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은 입을 꾹 닫은 채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서있었다. “수현 씨, 뭐라고 말 좀 해봐. 사형수도 죽기 전에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알려주잖아.”“내가 수현 씨를 구해줬던 걸 생각해서도 왜 이러는지 알려주면 안 돼?”차갑던 수현의 마음이 조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돌아서서 말없이 소영을 바라보았다. “그래. 네가 생명의 은인이라서 나의 옆자리를 줄곧 너한테 남겨두었어.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너한테도 나한테도 모두 불공평해.”“나한테 불공평하다고? 왜?”소영은 반사적으로 물었지만, 담담한 그의 표정을 보고서 이내 깨달았다.믿어지지 않아 하는 그녀를 보면서 수현은 말했다.“사랑이 없는 부부가 행복할까? 소영아, 너는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해.”‘사랑이 없다고?’‘내가 수현 씨를 사랑하는 걸 알면서도? 그러면 사랑이 없다는 건 수현 씨가...’ “소영아, 네가 필요한 걸 다 줄 수 있어. 근데 이것만은 안 돼.”소영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다른 건 필요 없고 이것만 꼭 가져야 하겠다면?”수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그 후 소영은 매일 그의 회사로 찾아가 소란을 피웠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의 부모도 나서서 설득했지만, 수현은 끄떡하지 않았다. 수현은 매일 찾아오는 소영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아마 ‘은인’이라는 방패 때문이었을 것이다.나중에 그가 약혼식에 나타나지 않자, 그녀가 버림받았다는 소식은 하룻밤 사이에 퍼졌고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시간이 지나고 소영의 어머니는 딸에게 더 이상 남자에게 강요하지 말고 살살 꼬드기라고 알려줬다.“걔가 너한테 마음도 없는데 네가 허구한 날 들이댄다고 소용이 있겠냐. 게다가 이런 일까지 벌였으니 더 싫어질 수밖에. 일단 엄마 말 들어, 차라리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나을 거야.”“약한 모습?”“그래. 네가 잘못했다고 빌어. 지금 너한테 마음 없어도 괜찮아. 친구로 지내자고 하고 옆에 붙어있으면 돼. 시간이
소영이 엄마 말대로 하자 과연 수현이 경계심을 내려놓았다.강소영은 수현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이다. 누가 뭐라든 수현의 마음속엔 늘 그녀의 자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게 설령 사랑이 아닌 고마움뿐이라도 말이다.게다가 윤아는 당시 멀리 떠나버린 뒤였다. 장장 5년이란 그 긴 시간은 소영에게 수현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하지만...진수현이 5년 동안 정말 한 번도 흔들리지 않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수현은 그 긴 시간 동안 소영을 친구 그 이상으로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게다가 소영이 친구라는 그 선을 넘으려 할 때마다 수현은 단칼에 제지하곤 했었다.덕분에 소영은 매번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소영아?”석훈의 부름에 소영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그러자 그녀의 앞에 보이는 건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다급한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석훈이었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진수현한테 뭐라 했는데?”그 말에 소영은 입술을 앙다문 채 석훈의 손을 밀쳐냈다.지금 그에게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사람들 앞에서 수현 씨와는 그냥 친구라고 말하라고? 아니, 그건 절대 못 한다.친구로 지내자던 말은 진짜 수현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해서 수현과 더 가까워질 기회를 만들기 위함이었다.애초에 그와 정말 친구로 지낼 생각 따위 없었으니.“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야.”소영이 한창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수현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것도 보란 듯이 윤아와 마주 보며 진지하게 말이다.그 말에 소영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물었다.5년 동안 그 어떤 일에도 관심을 두지 않던 그가 고작 심윤아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해명을 한다고?한편, 수현의 말에 윤아는 눈썹을 찌푸렸다. 조금 전 그 말은 어떻게든 모른 척할 수 있었지만 이 말까지 못 들은 척하는 건 무리였다.말을 마친 수현이 곧장 그녀의 손목을 잡아 왔기 때문이다. 그는 윤아의 호수 같은 눈을 지그시
하지만 윤아가 석훈의 곁을 지나가던 그때, 갑자기 무슨 생각인지 그가 손을 뻗어 윤아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윤아를 향해 분노를 쏟아냈다.“상관이 없어요? 말은 참 그럴싸하게 하시네요. 만약 정말 아무 사이가 아니라면 왜 아이를 둘이나 데리고 이곳에 온 건데요?”그의 말엔 윤아를 향한 뚜렷한 적의가 느껴졌다.한평생 모욕이라면 치를 떠는 윤아가 그런 그의 의도를 못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윤아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게 식더니 이내 냉소를 터뜨렸다.“고석훈 씨. 그쪽 눈엔 진수현이랑 강소영 씨가 영원히 한 쌍인 거죠?”서둘러 윤아에게 다가오려던 수현도 그녀의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윤아의 뒷모습을 유심히 보며 상황을 가늠했다.방금 저 질문, 무슨 뜻이지?“당연하죠!”석훈이 이를 갈며 말했다.“제 눈엔 소영이가 천 배, 만 배는 더 나아요. 당연히 우리 소영이만이 진수현한테 어울리는 여자고요.”“그러니까 석훈 씨는 소영 씨와 진수현이 참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여전히 소영 씨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거네요.”예상치 못한 말에 석훈은 잠시 멈칫했다. 윤아가 이렇게 말을 돌릴 줄이야.윤아는 당황해하는 석훈을 보며 빈정거리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아이를 데려온 건 아니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석훈 씨가 뭔데 저한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죠?”가시 돋친 말에 석훈은 그대로 벙쪄버렸다. 순간 너무 당황한 나머지 뭐라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그가 겨우 정신을 다잡았을 땐 이미 윤아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떠나간 뒤였다.석훈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소영을 바라봤다.“소영아. 난...”그러나 그에게 돌아오는 건 소영의 원망 섞인 눈빛이었다.분노와 질책이 그녀의 눈빛을 타고 싸늘하게 그를 훑었다.석훈은 그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제길. 방금 윤아 씨가 한 말을 소영이가 마음에 담아두진 않겠지? 날 싫어하게 되면 어떡하지? 이제 나와 거리를 두려고 하면...’윤아가 일을 망쳤다는 생각이 들자 석훈은 서
방금...윤아 씨 머리에서 피가 난 것 같은데?게다가 고석훈 저 자식... 아이를 발로 차려고 했어?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머리가 복잡해진 양훈은 석훈에게 다가가 싸늘하게 그를 바라봤다.“고석훈. 너 미친 거지?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나...”석훈은 아니라고 반박하려다가 윤아의 이마를 타고 흐르던 선홍빛 피를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자기가 큰 실수를 했다는 걸 인지했지만... 석훈은 고개를 돌려 소영을 바라봤다. 소영이 그의 마음을 알아줬으면 했다. 애초에 그녀가 아니라면 석훈도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 테니까.한편, 소영은 벌렁대는 심장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그녀는 사실 윤아가 이대로 잘못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양훈의 말을 듣고 번뜩 정신을 차렸다.소영은 하면 안되는 생각을 도로 집어넣고 언제 그랬냐는 듯 석훈을 향해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래, 석훈아. 말로 하면 몰라도 폭력은 정말 아니야.”소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게다가 어린아이잖아. 석훈 씨 이렇게 매정한 사람이었어?”그녀의 말에 석훈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아찔해 났다. 그는 한참을 그대로 멍하니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나, 난 널 위해서 그런 거였어!”그 말은 진심이었다. 소영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충동적으로 일을 벌이진 않았을 거다.석훈은 윤아와 그녀의 아이한테 아무런 적대심도 없었다. 소영이 아니라면 그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윤아에게 왜 그런 짓을 했겠는가.그러나 석훈의 말에 소영은 오히려 실망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홧김에 이성을 잃고 그런 짓을 한 거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믿어줬을 텐데. 이제 와 다 나 때문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겠어? 설마 내가 석훈 씨한테 아이를 해치라고 지시라도 했다는 거야? 난 저 아이들을 오늘 처음 알았어. 윤아 씨가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날 줄은 더더욱 몰랐고.”사실 소영이 이렇게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김양훈은 수현의 가장 친한 친구다. 만약
소영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데엔 제 책임도 있잖아요. 같이 가서 윤아 씨 상황을 봐야겠어요.”“그렇죠. 일이 이렇게 된 데엔 우리 모두 책임이 있죠. 진수현 지금쯤 엄청 화났을 거니까 안 따라오는 게 좋을 거예요.”말을 마친 그는 소영을 지그시 바라봤다.마치 그녀의 생각을 낱낱이 꿰뚫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한 그 눈빛에 소영은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그리고 그 순간 소영은 양훈에게 더 뭐라 할 수 없었다.“그... 그래요. 하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꼭 저한테 연락해 줘요. 비록 5년이나 못 본 사이지만 저도 윤아 씨가 너무 걱정돼서요.”양훈은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한 후 핸드폰을 챙겨 자리를 떴다.양훈이 가자 그 자리엔 소영과 석훈 둘만 남았다.소영은 양훈이 멀리 가버린 걸 확인 한 후 서둘러 몸을 돌려 석훈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어서 일어나.”석훈은 조금 전 소영이 한 말에 아직도 풀이 죽어 있는 상태였는데 갑자기 다가와 자기를 일으켜주자 어안이 벙벙해졌다.“소영아? 너... 너 나한테 화난 거 아니었어?”“일단 일어나 봐.”석훈은 그제야 소영의 부축을 받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소영은 석훈을 일으킨 후 다정하게 물었다.“괜찮아? 다친 덴 없어?”석훈은 고개를 흔들며 소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석훈아, 그렇게 보지 마. 조금 전에 내가 모질게 말했던 건 다 널 위해 그런 거였어.”“날 위해?”“생각 해봐. 오늘 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람을 때렸어. 다들 널 이해하려 하겠어? 이런 상황에서 내가 네 편을 들어주면 다들 널 뭐라 생각하겠어? 분명 네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거야. 그러니까 난 널 혼내는 척, 너한테 실망한 척하고 넌 나중에 반성한 척, 개과천선한 척 하기만 하면 돼. 그럼 아무도 널 탓을 하지 않을 거야.”반성한 척을 하라고?석훈은 되려 더 어리둥절해졌다.그는 이성을 되찾은 후 그의 행동이 잘못됐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니 서훈도 그의 말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할 수 있어요.”“그래. 훈이랑 윤이가 좀 도와줘. 아저씨가 얼른 병원에 데려다줄게.”“네.”이윽고 수현은 시선을 내려 기절해 있는 윤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선홍색 피는 그녀의 흰 피부색과 비교되며 더 소름 끼치게 다가왔다.수현은 행여나 운전 중에 윤아가 시트에서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레 뒷좌석에 눕히고 자리를 만들어 두 아이를 그녀의 양옆에 앉혔다.세심하게 자리를 조정한 후 수현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팡!문이 닫히고 차는 빠르게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뒷좌석에 앉은 서훈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윤아의 이마를 감싸며 낮게 읊조렸다.“걱정 마요, 엄마. 괜찮을 거예요.”하윤도 많이 놀란 듯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하윤의 늘 반짝이던 눈동자엔 어느새 슬픔이 가득 고여 두 볼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그 눈물은 방울방울 떨어져 어느새 윤아의 발등을 흠뻑 적셨다.“윤이야, 울지마.”서훈의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려왔다.그 소리에 하윤이 눈물범벅이 되어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고개를 들었다.“오빠... 엄마 죽어?”죽는다는 말에 서훈은 심장이 철렁했다. 그는 아까보다 서늘해진 눈으로 하윤을 꾸짖었다.“심하윤, 그런 소리 하지 마!”갑작스러운 꾸중에 하윤은 깜짝 놀라 울먹였다.“하지만...”“엄마는 그저 이마를 다치신 거야. 우리 엄만 안 죽어!”운전 중인 수현은 이따금 백미러로 윤아를 꼭 안고 있는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쥐방울만 한 아이들의 입에서 저런 대화가 오가는 걸 들으며 그는 심장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도로는 평탄했고 차도 빠르지만 스무스하게 달렸다. 하지만 평탄한 도로와 달리 수현의 마음은 아찔하게 덮쳐오는 파도 같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진지하게 말했다.“훈이, 윤이. 아저씨가... 엄마 지켜줄게. 아저씨 믿어.”믿으라는 말이 원
그리고 그 옆에 눈물범벅인 두 아이까지.경찰은 곧바로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진지하게 말했다.“따라오시죠.”곧이어 그는 손수 수현을 위해 길을 터줬다. 그는 가는 길에 막힘이 없게 하기 위해 차량을 통제하는 건 물론이고 가까운 병원에 연락까지 하면서 수현을 도왔다.경찰의 도움으로 수현은 예정보다 빨리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병원에 도착한 후, 수현은 곧장 윤아를 안고 응급실로 달려갔다. 물론 두 아이도 그의 뒤를 따랐다.한바탕 소동 끝에 윤아는 무사히 응급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_응급실에서 환자 외 다른 사람은 출입을 허가하지 않았기에 수현은 하는 수 없이 두 아이를 데리고 밖에서 기다렸다.혼잡한 응급실 내부와 달리 바깥은 사람 한 명 없이 한산했다. 수현은 윤이, 훈이와 함께 복도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조금 걸릴 거야. 여기서 기다리자.”서훈은 철이 일찍 든 데다 말수가 없는 편이다. 그는 수현의 말에 토를 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옆에 앉지도 않았다. 그는 조금 더 걸어가 수현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수현도 훈이가 무슨 생각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멀리 떨어지진 않아 그의 시야 안에 있었기에 수현도 굳이 그의 옆자리를 강요하진 않았다.그러나 예상치 못한 것은 하윤이 주동적으로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수현은 윤이가 드디어 자신을 용서해 주는 건가 싶어 잠시 기대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하윤은 그에게 다가간 뒤 콩알만 한 주먹을 뻗어 수현의 허벅지를 마구 때렸다.“아저씨 미워!”그러나 그 말랑한 주먹으로 아무리 때려봤자 수현이 아플 리가 없었다.수현은 하윤의 분이 풀릴 때까지 가만히 아이의 투정을 받아주었다. 비록 솜방망이 주먹은 아무런 타격도 없었지만,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하윤의 얼굴은 수현의 마음을 욱신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그렇게 수현은 하윤이 지쳐 더 때릴 힘이 없을 때까지 한참을 가만히 기다렸다. 그러고는 하윤의 자그마한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이제 다 때렸어?
그런 이유라면 납득할 수 있지.수현의 말이 끝난 후 하윤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때려보았는데 확실히 다리보다 더 수월한 것 같았다.의자에 앉아 있었을 때는 발뒤꿈치를 들어야 간신히 다리를 가격할 수 있었는데 수현이 이렇게 머리를 숙이고 얼굴을 내어주니 큰 어려움 없이 마음껏 주먹을 날릴 수 있게 되었다.하지만... 가까이서 본 수현의 새까만 눈동자는 생각보다 더 어두웠고 얼굴도 날카로워 조금 무서웠다.하윤은 그런 수현의 얼굴을 보니 갑자기 손을 뻗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녀는 수현의 험상궂게 생긴 얼굴을 한 눈 보고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그리고 수현도 그런 하윤의 변화를 눈치챘다.“왜 그래?”하윤이 입을 오므리더니 말했다.“아저씨가 보복하면 어떡해요?”‘키도 크고 손도 큰 아저씨가 저 힘으로 날 때리기라도 한다면 난 납작만두처럼 납작해질지도 몰라.’하윤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 무서워져 서둘러 몸을 돌려 오빠에게로 달려갔다.이미 딸에게 얼굴을 내어줄 마음의 준비를 다 했던 수현은 하윤이 갑자기 몸을 돌려 도망가 버리자, 어리둥절 해졌다.그는 한시름 놓은 동시에 또 왠지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딸에게 맞는 건 어떤 기분일까?상상해 보니 나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행복한 상상에 빠져있던 수현은 불현듯 지금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나 싶어졌다. 대체 누가 맞길 좋아한단 말인가?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수현은 얼른 지저분한 생각들을 치워버리고 응급실 상황에 집중했다.제발 무사하길... 수현은 윤아가 무사히 깨어만 준다면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한편, 서훈은 그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온 하윤을 살뜰히 챙겨줬다. 하윤을 의자에 앉히고 눈가에 맺힌 눈물도 세심히 닦아주는 모습은 제법 어른스러웠다.서훈은 참지 못하고 수현 쪽을 힐끗 보았다. 수현은 아직 그곳에 앉아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그의 커다란 몸집이 유독 외로워 보였다. 서훈은 그런 수현을 보며 입을 앙다물었다.“윤아, 우리 이제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