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윤아의 감정생활을 흥미진진하게 들으려고 했지만 그녀가 아이 얘기를 하니 민우의 관심 포인트는 순간 변했다.“대표님, 쌍둥이를 낳으셨어요? 남자아이예요, 여자아이예요?”윤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제가 아니라 친구라니까요.”“아, 네네. 대표님 친구분이죠. 그러니까 친구분께서 낳은 쌍둥이가 남자아이예요, 여자아이예요?”“중요해요?”“중요하죠. 제가 엄청 궁금하거든요.”“...이란성 쌍둥이예요.”“와. 만약 진수현 대표님께서 정말 아이들을 뺏으면 아들딸 다 있는 거네요?”“친구 전남편이라니까요.”“아, 네네. 친구분 전남편이죠. 아까 실수했어요. 네, 실수.”“하지만 진... 대표님 친구분께선 왜 전남편이 자신과 아이를 뺏는다고 생각했대요? 함께 키우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함께 키운다니요. 농담하지 마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그렇다면 이유가 필요하지 않겠어요? 왜 불가능한데요?”민우는 눈썹을 올리며 분석했다.“대표님 전남편, 아니 친구분 전남편 되게 대단하시죠? 사회에서 자원도 많고 지위도 높고요. 그런 사람과 함께 아이를 키운다면 아이들의 미래에 아주 좋잖아요.”“함께 키우는 건 불가능하다니까요? 뺏어가기만 할 뿐이에요. 뺏기만 한다고요.”윤아는 고집스럽게 뒤의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그리고 이미 만나는 사람도 있어요. 함께 키우고 또 도와주겠다는 거 다 가짜에요. 그냥 아이를 뺏으려는 수단일 뿐이라고요.”“만나는 사람이요?”여기까지 듣자, 민우는 드디어 포인트를 발견했다.그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대표님, 그러니까 진수현 대표님께서 이미 만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아이를 뺏을까 봐 두려우신 거죠?”윤아는 민우를 보며 대답하지 않았지만 눈빛과 표정은 이미 묵인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는 아까 민우가 친구분 남편이 아니라 직접 수현이라고 말한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일 초 후, 민우는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대표님, 만약 이걸 걱정하시는 거라면 정말 그럴 필요 없어요.”“
“히히, 저는 또 대표님이 안 궁금해하시는 줄 알았죠. 듣고 계셨네요?”민우는 히죽거리며 말했다.윤아는 참을 인을 세 번 그리다 민우에게 말했다.“민우 씨, 잘리고 싶어요?”“그럴 리가요. 대표님 잘 따라오시나 그냥 농담 한번 해봤어요. ”윤아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보고 민우는 이어서 말했다.“알았어요. 저 그러면 계속할게요.”“약혼 날짜까지 나오고 그러니까 사람들은 다 진짜로 두 사람이 약혼하는 줄로 알았던 거죠. 심지어 지인이 약혼 파티 초대장을 받았다고 인터넷에 올렸다니까요.”윤아의 눈썹이 살짝 찡그러졌다.“그래서요?”“대표님, 진정하시고 제 말 좀 끝까지 들어보세요.”“…”“그 뒤로 많은 사람들이 초대장 받았대요. 그리고 약혼식장 내부 사진까지 찍혀서 남성에 두 사람이 약혼 소식이 쫙 퍼지고 사람들은 약혼식 날만 기다린 거죠. 심지어 기자들이 약혼한다는 소문에 진씨 가문 대문 앞까지 모여들었는데, 글쎄 진씨 집안에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근거 없는 소문이라고 그랬대요.”윤아의 눈이 가늘어졌다.“근거 없는 소문이라고?”“그렇다니까요. 수현 씨 본인이 나와 직접 말한 건 아닌데, 진씨 집안에서 나와서 얘기하기를 다 헛소문이라고 그랬대요.”민우는 턱을 만지며 계속 떠들었다.“근데 소문이 그렇게 다 퍼졌는데 누가 거짓말이라고 믿겠어요? 그리고 진씨 집안에서 대응한 후 소문이 더 거세진 거죠. 예식장 사진까지 나오고. 소영 씨 지인이라는 사람이 채팅창 캡처 사진도 올렸잖아요. 소영 씨가 직접 약혼 사실을 시인했다는 대화 기록을 캡처한 거요. 제가 그걸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아세요?”윤아는 말없이 민우를 바라봤다.“아니 생각해 보세요. 진씨 집안에서 이미 헛소문이라고 말했는데, 왜 두 사람의 약혼 소문은 점점 더 거세질까. 뭔가 여자가 남자에게 약혼을 강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잖아요. 약혼한다는 소문이 다 돌았는데 약혼식 날 남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여자만 망신을 당하는 거고, 여자의 체면을 지켜주려면 남자가 약혼식에
“안 나타났다고?” 윤아는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네. 그랬대요.”윤아는 말이 없어졌다. ‘무슨 생각으로 안 간 거지? 은인이라면서 어떻게 감당하려고.’하지만 그가 약혼식에 안 갔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그때 많은 기자가 세기의 약혼식인 줄 알고 갔는데 남자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날 소영 씨 되게 불쌍했다고 그랬대요. 약혼식인데 남자는 안 보이지. 소영 씨도 망신이고 강씨 집안도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요. 근데 기자들이 사진은 못 찍었다 하더라고요. 뭐 찍혔다고 해도 다 폐기됐을걸요. ”윤아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아니면 진짜 거짓 소문인 게 아니었을까? 약혼식도 원래를 없었던 거고.”윤아는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애초에 수현이 자기와 계약 결혼도 깨고 애도 싫다고 한 게 다 소영 때문이었는데. 왜 그녀와의 약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거지?“처음에 누리꾼들도 그런 줄 알았는데 어느 기자가 봤을 때 엄청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더래요. 근데 기자들이 찍은 사진 다 폐기됐다고 하더라고요. 지나가던 행인이 영문을 모르고 들어가서 이쁘다고 몇 장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서 떠돌아다니다가 결국 그 사진들도 내려졌잖아요.”“사진 찍었다고?”“네, 저도 그때 소영 씨가 찍힌 사진을 봤거든요. 왜 그 손에 부케를 들고 있는 사진이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어요.”“사진을 봤어요?”윤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처음에는 약혼식이 그냥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민우가 사진까지 봤다고 하니 약혼식은 진짜 있었던 일이고 수현이 가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니까요. 진 대표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게 저는 잘 믿어지지 않아요. 몇 년동안 진 대표 옆에 다른 여자 있는걸 못 봤잖아요. 진짜로 그냥 대표님과 같이 아이들을 키우려고 한 게 아닐까요? 아니면…”민우는 잠시 말을 멈추고 윤아의 눈치를 살피면서 물었다. “대표님, 근데 이혼 왜 하셨어요? 두 분 사이 무슨 오해라도 있었던 게 아닐가요?”오해?윤아의 얼굴에 냉소가 어렸다. 오해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그가 아이를 뺏으려 한다면 그녀는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퇴근할 무렵, 그녀의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왔다. 바로 카톡으로 연락하는 ‘고독현 밤’이었다.[오늘 회사에 별일 없고 해서 일찍 퇴근해서 아이들을 집에 데려왔어요. 당신도 퇴근해서 바로 오면 될 것 같아요.]메시지 내용을 확인한 윤아는 두 눈을 의심했다.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답장했다.[안 돼요.]‘고독현 밤’이 바로 답장이 왔다.[뭐가 안된다는 거예요?][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가는 거요. 저의 의견도 존중해주셨으면 좋겠어요.]상대방은 한참 뒤에 답장했다.[윤아 씨, 내가 다시 생각나게 해줘요? 훈이 와 윤이, 내 자식이기도 해요.][그럴 필요 없어요. 아이들은 내가 키웠어요. 애들 아빠 누군지 내가 알아요. 어쨌든 당신은 아니에요.][그래요? 아니면 내가 애들 친자 검사해 볼까요?][아무튼 제 아이들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상대방은 오랫동안 답장이 없었다. 윤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나한테 설득당한 건가? 애들을 데려가지 않으려나?”하지만 이내 뭔가 잘못됨을 감지했다. 수현은 그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윤아는 불안해졌다. 퇴근까지 15분이 남았지만 상관하지 않고 조기 퇴근하려 서둘렀다.퇴근 준비를 하면서 윤아는 속으로 수현을 욕하기 시작했다. 매번 이 남자 때문에 조퇴해야 한다니.그때 핸드폰 메시지 알람이 뜨고 수현이 답장을 했다.[차에 탔어요. 집에 가는 중이에요.]“?”나쁜 자식! 그녀가 이를 갈며 전화하려던 찰나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전화하려고 했던 거면 본인 감정 잘 컨트롤 하죠. 애들도 옆에 있는데.]윤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아이들을 위해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전화하려던 생각을 접었다. 전화해서 뭐 한담? 그가 아이들을 다시 곱게 데려다 놓을 것도 아니었다. 수현은 아이들을 뺏어가기로 결심한 게 틀림없었다.윤아는 체념하고 더 이상 답장 하지 않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오만가지 생각
수현은 아이들을 데려온 후 요리사를 불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장난감도 가득 사 왔다. 두 아이의 취향을 잘 모르는 데다 장난감을 한 번도 사본 적이 없는 수현은 비서에게 장난감을 있는 대로 다 사 오게 하였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두 눈이 휘둥그레서 서로 눈치만 보았다.이윽고 윤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저씨, 이 장난감들 다 저랑 오빠를 주는 거예요?”“그래, 너희들 아빠가 되려면 이 정도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어? 일단 들어가서 맘에 드는 게 있는지 한번 볼까?”수현은 두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선 하윤이는 오빠한테 소곤거렸다. “오빠, 우리 이거 만져도 돼?”동생은 이미 참을성이 없어 보였다. 사실 훈이도 방안에 가득한 장난감을 보면서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훈이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만지지 말고 보기만 하자.”“왜? 아저씨가 우리 놀라고 사준 거 아니야?” 윤이는 아쉬운 듯 물었다.“아저씨가 사준 건 맞는데, 아직 우리 아빠도 아니잖아.”“하지만…”‘이렇게 재미있는 장난감들이 쌓여있는데 보기만 하라고?’윤이는 입을 삐죽하다가 이내 참지 못하고 장난감 하나를 집어서 포장을 뜯었다. 훈이가 말리려고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윤이는 장난감을 내밀면서 웃었다.“오빠, 이것 봐!”“윤아…”훈이는 얼굴을 찡그린 채 동생에게 뭐라고 하려 했지만, 수현이 다가오자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이게 마음에 들어?”수현은 윤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비행기 모형을 보면서 물었다.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인형도 있고 귀여운 장난감도 있었지만, 비행기 모형을 집어 든 딸을 보면서 그는 약간 의아해했다.수현의 물음에 윤이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좋아요. 윤이는 커서 멋진 비행기 조종사가 될 거예요.”“그래. 멋진 꿈이네.”수현은 딸이 그저 귀엽고 얌전한 성격인 줄 알았다. 조종사가 꿈이라니? 하긴 아이들의 상상력이 엉뚱해서 그럴 수도 있었다.
칭찬을 받은 윤이는 신나서 비행기 모형을 가지고 뛰어갔다.수현은 옆에 말없이 얌전히 서있는 훈이를 보면 물었다.“훈이는?”“네? 저요?”갑자기 쏠린 관심에 훈이는 긴장하고 있었다. “윤이는 꿈이 조종사 되는 거라던데, 우리 훈이는?”수현은 처음으로 아이들과 이렇게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고 어떤 걸 좋아하는지, 장래 희망이 뭔지를 물어본 것 같았다. 예전의 그는 아이들과 엮이는 걸 아주 질색 팔색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동안 떨어져 지낸 두 아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으며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 했다. 훈이는 수현의 눈길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아직 잘 모르겠어요.”옷자락만 만지작거리는 훈이의 작은 손을 바라보며 수현은 생각이 많아졌다.“아직 생각을 못 한 거야, 아니면 아저씨한테 알려주기 싫은 거야? 훈이야, 아저씨 생각엔 훈이가 또 아저씨를 싫어하는 것 같은데?”“아니에요.”훈이는 다급하게 부정했지만 아이가 자신에게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수현은 느낄 수 있었다. 훈이는 똑똑한 아이였다. 윤아가 아이들 앞에서 최선을 다해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분명히 뭔가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서 훈이가 아마도 자신을 이렇게 불편해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하면 아이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생각에 잠긴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엄마가 왔나 보다. 아저씨가 가서 열어주고 올게.”수현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그리고 훈이랑 윤이, 이제 더 이상 고독현 밤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고, 현 아저씨라고 부르면 안 될까?”말을 마치고 그는 아래층으로 향했다. 계속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윤아라면 어제도 집에 바로 들어온 적이 있어서 비밀번호를 알고 있을 텐데? 왜 계속 초인종을 누르지?’아마도 아이들을 데려온 그를 괘씸하게 여겨서 일부터 초인종을 계속 눌러 그를 골탕 먹이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역시 성질은 안 변했다니깐.
석훈은 자기 여신을 위해 불평을 이어갔다.“소영이가 너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알아? 너도 진짜 너무 한 거 아니야? 아무리 일이 바빠도 그렇지. 소영이 전화는 받아야 할 거 아니야.”양훈은 그런 석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석훈은 수현에게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어렸을 때부터 셋이 같이 놀던 사이이기도 했고, 집안끼리도 서로 잘 알고 지냈었기 때문에 수현도 그런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는 훨씬 관대했다. 하지만 그래도 어른이 된 지금은 어릴 적 친구들도 그의 눈치를 봐가면서 할말은 가려서 하는 편이지만 석훈은 여전히 뇌를 거치치 않고 마구 뱉어냈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그를 수현은 여러 번 경고했었지만, 고쳐질 기미는 안 보였다. 수현도 별수가 없었다. 장황한 불만을 늘어놓는 석훈을 무시하고 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일부러 올 필요는 없는데. 중요한 일 아니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말을 마친 수현은 문을 닫으려 했다.“수현 씨...”석훈은 손을 뻗어 문을 막으며 말했다.“야, 우리한테 연락을 안 한 건 그렇다 쳐. 근데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데 어쩜 차를 마시고 가라는 말도 없냐? 우리 남성에서 오자마자 여기로 너 보러 왔다고.”수현의 미간에 주름이 패었다. “오늘은 시간이 안 돼. 다음에 보자.”집안에는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조금 있으면 윤아도 도착할 것이다. 지금 이들을 들였다간 일이 어떻게 커질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단칼에 거절당한 석훈은 못마땅해 투덜거렸다.“수현아, 너 요즘 왜 그래? 우리 같은 친구는 이제 안중에도 없냐? 들어가서 얘기도 못 해? 차는 안 마셔도 되니까 얘기 좀 하자.”수현의 냉랭한 태도에 소영은 눈시울을 붉히면서 훌쩍였다.“수현 씨, 우리는 그저 수현 씨가 보고 싶어서...”수현의 시선은 양훈에게로 꽂혔다. 양훈은 코를 쓱 만지고는 수습에 나섰다. “아니면 오늘은 그만 돌아갈까? 수현이도 많이 바빠 보이는데 우리 나중에...”양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앳된 목소리가 들
‘맞아. 그러고 보니 아이가 수현 씨를 고독현 아저씨라고 불렀어. 고독현, 이건 또 무슨 뜻이지?’‘수현이라는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이 있었던가?’소영의 얼굴은 점차 일그러지더니 수현의 차가운 얼굴을 보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수현 씨, 저 아이는 누구야?” 양훈도 눈썹을 치켜뜬 채 조용히 수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 파악을 못 한 석훈은 계단에 서있는 윤이를 보면서 다짜고짜 물었다.“야, 쟤 너랑 되게 닮았는데? 설마 네 딸은 아니겠지?”석훈의 말이 끝나자, 소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주먹을 꽉 쥐었다. 긴 손톱은 살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애써 웃으며 물었다.“그런 거 아니지? 왜 전에도 수현 씨랑 닮은 애를 들이밀면서 수현 씨 애라고 그랬는데 알고 봤더니 애 얼굴을 뜯어고쳐서 수현 씨에게 빌붙으려고 그랬던 거잖아. 이 애도 그런 게 아닐까?”입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아이의 자연스러운 얼굴을 보면서 소영은 점차 자신이 없어졌다.그녀도 사실 알고 있었다. 성형을 한 거라면 얼굴이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는 것을. 더욱 그녀를 소름 끼치게 하는 것은 수현을 닮은 저 아이의 얼굴은 그 여자도 연상케 한다는 것이었다.윤아!소영은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도 싫었다. 그녀만 아니었다면 수현이랑 벌써 약혼하고도 남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문 앞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윤이는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귀여운 얼굴 때문에 어릴 때부터 주위 사람들이 하도 이쁘다고 해서 자주 있는 일이었다.눈앞의 상황을 보며 수현의 이마에 핏줄이 불끈 솟아났다. 윤아와 아이들이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까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은 그의 염원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 일은 너희들과 아무 상관이 없어. 더 이상 화내기 전에 나가줬으면 좋겠어.”“가긴 어디를 가. 수현아, 내 물음에 아직 대답 안 했잖아. 도대체 누구 애냐니까?”눈치 없는 석훈은 제 발로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