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이 자신과 선우를 커플이라 오해하는 것을 보고는 윤아는 귀찮음에 따로 해석하지 않고 아예 순순히 인정하며 말했다.“제가 그 이랑 싸워서 보고 싶지 않아서요. 그러니까 부탁이에요. 저 이를 약 올린다고 생각하고 같이 먹어주세요, 네?”윤아는 다가가 직원의 팔을 흔들며 도와주기를 바랐다. 여직원도 심성이 여린지라 윤아가 이리 부탁하자 결국 이렇게 얘기했다.“그럼, 그럼 매니저님한테 연락해 볼게요. 만약 동의하시면...”“그래요. 만약 동의하지 않으시면 전화 나한테 줘요. 내가 말하게.”여직원은 윤아를 향해 웃어 보이고 이내 전화기를 꺼내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이따가 결과 알려줘요.”“네.”화장실에 들어선 뒤, 윤아는 신속하게 칩을 꺼내 바꿨다. 유심 핀이 없었으나 다행이었던 건 윤아가 아침에 문을 나설 때 화장을 안 했어도 귀걸이를 하고 나와 조금이나마 신경을 쓴 것이었다. 마침 그 귀걸이가 도움이 됐다.칩을 바꿀 때 윤아는 가슴이 계속 콩닥콩닥 뛰어왔다. 칩을 빼냈을 때 그들이 알 수 있는지도 몰랐다. 이 화장실에 카메라 같은 건 없겠지? 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무의식 간에 사위를 둘러보며 구석구석 살폈다. 침착하려고 애썼으나 떨리는 손이 윤아를 팔아넘겼다.핸드폰이 땅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윤아는 재빠르게 주어 핸드폰을 닦고는 칩을 핸드폰에 꽂아 넣고 전원을 켰다. 마침 현아에게 연락하려던 찰나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고객님, 물어봤습니다.”윤아는 하는 수 없이 모든 물건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문을 열었다.“동의한대요?”여직원은 볼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매니저님이 고객님이 마주친 문제를 해결하는 것 또한 우리 직원의 의무 중 하나라면서 고객님이 필요로 하시고 팁까지 주신다는데 저더러 남아서 잘 도와드리랍니다.”“고마워요.”윤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그럼 제가 남자 친구분한테 가서 말씀드리고 올게요.”“아니요, 그럴
예를 들자면 지금 남자 쪽에서 여자 쪽을 보는 표정은 어이없는 표정이었고 여자 쪽은 팔짱을 끼고 남자 쪽과는 더 이상 말 섞고 싶어 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아마도 싸우는 모양인데 남자 쪽에서 먼저 문제를 일으키고 지금 사과하는 것처럼 보였다.아니나 다를까, 윤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네가 좋다고 하면, 내가 꼭 너랑 밥을 먹어야 해?”말을 마치고 윤아는 고개를 들어 선우를 봤다. 그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네가 뭔 짓을 한 건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 많은 짓을 벌여놓고 내가 너랑 마주 보면서 평화롭게 밥을 먹어야 해? 아니다, 알아듣기 쉽게 말할게. 만약 날 돌려보내 주지 않으면 이후에 밥 먹을 때마다 다른 사람이랑 먹을 거야. 그게 누구든 설사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이랑 먹어도 너랑은 절대 안 먹어.”윤아의 말은 비수처럼 선우의 심장에 꽂혔다. 만약 그들의 언어를 알아듣는 제삼자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분명 윤아가 한 말들이 너무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직원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말을 마친 뒤 선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 윤아는 입술을 말아 올리면서 웃었다.“아니면 내가 사람과 밥을 먹는 거 자체가 싫은 거야? 좋아, 그럼.”윤아는 손안의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나와 저 직원이 먹은 것들 다 가져가. 그리고 날 방에 가둬. 되도록 누구도 만날 수 없게, 어때?”“윤아야.”선우의 목소리는 정말 별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였다.“내가 너한테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네 생각에는 네가 밥을 안 먹는 게 네 건강을 다치게 하는 거겠지만 사실 다치는 건 내 마음이야.”말하며 선우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윤아가 내려놓은 젓가락을 다시 손에 쥐고 말했다.“그냥 사람 찾아서 밥 좀 먹는 거잖아? 뭐 동의하고 말고 할 게 있어? 하지만... 좋기는 저 직원이 널
선우는 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서 윤아를 바라봤다.“그럴 필요까진 없어, 윤아야. 그냥 밥 먹는 건데 뭘.”“됐어, 밥맛 다 떨어져서.”윤아는 말을 마치고 소파로 곧게 걸어가 누워버렸다.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기 싫다는 듯 말이다. 여직원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하지만 여자 쪽에서 아예 대화할 의사를 내비치지 않는 걸 보아하니 이번 대화는 실패인 모양인 듯했다.이상하다... 분명 남자 쪽에서 대화하는 내내 부드럽고 온화했는데 왜 화해가 안 되는 거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여자 쪽에서 먹을 의향이 없는 걸 확인한 여직원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이만 방해하지 않고 물러나겠습니다.”말을 마치고 직원은 문 쪽으로 걸어갔다.“잠시만요.”선우가 직원을 불러세웠다. 그리고 그는 윤아 앞으로 다가와 감긴 윤아의 눈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내가 너무 의심이 많았지? 내가 널 의심해서는 안 됐는데... 아까 일은 내가 잘못했어. 일어나서 밥 먹자, 응?”하지만 선우가 아무리 말을 많이 하고 부드럽게 달래도 윤아는 시체처럼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윤아야?”윤아는 미동도 않고 누워있었다.“아니면 내가 널 테이블로 안아가야겠어?”윤아의 눈이 번쩍 떠져 마침 선우의 눈과 시선이 부딪혔다. 선우가 이리 가까운 거리에 있는 줄 몰랐던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이내 진정했다.“넌 쓸 줄 안다는 게 그 방법 하나뿐이니?”선우는 입을 말아 올리며 말했다.“방법은 무작정 많다고 좋은 게 아니지, 유용하면 되는 거 아닌가?”윤아는 차가운 얼굴로 선우를 밀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나 혼자 있고 싶어. 네가 다른 사람이 나한테 접근하는 게 무섭다면 빨리 저 여직원 데리고 나가. 이다음에 저 여직원 들쑤실 생각도 하지 말고.”“그럴 생각 없어. 그저 저 여직원더러 너랑 같이 밥 좀 먹게 하려는 거야. 너 이미 너무 오랜 시간 아무것도 안 먹고 있잖아.”“나 지금 밥 생각 없어.”두 사람은 같은 대화를 지겹도록 반복했다
윤아는 현아의 말을 끊었다.“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끊지 말고 모두 기억해.”윤아가 이렇게 엄숙한 말투로 말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다. 현아는 사건의 심각성을 알아채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말을 하면서 현아는 혹시나 윤아의 말을 흘려듣거나 잊어버리지는 않을까 통화녹음 버튼을 눌렀다.“잘 들어. 나 지금 카베네 국제 공항에서 차로 한 20분 거리 되는 럭셔리호텔에 묵고 있어. 입구에는 24시간 편의점이 있고 내 방은 16층이야. 그런데 아마 여기에 오래 머무를 것 같지는 않아. 문 앞에는 두세 명 정도 되는 사람이 지키고 서있고 아마 저녁쯤 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것 같아. 내가 여기서 시간을 벌어보긴 할 건데 만약 내가 반항할 능력조차 상실하게 되면 아마 옮겨질 거야, 다른 곳으로. 그렇게 되면 다시 기회 봐서 너한테 연락할게.”여기까지 들은 현아의 동공이 커졌다. 납치된 거야? 윤아가?때마침 현아의 상사가 현아를 찾으러 왔다가 현아가 통화 중인 걸 확인하고는 돌아가려 했다. “잠깐만요.”현아는 뒤돌아가는 상사를 불러세우고 오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현아가 맨날 까칠남이라 말하고 다니던 배주한은 그녀의 급해 보이는 제스처에 발걸음을 돌려 다가갔다.“무슨 일이죠?”현아는 이내 통화를 스피커로 전환하고 윤아한테 말했다.“윤아야, 내가 까칠... 아니, 배 대표님한테도 오셔서 들어달라고 했어. 대표님이 나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니까 분명 도움이 될 거야.”배주한은 까칠 두 글자를 듣고 아마 뒤에 이어질 말이 까칠남이겠다는 것을 예상했다. 사실 현아한테서 까칠남이란 소리를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저번에 들었을 때는 현아가 절친과 하소연할 때였다. 맨날 자기를 불러 일을 시킨다고 저러니까 연애를 못 한다나 뭐라나... 하지만 오늘 자신을 앞에 두고 실언할 줄이야. 주한이 호칭을 고쳐주려고 입을 열려는 그때 윤아가 빠른 속도로 앞에 했던 얘기를 다시 한번 반복했다. 그 말을 듣고 난 주한의 눈이 가늘어졌다.“위치 보낼
이 모든 과정은 대략 6분 남짓 걸렸고 윤아도 드디어 새 계정을 만들었다. 이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윤아야.”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구 목소린지 알아챈 현아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주한의 커다란 손이 와서 그녀의 입을 가로막았다. 현아는 눈을 크게 뜨고 주한을 밀치려 했지만 어깨가 주한에게 꽉 잡혔다. 주한은 그녀의 귓가에 얼굴을 붙이고 조용히 말했다.“아무 말도 하지 마.”현아는 미간을 찡그리긴 했으나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다. 이윽고 수화기 너머에서 윤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혼자 있고 싶다 한 거 잊었어? 내가 사람 불러 밥 먹는 것도 뭐라 하더니 이젠 샤워하는 것까지 신경 쓰는 거야?”말을 하면서 윤아는 핸드폰을 옆에 있던 선반 위에 올려놓은 뒤 옷을 벗고 샤워기 아래에 섰다. 밖에서는 잠시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다가 선우가 입을 열었다.“알았어, 씻고 있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윤아는 선반 쪽을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옷을 안 가지고 들어왔는데 내 캐리어에 있는 옷 좀 가져다줄래?”“알았어, 가지러 갈게.”그리고 윤아는 샤워기를 끄고 문밖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샤워기를 켰다. 그리고 핸드폰을 가져와 스피커폰을 껐다.“지금 위치 보내드릴게요. 더 이상 말할 시간이 없어요. 핸드폰 칩을 바꿔야 하거든요. 이 핸드폰 칩은 아마 더 사용하진 못할 거예요.”“네.”주한은 자세를 유지한 채 담담하게 말했다.“우리가 방법을 대서 구할 테니까 자신을 잘 보호하고 있어요. 웬만하면 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요.”“감사합니다.”“괜찮아요.”윤아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현아야, 이 일 수현 씨한테 전해줘.”윤아가 현아를 부르고 나서야 주한은 현아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내렸다.“왜 직접 말하지 않고?”“시차 때문에 연락이 닿질 않아.”“알겠어. 근데 널 납치한 사람이 어떻게...”선우가 돌아올 시간이 되어 뒷수습해야 했던 윤아는 현아에게
“...”주한은 침묵했다. 눈앞에서 현아가 티켓을 사려고 화면을 누르는 걸 주한이 어이없다는 듯 손으로 막았다.“주현아 씨는 충동적일 때 좀 머리를 쓰고 침착해질 수는 없는 겁니까?”이 말은 현아의 심기를 살짝 불편하게 만들었다.“제가 충동적이라 말하시면서 침착하길 바라고 계시네요.”주한은 더 이상 현아와 말씨름하기 싫어 사건해결에 주의를 돌렸다.“티켓 사지 말고 신고해요.”신고?“안 돼요! 신고하면 안 돼요!”현아는 신고하려는 그의 손을 막았다. 주한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아까 윤아 말 못 들었어요? 신고하지 말라잖아요.”“하지만 이미 친구분은 납치당했습니다, 주현아 씨. 불법이라고요.”“알아요.”현아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누가 불법인 거 몰라요? 하지만 지난 5년 동안 늘 선우 씨가 윤아를 돌봐주며 챙겼다고요. 윤아가 신고하지 말라 한 건 이유가 있어서일 거예요.”주한은 말없이 현아를 바라봤다. 현아가 말을 덧붙였다.“정이란 게 있는 법이니까요. 그래도 너무 막다른 길로 내몰지는 말자는 소리예요.”두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부딪혔다. 먼저 양보한 건 주한 쪽이었다.“확실히 말이 맞네요, 사람 사이에 정이란 게 있는 법인데.”주한은 멈칫하더니 말을 꺼냈다.“같이 가죠.”현아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한을 쳐다봤다.“네? 무슨 말씀이세요? 저랑 같이 간다고요?”“주현아 씨가 한 말 아닙니까? 인정을 논해야 한다고. 이미 내가 이번 일을 알게 됐고 또 주현아 씨는 우리 회사 에이스 아닙니까. 지난 몇 년 동안 회사를 위해 힘써준 게 고마워서 이번 일은 저도 돕죠.”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현아는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주한이 있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주한이 오늘날 이 위치에 오를 수 있다는 건 머리가 정말 좋다는 거니까 그가 돕는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그래요. 티켓값은 제가 낼게요.”“잠시만요.”“또 뭔데요?”“친구
비행기에 탈 때까지도 수현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진짜 어이없어. 윤아는 이런 남자를 왜 좋아하는 거야. 뭘 이런 사람한테 소식을 전하라는 건지. 내가 보기엔 차라리 이선우 씨랑 만나는 게 낫겠어. 적어도 그 사람은 전화를 받기라도 하니까.”윤아의 상황에 안 그래도 마음이 복잡한데 수현은 연락조차 안 되니 짜증이 폭발해 버린 현아는 핸드폰에 대고 수현의 욕을 잔뜩 퍼부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수현에게는 윤아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주한은 현아를 몇 년 동안 봐왔지만 그녀가 이렇게까지 낙심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진정 좀 해요. 전화를 못 받을 만한 사정이 있겠죠.”“무슨 사정이요? 전화를 몇 통이나 쳤는데 아무리 바빠도 한 번쯤은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런 남자는 믿을게 못돼요. 무슨 사정이 있었든 윤아를 만나면 저 인간은 만나지 말라고 해야겠어요.”주한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지금으로썬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위험에 처한 건 그녀의 단짝친구이고 주한이 아무리 그 감정을 공감한대도 결국 당사자만큼은 아닐 테니.그리고 사실 현아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람을 살려야 하는 위급한 순간에 도움이 전혀 안 되고 있으니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 수밖에. 그것도 이렇게 중요한 순간이라면 말이다.비행기가 뜨기 전,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핸드폰 전원을 끄길 요구했다.현아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수현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하지만 여전히 답은 없었고 들리는 건 반복되는 통화연결음 뿐이었다. 현아는 화가 들끓었지만 윤아의 부탁도 있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문자라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현아는 문자가 문제 없이 전송된걸 확인한 후에야 핸드폰을 껐다.주한은 그런 그녀를 힐끔 보더니 물었다.“아직도 안 받아요?”“네.”현아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문자 보내놨으니 비행기 착륙할 때쯤엔 보겠죠. 아직 도착하려면 한참은 더 걸리니 자고 있었대도 그때쯤
선우가 떠나자 윤아는 그제야 숨을 돌렸다.이제 남은 가능성은 두 가지뿐이다.하나는 선우가 유심칩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고 그저 윤아가 난동을 부리는 거로 생각하는 것.다른 하나는 유심칩에 대해 이미 알고 있으나 욕실에 막무가내로 들어올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밖에 있는 것. 정말 샤워를 한다고 믿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니.비록 5년이란 시간을 윤아에게 매달린 선우지만 그 긴 시간 동안 선 넘는 행동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보면 선우도 꽤 윤아를 많이 존중해줬다 할 수 있다.그렇게 서로 존중하며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둘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윤아는 심란한 마음에 물 속으로 얼굴을 넣었다. 그렇게 하면 복잡한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씻겨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그나마 다행인 건 현아와 연락이 닿은 덕에 하루 종일 긴장 상태던 몸이 조금이나마 풀렸다는 것이다.이제 남은 건 전쟁이다.윤아는 시간을 벌기 위해 욕조의 물이 다 식을 때까지 아주 오래 몸을 담갔다.그동안 밖에선 조금 전 선우와의 대화를 끝으로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다시 찾아오지 않는 건 방을 이미 나간 건지, 아니면...윤아는 순간 무언가 떠오른 듯 안색이 창백해졌다.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그만 방에서 자고 있던 아이들을 깜빡하고 만 것이다.윤아는 아이들 걱정에 더 오래 머무르지 않고 타올로 몸의 물기만 간단히 닦아낸 후 문을 열어 옷이 담긴 주머니를 찾았다.주머니 속에는 온통 몸에 달라붙는 옷들뿐이어서 입으면서도 조금 불편했지만 생각해 보니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닌 것 같았다.선우는 이제 아예 사람을 감금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와서 무슨 짓을 더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래도 선을 절대 넘지 않는 좋은 사람이었는데...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짓은 절대 벌이지 않을 것 같았던 선우가 지금 이러고 있지 않은가.그 말은 더한 짓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