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서원 대표님. 같은 말을 타지 못하게 돼 아쉽네요.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저와 일 얘기를 좀 하실까요?”서원은 수현의 썩은 표정을 떠올리고 윤아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지만 눈 앞에 있는 윤아의 웃음을 보며 나오려던 말을 삼켰다.“그래요. 갑시다.”“고마워요.”떠날 때 윤아는 옆에 있던 아영도 초대했다.손을 흔드는 아영:“아뇨. 전 윤아 님이 마음도 없는 그 남자가 마음에 들어서요. 기회를 잡아야죠.”윤아:“...”이 사람들은 진수현이 강소영과 만나는 걸 알긴 알고 이러는걸까?하지만 남의 일에 간섭하기 싫어하는 윤아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다.“그래요. 그럼 저희 먼저 가볼게요.”윤아는 서원과 함께 떠났다.서원은 말을 끌고 오며 머쓱한듯 머리를 긁적였다.“하산하는데 한참 걸릴텐데, 앉을래요?”윤아는 방금 전 멀미를 심하게 했던 터라 거부감이 들었다.하지만 투자는...결국 윤아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타기로 결정했다.“타기만 해 봐.”그 때, 수현의 단호한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그러자 서원이 곧바로 말을 바꿨다.“그럼 차를 불러서 갈까요?”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윤아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말이 아닌 차를 탄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차는 빠르게 도착했다. 윤아가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보다 빨리 문을 열고 그대로 차에 앉아버렸다.윤아는 그를 보고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분명 아까 똑똑히 말했는데.윤아의 시선에도 수현은 아랑곳 않고 버티고 앉았다.그래, 친구가 부른 찬데 못 탈것도 없지.그러나 윤아는 그와 함께 앉을리가 없었다.그녀는 문을 쾅 닫아버리고 조수석에 가 앉았다.차서원과 민아영:“...”그들이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그냥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그러나 서원이 차에 타자 수현이 싸늘하게 말했다.“차서원. 앞에 앉아.”“왜?”서원은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수현의 서늘한 눈빛에 소름이 쫙 끼쳤다.“그래, 그래. 알겠어. 내가 앞에 앉지 뭐.”
몇 분 후,아영은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뒤 곧바로 문을 닫고 안전벨트를 했다. 그러고는 이제 이 조수석은 내 것이니 이제 너희가 뭘 하든 절대 안 바꿔준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윤아는 차에서 내린 뒤 서원에게 말했다.“먼저 들어가요.”“앗.”서원은 어차피 다 내려가야 하는데 같이 좀 앉으면 되지 않나 싶었다.그는 윤아의 말대로 허리를 굽혀 차에 타려 했으나 수현이 냉랭하게 말했다.“꺼져.”서원:“...”그는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잠시 멈춰있다가 고개를 들어 배시시 웃으며 윤아를 봤다.“윤아 아가씨, 먼저 타시죠.”윤아는 수현의 모습을 보며 옛일을 떠올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체념한듯 차 차에 탔다.서원은 그녀의 뒤에 따라왔다.수현과 거리를 유지해야 했기에 윤아는 서원 쪽으로 몸을 옮겼다.차가 출발한 뒤 수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차서원. 좀 저쪽으로 가봐.”서원은 어려운 일도 아니니 그의 말대로 옆쪽으로 몸을 옮겼다.진수현이 마음에 들어 하는 여자니 가까이 있는 게 싫을 수도 있지.여기까지 생각한 서원은 아예 창문에 붙다시피 했다.그러나 수현은 그래도 성에 안 차는지 다시 말했다.“더 가.”서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수현을 한 눈 보고는 더 옆으로 옮겼다.“더.”“아니, 진수현 너 미쳤어? 대체 어디까지 가라고? 아주 그냥 차에서 내리라고 하지?”수현은 무표정으로 말했다.“좋네.”“거지 같네.”중간에 앉은 윤아는 더는 못 참는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려 수현을 봤다. 그녀의 눈이 수현의 밤하늘같이 짙은 눈동자와 마주쳤다.차에 타서부터 수현은 한시도 윤아에게서 시선을 뗀 적이 없었다.“아니면 네가 내리는 건 어때?”윤아의 말에 서원이 엄지를 내밀었다.‘통쾌하다.’그는 속으로 윤아의 말에 신나게 맞장구를 쳤다.윤아에게 면박을 당한 수현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그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확실해? 내가 내리면 너도 내려야 할 텐데.”그 말에 윤아는 신경 안 쓴다는 듯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역시 이 여자는 잠들었을 때가 가장 순하다.깨어있을 땐 너무 건방지고 차갑다.그녀의 냉랭한 눈빛을 떠올리며 수현은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두 사람은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따뜻했던 순간이 몇 번 없었다.유감스럽게도 그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윤아의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고요하던 차 안에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바람에 단잠에 빠졌던 윤아도 화들짝 깨어버리고 말았다.수현은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그러나 윤아는 눈도 안 뜬 채 익숙한 듯 손만 움직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가까이 앉은 덕에 수현은 핸드폰 화면 속 ‘선우’이라는 이름을 볼 수 있었다.그의 낯빛이 곧바로 어두워졌다.“여보세요.”윤아가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말투가 어눌한 탓인지 선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자고 있었어? 어딘데?”“음.”윤아는 아직 정신이 흐릿했는데 그래서인지 목소리가 부드러운 솜뭉치 같이 나왔다. 윤아는 잠들기 전 기억을 되짚으며 말했다.“차 안에.”말을 마친 윤아는 자세가 불편한지 움직이는 바람에 머리를 수현의 어깨에 비볐다.편한 자세를 찾은 후 윤아는 다시 말했다.“무슨 일이야?”“차 안에서 잔다고? 윤아야, 혹시 어젯밤에 잘 못 잤어?”‘어젯밤에 못 잔 게 아니라 진수현이 말을 너무 험하게 타서 멀미하느라 저도 모르게...’윤아는 불현듯 뭔가 생각 난 듯 몸이 얼어붙었다.그러고는 서서히 눈을 뜨고 머리를 들었다. 그러자 마주친 수현의 검은 눈동자. 그는 그늘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윤아야?”윤아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선우가 불렀다.수현이 얇은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편하게 기댔나?”선우의 목소리가 순간 멈췄다.“윤아야, 너... 어디야?”윤아는 원래 수현을 만났다는 사실을 별일 아니라 여겨 그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들키게 된 거 그냥 말하기로 했다.“아직 가는 길이야. 오늘 일이 좀 있어서, 돌아가면 얘기해 줄게.”선우는 잠시 침묵하더니 대답했다.“그래.”그는 잠시 멈칫
‘같이 잔’, 이 세 글자에 몰래 엿듣고 있던 서원과 아영이 둔이 휘둥그레졌다.둘은 시선을 맞추더니 입을 모아 외쳤다.“같이 잔??”“무슨 뜻이야? 너네 같이 잤어?”운전을 하던 기사도 화들짝 놀라 브레이크를 훅 밟는 바람에 자동차 바퀴와 지면이 마찰하면서 귀를 째는듯한 소리를 냈다.덕분에 차에 탄 모두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운전기사는 당황하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머쓱하게 웃으면서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다 왔어요.”그 말에 윤아는 차가 어느새 승마장에 도착한걸 발견했다.윤아는 눈을 반짝이더니 수현을 홱 밀었다.덕분에 수현은 곧바로 차에서 내렸다.그가 내리자 윤아도 서둘러 내릴 준비를 하는데 뒤에서 수현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실컷 기대놓고 이대로 내빼는건가?”윤아:“...”진수현, 5년동안 낯짝이 많이 두꺼워진 모양이다.윤아는 그를 한 눈 보고는 콧웃음을 치며 말했다.“내빼면 뭐 어쩔건데?”말을 마친 윤아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는 곧장 탈의실로 가 옷을 갈아입고 떠났다.떠날 때 서원이 그녀를 찾아와 어색하게 말했다.“죄송해요. 둘이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알았으면 오늘 승마장에 초대하지도 않았을텐데.”“무슨 사연이요?”윤아는 담담하게 말했다.“나랑 아무 사이도 아니예요.”“그럼 아까 차에서는...”“있다 해도 5년 전 일이예요.”“5년 전?”서원은 혼자 중얼거리더니 뭔가 떠오른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길. 그런거였어.”서원은 또 혼자 중얼거렸다.“어쩐지 윤아 씨를 볼때면 이성을 잃는것 같더라니.”오늘 길 내내 미친 사람처럼 구는데 서원도 처음 보는 수현의 모습이었다.“그래서 말인데요, 차서원 대표님. 앞으로 우리 공적인 일에는 영향이 없을겁니다.”일...서원은 그제야 윤아가 오늘 자신을 찾아온게 일 때문이었다는걸 떠올렸다. 하지만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윤아는 곰곰히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뗐다.“오늘은 좀 그렇고
마지막 한마디를 듣고 나니 민우는 마음이 놓였다.“다행이네요. 내일 잘 말씀드리면 분명 투자 따낼 수 있을 거예요. 대표님이 이렇게 현명하시고 능력 있으신데 안 될 게 뭐가 있겠어요.”현명하고 능력 있어?분명 따낼 수 있어?사실 윤아는 조금... 어려울 것 같았다.윤아는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민우를 바라봤다.“차서원 대표랑 진수현 대표 중에 누가 더 대단하죠?”윤아의 질문에 민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게 무슨 뜻이에요? 갑자기 그건 왜요?”“솔직하게 말해줘요.”민우는 윤아와 수현의 과거를 알고 있기에 만약 진수현 대표가 더 낫다고 말하면 윤아가 화를 내진 않을지 하는 생각에 뭐라 대답할지 조금 고민되었다.어쨌든 윤아는 지금 그의 대표님인데.“무슨 생각 해요?”그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윤아가 물었다.그러자 민우가 용기 내 말했다.“진실을 말씀드릴지 기분 좋은 말을 해드릴지 고민 중입니다.”재밌는 대답에 윤아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날 기분 좋게 하면서도 진짜인 걸 말하면 되겠네요.”민우:“그건 너무 어려운데요.”윤아가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입사 첫 테스트라 해두죠.”“테스트요? 그럼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겠는걸요.”민우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경력만 봤을 땐 당연히 진수현 대표님이 훨씬 낫죠. 그분에 비하면 차서원 대표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니까요. 하지만 신임 대표는 또 열정과 잠재력이 넘친다는 장점도 있죠. 이쪽 분야도 전쟁터나 마찬가지라 끝까지 버티는 쪽이 승자거든요.”그의 말에 윤아가 싱긋 웃었다.“민우 씨가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관리직까지 올라온 건지 알 것 같네요.”민우가 웃으며 말했다.“과찬입니다.”“질문이 하나 더 있는데요.”“네?”“차서원 대표가 저희 같은 작은 회사를 위해 진수현에게 밉보일 일을 할까요?”그 말에 민우는 잠시 멈칫했다.“어떻게, 이번에도 어려운 질문이었나요?”“대표님. 혹시 제가 드린 제안이 마음에 안 드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 하는 윤아는 일찍 회사를 나섰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학교에 도착했을 땐 이미 5분이나 늦은 후였다.아이들은 아빠가 와서 데리고 갔다는 선생님의 얘기에 윤아는 낯빛이 확 바뀌었다.그녀는 소리가 높아지는 걸 주체 못하고 물었다.“뭐라고요?? 아빠가 데리고 갔다고요?”훈이 윤이가 무슨 아빠가 있다고...설마...윤아가 갑자기 언성을 높이자, 담임선생님은 깜짝 놀라 조심스레 말했다.“그, 첫날에 아이들 데리고 왔던 그 분이요. 훈이랑 윤이 아버지 아닌가요?”첫 등교 때 같이 왔던 사람?이선우를 말하는 건가?윤아는 한시름 놓았다. 선우를 말하는 거였구나. 윤아는 수현이 알아내기라도 한 줄 알고 깜짝 놀랐던 것이다.“왜요? 어머님, 안색이 안 좋으세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선생님이 조심스레 물었다.그제야 윤아는 정신이 돌아와 머리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많이 놀라셨죠? 전 또 모르는 사람이 데려가기라도 한 줄 알고.”“아니에요. 아무 일 없으면 됐죠. 뭐. 조심히 돌아가세요.”윤아는 선생님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현관문을 열자, 집 안에 가득 풍기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윤아의 코끝을 간지럽혔다.윤아가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신고 거실로 나가보니 두 아이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그리고 주방에는 선우가 도우미 아줌마 대신 요리를 하고 있었다.인기척을 느낀 장 씨 아줌마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윤아 아가씨, 오셨어요?”그 말에 아이들이 후다닥 뛰쳐나왔다.“엄마!”“엄마 돌아오셨어요?”둘은 동시에 윤아의 다리에 매달린 채 작은 머리를 올려 윤아를 바라봤다.그 모습에 윤아는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릴 것 같았다.윤아는 허리를 숙여 한 손에 한 명씩 안아 올렸다.“오늘 학교에서 어땠어? 재밌게 놀았어? 친구랑 싸우진 않았고?”두 아이는 머리를 흔들며 없다고 했다.아이들과 얘기를 주고받는데 마침 선우가 나왔다. 그는 윤아의 살랑거리는 긴 생머리와 선홍색 입술을 말없이
윤아는 시간도 늦었으니 얼른 아이들을 재우고 남은 업무를 봤다.윤아가 할 일을 얼추 끝낼 때까지 선우는 가지 않았는데 소파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니 떠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윤아가 말을 꺼내려 했으나 선우가 먼저 금테 안경을 벗어들더니 그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시간이 좀 늦었네.”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늦었네.”“여기서 호텔까지 꽤 먼데. 오늘 밤에 나 여기서 신세 좀 져도 돼? 방값 낼게.”방값 얘기에 윤아는 어처구니가 없어 했다.“방값은 무슨, 애초에 이 집도 네가 우리 빌려준 거잖아. 하룻밤 정도야 뭐, 편하게 지내.”말을 마친 윤아는 몸을 일으켰다.“방 정리해 줄게.”선우도 따라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 내가 하면 돼.”그는 윤아를 따라 손님방으로 향했다. 겨울이라 여기서 지내려면 두꺼운 이불과 베개가 필요했다.하지만 손님이 올 거란 생각을 못 했던 윤아는 침구 세트는 다 세 개씩만 준비했었다. 그 때문에 선우가 쓸 게 없자 윤아는 잠시 고민하다 자신의 이불을 그에게 건넸다.“일단... 내 이불 써. 난 윤이랑 같이 잘게.”“그래.”선우도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고마워. 우리 윤아.”우리 윤아...윤아는 간신히 입꼬리를 올렸다.선우는 이불을 챙겨 방으로 들어갔고 윤아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있다가 윤이를 찾으러 갔다.윤이는 같이 자자는 말에 잔뜩 들떠 윤아의 허리를 꼭 안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엄마, 그럼 오늘 자기 전에 책 읽어주세요.”윤아:“그래. 우리 윤이 오늘 착한 일 하면 엄마가 한 번 생각해 볼게.”“엄마, 어떻게 해야 착한 거예요?”“예를 들면, 엄마한테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줄래?”낮에는 선우가 있어 그에게 신경을 쓰느라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주지 못했었다.이것 역시 윤아가 굳이 남자 친구를 만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두 아이에게 쓸 시간도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오늘은 학교에서 뭐 했어?”윤이는 머리를
윤아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그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지금 다니는 학교도 분위기가 괜찮은 것 같아 보낸 건데. 예전에 해외에 있을 땐 아이들이 다 어려서 그런 생각은 안 했었다.그러나 지금, 윤아는 아이들도 점점 커가고 있음을 실감했다.한 부모 가정이라는 하자도 점점 아이들의 세상에서 더 뚜렷하게 인식되어 올 것이다.윤아는 어릴 때 자기도 느꼈던 그 경험들을 떠올렸다.하지만 윤아는 부족함을 못 느낄 정도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고 심씨 가문이 세력이 있다 보니 다른 아이들의 괴롭힘을 당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와 잘 지내보려고 다가오는 친구들만 있을 뿐.처음에는 그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게 마냥 기뻤다.하지만 어느 날, 윤아는 그들이 몰래 그녀의 얘기를 하는 걸 들었었다.“이건 진짜 비밀인데, 윤아 쟤 엄마 없대.”“뭐? 왜?”"쟤네 엄마가 꽃뱀이라 다른 남자랑 도망갔대. 우리 엄마가 그랬어, 쟤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안 그럼 우리도 나쁜 물 들 거래.”“헐. 진짜 심윤아 엄마가 꽃뱀이야?”“그렇다니까!”“완전 무서워! 우리도 이제 윤아랑 놀지 말자.”어린 윤아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훔쳤었다. 그러고는 먼저 그들과 거리를 두려고 피해 다니곤 했다.그런 일이 있다 보니 윤아는 어릴 적 마음이 꼬여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애들이 또 윤아의 뒷담화를 하는 바람에 윤아는 구석에 숨어 숨죽이고 듣고 있었다. 그러다 수현이 불쑥 나타나 그 친구들의 의자를 발로 차버렸다. 수현이 때릴 기세로 다가오자, 윤아를 욕하던 애들도 뿔뿔이 도망쳤다.그러고는 구석에 있는 윤아를 끄집어냈었다.“심공주. 저런 말을 왜 듣고만 있어?”윤아는 머리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수현은 그렇게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결국 윤아의 머리를 꼭 끌어안아 줬다.“이제 내가 있으니까 다시는 네 욕 못할 거야.”그렇게 윤아는 수현의 존재만으로 점점 용기가 생기고 마음도 건강해질 수 있었다.하지만...윤아는 다시 하윤이를 바라보았다.아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