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영과 서원은 말 할 것도 없고 주위에 있던 직원들까지 모두 수현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기세에 깜짝 놀랐다.그의 싸늘한 말투는 폭풍전야를 방불케 했다.그러나 이 승마장의 주인인 그를 감히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모두 얼어붙은 채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당황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윤아는 그 가녀린 몸으로 꿋꿋이 버티고 서있었다. 그녀는 마치 수현의 기분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차분한 모습이었다.심지어는 미간을 찌푸리고 다들 보는 앞에서 말했다.“사람 잘 못 본 거 아냐? 난 차서원 씨랑 왔어. 네 파트너가 아니라고.”이는 분명한 거절이었다.주위 사람들은 윤아의 대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마 그녀가 이런 공공연한 방식으로 수현을 깔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아니나 다를까, 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윤아를 매섭게 노려보더니 갑자기 말을 타고 그녀에게 돌진했다.그걸 본 아영은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윤아를 칠 기세로 달려드는 수현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설마 말로 사람을 치려는 건가?“진수현!”차서원도 수현이 윤아를 치려는줄 알고 깜짝 놀라 그의 이름을 외치며 윤아에게 손을 뻗었다.그러나 서원의 손이 윤아에게 닿기 전에 큼지막한 다른 누군가의 손이 다가오더니 윤아를 말 위로 휙 끌어 올렸다.“악!”윤아도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이 나오는 걸 주체할 수 없었다.사실 말이 자기를 향해 돌진할 때도 윤아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비록 5년이나 못 봤지만, 그녀는 수현을 잘 알았다.그는 윤아를 해치지 못한다. 기껏해야 겁이나 주려는 거겠지.그러니 윤아도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그런데 진수현이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안 된 그녀를 무작정 끌어올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이랴.”윤아가 말에 타자마자 수현은 말고삐를 풀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윤아는 반사적으로 곁에 있는 수현을 꽉 잡았다. 덕분에 미처 묶지 못한 머리가 사정없이 공중에서 흩날렸다.수현은 입꼬리를 올리며 한
수현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네 사람?”그의 싸늘한 눈빛에 서원은 칼에 베일 것만 같은 기분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그러나 그의 말에 탄 미인을 보며 또다시 주책맞은 입을 열었다.“내가 데려온 사람인데 안 돼? 빨리 돌려줘.”수현은 냉소를 터뜨리고는 윤아를 데리고 가버렸다.수현의 말이 움직이자 윤아는 또 반사적으로 그를 꽉 잡았다.“날 내려줘, 진수현. 진수현!”주위의 사람들은 그렇게 수현이 윤아를 데리고 출발선까지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는 도중에 윤아는 계속 화를 냈지만 수현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놀라운 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를 욕해도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서원도 이 광경을 보고 저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아무래도 오늘은 저 여자를 뺏을 수 없을 듯 보였다.서원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멍하니 서 있는 아영을 바라보았다.“제 쪽에 타실래요?”아영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홀린 듯 서원의 뒤로 걸어왔다.그의 말 옆에 다가온 아영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둘이 아는 사이예요?”“당연히 그렇지 않을까요? 모르는데 진수현이 자기 말에 태우겠어요? 여자라면 곁에 다가오지도 못하게 하던 놈이.”사람들 앞에서 무시를 당한 서원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아영도 덩달아 우울해져 말없이 손가락만 꼬물거렸다.그때, 서원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자 아영도 따라서 그를 쳐다봤다.둘은 가만히 눈을 마주쳤다.그렇게 몇초 뒤, 서원이 말했다.“타요. 나도 진수현 같은 방법을 쓸 줄 안다고 여기는 건 아니죠?”민아영:“...”그녀는 스스로 말의 등을 타고 힘겹게 올라가느라 화가 났다.아영이 앉은 후, 서원도 몸을 돌려 말에 올라탔다. 그러자 아영이 조심스레 물었다.“그, 말에서 떨어져서 갈비뼈 두 대 부러졌다는 거 진짜예요?”차서원:“...”둘은 말을 타고 출발선까지 갔다.서원은 자기 말에 타고 있어야 할 사람이 진수현 쪽에 있는 걸 보며 속에서 천불이 났다.“그냥 내기는 재미없지. 뭐 걸고 할 거
“그래서, 할 거야?”“제길.”서원이 이를 갈며 아영을 바라봤다.“어떻게, 되겠어요?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아영:“그, 안전이 먼저 아닐까요?”서원:“...”윤아:“...”윤아는 말은 안 했지만, 사실 그녀도 안전이 먼저라고 생각했다.그때 옆에 있던 스태프가 다가오더니 말했다.“진수현 대표님, 차서원 대표님. 곧 시작합니다.”서원은 줄을 꽉 잡고 이를 악물었다.“시작하면 했지. 내가 저 인간 하나 못 이길까 봐?”어느덧 출발 시간까지 1분밖에 남지 않았다.승마장의 직원들이 다시 한번 규칙을 설명했다.“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깃발을 먼저 잡는 사람이 승자예요.”“종점에는 저희 승마장에서 승자에게 드리는 선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두 안전에 유의하시고요. 카운트 시작합니다. 십, 구, 팔...”윤아는 그 와중에 말에서 내리려고 시도했다.그러나 수현에게 이끌려 말에 타게 된 순간부터 수현의 큰 손은 단단한 쇠사슬처럼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아 꼼짝도 할 수 없었다.카운트가 숫자 칠까지 셌을 때 윤아는 뒤에서 갑자기 몸을 앞으로 움직여 바짝 붙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서늘한 숨결이 윤아를 감싸왔다. 이윽고 들려오는 그의 낮은 목소리.“무서우면 돌아서 나 잡아도 돼.”윤아:“?”“누가...”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심판의 외침과 함께 옆에 있던 서원이 미친 듯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영의 비명이 승마장에 울려 퍼졌다.“아악! 천천히 좀 가요!! 안전이 제일 중요하지!”“안전은 무슨, 난 이기는 게 더 중요하거든요.”윤아:“...”윤아는 서원이 미친 듯이 질주하는 모습을 바라만 봤다. 어느새 그는 한참을 달렸는데 수현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윤아는 그와 얘기 하고 싶지 않아서 묻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자 윤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뭐 해?”예상대로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거는 윤아를 보며 수현의 검은 눈동자에 찰나의 만족
윤아는 수현의 도발에 입을 뗐다.“그게 될거라 생각해?”“그럼 꽉 잡아.”수현이 그녀에게 더 가까이 붙으며 말했다. 덕분에 그의 가슴 전체가 윤아의 등에 붙어서 체온이 그대로 느껴졌다.수현은 그의 얇은 입술을 윤아의 귓가에 바짝 붙인 채 말했다“이기게 해줄게.”그의 말과 함께 말은 전용 로드에서 거의 날다시피 달리기 시작했다.겨울의 찬바람이 사정없이 윤아의 몸이며 얼굴을 내리쳤다. 그녀의 머리칼은 바람에 날려 수현의 목에 안착했다.수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머리는 왜 안 묶은 거야?”윤아:“...”허허, 누구 탓인데.그가 탈의실에 들이닥치지만 않았어도 머리를 고정할 집게가 바닥에 떨어질 일도 없었을 거다.산 정상까지 가는 길은 두세 갈래가 있는데 길마다 형태가 달랐다.그래서인지 둘은 한참을 달려도 서원과 아영을 볼 수가 없었다.“다른 사람들은?”그걸 모르는 윤아는 이렇게 오래 달렸는데도 서원과 아영이 보이지 않자 의아해하며 물었다.“산 정상까지 가는 길은 총 세 갈래야. 두 길은 큰 길이고 하나는 샛길.”말이 끝나자 마침 갈림길에 들어섰다. 수현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윤아를 한 눈 봤다.“어느 길로 가고 싶어?”“나랑 뭔 상관인데?”“이기고 싶은 거면 차서원 대표는 아마 길이 험한 샛길로 갔을 거야. 우리도 샛길로 가면 두 말이 부딪히면서 크게 상할 수 있어.”“...”수현의 시선이 윤아에게 단단히 고정되었다. 그러나 윤아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아 그는 줄을 당겨 샛길로 들어섰다.뭔가 눈치챈 윤아는 낯빛이 바뀌더니 말했다.“뭐 하는 거야?”아까 분명 그렇게 말해놓고 샛길로 간다고?수현:“이기게 해주는 거야.”말을 마친 그는 말의 배를 꽉 조이며 샛길로 질주했다. 윤아가 후회할 새도 없게.샛길에 들어선 후 윤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길이 이름처럼 말이 부딪힐 정도로 그렇게까지 좁은 건 아닌듯했기 때문이다.들어선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길이 꽤 넓었다. 하지만 이곳은 산이다 보니 외벽에 딱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거세게 부는 바람에 윤아의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흩날렸다.미친 듯 달리는 말 때문에 울렁이던 속도 이제 한결 나아졌다. 윤아는 고개를 숙여 자신을 꽉 끌어안은 수현의 손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이만하면 됐어?”수현이 잠시 멈칫했다.“됐으면 좀 놓지. 나 깃발 가지러 가야 하는데.”윤아는 수현의 몸이 굳은 걸 느꼈다. 그리고 그는 서서히 그녀를 안았던 손을 풀었다.“그래. 가져야지.”수현은 먼저 말에서 내린 후 윤아에게 손을 내밀었다.그러나 윤아는 그를 한 눈 보고는 건넨 손을 잡지 않고 스스로 힘겹게 말에서 내렸다.윤아의 이런 모습에 수현은 다시 눈빛이 차게 식었다.말에서 내린 윤아는 숨을 한번 들이쉬고는 올라가 깃발을 뽑았다. 옆의 경품은 별 관심이 없었기에 열어보지 않았다.윤아가 몸을 일으키던 그때, 멀리서 서원이 욕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이 짐승 같은 인간. 어떻게 나보다 빨리 오지.”서원은 말에서 내리며 짜증스럽게 줄을 내팽개쳤다.“민아영 씨! 그쪽이 샛길로 못 가게 해서 이런 거 아녜요.”민아영:“웩.”서원:“...”서원은 수현을 한 눈 보고 그를 지나치고 윤아와 얘기하려 했다. 그러나 수현이 손을 뻗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내기의 룰이 뭐였는지 까먹었나 봐?”그의 말에 서원의 표정이 굳었다.“에이 왜 이래. 우리 알고 지낸 지도 꽤 됐는데, 지금 나랑 장난 하는 거지?”그러나 수현은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는 듯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내가 지금 장난하는 것 같아?”서원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였지만, 수현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고 심상치 않음을 느껴 입을 다물었다.수현은 지금 룰을 지키라는 경고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그저 그런 것뿐이라면 그의 몸에서 살기가 느껴지진 않았겠지.서원은 그의 옆에 깃발을 쥐고 서있는 청순한 미모의 윤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윤아와 수현 사이에 뭔가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걸 감지했다.서원은 하는 수 없이 꼬리를 내리고 뒤로 두 걸음 물러
“차서원 대표님. 같은 말을 타지 못하게 돼 아쉽네요.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저와 일 얘기를 좀 하실까요?”서원은 수현의 썩은 표정을 떠올리고 윤아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지만 눈 앞에 있는 윤아의 웃음을 보며 나오려던 말을 삼켰다.“그래요. 갑시다.”“고마워요.”떠날 때 윤아는 옆에 있던 아영도 초대했다.손을 흔드는 아영:“아뇨. 전 윤아 님이 마음도 없는 그 남자가 마음에 들어서요. 기회를 잡아야죠.”윤아:“...”이 사람들은 진수현이 강소영과 만나는 걸 알긴 알고 이러는걸까?하지만 남의 일에 간섭하기 싫어하는 윤아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다.“그래요. 그럼 저희 먼저 가볼게요.”윤아는 서원과 함께 떠났다.서원은 말을 끌고 오며 머쓱한듯 머리를 긁적였다.“하산하는데 한참 걸릴텐데, 앉을래요?”윤아는 방금 전 멀미를 심하게 했던 터라 거부감이 들었다.하지만 투자는...결국 윤아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타기로 결정했다.“타기만 해 봐.”그 때, 수현의 단호한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그러자 서원이 곧바로 말을 바꿨다.“그럼 차를 불러서 갈까요?”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윤아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말이 아닌 차를 탄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차는 빠르게 도착했다. 윤아가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보다 빨리 문을 열고 그대로 차에 앉아버렸다.윤아는 그를 보고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분명 아까 똑똑히 말했는데.윤아의 시선에도 수현은 아랑곳 않고 버티고 앉았다.그래, 친구가 부른 찬데 못 탈것도 없지.그러나 윤아는 그와 함께 앉을리가 없었다.그녀는 문을 쾅 닫아버리고 조수석에 가 앉았다.차서원과 민아영:“...”그들이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그냥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그러나 서원이 차에 타자 수현이 싸늘하게 말했다.“차서원. 앞에 앉아.”“왜?”서원은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수현의 서늘한 눈빛에 소름이 쫙 끼쳤다.“그래, 그래. 알겠어. 내가 앞에 앉지 뭐.”
몇 분 후,아영은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뒤 곧바로 문을 닫고 안전벨트를 했다. 그러고는 이제 이 조수석은 내 것이니 이제 너희가 뭘 하든 절대 안 바꿔준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윤아는 차에서 내린 뒤 서원에게 말했다.“먼저 들어가요.”“앗.”서원은 어차피 다 내려가야 하는데 같이 좀 앉으면 되지 않나 싶었다.그는 윤아의 말대로 허리를 굽혀 차에 타려 했으나 수현이 냉랭하게 말했다.“꺼져.”서원:“...”그는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잠시 멈춰있다가 고개를 들어 배시시 웃으며 윤아를 봤다.“윤아 아가씨, 먼저 타시죠.”윤아는 수현의 모습을 보며 옛일을 떠올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체념한듯 차 차에 탔다.서원은 그녀의 뒤에 따라왔다.수현과 거리를 유지해야 했기에 윤아는 서원 쪽으로 몸을 옮겼다.차가 출발한 뒤 수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차서원. 좀 저쪽으로 가봐.”서원은 어려운 일도 아니니 그의 말대로 옆쪽으로 몸을 옮겼다.진수현이 마음에 들어 하는 여자니 가까이 있는 게 싫을 수도 있지.여기까지 생각한 서원은 아예 창문에 붙다시피 했다.그러나 수현은 그래도 성에 안 차는지 다시 말했다.“더 가.”서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수현을 한 눈 보고는 더 옆으로 옮겼다.“더.”“아니, 진수현 너 미쳤어? 대체 어디까지 가라고? 아주 그냥 차에서 내리라고 하지?”수현은 무표정으로 말했다.“좋네.”“거지 같네.”중간에 앉은 윤아는 더는 못 참는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려 수현을 봤다. 그녀의 눈이 수현의 밤하늘같이 짙은 눈동자와 마주쳤다.차에 타서부터 수현은 한시도 윤아에게서 시선을 뗀 적이 없었다.“아니면 네가 내리는 건 어때?”윤아의 말에 서원이 엄지를 내밀었다.‘통쾌하다.’그는 속으로 윤아의 말에 신나게 맞장구를 쳤다.윤아에게 면박을 당한 수현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그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확실해? 내가 내리면 너도 내려야 할 텐데.”그 말에 윤아는 신경 안 쓴다는 듯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역시 이 여자는 잠들었을 때가 가장 순하다.깨어있을 땐 너무 건방지고 차갑다.그녀의 냉랭한 눈빛을 떠올리며 수현은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두 사람은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따뜻했던 순간이 몇 번 없었다.유감스럽게도 그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윤아의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고요하던 차 안에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바람에 단잠에 빠졌던 윤아도 화들짝 깨어버리고 말았다.수현은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그러나 윤아는 눈도 안 뜬 채 익숙한 듯 손만 움직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가까이 앉은 덕에 수현은 핸드폰 화면 속 ‘선우’이라는 이름을 볼 수 있었다.그의 낯빛이 곧바로 어두워졌다.“여보세요.”윤아가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말투가 어눌한 탓인지 선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자고 있었어? 어딘데?”“음.”윤아는 아직 정신이 흐릿했는데 그래서인지 목소리가 부드러운 솜뭉치 같이 나왔다. 윤아는 잠들기 전 기억을 되짚으며 말했다.“차 안에.”말을 마친 윤아는 자세가 불편한지 움직이는 바람에 머리를 수현의 어깨에 비볐다.편한 자세를 찾은 후 윤아는 다시 말했다.“무슨 일이야?”“차 안에서 잔다고? 윤아야, 혹시 어젯밤에 잘 못 잤어?”‘어젯밤에 못 잔 게 아니라 진수현이 말을 너무 험하게 타서 멀미하느라 저도 모르게...’윤아는 불현듯 뭔가 생각 난 듯 몸이 얼어붙었다.그러고는 서서히 눈을 뜨고 머리를 들었다. 그러자 마주친 수현의 검은 눈동자. 그는 그늘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윤아야?”윤아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선우가 불렀다.수현이 얇은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편하게 기댔나?”선우의 목소리가 순간 멈췄다.“윤아야, 너... 어디야?”윤아는 원래 수현을 만났다는 사실을 별일 아니라 여겨 그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들키게 된 거 그냥 말하기로 했다.“아직 가는 길이야. 오늘 일이 좀 있어서, 돌아가면 얘기해 줄게.”선우는 잠시 침묵하더니 대답했다.“그래.”그는 잠시 멈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