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은 아이들을 데려온 후 요리사를 불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장난감도 가득 사 왔다. 두 아이의 취향을 잘 모르는 데다 장난감을 한 번도 사본 적이 없는 수현은 비서에게 장난감을 있는 대로 다 사 오게 하였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두 눈이 휘둥그레서 서로 눈치만 보았다.이윽고 윤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저씨, 이 장난감들 다 저랑 오빠를 주는 거예요?”“그래, 너희들 아빠가 되려면 이 정도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어? 일단 들어가서 맘에 드는 게 있는지 한번 볼까?”수현은 두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선 하윤이는 오빠한테 소곤거렸다. “오빠, 우리 이거 만져도 돼?”동생은 이미 참을성이 없어 보였다. 사실 훈이도 방안에 가득한 장난감을 보면서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훈이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만지지 말고 보기만 하자.”“왜? 아저씨가 우리 놀라고 사준 거 아니야?” 윤이는 아쉬운 듯 물었다.“아저씨가 사준 건 맞는데, 아직 우리 아빠도 아니잖아.”“하지만…”‘이렇게 재미있는 장난감들이 쌓여있는데 보기만 하라고?’윤이는 입을 삐죽하다가 이내 참지 못하고 장난감 하나를 집어서 포장을 뜯었다. 훈이가 말리려고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윤이는 장난감을 내밀면서 웃었다.“오빠, 이것 봐!”“윤아…”훈이는 얼굴을 찡그린 채 동생에게 뭐라고 하려 했지만, 수현이 다가오자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이게 마음에 들어?”수현은 윤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비행기 모형을 보면서 물었다.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인형도 있고 귀여운 장난감도 있었지만, 비행기 모형을 집어 든 딸을 보면서 그는 약간 의아해했다.수현의 물음에 윤이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좋아요. 윤이는 커서 멋진 비행기 조종사가 될 거예요.”“그래. 멋진 꿈이네.”수현은 딸이 그저 귀엽고 얌전한 성격인 줄 알았다. 조종사가 꿈이라니? 하긴 아이들의 상상력이 엉뚱해서 그럴 수도 있었다.
칭찬을 받은 윤이는 신나서 비행기 모형을 가지고 뛰어갔다.수현은 옆에 말없이 얌전히 서있는 훈이를 보면 물었다.“훈이는?”“네? 저요?”갑자기 쏠린 관심에 훈이는 긴장하고 있었다. “윤이는 꿈이 조종사 되는 거라던데, 우리 훈이는?”수현은 처음으로 아이들과 이렇게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고 어떤 걸 좋아하는지, 장래 희망이 뭔지를 물어본 것 같았다. 예전의 그는 아이들과 엮이는 걸 아주 질색 팔색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동안 떨어져 지낸 두 아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으며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 했다. 훈이는 수현의 눈길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아직 잘 모르겠어요.”옷자락만 만지작거리는 훈이의 작은 손을 바라보며 수현은 생각이 많아졌다.“아직 생각을 못 한 거야, 아니면 아저씨한테 알려주기 싫은 거야? 훈이야, 아저씨 생각엔 훈이가 또 아저씨를 싫어하는 것 같은데?”“아니에요.”훈이는 다급하게 부정했지만 아이가 자신에게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수현은 느낄 수 있었다. 훈이는 똑똑한 아이였다. 윤아가 아이들 앞에서 최선을 다해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분명히 뭔가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서 훈이가 아마도 자신을 이렇게 불편해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하면 아이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생각에 잠긴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엄마가 왔나 보다. 아저씨가 가서 열어주고 올게.”수현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그리고 훈이랑 윤이, 이제 더 이상 고독현 밤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고, 현 아저씨라고 부르면 안 될까?”말을 마치고 그는 아래층으로 향했다. 계속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윤아라면 어제도 집에 바로 들어온 적이 있어서 비밀번호를 알고 있을 텐데? 왜 계속 초인종을 누르지?’아마도 아이들을 데려온 그를 괘씸하게 여겨서 일부터 초인종을 계속 눌러 그를 골탕 먹이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역시 성질은 안 변했다니깐.
석훈은 자기 여신을 위해 불평을 이어갔다.“소영이가 너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알아? 너도 진짜 너무 한 거 아니야? 아무리 일이 바빠도 그렇지. 소영이 전화는 받아야 할 거 아니야.”양훈은 그런 석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석훈은 수현에게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어렸을 때부터 셋이 같이 놀던 사이이기도 했고, 집안끼리도 서로 잘 알고 지냈었기 때문에 수현도 그런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는 훨씬 관대했다. 하지만 그래도 어른이 된 지금은 어릴 적 친구들도 그의 눈치를 봐가면서 할말은 가려서 하는 편이지만 석훈은 여전히 뇌를 거치치 않고 마구 뱉어냈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그를 수현은 여러 번 경고했었지만, 고쳐질 기미는 안 보였다. 수현도 별수가 없었다. 장황한 불만을 늘어놓는 석훈을 무시하고 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일부러 올 필요는 없는데. 중요한 일 아니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말을 마친 수현은 문을 닫으려 했다.“수현 씨...”석훈은 손을 뻗어 문을 막으며 말했다.“야, 우리한테 연락을 안 한 건 그렇다 쳐. 근데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데 어쩜 차를 마시고 가라는 말도 없냐? 우리 남성에서 오자마자 여기로 너 보러 왔다고.”수현의 미간에 주름이 패었다. “오늘은 시간이 안 돼. 다음에 보자.”집안에는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조금 있으면 윤아도 도착할 것이다. 지금 이들을 들였다간 일이 어떻게 커질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단칼에 거절당한 석훈은 못마땅해 투덜거렸다.“수현아, 너 요즘 왜 그래? 우리 같은 친구는 이제 안중에도 없냐? 들어가서 얘기도 못 해? 차는 안 마셔도 되니까 얘기 좀 하자.”수현의 냉랭한 태도에 소영은 눈시울을 붉히면서 훌쩍였다.“수현 씨, 우리는 그저 수현 씨가 보고 싶어서...”수현의 시선은 양훈에게로 꽂혔다. 양훈은 코를 쓱 만지고는 수습에 나섰다. “아니면 오늘은 그만 돌아갈까? 수현이도 많이 바빠 보이는데 우리 나중에...”양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앳된 목소리가 들
‘맞아. 그러고 보니 아이가 수현 씨를 고독현 아저씨라고 불렀어. 고독현, 이건 또 무슨 뜻이지?’‘수현이라는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이 있었던가?’소영의 얼굴은 점차 일그러지더니 수현의 차가운 얼굴을 보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수현 씨, 저 아이는 누구야?” 양훈도 눈썹을 치켜뜬 채 조용히 수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 파악을 못 한 석훈은 계단에 서있는 윤이를 보면서 다짜고짜 물었다.“야, 쟤 너랑 되게 닮았는데? 설마 네 딸은 아니겠지?”석훈의 말이 끝나자, 소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주먹을 꽉 쥐었다. 긴 손톱은 살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애써 웃으며 물었다.“그런 거 아니지? 왜 전에도 수현 씨랑 닮은 애를 들이밀면서 수현 씨 애라고 그랬는데 알고 봤더니 애 얼굴을 뜯어고쳐서 수현 씨에게 빌붙으려고 그랬던 거잖아. 이 애도 그런 게 아닐까?”입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아이의 자연스러운 얼굴을 보면서 소영은 점차 자신이 없어졌다.그녀도 사실 알고 있었다. 성형을 한 거라면 얼굴이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는 것을. 더욱 그녀를 소름 끼치게 하는 것은 수현을 닮은 저 아이의 얼굴은 그 여자도 연상케 한다는 것이었다.윤아!소영은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도 싫었다. 그녀만 아니었다면 수현이랑 벌써 약혼하고도 남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문 앞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윤이는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귀여운 얼굴 때문에 어릴 때부터 주위 사람들이 하도 이쁘다고 해서 자주 있는 일이었다.눈앞의 상황을 보며 수현의 이마에 핏줄이 불끈 솟아났다. 윤아와 아이들이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까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은 그의 염원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 일은 너희들과 아무 상관이 없어. 더 이상 화내기 전에 나가줬으면 좋겠어.”“가긴 어디를 가. 수현아, 내 물음에 아직 대답 안 했잖아. 도대체 누구 애냐니까?”눈치 없는 석훈은 제 발로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멀리서 윤아는 별장 문 앞에 낯익은 그림자 몇 개를 발견하였다. 가까이 다가간 후에야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석훈 씨, 양훈 씨, 그리고 소...영.소영의 가녀린 실루엣을 보면서 그녀는 지난번 경매장에서의 두 사람 모습을 떠올렸다. 그 뒤로 수현 옆에서 그녀를 본 적이 없었는데 여기에 나타나다니.자신의 아이들은 집 안에 있고 여기에 소영이 왔다는 것은...얼굴이 굳어진 채로 별장으로 달려간 윤아는 마침 수현이는 석훈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내던지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석훈은 그녀와 멀지 않은 곳에 내팽개쳐졌다. 석훈이를 부축하려던 소영과 양훈도 가로등 아래에 있는 윤아의 그림자를 발견하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오가고 마침내 모두 윤아에게 쏠렸다. 윤아를 본 소영은 귀신이라도 본 듯 눈이 커졌다. 지난 5년간 수현은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소영은 자신이 항상 특별한 여자라고 여겨왔다.소영은 처음에 윤아가 약속을 어기고 갑자기 귀국할까 봐 두려웠었다. 그녀가 돌아오면 자신은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게 뻔했다.하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윤아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야 소영은 마음이 놓였다. 윤아도 아마 결혼하고 옆에는 다른 남자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5년은 아주 긴 시간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변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윤아를 보면서 소영은 자신이 질 거란걸 확신하였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윤아는 한층 더 여성스러워져 매력을 풍기고 있었으며 소영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잠깐만, 그러면 저 안에 있는 애가 윤아의 자식인가? 윤아의 애가 왜 수현 씨 집에 있지?’그녀의 머릿속에서 물음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끝내 모든 게 윤곽을 드러내는 듯했다. 양훈도 사실 속으로 대충 짐작은 했지만 윤아가 나타나자, 거의 백 프로 확신하였다. 바닥에 누워 있던 석훈은 소영이가 일으켜주기를 기다리다 이내 자리를
하지만 윤아는 더 이상 그들과 엮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저 빨리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오고 싶었다.망설임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면서 석훈은 소리 질렀다.“수현아, 저 여자가 왜 여기 있어? 너 예전에 이혼한 거 아니야? 안에 있는 애는 또 뭐냐?”석훈은 제 분을 못 이겨 미쳐 날뛰고 있었다.“너 이러고 무슨 낯으로 소영이를 만나?”자신의 이름을 들은 소영은 눈시울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석훈은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수현을 보면서 더욱 화가 치밀었다. 석훈은 소영을 몇 년 동안 계속 좋아하고 있었다. 바람불면 날아갈까 애지중지 옆에서 지켜보던 여신이 이런 대접을 받으니, 그는 견딜 수 없었다. “오늘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너 이거 분명하게 얘기하라고. 아니면 내가 너랑 끝장 볼 거야”말을 마치고 석훈은 수현의 멱살을 잡으려고 다가갔다.수현은 얼굴이 굳은 채 차갑게 대꾸했다.“그만해.”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석훈은 그만 움찔하고 말았다. “알았어. 대신 너 이거 오늘 꼭 해명해야 한다고!”“뭘 해명해? 언제부터 내가 너한테 일일이 보고하고 다녔어?”석훈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이게 어디 너 혼자 일이야? 소영이 일이기도 하잖아. 걔가 너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너는 다른 여자나 만나고. 소영이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옆집까지 울려 퍼졌다.윤아는 그들끼리 싸우도록 내버려두고 집안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 순간 그녀는 언제 나왔는지 모를 두 아이를 발견하였다. 아이들은 수현의 뒤쪽에 서서 까치발을 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아는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좋은 것만 봐도 모자랄 판에 이런 어지러운 장면을 볼 것을 생각하니 그녀는 망설임 없이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빨리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밖에 없었다.‘싸울 테면 싸우라지. 내가 알게 뭐람.’윤아가 지나가려는 순간 석훈은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잡고서 트집을 잡았다.“
멋있게 소영의 편을 들어주려던 석훈은 보기 좋게 수현이한테 제지당하자 화가 났다. 그래서 마침 윤아가 눈에 띄었고 불똥이 그녀에게로 튀었다. 하지만 석훈은 자기 행동이 수현이를 이토록 화나게 할 줄은 몰랐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수현이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손을 놓으려고 했지만, 너무 늦었다. 퍽 소리와 함께 석훈은 바닥으로 떨어져 나갔다. 윤아가 알아채기도 전에 수현은 그녀의 허리를 감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윤아는 놀라서 수현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그의 향기가 코끝을 감쌌다. ‘어깨를 잡았다고 이렇게 화를 낸 건가?’바닥에 나뒹굴던 석훈도 화가 난 나머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서 수현에게 주먹을 휘둘렀다.“너 이 자식, 지금 저 여자 때문에 나를 쳐? 진짜 오늘 끝을 보자고!” 수현은 윤아를 등 뒤에 가린 후 한 손으로 가볍게 주먹을 막았다. 석훈은 자기 주먹을 아무렇지 않게 잡은 수현을 놀란 듯 바라보았다.“정신 차려.석현.” “정신 차려야 할 사람은 너야! 너는 소영이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석훈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남은 손도 휘둘렀다. “퍽”주먹이 수현의 턱에 꽂혔다. 놀란 윤아가 그의 얼굴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 소영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꺅. 석현 씨, 그만해!”소영은 울 듯한 얼굴로 수현의 팔에 매달려 석훈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나 때문에 싸우지들 말고 말로 풀어.”소영이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자신 때문에 싸우지 말라니? 아니 이게 어딜 봐서?”양훈은 어이없어하는 윤아와 한데 엉켜있는 세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너희 그거 놓고 말로 하자. 응? 친구들끼리 이게 무슨 꼴이야.”석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갈며 말했다.“얘가 먼저 손찌검했잖아.”“네가 윤아에게 손대지 않았더라면 수현이도 그러지 않았을 거잖아.”양훈은 맞받아쳤다.“야, 내가 어깨만 잡았잖아, 때리기라도 했냐?”“그래, 때리지는 않았지. 그래도 그렇게 잡으면 아프잖아.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을 그렇게 막 잡아도 돼? 너는
양훈은 다가가 석훈을 말렸지만 소용없었다.양훈은 할 수 없이 소영에게 석훈을 좀 말려보라고 눈치를 주었다. 소영이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석훈 씨, 우선 이거 놓고 얘기해.”그제야 석훈은 그녀의 말대로 천천히 손을 놓았다. 하지만 수현은 석훈의 주먹을 잡은 채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수현 씨...”소영은 수현을 달래기 시작했다.“수현 씨도 우선 이거 놓고 얘기해.”하지만 수현은 아무 말 없이 석훈을 노려보기만 할 뿐 꿈적하지도 않았다.양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가 일부러 너를 귀찮게 하러 온 게 아니야. 정말 그냥 네가 잘 지내나 걱정돼서 보러온 거야.”수현의 얼굴에는 냉소가 지어졌다.“그렇게 걱정돼서 여기서 지금 행패를 부리고 있어?”“아니...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된 거지...”수현은 코웃음을 쳤지만, 여전히 손 놓을 기미가 안 보였다.양훈은 최후의 방법으로 윤아를 바라보았다. 이젠 그녀만이 수현을 설득할 수 있었다.윤아는 그의 시선을 알아챘지만 이내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뭐야. 자기랑 상관없다는 건가?’‘그냥 이대로 문 앞에서 밤을 새우게 생겼는데?”양훈은 수현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다. 화나 가면 누가 뭐래도 듣지 않았다. 다행히 옆에 윤아가 있어 설득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도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순간, 작은 머리 하나가 수현의 뒤에서 쏙 나오더니 작은 손이 수현의 옷자락을 당겼다. 순간 굳어졌던 수현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윤이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아저씨, 지금 친구랑 싸우는 거예요?”자리에 서있던 어른들의 시선이 일제히 윤이한테 쏠렸다.윤이의 귀여운 얼굴에 양훈과 석훈도 눈을 떼지 못하였다. 윤아는 딸을 옆으로 데려와서 말했다.“어른들의 일이니까 윤이는 신경 안 써도 돼.”눈앞에 쪼그려 앉은 엄마를 보면서 윤이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오빠는 어딨어? 오빠를 불러서 같이 집에 가자.”“오빠는 엄마 뒤에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