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는 기획안을 다 정리한 후 수현에게 전화 걸었다.“메일 주소 알려줘. 기획안 보낼...”“회사로 가져다줘.”잠시 멍해 있던 윤아는 수현이 또 말하는 것을 들었다.“주소는 이 비서에게 보내라고 할게.”“메일로 보내면 안 될까?”“심윤아, 내가 투자한 돈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야. 당신이 놀라고 준 돈도 아니고. 진지하게 임했으면 해.”전화를 끊은 후 윤아는 심호흡하고 성질을 가라앉힌 다음 일어나 기획안을 프린터에서 인쇄했다.그녀가 다 끝내자 민재가 진 씨 그룹 지사의 주소도 보내왔다.윤아는 기획안을 서류봉투에 넣고 일어나 문을 나섰다.그녀는 민재가 알려준 주소를 따라 지점 아래층에 일찍 도착했다.역시 진 씨 그룹이었다. 수원에 있는 지사라 해도 빌딩이 장관이다.어쩐지 그가 자신의 작은 회사에 투자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많은 직원이 와서 취직하더라니.윤아는 서류 가방을 들고 들어갔다.지사라도 사람을 만나려면 예약이 필요했다. 윤아는 이미 똑똑해져서 프런트에 직접 수현을 찾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이 비서님과 약속이 있습니다.”역시 이비서의 이름에 프런트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윤아의 깔끔한 옷차림을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바로 조회해 드리겠습니다.”1분 후.프런트에서 전화를 끊고 말했다. “아가씨, 5번 엘리베이터로 바로 16층에 올라가 비서실로 가세요.”“감사합니다.”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윤아는 생각에 잠겼다.이제 평온해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또 업무상의 이유로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수현이 일을 빌미로 다른 요구를 제기한다면 윤아는 전혀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다.여기까지 생각한 윤아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자신의 미간을 만지작거렸다.엘리베이터 밖, 민재가 이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윤아가 나오자 얼른 미소를 지었다.“윤아 아가씨.”윤아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대표님께서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윤아는
수현은 그 자리에 서서 처음에는 무표정했지만, 무엇을 보았는지 눈살을 찌푸렸다.“이 기획안은 누가 만든 거야?”윤아는 그의 말투에 눈을 부릅뜨고 그를 보았다.“왜 그래?”“당신이 한 거야?”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왜?”말이 끝나자마자 수현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5년 동안 이것밖에 못 배웠어?”윤아는 말을 듣고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다. “무슨 뜻이야? 내 기획안에 문제 있어?”“당신의 기획안대로라면 시간 낭비하지 말고 회사를 아예 열지 마.”“...”이런 말이 수현의 입에서 나와서 윤아는 매우 화가 났지만 그녀는 수현이 업무와 관련해서 항상 진지하고 헛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수현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윤아의 기획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윤아는 마지못해 입술을 깨물었다.“그럼 무슨 의견이 있는데?”수현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기획안을 들고 자신의 책상 앞으로 가서 책상 위에 집어 던졌다.수현이 자신을 상대하지 않자, 윤아는 입술을 오므리고 다가갔다.“문제가 뭔데? 수정할게.”수현는 입술을 옴짝달싹했다.“이건 폐기해야 하니 수정할 필요 없어.”“...”그녀가 만든 기획안이 이렇게 형편없단 말인가?”수정은 둘째치고 전부 폐기해야 한다고?윤아는 갑자기 수현이 일부러 복수를 한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그녀는 기획안을 들어 보고는 말했다.“진짜 이걸 폐기할 거야?”이 말을 들은 수현은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 손실을 감당할 수 있다면 사용해도 의견 없어.”잠시 침묵하다가 윤아가 말했다. “알았어. 만약 이 기획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낼게.”말을 마친 윤아는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내가 가라고 했어?”윤아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수현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왔다 갔다 하면서 길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할 거야? 내가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는 거야?”“길에서 시간 낭비?
'비밀번호가 내 생일이라고?''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이 노트북은 새것처럼 보였는데 아마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컴퓨터 비밀번호를 자신의 생일로 설정했다고?''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이혼을 주동하고, 심지어 아이를 유산시키고도 그녀의 생일을 비밀번호로 사용했다고?'윤아는 자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무표정한 얼굴로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컴퓨터가 진짜 켜졌다. 정말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왜?''진수현, 너 도대체 왜?'윤아는 한스러워하며 새 파일을 만든 다음 타자했다.생각하지도 말고 속지도 말자.설령 그가 자신의 생일을 비밀번호로 사용한다고 해도,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과거는 이미 지났고 지금 그녀는 미래를 내다보고 마주한 일을 완성해야 한다.그러나 기획안이 수현의 마음에 들지 않으니 윤아는 당연히 그의 의견을 물을 것이다.수현은 비밀번호가 윤아에게 약간의 파장도 일으키지 않은 것을 보고 가슴이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남긴 것이니.기획안도 자연히 오늘 만들어야 한다.그는 손끝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는데 표정과 동작이 모두 무심해 보였다.“당신은 광고회사를 하고 있는데, 방금 그 기획안은 마치 한 사람의 계획처럼 너무 이상적이야. 작은 회사가 빠르게 시장에서 입지를 굳히려면 기회를 잘 잡아야 해.”말하는 동안 그의 손끝은 원래 기획안 중 어느 하나에 떨어졌다. “너무 고전적이어서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야. 외국에서 5년 동안 이런 걸 배웠어? 아니면 이선우가 당신에게 이것만 가르친 거야? 보아하니 그를 선택한 것도 그저 그렇네.”마지막 한 마디에는 사적인 감정이 너무 많이 섞여 있었다.그러자 열심히 듣던 윤아의 얼굴에 다른 표정이 더해졌다. 윤아는 찡그린 얼굴로 불쾌하듯 그를 바라보았다.“진 대표님, 저와 업무 이야기를 하실 겁니까, 아니면 사생활 이야기를 하실 겁니까?”수현의 눈동자는 칠흑같이 어두웠다.“일 얘기하면 어떻고 사생활 얘기하면 어때?”“만약 일에
“그런 눈으로 보지 말고, 기획안 안 할 거야?”그가 잘못을 인정했기 때문인지 윤아의 마음도 편해졌다. 기획안은 원래부터 해야 하는 것인데 체면 때문에 수현에게 몇 마디 쏘아붙이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이후 일하는 시간 동안 수현은 예전처럼 자꾸 신랄한 말을 하지 않고 진지하게 그녀와 기획안을 논의했다.아마도 그녀가 오랫동안 귀국하지 않은 탓인지 전후 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수현의 지도와 조언으로 윤아는 확실히 많은 것을 배웠다.그래서 마지막에는 윤아도 옆에 있는 남자가 자신의 전남편이었다는 것을 잊고 일에 몰두했다. 수현과 말하는 말투는 마치 그를 파트너로 생각하는 것처럼 정상적이었다.이를 깨달은 수현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윤아는 열심히 일했고, 그래서 민재가 두 사람에게 식사하라고 문을 두드렸을 때 그녀의 기획안은 조금 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노트북을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민재는 어쩔 수 없이 수현을 바라보았다.수현은 입술을 꾹 다물더니 입을 열었다.“밥 먹어야지.”“응.”윤아는 대답했지만 화면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니, 수현는 그녀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듣지 않고 다만 소리가 나니 대꾸했다는 의심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몇 분이 지나도 윤아는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수현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귀띔했다.“심윤아.”윤아는 또 엉겁결에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려 줘.”진수현:“...”그는 손을 뻗어 윤아 노트북 옆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먼저 밥 먹고 일하자.”잦은 방해 탓인지 집중이 안 된 윤아는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한 표정으로 수현을 바라보았다.“일이 거의 끝나가는데 네가 먼저 가서 먹으면 안 돼?”게다가 윤아는 여기서 수현과 함께 식사할 계획이 없다.수현은 입술을 오므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를 지켜보던 민재는 얼른 다가와서 말했다.“아가씨, 일도 중요하지만 식사를 제때 하지 않으면 위병이 생
마침내 그녀가 식사를 원하자 민재는 서둘러 준비한 음식을 가져왔다.점심은 그가 미리 준비한 것으로 고급 레스토랑에서 샀는데 접시가 매우 아름답고 심지어 보온 효과도 있었다.뚜껑을 열자 향기가 퍼졌다.윤아는 밥을 한입 먹고 무엇이 생각났는지 수현의 식판에 밥을 보았는데, 과연 그의 접시에 놓인 쌀밥도 보였다.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이제 밥 먹어도 돼? 위 괜찮아?”말이 끝나자 주위는 적막해졌다.수현이 그녀를 보기 전 윤아는 얼른 입을 열어 해명했다. “협력관계 때문에 물어본 거야.”그녀가 해명하지 않으면 괜찮은데 해명하자 더욱 이상해졌다. 과연, 윤아의 해명을 들은 수현의 얇은 입술이 살짝 치켜 올랐다.“그래? 당신이 나를 걱정 한다고 생각할게.”이전에 윤아가 내키지 않아 하는 것 때문에 생겼던 부정적인 감정이 지금은 완전히 사라지고 수현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 남아 있었다.윤아가 자신에게 관심 있다는 것.비록 윤아가 어색해 보였지만 이 작은 관심만으로도 수현은 기뻐할 만했다.윤아는 순풍에 돛 단 듯한 수현의 뻔뻔한 행동에 눈썹을 찡그렸다.그녀가 말하지 않자 수현은 적극적으로 물었다. “밥이 위에 좋지 않아? 난 세 끼를 정상적으로 먹으면 되는 줄 알았어.”이 질문을 받은 심윤아는 눈살을 찌푸렸다.“삼시세끼를 정상적으로 먹으면 되는데 얼마 전에 위출혈이 나지 않았어? 아직 당신 위가 약해서 회복하는 동안 이것들은 먹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아.”“그럼 뭐 먹어?”수현이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으로 물었다.“죽, 소화 잘되는 음식, 채소, 과일, 그런데 섭취량에 주의하고 많이 먹지 말고 적게 여러 번 먹는 것이 좋아.”예전에 그녀가 막 외국에 갔을 때, 아버지가 한동안 위병을 앓으셨는데, 그 기간 동안 윤아가 관리해 줬다.그래서 지난번에 수현이 위출혈로 입원했을 때 윤아가 적절한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갈 수 있었다.수현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번에 병원에 가지고 온 것처럼?”지
수현은 빠르게 훑어보았다. 원래는 그녀의 문장에서 문제를 찾아서 그녀를 남겨두려고 했다.하지만 윤아는 배우는 것이 너무 빨랐고, 게다가 쓰는 과정은 그가 줄곧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한 치의 실수도 찾을 수 없었다.결국 수현은 오타를 찾아냈다.“여기 틀렸어.”그러자 윤아도 별생각 없이 바로 다가갔다. “어디?”수현의 마우스가 움직이자 윤아의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마침내 그의 마우스가 한 글자 위에 멈춘 것을 보았다.처음에 윤아는 멍해져서 수현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고 물었다.“여기에 무슨 문제 있어?”“마가 아니고 미야.”수현은 담담히 말했다.그제야 윤아는 미래의 미를 마라고 쓴 자신을 발견했다.그녀는 수현을 한번 보았다. 이렇게 많은 글자에서 이렇게 작은 문제를 보아낼 수 있다니.“타자할 때 주의 깊게 보지 못했어. 미안.”윤아는 어쩔 수 없이 노트북을 가지고 가서 글씨를 고친 후 다시 가져다 주었다.“또 다른 문제 있어?”수현은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기다리는 동안 윤아는 하품을 하고 싶을 정도로 지루했지만, 자신의 회사를 위해 손을 뻗어 입과 코를 가리고 하품 충동을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얼마나 기다렸는지, 수현은 마침내 그녀에게 잘못된 점을 지적했다.“문법이 틀렸어.”윤아:“...”그녀는 자신의 귀로 들은 내용이 믿기지 않아 수현를 쳐다보았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는 항상 업무를 엄격하게 대하는데 그녀의 문법과 오타를 찾는 것도 정상이다. 그가 문제를 찾도록 스스로 일을 완벽하게 하지 못한 그녀의 탓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문법을 다시 고쳐 가지고 왔다.몇 분 후.“이것도 문제 있어.”윤아는 계속 수정했다.또 몇 분 후.“여기 단락을 나누어야지. 글이 너무 촘촘해서 미적 감각을 해쳐.”“...”윤아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참았다.중요하지 않은 일을 몇 차례 반복한 뒤 다섯 번째로 계획서를 살펴보기 시작하자 윤아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중요한 문제는 없어?”그는 줄곧 이런 사소한 흠을 들추
“그럼 내 기획안은...”“합격이야.”수현이 말했다. “합격이라고? 이걸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야?”“응.”그래서 그는 처음에 합격이라고 생각해서 작은 문제점들을 골라낸 걸까?그렇게 생각하면 납득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합격했으니 나는...”윤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현은 이미 차 키를 들고 일어섰다.“가자, 데려다줄게.”그러자 윤아는 무의식적으로 거절했다.“아니야. 내가 직접 운전해서 왔으니 혼자 돌아가면 돼.”게다가, 그녀는 원래 기획안을 전달하러 온 것이지, 그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온 것이 아닌데, 어떻게 그가 데려다주겠다는 것을 동의할 수 있겠는가.그 생각에 윤아는 재빨리 자기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몇 걸음 걸었을 때 수현이 윤아의 손목을 잡았다. “면허시험 볼 때 필기시험은 부정행위로 합격한거야?”윤아:“?”수현:“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졸음운전이 안 된다는 걸 모르겠어?”“하품 몇 번 했을 뿐인데 졸음운전이 웬 말이야? 상황이 다르잖아.”하지만 수현은 바로 반박했다. “피곤하지 않은데 하품할 수 있어? 잔말 말고 빨리 가.”“아까 한 거지 지금이 아니잖아...”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아는 또 참지 못하고 하품했다.“...”수현은 웃음이 터졌다. “이래도 안 피곤해?”이번에는 전혀 반박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수현이 자신을 배웅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말을 돌렸다.“좋아. 운전 안 할게. 대리 기사 불러서 가면 되지?”말을 마친 윤아는 휴대폰을 꺼내 대리운전을 부르려다 수현에게 제지당했다.윤아가 고개를 들자 수현의 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이렇게 나를 배척할 거야?”윤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그의 깊은 눈빛을 피했다. “진 대표님, 저희는 협력관계인데 어떻게 당신을 배척할 수 있겠어요?”“그래? 배척하지 않으면 협력자가 데려다주는 게 뭐 어때? 아니면 내가 뭘 알까 봐 일부러 나를 피하는 건가?”마지막 말은 수현이 일부러 그녀를 자극한 것이다.윤아는 눈
말이 끝나자, 수현은 이미 차 문을 열고 차에 탔다.윤아:“...”수현이 안전벨트를 했는데 윤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녀가 원치 않는 모습과 경악하는 모습을 본 수현은 마음이 통쾌했다. 입가에 미세하게 미소를 지은 후 입을 열었다.“안 타? 아니면 피곤해서 차를 탈 줄 모르는 거야?”심연우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한스럽게 차에 올랐다.그녀는 수현을 완전히 운전기사로 삼은 듯 조수석에 타지 않고 곧바로 뒷좌석에 탔다. 차에 탄 후 백미러를 통해 수현의 얼굴을 보니, 이상하게도 그를 운전기사로 취급한 것에 대해 화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회사에서 출발했다.차는 수현에게는 저렴했지만 기술이 좋아 운전할 수만 있으면 상관없었다.윤아는 뒷좌석에 기대어 가슴 앞에 팔짱을 꼈다.원래는 수현이 자신에게 몇 마디 푸념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수현은 마치 단순히 윤아를 바래다주려는 듯 줄곧 조용히 차를 운전했다.차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2분 정도 지나 차가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길이 평탄해졌다.수현은 백미러를 통해 윤아를 힐끗 보았다.“힘들면 쉬어.”윤아는 입을 다물고 그의 눈을 피하며 무시했다.회사로 돌아가는 데 20분 정도 걸리는데 윤아는 지금 좀 졸리긴 했다.‘잠깐 눈 붙일까?’‘아니다, 진수현 운전하는데 자면 마치 안심하는 것 같으니까 그냥 버티고 회사로 돌아가야겠다.’어차피 기획안은 이미 끝났고 오후에 할 일이 없으니 그때 가서 쉬면 된다.하지만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차가 안정적이고 이전에 너무 집중한 탓에 지금 너무 피곤했다.그래서 마지막에 자리에 기대어 무의식적으로 잠들었다.고른 숨소리를 듣고 수현은 뒤돌아 그녀가 이미 잠든 것을 보고는 내색하지 않고 차의 속도를 줄인 다음 앞쪽 사거리를 보고 잠시 생각한 후 방향을 바꾸어 다시 한 바퀴 돌았다.윤아는 휴대폰 벨소리에 잠이 깼다.깨어났을 때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보았는데 뜻밖에도 20여 분 동안 잠을 잤다는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