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그러고 보니 아이가 수현 씨를 고독현 아저씨라고 불렀어. 고독현, 이건 또 무슨 뜻이지?’‘수현이라는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이 있었던가?’소영의 얼굴은 점차 일그러지더니 수현의 차가운 얼굴을 보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수현 씨, 저 아이는 누구야?” 양훈도 눈썹을 치켜뜬 채 조용히 수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 파악을 못 한 석훈은 계단에 서있는 윤이를 보면서 다짜고짜 물었다.“야, 쟤 너랑 되게 닮았는데? 설마 네 딸은 아니겠지?”석훈의 말이 끝나자, 소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주먹을 꽉 쥐었다. 긴 손톱은 살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애써 웃으며 물었다.“그런 거 아니지? 왜 전에도 수현 씨랑 닮은 애를 들이밀면서 수현 씨 애라고 그랬는데 알고 봤더니 애 얼굴을 뜯어고쳐서 수현 씨에게 빌붙으려고 그랬던 거잖아. 이 애도 그런 게 아닐까?”입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아이의 자연스러운 얼굴을 보면서 소영은 점차 자신이 없어졌다.그녀도 사실 알고 있었다. 성형을 한 거라면 얼굴이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는 것을. 더욱 그녀를 소름 끼치게 하는 것은 수현을 닮은 저 아이의 얼굴은 그 여자도 연상케 한다는 것이었다.윤아!소영은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도 싫었다. 그녀만 아니었다면 수현이랑 벌써 약혼하고도 남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문 앞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윤이는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귀여운 얼굴 때문에 어릴 때부터 주위 사람들이 하도 이쁘다고 해서 자주 있는 일이었다.눈앞의 상황을 보며 수현의 이마에 핏줄이 불끈 솟아났다. 윤아와 아이들이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까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은 그의 염원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 일은 너희들과 아무 상관이 없어. 더 이상 화내기 전에 나가줬으면 좋겠어.”“가긴 어디를 가. 수현아, 내 물음에 아직 대답 안 했잖아. 도대체 누구 애냐니까?”눈치 없는 석훈은 제 발로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멀리서 윤아는 별장 문 앞에 낯익은 그림자 몇 개를 발견하였다. 가까이 다가간 후에야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석훈 씨, 양훈 씨, 그리고 소...영.소영의 가녀린 실루엣을 보면서 그녀는 지난번 경매장에서의 두 사람 모습을 떠올렸다. 그 뒤로 수현 옆에서 그녀를 본 적이 없었는데 여기에 나타나다니.자신의 아이들은 집 안에 있고 여기에 소영이 왔다는 것은...얼굴이 굳어진 채로 별장으로 달려간 윤아는 마침 수현이는 석훈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내던지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석훈은 그녀와 멀지 않은 곳에 내팽개쳐졌다. 석훈이를 부축하려던 소영과 양훈도 가로등 아래에 있는 윤아의 그림자를 발견하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오가고 마침내 모두 윤아에게 쏠렸다. 윤아를 본 소영은 귀신이라도 본 듯 눈이 커졌다. 지난 5년간 수현은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소영은 자신이 항상 특별한 여자라고 여겨왔다.소영은 처음에 윤아가 약속을 어기고 갑자기 귀국할까 봐 두려웠었다. 그녀가 돌아오면 자신은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게 뻔했다.하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윤아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야 소영은 마음이 놓였다. 윤아도 아마 결혼하고 옆에는 다른 남자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5년은 아주 긴 시간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변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윤아를 보면서 소영은 자신이 질 거란걸 확신하였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윤아는 한층 더 여성스러워져 매력을 풍기고 있었으며 소영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잠깐만, 그러면 저 안에 있는 애가 윤아의 자식인가? 윤아의 애가 왜 수현 씨 집에 있지?’그녀의 머릿속에서 물음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끝내 모든 게 윤곽을 드러내는 듯했다. 양훈도 사실 속으로 대충 짐작은 했지만 윤아가 나타나자, 거의 백 프로 확신하였다. 바닥에 누워 있던 석훈은 소영이가 일으켜주기를 기다리다 이내 자리를
하지만 윤아는 더 이상 그들과 엮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저 빨리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오고 싶었다.망설임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면서 석훈은 소리 질렀다.“수현아, 저 여자가 왜 여기 있어? 너 예전에 이혼한 거 아니야? 안에 있는 애는 또 뭐냐?”석훈은 제 분을 못 이겨 미쳐 날뛰고 있었다.“너 이러고 무슨 낯으로 소영이를 만나?”자신의 이름을 들은 소영은 눈시울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석훈은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수현을 보면서 더욱 화가 치밀었다. 석훈은 소영을 몇 년 동안 계속 좋아하고 있었다. 바람불면 날아갈까 애지중지 옆에서 지켜보던 여신이 이런 대접을 받으니, 그는 견딜 수 없었다. “오늘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너 이거 분명하게 얘기하라고. 아니면 내가 너랑 끝장 볼 거야”말을 마치고 석훈은 수현의 멱살을 잡으려고 다가갔다.수현은 얼굴이 굳은 채 차갑게 대꾸했다.“그만해.”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석훈은 그만 움찔하고 말았다. “알았어. 대신 너 이거 오늘 꼭 해명해야 한다고!”“뭘 해명해? 언제부터 내가 너한테 일일이 보고하고 다녔어?”석훈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이게 어디 너 혼자 일이야? 소영이 일이기도 하잖아. 걔가 너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너는 다른 여자나 만나고. 소영이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옆집까지 울려 퍼졌다.윤아는 그들끼리 싸우도록 내버려두고 집안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 순간 그녀는 언제 나왔는지 모를 두 아이를 발견하였다. 아이들은 수현의 뒤쪽에 서서 까치발을 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아는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좋은 것만 봐도 모자랄 판에 이런 어지러운 장면을 볼 것을 생각하니 그녀는 망설임 없이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빨리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밖에 없었다.‘싸울 테면 싸우라지. 내가 알게 뭐람.’윤아가 지나가려는 순간 석훈은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잡고서 트집을 잡았다.“
멋있게 소영의 편을 들어주려던 석훈은 보기 좋게 수현이한테 제지당하자 화가 났다. 그래서 마침 윤아가 눈에 띄었고 불똥이 그녀에게로 튀었다. 하지만 석훈은 자기 행동이 수현이를 이토록 화나게 할 줄은 몰랐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수현이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손을 놓으려고 했지만, 너무 늦었다. 퍽 소리와 함께 석훈은 바닥으로 떨어져 나갔다. 윤아가 알아채기도 전에 수현은 그녀의 허리를 감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윤아는 놀라서 수현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그의 향기가 코끝을 감쌌다. ‘어깨를 잡았다고 이렇게 화를 낸 건가?’바닥에 나뒹굴던 석훈도 화가 난 나머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서 수현에게 주먹을 휘둘렀다.“너 이 자식, 지금 저 여자 때문에 나를 쳐? 진짜 오늘 끝을 보자고!” 수현은 윤아를 등 뒤에 가린 후 한 손으로 가볍게 주먹을 막았다. 석훈은 자기 주먹을 아무렇지 않게 잡은 수현을 놀란 듯 바라보았다.“정신 차려.석현.” “정신 차려야 할 사람은 너야! 너는 소영이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석훈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남은 손도 휘둘렀다. “퍽”주먹이 수현의 턱에 꽂혔다. 놀란 윤아가 그의 얼굴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 소영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꺅. 석현 씨, 그만해!”소영은 울 듯한 얼굴로 수현의 팔에 매달려 석훈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나 때문에 싸우지들 말고 말로 풀어.”소영이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자신 때문에 싸우지 말라니? 아니 이게 어딜 봐서?”양훈은 어이없어하는 윤아와 한데 엉켜있는 세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너희 그거 놓고 말로 하자. 응? 친구들끼리 이게 무슨 꼴이야.”석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갈며 말했다.“얘가 먼저 손찌검했잖아.”“네가 윤아에게 손대지 않았더라면 수현이도 그러지 않았을 거잖아.”양훈은 맞받아쳤다.“야, 내가 어깨만 잡았잖아, 때리기라도 했냐?”“그래, 때리지는 않았지. 그래도 그렇게 잡으면 아프잖아.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을 그렇게 막 잡아도 돼? 너는
양훈은 다가가 석훈을 말렸지만 소용없었다.양훈은 할 수 없이 소영에게 석훈을 좀 말려보라고 눈치를 주었다. 소영이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석훈 씨, 우선 이거 놓고 얘기해.”그제야 석훈은 그녀의 말대로 천천히 손을 놓았다. 하지만 수현은 석훈의 주먹을 잡은 채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수현 씨...”소영은 수현을 달래기 시작했다.“수현 씨도 우선 이거 놓고 얘기해.”하지만 수현은 아무 말 없이 석훈을 노려보기만 할 뿐 꿈적하지도 않았다.양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가 일부러 너를 귀찮게 하러 온 게 아니야. 정말 그냥 네가 잘 지내나 걱정돼서 보러온 거야.”수현의 얼굴에는 냉소가 지어졌다.“그렇게 걱정돼서 여기서 지금 행패를 부리고 있어?”“아니...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된 거지...”수현은 코웃음을 쳤지만, 여전히 손 놓을 기미가 안 보였다.양훈은 최후의 방법으로 윤아를 바라보았다. 이젠 그녀만이 수현을 설득할 수 있었다.윤아는 그의 시선을 알아챘지만 이내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뭐야. 자기랑 상관없다는 건가?’‘그냥 이대로 문 앞에서 밤을 새우게 생겼는데?”양훈은 수현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다. 화나 가면 누가 뭐래도 듣지 않았다. 다행히 옆에 윤아가 있어 설득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도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순간, 작은 머리 하나가 수현의 뒤에서 쏙 나오더니 작은 손이 수현의 옷자락을 당겼다. 순간 굳어졌던 수현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윤이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아저씨, 지금 친구랑 싸우는 거예요?”자리에 서있던 어른들의 시선이 일제히 윤이한테 쏠렸다.윤이의 귀여운 얼굴에 양훈과 석훈도 눈을 떼지 못하였다. 윤아는 딸을 옆으로 데려와서 말했다.“어른들의 일이니까 윤이는 신경 안 써도 돼.”눈앞에 쪼그려 앉은 엄마를 보면서 윤이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오빠는 어딨어? 오빠를 불러서 같이 집에 가자.”“오빠는 엄마 뒤에 있는데.”
‘뭐야? 윤아가 아들딸 쌍둥이를 낳은 거야?’‘근데 두 명을 낳은 거라면 5년 동안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울 수는 없잖아?’‘그래. 아마 다시 재혼했을지도 모르지.’소영은 머리가 터질듯했지만, 가까스로 자신을 위로하면서 진정했다. 수현은 윤이를 발견한 순간 이내 석훈에게서 손을 떼고 떨어졌다.양훈은 그런 그의 행동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훈이는 여동생 따라 윤아의 등 뒤로 숨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려는 윤아를 보면서 석훈이가 또 시비를 걸기 시작하였다.“수현아,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얘들 다 네 자식들인 거야? 윤아와 자식까지 낳아 놓고 소영이는 어떡하라고. 소영이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수현의 눈빛은 마침 윤아와 마주쳤다. 윤아는 그동안 수현에게 줄곧 냉담하게 대했고 그의 말도 믿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이 몇 년 동안의 일도 그녀에게 자세히 설명할 기회도 없었다. 수현은 지금이 바로 해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기고 이내 입을 열었다. “5년 전에 나는 소영이한테 분명히 말했어. 네가 소영이랑 그렇게 가깝게 지내는데, 소영이가 너한테는 얘기를 안 해줬나 봐?”수현은 말하면서 시선은 계속 윤아한테로 향했다. 윤아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무슨 얘기?” 석훈은 이해가 안 되는 표정으로 소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소영아, 이게 다 무슨 뜻이야? 수현이랑 무슨 얘기 한 거야? 내가 뭘 모른다는 거지?”겨우 진정한 소영의 가슴이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였다. 가뜩이나 핏기가 없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녀는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수현이 그 일을 입에 올릴 줄 몰랐다. 약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날 소영은 그를 찾아갔고 그때 둘이 나눈 이야기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소영아, 다시는 이런 일 벌이지 마.”소영이가 찾아간 날 수현이가 유리창 앞에서 그녀를 등지고 한 말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차가운 뒷모습만 보였었다. 소영이는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수현 씨 옆자리에 내가 설 수 있다고 수현 씨가 자기 입으
수현은 입을 꾹 닫은 채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서있었다. “수현 씨, 뭐라고 말 좀 해봐. 사형수도 죽기 전에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알려주잖아.”“내가 수현 씨를 구해줬던 걸 생각해서도 왜 이러는지 알려주면 안 돼?”차갑던 수현의 마음이 조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돌아서서 말없이 소영을 바라보았다. “그래. 네가 생명의 은인이라서 나의 옆자리를 줄곧 너한테 남겨두었어.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너한테도 나한테도 모두 불공평해.”“나한테 불공평하다고? 왜?”소영은 반사적으로 물었지만, 담담한 그의 표정을 보고서 이내 깨달았다.믿어지지 않아 하는 그녀를 보면서 수현은 말했다.“사랑이 없는 부부가 행복할까? 소영아, 너는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해.”‘사랑이 없다고?’‘내가 수현 씨를 사랑하는 걸 알면서도? 그러면 사랑이 없다는 건 수현 씨가...’ “소영아, 네가 필요한 걸 다 줄 수 있어. 근데 이것만은 안 돼.”소영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다른 건 필요 없고 이것만 꼭 가져야 하겠다면?”수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그 후 소영은 매일 그의 회사로 찾아가 소란을 피웠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의 부모도 나서서 설득했지만, 수현은 끄떡하지 않았다. 수현은 매일 찾아오는 소영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아마 ‘은인’이라는 방패 때문이었을 것이다.나중에 그가 약혼식에 나타나지 않자, 그녀가 버림받았다는 소식은 하룻밤 사이에 퍼졌고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시간이 지나고 소영의 어머니는 딸에게 더 이상 남자에게 강요하지 말고 살살 꼬드기라고 알려줬다.“걔가 너한테 마음도 없는데 네가 허구한 날 들이댄다고 소용이 있겠냐. 게다가 이런 일까지 벌였으니 더 싫어질 수밖에. 일단 엄마 말 들어, 차라리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나을 거야.”“약한 모습?”“그래. 네가 잘못했다고 빌어. 지금 너한테 마음 없어도 괜찮아. 친구로 지내자고 하고 옆에 붙어있으면 돼. 시간이
소영이 엄마 말대로 하자 과연 수현이 경계심을 내려놓았다.강소영은 수현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이다. 누가 뭐라든 수현의 마음속엔 늘 그녀의 자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게 설령 사랑이 아닌 고마움뿐이라도 말이다.게다가 윤아는 당시 멀리 떠나버린 뒤였다. 장장 5년이란 그 긴 시간은 소영에게 수현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하지만...진수현이 5년 동안 정말 한 번도 흔들리지 않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수현은 그 긴 시간 동안 소영을 친구 그 이상으로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게다가 소영이 친구라는 그 선을 넘으려 할 때마다 수현은 단칼에 제지하곤 했었다.덕분에 소영은 매번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소영아?”석훈의 부름에 소영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그러자 그녀의 앞에 보이는 건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다급한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석훈이었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진수현한테 뭐라 했는데?”그 말에 소영은 입술을 앙다문 채 석훈의 손을 밀쳐냈다.지금 그에게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사람들 앞에서 수현 씨와는 그냥 친구라고 말하라고? 아니, 그건 절대 못 한다.친구로 지내자던 말은 진짜 수현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해서 수현과 더 가까워질 기회를 만들기 위함이었다.애초에 그와 정말 친구로 지낼 생각 따위 없었으니.“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야.”소영이 한창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수현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것도 보란 듯이 윤아와 마주 보며 진지하게 말이다.그 말에 소영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물었다.5년 동안 그 어떤 일에도 관심을 두지 않던 그가 고작 심윤아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해명을 한다고?한편, 수현의 말에 윤아는 눈썹을 찌푸렸다. 조금 전 그 말은 어떻게든 모른 척할 수 있었지만 이 말까지 못 들은 척하는 건 무리였다.말을 마친 수현이 곧장 그녀의 손목을 잡아 왔기 때문이다. 그는 윤아의 호수 같은 눈을 지그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