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데뭔데?”재밌는 가십거리가 생기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좋아하는 건 어느 곳에서든 다 똑같은 모양이다.“심윤아 매니저님 말이야. 애가 둘이나 있대.”놀라운 소식에 모두 깜짝 놀랐다. 그저 평범한 남녀 사이 사랑 얘기일 줄 알았는데 윤아가 이혼한 적이 있었다니. 그것도 모자라 아이가 둘이나 있을 줄이야.“내가 들은 얘긴데. 이선우 대표님 집안이 엄해서 애 둘이나 딸린 여자는 집안에 들이지 않는 거래.”“재혼한 데다가 애가 둘이나 있는 여자면 그냥 평범한 남자를 만나는 건 그럴 수 있다 쳐도 대표님과 결혼하는 건 너무 욕심이 과한 거 아니야? 대표님 집안에서 절대 동의할 리가 없지. 난 왜 둘이 만나지 않는 건가 했어. 못 만나는 거였구나.”누군가 비꼬듯 말했다.“어디서 들은 얘기야 넌? 내가 알기론 이선우 대표님 아버님은 첩도 들였다던데. 이걸 집안이 엄하다고 할 수 있나?”“하긴. 일곱 살 남짓인 그 집 아이도 대표님 새엄마가 낳은 거 아냐? 그 새엄마라는 사람도 그다지 좋은 분은 아니라더라.”선우와 윤아에 관한 얘기로 시작했던 수다가 어느새 선우의 집안 얘기로까지 번졌다.그러다 보다 못한 팀장이 헛기침으로 눈치를 주고서야 그들은 하나둘 뿔뿔이 흩어졌다.“온종일 가십거리나 떠들고 다닐 열정으로 일을 하면 쟤네가 팀장 달았을 텐데. 어휴 참.”팀장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를 떴다._한편, 윤아는 사람들이 뒤에서 뭐라 하는지 알 리가 없었다. 설령 안다 해도 남들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말이다.그 많은 사람의 입을 그녀가 어떻게 일일이 단속할 수 있겠는가. 윤아는 그저 자신의 입만 잘 단속하며 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선우와 헤어진 후 윤아는 곧장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러나 사무실로 가던 도중에 뭔가 떠오른 듯 다시 발걸음을 돌려 진 비서의 사무실로 향했다.똑똑-오늘 일정을 준비하고 있던 이 비서는 누군가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머리를 들었고 오는 사람이 심윤아 매니저
마침내 진 비서는 보고서를 그녀에게 건넸다.펼쳐보니 정말로 선우가 말한 그 보고서였고 날짜도 한 달 전의 것이었다.게다가 이건 그냥 보통의 시장조사 보고서가 아닌 많은 세부사항이 매우 깊게 조사된 것이었다.보고서를 다 읽은 후 윤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행히 선우는 정말로 국내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던 거고 자신 때문이 아닌 걸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고마워요. 여기 보고서는 돌려드릴게요.”윤아는 시장 조사 보고서를 그에게 돌려주었다.“매니저님. 가져가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을래요?”“괜찮아요. 방금 다 봤어요.”“네. 그럼 필요하면 언제든지 메시지 보내주세요. 바로 가져다드릴게요."둘은 잠깐의 대화를 나눈 뒤 헤어졌다. 진 비서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서 자신의 이마에 묻은 땀을 닦으며 손에 들고 있는 시장 조사 보고서를 내려다봤다. 그는 문득 이선우가 처음에 그에게 지시하던 일을 떠올렸다.“더 자세하게.”“자세하게?” 진 비서는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해 다시 물었다. “대표님. 얼마나 더 자세해야 할까요?”“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자세하게 하도록 해.”그러나 보고서가 완성된 후에도 그건 계속해서 그곳에 있었고 며칠 동안 사용되지 않았다.오늘 심윤아가 찾아와 가져가고 나서야 진 비서는 그가 처음에 왜 그렇게 자세하게 하라고 말했는지 깨달은 것이었다.그는 사실 심윤아를 위해서였다. 그녀를 위해서 그러면서도 그녀에게 알려지지는 않게 말이다.진 비서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선우가 그가 알고 있던 그 미친놈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그러나 미친놈은 미친놈이다. 누구를 위해서라도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이선우의 과거의 미친 짓을 생각하면서 진 비서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이선우가 윤아에게 빠지게 된 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종잡을 수 없었다._회사를 개설하기로 결정한 이후, 윤아는 굉장히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이전에는 낮잠을 자는 시간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점심에 쉴 시간조차 없이 밤늦게까지 일에 매
몇 초 뒤, 윤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이미지 박살 났네.”거울 속의 그녀는 다크서클이 길게 떨어진 모습이 팬더가 따로 없었다. 바쁜 탓에 화장도 안 하고 잠도 못 잔 탓에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창백한 얼굴에 눈 밑 처짐까지 더해져 몇 킬로 감량한 결과, 그녀의 모습은 약물 중독자 같은 느낌을 줬다.남들은 고사하고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랄 정도이니 말이다.“너 설마 며칠 동안 이 몰골로 회사를 돌아다녔던 거야?”윤아는 그녀의 말에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응.”“푸하하.” 현아는 하마터면 먹던 밥을 그대로 뿜어버릴 뻔했다. “정말이구나.”현아는 윤아의 가련한 표정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예쁜 애들은 다르네. 이미지를 신경 쓰지 않아도 여전히 미인이야.”사실 윤아의 모습이 현아에게는 그렇게까지 엉망은 아녔다.그저 평소의 정교한 모습과 비교하면 상당히 나쁘게 보일 뿐이었고 무엇보다도 자연미인이기 때문에 눈 밑 처짐과 창백한 얼굴은 오히려 그녀를 병약미가 돋보이게 만들어주었다.여기까지 생각한 현아는 감탄했다.미인은 초췌해도 미인이구나. 만약 그였다면... 아마도 참으로 참혹한 모습이 될 것 같다.“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회사 여는 게 며칠 안에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해. 조금 늦어져도 괜찮잖아.”“알겠어.”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나 몸 잘 챙길게.”회사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윤아의 관심과 집중력은 빠르게 회사로 옮겨졌다. 그녀는 급하게 현아에게 몇 가지 유의사항에 대해 질문을 했고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문제는 완전히 잊어버렸다.현아는 그녀가 중독자로 변하는 것을 보고 지금 더 이상 어떤 말로 설득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결국 두 사람의 식사는 또 업무로 대체되어버렸다.떠날 시간이 다가올 때쯤 현아는 자기가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녀는 딱히 신경 쓰지 않고 다이어트 하는 셈 생각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집으로 돌아온 현아는 두 아이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자세히 보니 둘은 라이브방송을 하고 있었다.생각해보니 훈이와 윤이는 아직 현아를 발견하지 못했기에 현아는 나오려던 말을 서둘러 삼키고 주방으로 곧장 가 분주히 움직였다.최근 들어 시간이 없던 탓에 설거지도 제대로 안 했을 거란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주방은 오히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설거지는 말할 것도 없이 식탁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서랍 위의 일지에는 오늘 칸에 체크 표시도 되어있었다.“도우미분이 벌써 왔다 가셨나?”현아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별다른 생각 없이 베란다로 향했다.잠시 후 그녀는 두 아이의 방송이 끝나고서야 방으로 돌아갔다.“현아 아줌마!”현아를 보자마자 윤이가 잔뜩 신나서 현아가 허리도 채 숙이기 전에 달려와 그녀의 다리를 꼭 끌어안았다.“현아 아줌마. 너무 오래 못 봐서 정말 보고 싶었어요.”“그래?”현아는 가자미눈을 한 채 몸을 낮추고 윤이가 반응하기도 전에 말랑하고 귀여운 볼살을 몇 번이나 만지고 쭈물거렸다. 윤이의 볼따구가 핑크빛이 되어서야 현아는 손을 놓고 윤이의 이마에 사랑스럽게 뽀뽀를 했다.“아줌마도 보고 싶었어!”윤이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아줌마. 좀 이상한 것 같아.”“히히. 현아 아줌마만 윤이한테 이렇게 할 수 있는 거야. 다른 사람은 절대 우리 윤이 얼굴 만지게 해주면 안 돼.”현아는 기분이 좋은지 변태처럼 헤실헤실 웃어댔다.“음. 그래요.”순진한 윤이는 두 볼이 핑크 빚이 되었는데도 착하게 현아의 말에 동의했다.그 모습을 본 현아는 참지 못하고 또 한 번 그의 볼에 뽀뽀하고는 한마디 보탰다.“아 참. 현아 아줌마 말고 다른 사람은 우리 윤이 볼에 뽀뽀도 안 돼. 물론 너희 엄마랑 할아버지는 제외야.”그때 마침 훈이도 걸어 나왔다.녀석은 제법 공손하게 현아에게 인사했다.“현아 아줌마.”훈이를 보자 현아는 눈을 반짝이며 윤이를 놓아주고 훈이에게로 돌진했다.뒤로 얼른 물러나는 훈이.“훈이야!”
여기까지 생각한 현아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어서 이 아줌마가 빨리 결혼해서 너희처럼 귀여운 아이들을 낳아 현아 아줌마가 너희들 볼을 그만 놓아줄 수 있게 해달라고 빌어."윤이는 곧바로 그녀의 목을 끌어안고 말했다.“현아 아줌마가 빨리 결혼하게 해주세요.”“아이고 요 귀여운 것. 정말 귀여워 죽겠어.”_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선우가 윤아를 찾았다.“아직 일 안 끝났어?”바쁜 와중에 윤아가 머리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아니. 좀 걸릴 것 같아.”말을 마친 그녀는 그제야 누가 자기에게 말을 거는지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네가 어떻게 여기에 왔어?”선우는 한 손엔 차 열쇠를, 한 손엔 정장 외투를 들고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들어왔다.“퇴근하러 왔어. 근데 넌 아직도 좀 바쁜 것 같아 보이네.”말하면서 선우는 편히 소파에 앉았다. “여기서 널 기다릴게. 얼마나 걸릴 것 같아?”처음에는 거절하려 했지만 결국 윤아는 말했다.“한 시간 정도 걸릴 거야.”“좋아. 너 마저 일 봐.”그는 배려심 넘치게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고 덕분에 윤아는 다시 그녀의 일에 몰두했다.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갈 때쯤 선우는 소파에 책을 찾아 앉아있었다.처음에는 책을 읽으려 했지만 왜인지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윤아의 얼굴에 머무르게 되었다.윤아는 일할 때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흰 키보드 위에 길게 뻗은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며 키를 누르고 긴 머리카락은 어깨너머 드리워져도 발견하지 못한 채 여전히 집중력을 유지했다.가끔 고민해야 할 문제가 생길 때에만 타자를 멈추고 아래턱을 받치며 핑크빛 입술을 살짝 앙다물었는데 그 모습이 참 예뻤다.윤아는 자신이 일할 때의 작은 표정들이 모두 선우의 눈에 담기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선우는 겉으로는 책을 보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도 선우는 기꺼이 기다릴 의향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일하는 것
이선우는 손을 잠시 멈추더니 싱긋 웃었다. 하지만 손은 거두지는 않고 계속 그녀의 단추 위에 올려두었다.“윤아야.”그의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웠다.“이 정도로 날 밀어내는 거야?”“아니, 난 그쟝...”심윤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직도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선우는 한숨을 쉬며 자기 손을 떼어냈다.“그런 거라면 네가 직접 해.”심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가 손을 떼어내자 심윤아는 재빨리 뒤돌아서더니 자기 겉옷의 단추를 채웠다.옷을 다 입은 그녀가 뒤돌아섰을 때 이선우는 그녀의 노트북이 든 가방을 대신 들고 앞으로 걸어갔다. 심윤아도 재빠르게 따라갔다.회사 사람들은 거의 퇴근했지만 아직 남아서 야근을 하는 사람들은 두 사람을 만나면 인사를 건넸다.“이 대표님, 심 매니저님.”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엘리베이터에 탄 뒤 심윤아는 그에게 주현아가 자기 집에 있다고 얘기했다.“현아 씨 휴가야? 현아 씨네 대표님이 휴가를 준 건가?”주현아의 상사 얘기를 꺼내자 심윤아는 웃음을 찾을 수가 없었다.“어, 어렵게 얻은 휴가야. 나도 걔 사장님이 휴가를 3일이나 준 게 이상해.”두 사람은 일상적인 수다를 떨며 함께 차에 탄 뒤 주차장을 떠났다.집에 도착해 심윤아와 이선우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밥을 짓는 맛있는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따뜻한 노란색 불빛 아래 심하윤과 심서훈은 거실 소파에 앉아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엄마! 아저씨.”두 녀석은 며칠 동안 못 본 이선우를 열정적으로 반기며 모두 이선우에게 안겼다.이선우는 한 손에 한 명씩 들고 두 녀석을 모두 안아 올렸다.신서훈은 조금 쑥스러워하며 이선우의 목을 살짝 끌어안았다.그런데 심하윤은 이선우의 목을 꽉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저씨 우리 엄마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아저씨 최고!”“엄마를 데려다주지 않으면 이 삼촌은 싫어?”“아니요. 아저씨는 항상 좋아요.”이선우는 이미 신발을 바꿔 신은 뒤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 이쪽에는 신경도 쓰지
이선우는 보기에는 온화에 보이지만 사회적 지위가 매우 높았기에 그녀는 감히 이선우를 평범한 남자를 대하듯이 할 수 없었다.알고 지낸 지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아마도 그녀가 심윤아의 절친이기도 했기에 이선우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주었다. 뭔가 좋은 것이 있으면 그녀에게도 선물하곤 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주현아는 이선우의 편에 서게 되었다. 심지어 때때로 이선우의 칭찬을 심윤아에게 하기도 했다. 거기에 그녀는 진심으로 이선우를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했다.심윤아의 곁을 5년 동안 지켰고 거기에 한 번도 옆에 다른 여자가 없었다.이 정도로 지극정성인 남자는 이 세상에 이선우를 제외하고는 오래전에 멸종됐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심윤아가 이혼한 뒤 애들을 낳은 것도 신경 쓰지 않았고 아이들도 자신의 아이처럼 대했다.이게 사랑이 아니라면...“뭘 얻는다는 거야?”이때 심윤아는 부엌에서 나오면서 주현아가 한 말의 절반은 들었지만 앞의 내용은 듣지 못한 듯했다.주현아는 헛기침하면서 얼굴이 붉어지거나 더듬지도 않고 거짓말을 했다.“뭘 얻겠어? 당연히 프로젝트지.”이선우는 심윤아의 손에 들린 그릇을 받아 들며 말했다.“내가 할게.”심윤아도 그릇을 이선우에게 건네주었다.“식사 시간 다 됐는데 아직도 일 얘기 중인 거야?”“야, 일 얘기가 어때서? 이건 우리가 그만큼 일에 열정이 있다는 거야. 일은 우리의 생명과도 같다고.”그 말을 들은 심윤아는 고개를 돌려 주현아를 바라보았다.“그래? 그럼 지금 바로 네 상사한테 전화해서 일이 네 생명이라고 말한다?”주현아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좋은 분위기에 갑자기 개 같은 상사 얘기는 왜 꺼내? 그 사람 얘기 꺼내지도 마.”다들 앉은 뒤 심윤아는 주현아의 방금 주현아의 표정이 떠올라 계속 웃었다.“내 느낌에는 너하고 네 상사 곧 원수를 사랑할 것 같은데?”“쯧쯧, 누가 그 사람을 사랑한대? 심윤아 내가 경고하는데 날 그 남자와 엮지 마. 내가 5년 동안 솔로 탈출을 못한 건 모두 그 사람 덕분이니까. 내가
저녁 식사 후 이선우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설거지는 내가 할게.”“설거지 안 해도 돼. 식기세척기에 넣기만 하면 돼.”하지만 이선우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심윤아가 반응할 새도 없이 그릇들을 모두 그가 가져갔다.주현아는 옆에서 구경하다가 놀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그냥 둬 윤아야. 하고 싶다잖아. 네가 계속 말리면 선우 씨가 언제 또 점수를 따겠어?”“맞아.”이선우도 주현아의 말에 동의했다.“나한테도 점수 딸 기회를 줘야지.”이렇게까지 말하니 심윤아도 더 뭐라고 할 수가 없어 남은 그릇들을 이선우에게 가져다주었다.잘 시간이 되자 주현아는 자기 방이 있으면서도 굳이 베개를 안고 와서는 심윤아와 함께 자겠다고 했다.창밖에서는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고 방 안의 온도도 많이 떨어졌지만 두 사람이 한 침대에 누우니 이불 안의 온도는 올라갔다.“전에 학교 다닐 때 내가 너희 집에 자주 놀러 가서 몰래 자고 왔던 거 기억난다. 근데 그때 너희 집 침대 엄청 컸었는데. 사실 나는 그때 부잣집 침대는 다 이만큼 큰가 싶었어.”전에 일을 얘기하니 심윤아는 웃음이 터졌다.“아빠는 내가 침대서 떨어질까 봐 걱정되셨나 봐.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맞춤 제작한 침대에서 잤어.”“아이고, 네가 그 말하니까 그때 아무리 네 침대에서 굴러도 떨어지지 않던 기억이 떠오르네.”세월이 흘러 지난 일을 얘기할 때마다 사무치게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주현아는 마치 작은 새처럼 예전에 재미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얘기했다.“맞다. 너 그때 기억나? 우리 잘 때 몰래 훔쳐 먹다가 너희 집 도우미한테 들켰던 거.”하지만 주현아의 말에 아무런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주현아는 심윤아가 잠이 든 줄 알고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바라봤더니 그녀는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윤아야, 윤아야?”주현아가 몇 번 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너 왜 그래?”심윤아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니, 방금 잠깐 멍때렸어.”하지만 주현아는 그녀의 뒤통수를 움켜쥐고서는 겁을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