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는 시간도 늦었으니 얼른 아이들을 재우고 남은 업무를 봤다.윤아가 할 일을 얼추 끝낼 때까지 선우는 가지 않았는데 소파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니 떠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윤아가 말을 꺼내려 했으나 선우가 먼저 금테 안경을 벗어들더니 그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시간이 좀 늦었네.”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늦었네.”“여기서 호텔까지 꽤 먼데. 오늘 밤에 나 여기서 신세 좀 져도 돼? 방값 낼게.”방값 얘기에 윤아는 어처구니가 없어 했다.“방값은 무슨, 애초에 이 집도 네가 우리 빌려준 거잖아. 하룻밤 정도야 뭐, 편하게 지내.”말을 마친 윤아는 몸을 일으켰다.“방 정리해 줄게.”선우도 따라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 내가 하면 돼.”그는 윤아를 따라 손님방으로 향했다. 겨울이라 여기서 지내려면 두꺼운 이불과 베개가 필요했다.하지만 손님이 올 거란 생각을 못 했던 윤아는 침구 세트는 다 세 개씩만 준비했었다. 그 때문에 선우가 쓸 게 없자 윤아는 잠시 고민하다 자신의 이불을 그에게 건넸다.“일단... 내 이불 써. 난 윤이랑 같이 잘게.”“그래.”선우도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고마워. 우리 윤아.”우리 윤아...윤아는 간신히 입꼬리를 올렸다.선우는 이불을 챙겨 방으로 들어갔고 윤아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있다가 윤이를 찾으러 갔다.윤이는 같이 자자는 말에 잔뜩 들떠 윤아의 허리를 꼭 안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엄마, 그럼 오늘 자기 전에 책 읽어주세요.”윤아:“그래. 우리 윤이 오늘 착한 일 하면 엄마가 한 번 생각해 볼게.”“엄마, 어떻게 해야 착한 거예요?”“예를 들면, 엄마한테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줄래?”낮에는 선우가 있어 그에게 신경을 쓰느라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주지 못했었다.이것 역시 윤아가 굳이 남자 친구를 만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두 아이에게 쓸 시간도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오늘은 학교에서 뭐 했어?”윤이는 머리를
윤아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그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지금 다니는 학교도 분위기가 괜찮은 것 같아 보낸 건데. 예전에 해외에 있을 땐 아이들이 다 어려서 그런 생각은 안 했었다.그러나 지금, 윤아는 아이들도 점점 커가고 있음을 실감했다.한 부모 가정이라는 하자도 점점 아이들의 세상에서 더 뚜렷하게 인식되어 올 것이다.윤아는 어릴 때 자기도 느꼈던 그 경험들을 떠올렸다.하지만 윤아는 부족함을 못 느낄 정도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고 심씨 가문이 세력이 있다 보니 다른 아이들의 괴롭힘을 당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와 잘 지내보려고 다가오는 친구들만 있을 뿐.처음에는 그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게 마냥 기뻤다.하지만 어느 날, 윤아는 그들이 몰래 그녀의 얘기를 하는 걸 들었었다.“이건 진짜 비밀인데, 윤아 쟤 엄마 없대.”“뭐? 왜?”"쟤네 엄마가 꽃뱀이라 다른 남자랑 도망갔대. 우리 엄마가 그랬어, 쟤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안 그럼 우리도 나쁜 물 들 거래.”“헐. 진짜 심윤아 엄마가 꽃뱀이야?”“그렇다니까!”“완전 무서워! 우리도 이제 윤아랑 놀지 말자.”어린 윤아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훔쳤었다. 그러고는 먼저 그들과 거리를 두려고 피해 다니곤 했다.그런 일이 있다 보니 윤아는 어릴 적 마음이 꼬여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애들이 또 윤아의 뒷담화를 하는 바람에 윤아는 구석에 숨어 숨죽이고 듣고 있었다. 그러다 수현이 불쑥 나타나 그 친구들의 의자를 발로 차버렸다. 수현이 때릴 기세로 다가오자, 윤아를 욕하던 애들도 뿔뿔이 도망쳤다.그러고는 구석에 있는 윤아를 끄집어냈었다.“심공주. 저런 말을 왜 듣고만 있어?”윤아는 머리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수현은 그렇게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결국 윤아의 머리를 꼭 끌어안아 줬다.“이제 내가 있으니까 다시는 네 욕 못할 거야.”그렇게 윤아는 수현의 존재만으로 점점 용기가 생기고 마음도 건강해질 수 있었다.하지만...윤아는 다시 하윤이를 바라보았다.아
수현이 날카롭게 민재를 쏘아봤다.민재는 괜히 찔려서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수현은 분명 그가 강소영을 들였다고 화를 내는 거다.하지만 강소영 아가씨를 어떻게 안 들여보낼 수가 있겠는가. 비록 수현과 만나는 사이는 아니지만 강소영이 진수현 어머니께 인사까지 드린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사람들 눈에는 강소영이 수현과 결혼하게 될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수현의 말뜻이 뭔지 아는 소영도 머쓱해하며 설명했다.“비서님 탓하지 마. 내가 들여보내달라고 한 거야. 내가 안 들여보내 주면 소란 피울 거라고 해서 비서님도 어쩔 수 없었어.”그녀의 말에 수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소영을 한 눈 봤다.“그래?”소영은 가련해 보이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수현의 싸늘한 웃음이었다.“안 들여보내면 소란을 피워? 강소영 너 언제부터 그렇게 막무가내였지?”순간 소영의 표정이 굳었다.“수현 씨, 난 그냥...”수현이 소영에게 화를 낼 줄은 몰랐던 민재는 얼른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에 곧바로 짐을 챙겨 몸을 일으켰다.“강소영 아가씨가 대표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요. 두 분 말씀 나누세요, 그럼 전 이만.”일 벌여놓고 그냥 내빼시겠다? 수현이 비릿하게 웃었다.민재는 수현이 굳이 그를 막지 않자 서둘러 방을 벗어났다.민재가 떠나자, 방에는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소영은 수현을 보며 자기 체면을 구겼다는 생각이 몹시 언짢았다. 그래도 그의 비서인 민재라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정말 못 견뎠을 거다.“수현 씨, 오늘 하루 종일 어디 갔었어. 핸드폰도 꺼져있고. 일이 많이 바빴어? 이 침. 오늘은 뭐 좀 먹었어? 배고프면 우리...”“강소영.”수현이 싸늘하게 그녀를 불렀다.소영은 하던 말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왜, 왜?”“말했을 텐데. 나한테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수현의 쌀쌀맞은 말에 소영의 눈가가 붉어졌다.“이, 이게 어떻게 낭비야? 난 그냥 널 좋아하니까 잘해주려는 거야. 그리고 난 이렇게 계속 네 옆을 지
향수...눈물을 흘리던 소영은 불현듯 누군가 생각 났다.5년 동안 그의 몸에서 여자 향수 냄새가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마치 바람에 흩날려온 것만 같은 아주 연한 꽃향. 술집을 드나드는 그런 여자들은 뿌릴 리가 없는 그런 향수다.소영이 넋을 놓고 있는 틈을 타 수현이 그녀를 밀쳐냈다. 힘이 좀 들어간 탓에 소영은 휘청이며 뒤로 물러났다.수현은 짐승같이 사나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손대지 마.”소영은 수현의 그런 표정은 처음 보았다. 그녀는 두려움에 휩싸여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하지만 방금 맡았던 그 향수 냄새를 생각하면 그냥 물러날 수 없었다.“그래, 손 안 댈게. 그럼 너도 솔직하게 얘기해줘. 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어디서 난 거야? 날 좋아하지 않는 건 상관없어. 근데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니야.”향수 냄새?수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숙여 팔에서 나는 냄새를 맡았다. 옅은 향수 냄새...그녀의 향기다.그도 그럴 것이 같은 말을 탄 데다 그렇게 오래 안고 있었으니 냄새가 남을 수밖에.소영은 수현이 생각 없이 하는 모든 행동에 큰 충격을 받았다.본인은 모를 수 있지만 그를 지켜보던 소영은 똑똑히 보아낼 수 있었다. 수현의 그 썩은 표정이 한순간에 풀리는걸. 게다가 팔을 들어 대놓고 냄새를 맡는 모습까지.그 순간 그의 눈빛은 믿을 수 없게 부드러워졌다.만약 소영의 앞에 거울이 있었다면 지금 그녀가 얼마나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누구야?”불길한 예감에 조금은 짐작이 간 소영은 저도 모르게 수현에게 물었다.그녀의 말에 수현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쌀쌀맞게 말했다.“내 사생활까지 너한테 보고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아?”소영은 낯빛이 창백해진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수현의 냉랭한 모습에 결국 소영은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수현은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허리에 대충 수건 한 장을 두른 채 나와 차서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수현이 전화를 걸어올 때 차서원은 하필 클럽에 있어
“그것 뿐이야?”아니, 뭔가 이상하다.“저번 경매라면, 언제?”“몰라서 물어? 그때 너도 있었는데? 왜? 설마 그 날 둘이 못 만났어?”수현:“...”“진짜 못 봤어?”“계속 말해 봐. 외투 돌려받은 다음에는 무슨 말 했는데?”서원은 잠시 말이 없다 잠시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진수현, 아무리 우리가 협업 관계라지만 사석에서는 친구 아니겠냐. 그렇지만 친구 사이에도 그 정도 간섭은 지나치단다. 윤아 씨랑 무슨 얘기 했는지까지 감시할 셈이야?”그러나 수현은 봐주지 않았다.`“말 해.”“이 파렴치한 자식!”결국 서원은 그의 핍박에 못 이겨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해줬다.통화를 마친 후 수현은 핸드폰을 든 채 뭔가 생각하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무엇 때문인지 내일 있을 일 때문에 심란하던 그의 마음도 많이 나아졌다.잠에 들기 전, 그는 핸드폰을 들어 또 귀여운 두 아이의 계정에 들어갔다.해외에 있을 때 같은 비행기를 탄 걸 보면 그 아이들도 이 곳에 있다는 얘기인데.아니나 다를까, 수현은 그 계정의 IP 주소가 이 곳 수원인 걸 확인했다..이런 우연이.해외에서도 같은 곳이더니, 비행기도 같고 한국에서도 같은 도시다.아이 부모가 수원으로 거주지를 옮긴 건가?아이...수현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표정이 굳었다.만약 5년 전에 윤아와 이혼 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아이도 이 정도 나이일 텐데._이튿날,윤아가 눈을 떴을 때 하윤이는 그녀의 몸에 널브러져 머리를 파묻고 자고 있었다.윤아가 몸을 움직이자 하윤이가 잠꼬대를 했다.“엄마. 졸려... 안아줘...”윤아는 손을 뻗어 하윤이를 꼭 안은 채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이제 일어나야지. 오늘도 학교 가는 날이야.”하윤이는 윤아의 곁에서 몇초를 더 꾸물거리고는 몸을 일으켰다.훈이와 윤이 모두 좋은 습관이 있었는데 바로 윤아가 깨우면 바로 잘 일어난다는 거였다.하윤은 침대에서 일어난 후 옷을 입으러 갔고 윤아도 다른 일을 하러 방을 나섰다.해외에 있을 때 아이들은 이
결국 윤아는 선우에게 두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일을 부탁했다.그리고 그녀는 혼자 회사로 출근하기로 했다.아직 회사가 안정되지 않았기에 윤아는 차를 사지 않았다. 말하자면 우습지만 그녀는 회사 대표가 돼서도 매일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출근한다. 오히려 사원인 오민우가 더 먼저 차를 뽑았다.출근길에 바다 넘어 있는 그녀의 친구 현아가 연락이 왔다.“우리 윤아. 요즘 어때? 한동안 연락을 못 했네. 회사는 잘 돼가고 있어?”현아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녀는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윤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럭저럭 괜찮아. 넌 요즘 어때?”“말도 마. 저 상사 놈 때문에 짜증 나 죽겠어. 윤아야, 내가 몇십 년을 살았는데 내 평생 저런 싸이코는 처음이야! 대체 저 인간은 어떻게 저렇게 사원들 착취를 잘하지?”윤아는 화가 나 날뛰는 현아에게 조금씩 맞장구를 쳐주며 십분 내내 그녀의 상사 욕을 들어줬다.“됐어, 됐어. 그 인간 얘기는 그만하자. 생각만 해도 욕 나와.”“응.”“아참. 앨리스와는 잘 지내고 있어? 걔 너한테 엄청 예쁜 집도 구해줬다며? 너만을 위한 집이라던데. 너희들 지금쯤 완전 재밌게 지내고 있겠다? 나 돌아갔을 땐 둘이서 좋아 죽느라 나 잊는 거 아냐?”앨리스 얘기에 윤아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일전에 앨리스가 그녀와 같이 지내기 싫은 티를 낸 후에 윤아는 괜히 짐이 되기 싫어곧장 그 집에서 나왔었다.윤아는 앨리스를 탓하진 않았지만 그 후로 둘이 연락을 주고받는 일은 없었다.윤아가 앨리스에게 전화 한 적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앨리스는 대충 얼버무리고 통화를 마치려 했다.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한 후 윤아는 앨리스가 자기와 통화하기 싫어한다는 걸 눈치챘다.둘 다 성인이니 그녀가 연락하는 걸 꺼린다면 윤아도 굳이 그녀를 귀찮게 하진 않았다.윤아는 이곳에 없는 현아까지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굳이 이 얘기를 하지 않았다.결국 윤아는 웃으며 말했다.“응. 집 예쁘더라. 걱정하지 마, 네가 돌아올 자리는 언제든 있
윤아가 정색하며 말했다.“심윤아요. 어제 대표님과 약속했습니다.”원래 심드렁하던 데스크 직원은 윤아의 이름을 듣자 갑자기 태도가 휙 바뀌었다.“심윤아 아가씨요?”그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자 윤아는 조금 의아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네.”“대표님께서 아가씨 오시면 바로 올라가시면 된다고 하셨습니다.”“그래요?”조금 의외였다.“저희 대표님이 신경 쓰셨어요.”직원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윤아를 엘리베이터까지 안내했다.“대표님 전용 엘리베이터에요. 맨 위층으로 가시면 됩니다.”그는 엘리베이터용 비밀번호까지 입력해 주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야 윤아는 어느 방으로 가야 하는지를 물어보지 않은 걸 떠올렸다.그러나 꼭대기 층에 가니 방이 하나밖에 없었다.물을 필요가 없었군.사무실 문은 닫혀 있었다. 윤아는 다가가 조심스레 노크했다.그러자 안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요.”그 목소리를 들은 윤아는 잠시 멈칫했다.아직 차서원과 그다지 친하지 않아 그의 목소리를 분간하진 못하지만 억지로 낮춘 듯한 목소리에 윤아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그녀가 아직 문 앞에 서서 생각하고 있는데 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그리고 수려한 용모의 남자가 불쑥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단단한 몸매에 깔끔한 검은색 머리, 그리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빛까지.진수현!그를 본 윤아는 표정이 구겨질 뻔했다. 그녀는 순간 어이없는 기분이 들어 몸을 돌려 가버리려고 했다.“차서원 찾아온 거 아니야? 그냥 가게?”그의 말에 윤아가 걸음을 멈췄다.왜 왔었던 건지 생각 난 윤아는 고개를 돌려 쌀쌀하게 말했다.“차서원 대표는?”수현:“일 얘기야?”그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더니 말을 이었다.“투자받으려고?”그의 말에 윤아가 움찔했다.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투자 때문에 차서원을 찾아갔다는 얘기를 그에게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근데 어떻게 안 거지?‘내 뒷조사를 하나?’이 생각이 들자 윤아는 낯빛이 확 바뀌었다.그럼 아이는...“투자받으려는
다 지난 일을, 그것도 하필 친밀하던 시절 얘기라니.윤아는 살짝 움찔하더니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진수현. 너 진짜 뻔뻔하다.”이미 강소영이 있는데 다른 여자에게 질척거리고 있지 않은가.‘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어이없어. 5년 전에 받은 상처가 모자란 건가?’“뻔뻔해?”수현이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어느새 윤아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윤아가 빠져나가려 하자 수현이 그녀의 길을 막아섰다.수현은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너 그때 내 침대에서는 그렇게 말 안 했어.”짝!결국 참지 못하고 수현의 뺨을 치는 윤아.그녀가 손을 올릴 거라는 예상을 못 한 건지 수현의 고개가 옆쪽으로 돌려졌다.반응이 돌아온 그는 윤아의 손목을 포박하고 몸을 숙여 키스하려고 했다.짝!그러자 급해 난 윤아가 그의 뺨을 한 번 더 내리쳤다.“진수현, 적당히 해. 그 일은 다 지난 일이야. 우리 이혼한 지 5년이라고!”어느 말이 수현을 자극한 건지 그는 멈칫하더니 가까이 있는 윤아를 노려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5년, 5년이 흘렀구나. 수현은 그의 평생이 다 흘러가야지만 만날 수 있을까 싶었는데.그는 그대로 멈춰서 숨을 몰아쉬며 윤아를 봤다.윤아는 그런 수현을 보며 더는 들이대지 않을 것 같아 그 틈을 타 수현을 밀쳐내고 몸을 돌려 가버렸다.“심윤아. 참 쉽게 가네. 지독하다.”윤아는 냉소를 터뜨렸다. 진짜 독한 인간이 누군데.아이는 진수현 본인이 버린 거다. 이혼신고도 그가 직접 법원에 가서 한 거고. 그런데도 지금 누가 누굴 보고 지독하다는 건지.“너 그렇게 아무것도 상관없어? 할머니도?”할머니란 말에 윤아의 발걸음이 주춤했다. 할머님은 정말 많이 보고 싶지만...윤아는 이미 수현과 이혼한 상태다. 이런 상태로 할머님을 보러 간다면.“널 많이 보고 싶어 하셔.”수현이 말했다.그 말에 윤아는 하마터면 주체하지 목하고 그에게 갈 뻔했다. 그러나 다행히 관건적인 순간에 그녀는 스스로를 다잡았다.할머님이 확실히 윤아의 아픈 손가락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