화나 계셔서 혹시나 미움 살까 봐...”대장은 이를 듣더니 갑자기 표정이 변했다.“큰일났다. 얼른 저 차 쫓아. 그리고 윤아 씨 지금 방에 있는지 확인하고.”대장의 지시하에 다들 각자의 위치로 향했다. 누구는 차로, 누구는 방으로 달려갔다.“큰일이에요! 심윤아 씨가 사라졌어요!”“진 비서 이 사람이! 얼른 쫓아가! 차 몇 대 더 보내고! 그리고 이 소식을 대표님께 알려!”순간 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별장을 순조롭게 탈출한 우진은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윤아와 아이들도 바닥에서 일어나 곧 닥칠지도 모르는 위험을 대비해 셋 다 안전벨트를 맸다.우진도 전혀 속도를 늦출 엄두를 내지 못했고 백미러로 윤아를 보며 말했다.“아마 저들이 바로 발견할 거예요. 최악의 상황이라면 지금 이미 우리를 쫓아오고 있을 수도 있어요. 윤아 님, 만약 저들이 이미 쫓아오고 있다면 이따 다른 곳을 찾아 내려드릴게요. 그럼 일단 잘 숨어계셔야 해요. 이 차는 이미 찍혀서 너무 위험해요.”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다시 데리러 가지 못할 수도 있으니 내려서는 알아서 방법을 찾아야 해요.”우진은 이렇게 말하며 백미러로 그녀를 쳐다봤다.“윤아 님, 여기는 지금 외국이에요. 밖에서 홑몸도 아니고 아이를 둘이나 데리고 있으면 별장에 있는 것보다 백배 천배 위험해요. 지금이라도 후회한다면 돌아가도 돼요.”“아니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후회 없어요.”윤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혼자 아이를 데리고 외국에서 살아본 적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일단 우리를 어디 내려줘요.”우진은 굳건한 그녀의 말투에 더는 걱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얼마나 지났을까, 우진은 아마도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서인지 자기도 어느 길인지 모를 만큼 이리저리 에돌아 갔다. 그러다 결국 약간 은밀한 곳을 찾아 윤아를 내려줬다.차를 세우고 우진은 먼 곳을 내다봤다.“앞에 농장이 하나 있을 거예요. 일단 그쪽
차에 사람이 없으니 우진도 속도를 조금 내렸다. 우진이 도울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앞에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그도 잘 몰랐다.후회하냐고 묻는다면 이미 끝난 일을 후회하든 하지 않든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우진의 차가 따라잡힌 건 1시간 뒤였다.그는 차와 함께 선우에게 끌려왔다. 마치 자신의 결말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표정이 어두웠지만 구걸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그들이 어디에 있어요?”선우의 말투는 여전히 가벼웠다.하지만 우진은 이게 폭풍 전야임을 잘 알고 있었다.우진은 고개를 들어 선우의 두 눈을 쳐다보며 웃었다.“어디 갔는지는 저도 몰라요. 중간에 헤어졌거든요.”이 말에 선우 눈가의 핏줄이 불끈 솟아났다.“왜 그랬어요?”우진은 입술을 앙다물더니 말했다.“이유는 없어요.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 것뿐이에요.”“내가 전에 벌준 것 때문에 그래요?”선우는 안경을 위로 올리며 물었다.“그래서 윤아와 아이들을 놓아주는 것으로 복수하는 거예요?”“아니요.”우진이 고개를 저었다.“정확히 말하면 대표님은 제게 은인과도 같은 사람이죠. 그러니 대표님이 제게 벌을 준다 해도 복수하지는 않을 거예요.”우진은 이렇게 말하더니 진지한 눈빛으로 선우를 바라봤다.“돌이킬 수 있을 때 그만하세요.”선우는 그런 우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얼굴엔 이미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그만하라고요?”“대표님 혹시 그거 아세요? 저번에 윤아 님이 유심 카드를 가졌지만 바로 신고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선우는 입술을 앙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약 그때 윤아 님이 신고했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요? 대표님, 윤아 님은 대표님께 희망을 안고 있었고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했어요.”“이제 그만해요. 그러면 대표님도 윤아 님과 계속 친구로 남을 수 있어요.”“친구라.”이 말에 선우가 웃기 시작했다. 처음엔 하찮다는 듯 가벼운 웃음이었지만 이내 세상 우스운 소리라도 들은 듯 점점 커졌다.우진은 그 자리에 서서 그
선우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었다.위로 올라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우진의 자리를 넘보는 사람이 많았지만 우진의 처사가 늘 완벽했기에 흠을 찾기가 어려웠다.그 흠이 지금 생겼으니 이 기회에 철저히 우진을 짓밟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먼저 사람부터 찾아와요.”하지만 선우는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그 사람은 그래도 성에 차지 않는지 다시 물었다.“그럼 진 비서님은...””“당신 눈엔 진 비서밖에 안 보입니까?”선우는 말투가 바뀌더니 눈빛이 차가워졌고 온몸으로 음침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그 사람은 이에 놀라 더는 말할 엄두를 못 내고 얌전해졌다.“그럼 먼저 심윤아 씨 찾으러 가보겠습니다.”사람들이 가고 선우는 짜증스럽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예전에는 담배를 피지 않던 그가 지금은...요즘 일어난 일은 정말 그를 짜증 나게 했다. 윤아가 이 정도로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줄은 몰랐다.선우는 수현이 자기보다 잘난 게 뭔지 궁금했다.선우는 늘 윤아뿐이었고 윤아가 아닌 다른 여자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5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선우는 사색에 잠겨 힘껏 담배를 피우다가 하마터면 연기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켁...”선우의 기침 소리에 밖을 지키던 사람이 안으로 들어와 걱정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선우는 대답 대신에 손가락 사이로 깜빡거리는 담뱃불을 보며 말했다.“진 비서는 일단 가둬둬요. 윤아 찾으면 그때 밥을 가져다주는 걸로 하죠.”“네.”“그리고 윤아는 아이를 둘이나 데리고 있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예요. 근처 농장 위주로 찾아요. 시내에 있는 호텔도 찾아보고요.”“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전달하겠습니다.”...으슥한 밤.윤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저렴한 여인숙으로 향했다.여인숙은 환경이 엉망이었고 곰팡내가 잔잔하게 깔려 있었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던 윤아는 뒤쪽에 시궁창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윤아
둘은 간단하게 몇 마디 더 나눴고 여사장은 할 일이 남았다며 자리를 비웠다.가기 전 여사장은 잘 때 문단속을 잘하라고 당부했고 혹시 누가 문을 두드려도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윤아는 알겠다고 하더니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여사장을 불렀다.“죄송한데 올 때 물건을 도둑 맞아서 핸드폰이 없어요. 혹시 전화 좀 하게 핸드폰 빌려주실 수 있나요?”여사장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죠.”“1층에 공용인 전화기가 있으니 먹고 내려와요.”공용 전화기?윤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조금 있다 내려갈게요.”그러더니 문을 닫고 음식을 두 아이에게 나눠줬다.“내 새끼, 일단 좀 먹자. 집에 가면 엄마가 맛있는 거 사줄게.”“네, 고마워요. 엄마.”두 아이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지만 윤아는 전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바로 아이를 두고 나가기엔 불안했다.윤아가 나가고 누군가가 들어오면 어떡하지?그러다...한참 고민하던 윤아는 그래도 아이들이 다 먹으면 같이 아래로 내려가 전화하기로 했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그녀가 옆을 지키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여사장이 직접 만든 소시지는 맛이 아주 좋았고 아이들은 맛있게 잘 먹었다.윤아는 별로 입맛이 없었지만 그래도 허기를 달래기 위해 조금 먹었다.“엄마, 다 먹었어요.”윤아는 식기를 정리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가자. 내려가서 전화 좀 하고 오자.”2분 뒤.윤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아래층에 있는 공용 전화기를 쓰려면 카운터로 내려가 여사장을 찾아야 했다. 방에서 나온 윤아는 아이들을 자기 옆으로 당겼다.“우린 지금 외국에 있고 환경도 별로 안 좋아. 이따 엄마 잘 따라오고 절대 뛰어다니면 안 돼, 알겠지?”“네, 알겠어요. 엄마.”두 녀석은 윤아를 따라 아래층으로 향했다. 멀리서 여사장이 카운터에 앉아 웃으며 옆에 있는 직원들과 담소를 나누는 게 보였고 공용 전화기는 여사장과 머지않은 곳에 놓여 있었다.윤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쪽으로 걸어가려는데 입구에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