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그러고 보니 아이가 수현 씨를 고독현 아저씨라고 불렀어. 고독현, 이건 또 무슨 뜻이지?’‘수현이라는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이 있었던가?’소영의 얼굴은 점차 일그러지더니 수현의 차가운 얼굴을 보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수현 씨, 저 아이는 누구야?” 양훈도 눈썹을 치켜뜬 채 조용히 수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 파악을 못 한 석훈은 계단에 서있는 윤이를 보면서 다짜고짜 물었다.“야, 쟤 너랑 되게 닮았는데? 설마 네 딸은 아니겠지?”석훈의 말이 끝나자, 소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주먹을 꽉 쥐었다. 긴 손톱은 살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애써 웃으며 물었다.“그런 거 아니지? 왜 전에도 수현 씨랑 닮은 애를 들이밀면서 수현 씨 애라고 그랬는데 알고 봤더니 애 얼굴을 뜯어고쳐서 수현 씨에게 빌붙으려고 그랬던 거잖아. 이 애도 그런 게 아닐까?”입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아이의 자연스러운 얼굴을 보면서 소영은 점차 자신이 없어졌다.그녀도 사실 알고 있었다. 성형을 한 거라면 얼굴이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는 것을. 더욱 그녀를 소름 끼치게 하는 것은 수현을 닮은 저 아이의 얼굴은 그 여자도 연상케 한다는 것이었다.윤아!소영은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도 싫었다. 그녀만 아니었다면 수현이랑 벌써 약혼하고도 남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문 앞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윤이는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귀여운 얼굴 때문에 어릴 때부터 주위 사람들이 하도 이쁘다고 해서 자주 있는 일이었다.눈앞의 상황을 보며 수현의 이마에 핏줄이 불끈 솟아났다. 윤아와 아이들이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까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은 그의 염원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 일은 너희들과 아무 상관이 없어. 더 이상 화내기 전에 나가줬으면 좋겠어.”“가긴 어디를 가. 수현아, 내 물음에 아직 대답 안 했잖아. 도대체 누구 애냐니까?”눈치 없는 석훈은 제 발로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멀리서 윤아는 별장 문 앞에 낯익은 그림자 몇 개를 발견하였다. 가까이 다가간 후에야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석훈 씨, 양훈 씨, 그리고 소...영.소영의 가녀린 실루엣을 보면서 그녀는 지난번 경매장에서의 두 사람 모습을 떠올렸다. 그 뒤로 수현 옆에서 그녀를 본 적이 없었는데 여기에 나타나다니.자신의 아이들은 집 안에 있고 여기에 소영이 왔다는 것은...얼굴이 굳어진 채로 별장으로 달려간 윤아는 마침 수현이는 석훈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내던지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석훈은 그녀와 멀지 않은 곳에 내팽개쳐졌다. 석훈이를 부축하려던 소영과 양훈도 가로등 아래에 있는 윤아의 그림자를 발견하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오가고 마침내 모두 윤아에게 쏠렸다. 윤아를 본 소영은 귀신이라도 본 듯 눈이 커졌다. 지난 5년간 수현은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소영은 자신이 항상 특별한 여자라고 여겨왔다.소영은 처음에 윤아가 약속을 어기고 갑자기 귀국할까 봐 두려웠었다. 그녀가 돌아오면 자신은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게 뻔했다.하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윤아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야 소영은 마음이 놓였다. 윤아도 아마 결혼하고 옆에는 다른 남자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5년은 아주 긴 시간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변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윤아를 보면서 소영은 자신이 질 거란걸 확신하였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윤아는 한층 더 여성스러워져 매력을 풍기고 있었으며 소영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잠깐만, 그러면 저 안에 있는 애가 윤아의 자식인가? 윤아의 애가 왜 수현 씨 집에 있지?’그녀의 머릿속에서 물음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끝내 모든 게 윤곽을 드러내는 듯했다. 양훈도 사실 속으로 대충 짐작은 했지만 윤아가 나타나자, 거의 백 프로 확신하였다. 바닥에 누워 있던 석훈은 소영이가 일으켜주기를 기다리다 이내 자리를
하지만 윤아는 더 이상 그들과 엮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저 빨리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오고 싶었다.망설임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면서 석훈은 소리 질렀다.“수현아, 저 여자가 왜 여기 있어? 너 예전에 이혼한 거 아니야? 안에 있는 애는 또 뭐냐?”석훈은 제 분을 못 이겨 미쳐 날뛰고 있었다.“너 이러고 무슨 낯으로 소영이를 만나?”자신의 이름을 들은 소영은 눈시울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석훈은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수현을 보면서 더욱 화가 치밀었다. 석훈은 소영을 몇 년 동안 계속 좋아하고 있었다. 바람불면 날아갈까 애지중지 옆에서 지켜보던 여신이 이런 대접을 받으니, 그는 견딜 수 없었다. “오늘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너 이거 분명하게 얘기하라고. 아니면 내가 너랑 끝장 볼 거야”말을 마치고 석훈은 수현의 멱살을 잡으려고 다가갔다.수현은 얼굴이 굳은 채 차갑게 대꾸했다.“그만해.”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석훈은 그만 움찔하고 말았다. “알았어. 대신 너 이거 오늘 꼭 해명해야 한다고!”“뭘 해명해? 언제부터 내가 너한테 일일이 보고하고 다녔어?”석훈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이게 어디 너 혼자 일이야? 소영이 일이기도 하잖아. 걔가 너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너는 다른 여자나 만나고. 소영이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옆집까지 울려 퍼졌다.윤아는 그들끼리 싸우도록 내버려두고 집안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 순간 그녀는 언제 나왔는지 모를 두 아이를 발견하였다. 아이들은 수현의 뒤쪽에 서서 까치발을 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아는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좋은 것만 봐도 모자랄 판에 이런 어지러운 장면을 볼 것을 생각하니 그녀는 망설임 없이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빨리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밖에 없었다.‘싸울 테면 싸우라지. 내가 알게 뭐람.’윤아가 지나가려는 순간 석훈은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잡고서 트집을 잡았다.“
멋있게 소영의 편을 들어주려던 석훈은 보기 좋게 수현이한테 제지당하자 화가 났다. 그래서 마침 윤아가 눈에 띄었고 불똥이 그녀에게로 튀었다. 하지만 석훈은 자기 행동이 수현이를 이토록 화나게 할 줄은 몰랐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수현이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손을 놓으려고 했지만, 너무 늦었다. 퍽 소리와 함께 석훈은 바닥으로 떨어져 나갔다. 윤아가 알아채기도 전에 수현은 그녀의 허리를 감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윤아는 놀라서 수현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그의 향기가 코끝을 감쌌다. ‘어깨를 잡았다고 이렇게 화를 낸 건가?’바닥에 나뒹굴던 석훈도 화가 난 나머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서 수현에게 주먹을 휘둘렀다.“너 이 자식, 지금 저 여자 때문에 나를 쳐? 진짜 오늘 끝을 보자고!” 수현은 윤아를 등 뒤에 가린 후 한 손으로 가볍게 주먹을 막았다. 석훈은 자기 주먹을 아무렇지 않게 잡은 수현을 놀란 듯 바라보았다.“정신 차려.석현.” “정신 차려야 할 사람은 너야! 너는 소영이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석훈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남은 손도 휘둘렀다. “퍽”주먹이 수현의 턱에 꽂혔다. 놀란 윤아가 그의 얼굴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 소영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꺅. 석현 씨, 그만해!”소영은 울 듯한 얼굴로 수현의 팔에 매달려 석훈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나 때문에 싸우지들 말고 말로 풀어.”소영이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자신 때문에 싸우지 말라니? 아니 이게 어딜 봐서?”양훈은 어이없어하는 윤아와 한데 엉켜있는 세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너희 그거 놓고 말로 하자. 응? 친구들끼리 이게 무슨 꼴이야.”석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갈며 말했다.“얘가 먼저 손찌검했잖아.”“네가 윤아에게 손대지 않았더라면 수현이도 그러지 않았을 거잖아.”양훈은 맞받아쳤다.“야, 내가 어깨만 잡았잖아, 때리기라도 했냐?”“그래, 때리지는 않았지. 그래도 그렇게 잡으면 아프잖아.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을 그렇게 막 잡아도 돼? 너는
양훈은 다가가 석훈을 말렸지만 소용없었다.양훈은 할 수 없이 소영에게 석훈을 좀 말려보라고 눈치를 주었다. 소영이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석훈 씨, 우선 이거 놓고 얘기해.”그제야 석훈은 그녀의 말대로 천천히 손을 놓았다. 하지만 수현은 석훈의 주먹을 잡은 채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수현 씨...”소영은 수현을 달래기 시작했다.“수현 씨도 우선 이거 놓고 얘기해.”하지만 수현은 아무 말 없이 석훈을 노려보기만 할 뿐 꿈적하지도 않았다.양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가 일부러 너를 귀찮게 하러 온 게 아니야. 정말 그냥 네가 잘 지내나 걱정돼서 보러온 거야.”수현의 얼굴에는 냉소가 지어졌다.“그렇게 걱정돼서 여기서 지금 행패를 부리고 있어?”“아니...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된 거지...”수현은 코웃음을 쳤지만, 여전히 손 놓을 기미가 안 보였다.양훈은 최후의 방법으로 윤아를 바라보았다. 이젠 그녀만이 수현을 설득할 수 있었다.윤아는 그의 시선을 알아챘지만 이내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뭐야. 자기랑 상관없다는 건가?’‘그냥 이대로 문 앞에서 밤을 새우게 생겼는데?”양훈은 수현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다. 화나 가면 누가 뭐래도 듣지 않았다. 다행히 옆에 윤아가 있어 설득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도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순간, 작은 머리 하나가 수현의 뒤에서 쏙 나오더니 작은 손이 수현의 옷자락을 당겼다. 순간 굳어졌던 수현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윤이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아저씨, 지금 친구랑 싸우는 거예요?”자리에 서있던 어른들의 시선이 일제히 윤이한테 쏠렸다.윤이의 귀여운 얼굴에 양훈과 석훈도 눈을 떼지 못하였다. 윤아는 딸을 옆으로 데려와서 말했다.“어른들의 일이니까 윤이는 신경 안 써도 돼.”눈앞에 쪼그려 앉은 엄마를 보면서 윤이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오빠는 어딨어? 오빠를 불러서 같이 집에 가자.”“오빠는 엄마 뒤에 있는데.”
‘뭐야? 윤아가 아들딸 쌍둥이를 낳은 거야?’‘근데 두 명을 낳은 거라면 5년 동안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울 수는 없잖아?’‘그래. 아마 다시 재혼했을지도 모르지.’소영은 머리가 터질듯했지만, 가까스로 자신을 위로하면서 진정했다. 수현은 윤이를 발견한 순간 이내 석훈에게서 손을 떼고 떨어졌다.양훈은 그런 그의 행동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훈이는 여동생 따라 윤아의 등 뒤로 숨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려는 윤아를 보면서 석훈이가 또 시비를 걸기 시작하였다.“수현아,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얘들 다 네 자식들인 거야? 윤아와 자식까지 낳아 놓고 소영이는 어떡하라고. 소영이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수현의 눈빛은 마침 윤아와 마주쳤다. 윤아는 그동안 수현에게 줄곧 냉담하게 대했고 그의 말도 믿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이 몇 년 동안의 일도 그녀에게 자세히 설명할 기회도 없었다. 수현은 지금이 바로 해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기고 이내 입을 열었다. “5년 전에 나는 소영이한테 분명히 말했어. 네가 소영이랑 그렇게 가깝게 지내는데, 소영이가 너한테는 얘기를 안 해줬나 봐?”수현은 말하면서 시선은 계속 윤아한테로 향했다. 윤아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무슨 얘기?” 석훈은 이해가 안 되는 표정으로 소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소영아, 이게 다 무슨 뜻이야? 수현이랑 무슨 얘기 한 거야? 내가 뭘 모른다는 거지?”겨우 진정한 소영의 가슴이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였다. 가뜩이나 핏기가 없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녀는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수현이 그 일을 입에 올릴 줄 몰랐다. 약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날 소영은 그를 찾아갔고 그때 둘이 나눈 이야기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소영아, 다시는 이런 일 벌이지 마.”소영이가 찾아간 날 수현이가 유리창 앞에서 그녀를 등지고 한 말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차가운 뒷모습만 보였었다. 소영이는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수현 씨 옆자리에 내가 설 수 있다고 수현 씨가 자기 입으
수현은 입을 꾹 닫은 채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서있었다. “수현 씨, 뭐라고 말 좀 해봐. 사형수도 죽기 전에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알려주잖아.”“내가 수현 씨를 구해줬던 걸 생각해서도 왜 이러는지 알려주면 안 돼?”차갑던 수현의 마음이 조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돌아서서 말없이 소영을 바라보았다. “그래. 네가 생명의 은인이라서 나의 옆자리를 줄곧 너한테 남겨두었어.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너한테도 나한테도 모두 불공평해.”“나한테 불공평하다고? 왜?”소영은 반사적으로 물었지만, 담담한 그의 표정을 보고서 이내 깨달았다.믿어지지 않아 하는 그녀를 보면서 수현은 말했다.“사랑이 없는 부부가 행복할까? 소영아, 너는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해.”‘사랑이 없다고?’‘내가 수현 씨를 사랑하는 걸 알면서도? 그러면 사랑이 없다는 건 수현 씨가...’ “소영아, 네가 필요한 걸 다 줄 수 있어. 근데 이것만은 안 돼.”소영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다른 건 필요 없고 이것만 꼭 가져야 하겠다면?”수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그 후 소영은 매일 그의 회사로 찾아가 소란을 피웠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의 부모도 나서서 설득했지만, 수현은 끄떡하지 않았다. 수현은 매일 찾아오는 소영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아마 ‘은인’이라는 방패 때문이었을 것이다.나중에 그가 약혼식에 나타나지 않자, 그녀가 버림받았다는 소식은 하룻밤 사이에 퍼졌고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시간이 지나고 소영의 어머니는 딸에게 더 이상 남자에게 강요하지 말고 살살 꼬드기라고 알려줬다.“걔가 너한테 마음도 없는데 네가 허구한 날 들이댄다고 소용이 있겠냐. 게다가 이런 일까지 벌였으니 더 싫어질 수밖에. 일단 엄마 말 들어, 차라리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나을 거야.”“약한 모습?”“그래. 네가 잘못했다고 빌어. 지금 너한테 마음 없어도 괜찮아. 친구로 지내자고 하고 옆에 붙어있으면 돼. 시간이
소영이 엄마 말대로 하자 과연 수현이 경계심을 내려놓았다.강소영은 수현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이다. 누가 뭐라든 수현의 마음속엔 늘 그녀의 자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게 설령 사랑이 아닌 고마움뿐이라도 말이다.게다가 윤아는 당시 멀리 떠나버린 뒤였다. 장장 5년이란 그 긴 시간은 소영에게 수현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하지만...진수현이 5년 동안 정말 한 번도 흔들리지 않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수현은 그 긴 시간 동안 소영을 친구 그 이상으로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게다가 소영이 친구라는 그 선을 넘으려 할 때마다 수현은 단칼에 제지하곤 했었다.덕분에 소영은 매번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소영아?”석훈의 부름에 소영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그러자 그녀의 앞에 보이는 건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다급한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석훈이었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진수현한테 뭐라 했는데?”그 말에 소영은 입술을 앙다문 채 석훈의 손을 밀쳐냈다.지금 그에게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사람들 앞에서 수현 씨와는 그냥 친구라고 말하라고? 아니, 그건 절대 못 한다.친구로 지내자던 말은 진짜 수현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해서 수현과 더 가까워질 기회를 만들기 위함이었다.애초에 그와 정말 친구로 지낼 생각 따위 없었으니.“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야.”소영이 한창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수현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것도 보란 듯이 윤아와 마주 보며 진지하게 말이다.그 말에 소영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물었다.5년 동안 그 어떤 일에도 관심을 두지 않던 그가 고작 심윤아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해명을 한다고?한편, 수현의 말에 윤아는 눈썹을 찌푸렸다. 조금 전 그 말은 어떻게든 모른 척할 수 있었지만 이 말까지 못 들은 척하는 건 무리였다.말을 마친 수현이 곧장 그녀의 손목을 잡아 왔기 때문이다. 그는 윤아의 호수 같은 눈을 지그시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