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는 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서 윤아를 바라봤다.“그럴 필요까진 없어, 윤아야. 그냥 밥 먹는 건데 뭘.”“됐어, 밥맛 다 떨어져서.”윤아는 말을 마치고 소파로 곧게 걸어가 누워버렸다.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기 싫다는 듯 말이다. 여직원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하지만 여자 쪽에서 아예 대화할 의사를 내비치지 않는 걸 보아하니 이번 대화는 실패인 모양인 듯했다.이상하다... 분명 남자 쪽에서 대화하는 내내 부드럽고 온화했는데 왜 화해가 안 되는 거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여자 쪽에서 먹을 의향이 없는 걸 확인한 여직원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이만 방해하지 않고 물러나겠습니다.”말을 마치고 직원은 문 쪽으로 걸어갔다.“잠시만요.”선우가 직원을 불러세웠다. 그리고 그는 윤아 앞으로 다가와 감긴 윤아의 눈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내가 너무 의심이 많았지? 내가 널 의심해서는 안 됐는데... 아까 일은 내가 잘못했어. 일어나서 밥 먹자, 응?”하지만 선우가 아무리 말을 많이 하고 부드럽게 달래도 윤아는 시체처럼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윤아야?”윤아는 미동도 않고 누워있었다.“아니면 내가 널 테이블로 안아가야겠어?”윤아의 눈이 번쩍 떠져 마침 선우의 눈과 시선이 부딪혔다. 선우가 이리 가까운 거리에 있는 줄 몰랐던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이내 진정했다.“넌 쓸 줄 안다는 게 그 방법 하나뿐이니?”선우는 입을 말아 올리며 말했다.“방법은 무작정 많다고 좋은 게 아니지, 유용하면 되는 거 아닌가?”윤아는 차가운 얼굴로 선우를 밀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나 혼자 있고 싶어. 네가 다른 사람이 나한테 접근하는 게 무섭다면 빨리 저 여직원 데리고 나가. 이다음에 저 여직원 들쑤실 생각도 하지 말고.”“그럴 생각 없어. 그저 저 여직원더러 너랑 같이 밥 좀 먹게 하려는 거야. 너 이미 너무 오랜 시간 아무것도 안 먹고 있잖아.”“나 지금 밥 생각 없어.”두 사람은 같은 대화를 지겹도록 반복했다
윤아는 현아의 말을 끊었다.“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끊지 말고 모두 기억해.”윤아가 이렇게 엄숙한 말투로 말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다. 현아는 사건의 심각성을 알아채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말을 하면서 현아는 혹시나 윤아의 말을 흘려듣거나 잊어버리지는 않을까 통화녹음 버튼을 눌렀다.“잘 들어. 나 지금 카베네 국제 공항에서 차로 한 20분 거리 되는 럭셔리호텔에 묵고 있어. 입구에는 24시간 편의점이 있고 내 방은 16층이야. 그런데 아마 여기에 오래 머무를 것 같지는 않아. 문 앞에는 두세 명 정도 되는 사람이 지키고 서있고 아마 저녁쯤 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것 같아. 내가 여기서 시간을 벌어보긴 할 건데 만약 내가 반항할 능력조차 상실하게 되면 아마 옮겨질 거야, 다른 곳으로. 그렇게 되면 다시 기회 봐서 너한테 연락할게.”여기까지 들은 현아의 동공이 커졌다. 납치된 거야? 윤아가?때마침 현아의 상사가 현아를 찾으러 왔다가 현아가 통화 중인 걸 확인하고는 돌아가려 했다. “잠깐만요.”현아는 뒤돌아가는 상사를 불러세우고 오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현아가 맨날 까칠남이라 말하고 다니던 배주한은 그녀의 급해 보이는 제스처에 발걸음을 돌려 다가갔다.“무슨 일이죠?”현아는 이내 통화를 스피커로 전환하고 윤아한테 말했다.“윤아야, 내가 까칠... 아니, 배 대표님한테도 오셔서 들어달라고 했어. 대표님이 나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니까 분명 도움이 될 거야.”배주한은 까칠 두 글자를 듣고 아마 뒤에 이어질 말이 까칠남이겠다는 것을 예상했다. 사실 현아한테서 까칠남이란 소리를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저번에 들었을 때는 현아가 절친과 하소연할 때였다. 맨날 자기를 불러 일을 시킨다고 저러니까 연애를 못 한다나 뭐라나... 하지만 오늘 자신을 앞에 두고 실언할 줄이야. 주한이 호칭을 고쳐주려고 입을 열려는 그때 윤아가 빠른 속도로 앞에 했던 얘기를 다시 한번 반복했다. 그 말을 듣고 난 주한의 눈이 가늘어졌다.“위치 보낼
이 모든 과정은 대략 6분 남짓 걸렸고 윤아도 드디어 새 계정을 만들었다. 이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윤아야.”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구 목소린지 알아챈 현아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주한의 커다란 손이 와서 그녀의 입을 가로막았다. 현아는 눈을 크게 뜨고 주한을 밀치려 했지만 어깨가 주한에게 꽉 잡혔다. 주한은 그녀의 귓가에 얼굴을 붙이고 조용히 말했다.“아무 말도 하지 마.”현아는 미간을 찡그리긴 했으나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다. 이윽고 수화기 너머에서 윤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혼자 있고 싶다 한 거 잊었어? 내가 사람 불러 밥 먹는 것도 뭐라 하더니 이젠 샤워하는 것까지 신경 쓰는 거야?”말을 하면서 윤아는 핸드폰을 옆에 있던 선반 위에 올려놓은 뒤 옷을 벗고 샤워기 아래에 섰다. 밖에서는 잠시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다가 선우가 입을 열었다.“알았어, 씻고 있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윤아는 선반 쪽을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옷을 안 가지고 들어왔는데 내 캐리어에 있는 옷 좀 가져다줄래?”“알았어, 가지러 갈게.”그리고 윤아는 샤워기를 끄고 문밖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샤워기를 켰다. 그리고 핸드폰을 가져와 스피커폰을 껐다.“지금 위치 보내드릴게요. 더 이상 말할 시간이 없어요. 핸드폰 칩을 바꿔야 하거든요. 이 핸드폰 칩은 아마 더 사용하진 못할 거예요.”“네.”주한은 자세를 유지한 채 담담하게 말했다.“우리가 방법을 대서 구할 테니까 자신을 잘 보호하고 있어요. 웬만하면 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요.”“감사합니다.”“괜찮아요.”윤아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현아야, 이 일 수현 씨한테 전해줘.”윤아가 현아를 부르고 나서야 주한은 현아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내렸다.“왜 직접 말하지 않고?”“시차 때문에 연락이 닿질 않아.”“알겠어. 근데 널 납치한 사람이 어떻게...”선우가 돌아올 시간이 되어 뒷수습해야 했던 윤아는 현아에게
“...”주한은 침묵했다. 눈앞에서 현아가 티켓을 사려고 화면을 누르는 걸 주한이 어이없다는 듯 손으로 막았다.“주현아 씨는 충동적일 때 좀 머리를 쓰고 침착해질 수는 없는 겁니까?”이 말은 현아의 심기를 살짝 불편하게 만들었다.“제가 충동적이라 말하시면서 침착하길 바라고 계시네요.”주한은 더 이상 현아와 말씨름하기 싫어 사건해결에 주의를 돌렸다.“티켓 사지 말고 신고해요.”신고?“안 돼요! 신고하면 안 돼요!”현아는 신고하려는 그의 손을 막았다. 주한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아까 윤아 말 못 들었어요? 신고하지 말라잖아요.”“하지만 이미 친구분은 납치당했습니다, 주현아 씨. 불법이라고요.”“알아요.”현아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누가 불법인 거 몰라요? 하지만 지난 5년 동안 늘 선우 씨가 윤아를 돌봐주며 챙겼다고요. 윤아가 신고하지 말라 한 건 이유가 있어서일 거예요.”주한은 말없이 현아를 바라봤다. 현아가 말을 덧붙였다.“정이란 게 있는 법이니까요. 그래도 너무 막다른 길로 내몰지는 말자는 소리예요.”두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부딪혔다. 먼저 양보한 건 주한 쪽이었다.“확실히 말이 맞네요, 사람 사이에 정이란 게 있는 법인데.”주한은 멈칫하더니 말을 꺼냈다.“같이 가죠.”현아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한을 쳐다봤다.“네? 무슨 말씀이세요? 저랑 같이 간다고요?”“주현아 씨가 한 말 아닙니까? 인정을 논해야 한다고. 이미 내가 이번 일을 알게 됐고 또 주현아 씨는 우리 회사 에이스 아닙니까. 지난 몇 년 동안 회사를 위해 힘써준 게 고마워서 이번 일은 저도 돕죠.”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현아는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주한이 있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주한이 오늘날 이 위치에 오를 수 있다는 건 머리가 정말 좋다는 거니까 그가 돕는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그래요. 티켓값은 제가 낼게요.”“잠시만요.”“또 뭔데요?”“친구
비행기에 탈 때까지도 수현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진짜 어이없어. 윤아는 이런 남자를 왜 좋아하는 거야. 뭘 이런 사람한테 소식을 전하라는 건지. 내가 보기엔 차라리 이선우 씨랑 만나는 게 낫겠어. 적어도 그 사람은 전화를 받기라도 하니까.”윤아의 상황에 안 그래도 마음이 복잡한데 수현은 연락조차 안 되니 짜증이 폭발해 버린 현아는 핸드폰에 대고 수현의 욕을 잔뜩 퍼부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수현에게는 윤아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주한은 현아를 몇 년 동안 봐왔지만 그녀가 이렇게까지 낙심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진정 좀 해요. 전화를 못 받을 만한 사정이 있겠죠.”“무슨 사정이요? 전화를 몇 통이나 쳤는데 아무리 바빠도 한 번쯤은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런 남자는 믿을게 못돼요. 무슨 사정이 있었든 윤아를 만나면 저 인간은 만나지 말라고 해야겠어요.”주한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지금으로썬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위험에 처한 건 그녀의 단짝친구이고 주한이 아무리 그 감정을 공감한대도 결국 당사자만큼은 아닐 테니.그리고 사실 현아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람을 살려야 하는 위급한 순간에 도움이 전혀 안 되고 있으니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 수밖에. 그것도 이렇게 중요한 순간이라면 말이다.비행기가 뜨기 전,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핸드폰 전원을 끄길 요구했다.현아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수현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하지만 여전히 답은 없었고 들리는 건 반복되는 통화연결음 뿐이었다. 현아는 화가 들끓었지만 윤아의 부탁도 있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문자라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현아는 문자가 문제 없이 전송된걸 확인한 후에야 핸드폰을 껐다.주한은 그런 그녀를 힐끔 보더니 물었다.“아직도 안 받아요?”“네.”현아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문자 보내놨으니 비행기 착륙할 때쯤엔 보겠죠. 아직 도착하려면 한참은 더 걸리니 자고 있었대도 그때쯤
선우가 떠나자 윤아는 그제야 숨을 돌렸다.이제 남은 가능성은 두 가지뿐이다.하나는 선우가 유심칩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고 그저 윤아가 난동을 부리는 거로 생각하는 것.다른 하나는 유심칩에 대해 이미 알고 있으나 욕실에 막무가내로 들어올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밖에 있는 것. 정말 샤워를 한다고 믿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니.비록 5년이란 시간을 윤아에게 매달린 선우지만 그 긴 시간 동안 선 넘는 행동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보면 선우도 꽤 윤아를 많이 존중해줬다 할 수 있다.그렇게 서로 존중하며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둘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윤아는 심란한 마음에 물 속으로 얼굴을 넣었다. 그렇게 하면 복잡한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씻겨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그나마 다행인 건 현아와 연락이 닿은 덕에 하루 종일 긴장 상태던 몸이 조금이나마 풀렸다는 것이다.이제 남은 건 전쟁이다.윤아는 시간을 벌기 위해 욕조의 물이 다 식을 때까지 아주 오래 몸을 담갔다.그동안 밖에선 조금 전 선우와의 대화를 끝으로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다시 찾아오지 않는 건 방을 이미 나간 건지, 아니면...윤아는 순간 무언가 떠오른 듯 안색이 창백해졌다.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그만 방에서 자고 있던 아이들을 깜빡하고 만 것이다.윤아는 아이들 걱정에 더 오래 머무르지 않고 타올로 몸의 물기만 간단히 닦아낸 후 문을 열어 옷이 담긴 주머니를 찾았다.주머니 속에는 온통 몸에 달라붙는 옷들뿐이어서 입으면서도 조금 불편했지만 생각해 보니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닌 것 같았다.선우는 이제 아예 사람을 감금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와서 무슨 짓을 더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래도 선을 절대 넘지 않는 좋은 사람이었는데...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짓은 절대 벌이지 않을 것 같았던 선우가 지금 이러고 있지 않은가.그 말은 더한 짓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이
윤아는 머리를 말리고 잠깐 쉬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체내에 약효가 아직 가시지 않은 탓인지 침대에 눕자 저도 모르게 스르륵 잠에 들었다.얼마나 지났을까, 잠에서 깨 서서히 의식이 돌아올 때쯤 방 밖에서 누군가가 대화하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대표님, 윤아 님은 아직 안 깨셨어요?”“네.”“저희 차량이 이미 대기 중이어서요. 이제 출발해야 합니다.”선우는 굳게 닫힌 방문을 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피곤할 텐데 좀 더 자게 놔두죠.”“하지만...”우진이 머뭇거렸으나 선우는 서늘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조금 더 자게 놔두라잖아요. 못 알아들어요?”선우가 화를 낼 것도 예상했던 일이라 우진은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알겠습니다.”우진은 밖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에게 상황을 전달한 후 복도에서 대기했다.사실 우진은 이 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고 중간에 윤아가 다른 사람과도 연락이 닿았단 걸 선우에게 다시 한번 전해줄 생각이었다.이 곳 사람들은 선우 쪽 사람이 아니라 컨트롤 하기 어려워 만약 일이 커지면 수습하기도 힘들 것이다.우진도 선우가 정신이 좀 나간 것 같다고는 생각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 걸 인제 와 어쩌겠는가. 그는 그저 비서로서의 업무를 성실히 해야겠다 생각했다.그리고 윤아도 반 시간 정도면 깨어날 수도 있으니 조금 더 기다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다 판단했다.한편, 윤아는 심장이 벌렁댔지만 운 좋게 둘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잠에서 깼다가 그대로 걸리면 빼도 박도 못하고 끌려갈 게 뻔했으니 말이다.윤아는 다시 눈을 꼭 감고 자는 척을 시전했다.그러나 얼마 안 가 다시 들려오는 인기척에 윤아는 미간을 찌푸렸다.‘선우가 들어왔나?’들릴 듯 말 듯 한 낮은 발소리가 점점 다가오더니 윤아의 침대맡에서 멈추었다.선우는 누워있는 윤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깨어 있을 때와 달리 잠들어있는 윤아는 유난히 조용했다. 선우는 윤아의 정교한 오관을 한눈에 담기라도 하려는 듯 가만히 바라봤다.윤아의 얼굴은
문을 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그들은 마침 방을 나온 윤아와 눈이 마주쳤다.윤아는 아이들을 건드리는 모습에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다가가 따졌다.“지금 내 애한테 무슨 짓이에요?”우진도 하필 이럴 때 윤아에게 딱 걸릴 줄 몰랐던 터라 적잖이 당황한듯했다.두 시간을 기다렸는데도 윤아가 깨지 않아 아이들을 먼저 데려가려고 한 거였다. 그러면 윤아가 깬 후에도 아이들 때문에 순순히 따라나설 거라 판단했으니까.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깨다니.“윤아 님, 오해예요... 먼저 제 말 좀 들어주세요.”“오해? 두 사람이 제 아이를 몰래 데려가고 있는데 무슨 오해가 있다는 거죠?”말을 마친 윤아는 다가가 아이를 낚아챈 후 우진을 쫓아냈다.우진은 윤아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윤아 님. 깨셨으니 이제 출발합시다.”“출발이요? 무슨 출발?”“여기는 그저 잠시 쉬어가는 곳이었어요. 이제 장기간 머물 별장으로 가야죠.”윤아는 웃음을 터뜨렸다.“진 비서님. 선우가 지금 미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스스로 모를 수 있다 쳐요. 그렇다고 진 비서님도 모르나요? 진 비서는 연대책임이란 것도 몰라요?”우진이 윤아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그는 쓴웃음을 짓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그렇다고 해도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대표님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니 자연히 대표님 뜻을 따라야죠. 이 일을 한 지도 몇 년이나 됐는데 이제 와서 제가 도망갈 리도 없잖습니까.”윤아는 그의 대답으로부터 그가 무슨 생각인지 얼추 알 것 같았다.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지만 이왕 도울 거 일 처리는 완벽하게 할 거라는 말이었다.“이러는 게 선우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요?”윤아는 말을 하면서도 가슴이 저릿했다.“정말 선우를 위한다면 지금 해야 할 건 방조가 아니라 그를 말리는 거예요.”“윤아 님. 제가 안 말려봤겠습니까? 윤아 님도 대표님과 오랜 시간 지내보셨으니 저보다 대표님을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윤아는 대답 없이 입술만 깨물다 그를 쫓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