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수는 고개를 돌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하승우를 보았다.수작업으로 재단한 검은색 셔츠와 정장 바지에 좁은 어깨와 긴 다리를 쭉 뻗은 몸매는 세계 정상급 남성 모델들이 무색할 정도였다.잘생긴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연예계 어느 남자 스타도 압도할 수 있었다.그가 막 촬영장에 들어갔을 때 많은 소녀가 그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평범한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던 남자 스타들도 그의 옆에서는 무색해 보였다.남지수는 그를 보며 고3에 하승우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도 하승우의 외모에 현혹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그러나 아까 하승우의 말을 생각하면 남지수의 마음은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허수영 씨는 어울리지 않아요. 제가 원하는 효의와는 이미지가 아주 달라요.”“이미지는 바꿀 수 있어요.”하승우의 말투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이 일은 제작진 임원 모두가 통과했어요.”제작진 임원 전원이 통과했다는 그 말은 그녀 같은 작은 작가는 더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남지수는 입술을 꽉 깨물고 심장이 아파 죽을 것 같았다.허수영을 얼마나 열심히 지켜주는지 어이없을 따름이었다. 허수영이 이 역할을 하고 싶어 해서 여태껏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던 그가 이 드라마에 투자하다니. 그는 정말 허수영을 위해 많은 것을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렇게 정해요.”하승우가 말했다.“다시는 바꾸지 않을 거예요.”이 말에 허수영의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남지수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스크를 썼지만 주먹을 불끈 쥔 채 노기를 띤 눈빛을 짓고 있어 보는 사람들도 화가 난 것을 눈치챘다.허수영은 걸어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승우야, 나 때문에 남지수 씨랑 싸우지 마. 효의 캐릭터가 마음에 드는데 남지수 씨가 마침 작가라 나에게 불만인 건 이해해.”그녀는 또 남지수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남지수 씨, 정말 하고 싶은 드라마인데 잘 찍을 테니 화내지 마세요.”주영배는 멍한 표정으로 그들 셋을 바라보았다. 그는 항
입을 꾹 다문 남지수는 그의 옆을 지나갔다.소지성은 3년 전처럼 유치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밉살스러웠다.하지만 어릴 때 남지수는 소지성을 아주 좋아했다.둘은 짜개바지 시절부터 알고 지냈고 그 후에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하지만 3년 전 그녀가 하씨 가문에 액을 막으러 시집간다는 소식을 알게 된 소지성은 그녀가 불구덩이 뛰어드는 것이라고 호되게 꾸짖었다. 하지만 여전히 결혼을 고집하는 남지수를 보며 소지성은 화가 났지만 어쩔수 없이 ‘허락’했다.보답을 바라지 않은 듯 헌신적으로 하승우를 대하는 남지수가 못마땅해 소지성은 그녀와 여러 번 싸웠고 심지어 욕도 했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결국 크게 한 번 싸운 후 두 사람은 사이가 틀어졌고 20년간 유지해 온 우정도 끊어졌다.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은 3년이나 만나지 않았다.남지수는 아쉬워했다. 소지성은 그녀의 중요한 친구였는데 이제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 같았다.번잡한 생각을 접고 남지수는 현장에서 촬영 상황을 보며 메모했다.첫 번째는 허수영의 단독 신이다. 외모는 효의 캐릭터와 잘 어울리지 않았지만 연기력이 좋아 잘 표현했다.두 번째는 허수영의 상대역 황제 캐릭터를 맡은 소지성의 신이다.두 번째 신을 찍을 때 하승우는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히 허수영의 연기를 끝까지 지켜보았는 그의 모습에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투자자가 왜 아직도 여기 있어? 시선이 허수영에게 고정됐는데 두 사람 무슨 사이야?”“헤헤,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닐까? 허수영을 보며 잔뜩 긴장한 모습을 봐.”남지수는 마음이 아파났다.‘하승우가 허수영을 얼마나 좋아했으면 남들까지도 보아냈을까.’남지수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써 자제했다.‘지금은 일하러 왔으니 개인감정을 개입하지 말아야 해...’차츰 남지수가 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때 허수영에게 사고가 생겼다.복잡한 액션을 찍으며 힘을 너무 많이 써 얼굴이 하얗게 질린 허수영은 몸을 휘청거리며 쓰러졌다.주영배를 비롯한 스태프
남지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허수영의 말에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오른 남지수는 숨을 쉬기 어려웠다.남지수는 허수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신경이 쓰이고 열불이 나서 도저히 못 참겠어요!”남지수가 이렇게 말할 줄 몰랐던 허수영은 멍해졌다. 그녀의 인상 속에서 남지수는 항상 약자였다.분노의 불길에 오장육부가 타버릴 것 같았던 남지수는 입술을 깨물며 진정하려고 애썼다.“허수영 씨, 하승우에게 아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여보’라고 부르면 내연녀와 다를 게 뭔가요? 감독님 앞에서 실수해서 그랬다고 하는데 배우가 NG를 내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더군다나 몸이 불편해 NG를 낸 거면 감독님이 뭐라 안 하시는 걸 모르는 게 아니죠?”“다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스태프들 앞에서 하승우를 ‘여보’라고 부른 건 당신이 이렇게 부르기 싶었기 때문이에요.”“뻔뻔한 짓을 했으면 대범하게 인정해도 되잖아요?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나한테 와서 능청스럽게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허수영의 눈동자에는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렸지만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불과 몇 초 사이에 분노가 사라진 허수영은 곧 아련한 모습으로 남지수를 스쳐지나갔다.“승우야...”깜짝 놀란 남지수가 고개를 돌려보니 허수영이 하승우의 품에 엎드려 마치 방금 괴롭힘을 당한 것처럼 힘없고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하승우는 급히 그녀의 팔을 잡으며 다정하게 물었다.“왜 그래? 아직도 불편해?”허수영은 하승우를 바라보며 괴로운 듯 말했다.“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운 게 불편해. 또 남지수 씨가 날 욕했어...”“너 수영이에게 뭐라했어?”남지수를 바라보는 하승우의 눈빛은 찬 바람이 몰아치는 것처럼 싸늘했다.남지수는 마치 얼음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온몸이 차가워져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쓰라린 마음을 가까스로 달래며 남지수가 말했다.“그래요. 뭐라 했어요!”이렇게 강경한 태도는 허수영이 상상했던 것과 아주 달랐다. 그녀는 남지수가 반박할 줄 알았
몸집이 우람짐 하승우가 담벼락처럼 남지수를 가로막자 그녀는 꼼짝달싹 못 했다.남지수는 하승우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눈길을 옆의 벽지에 고정했다.“무슨 얘기를 해?”남지수는 하승우가 무슨 얘기를 할지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허수영을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하승우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던졌다.“나랑 수영의 일이 마음에 걸렸어?”남지수는 말문이 막혔다.불빛 아래 하승우의 피부는 백옥처럼 매끄러웠고 윤곽도 더 또렷해 보였다. 그는 그윽하지만 또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지수를 지켜봤다.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남지수의 주먹을 움켜쥔 손바닥에는 땀이 조금 났다.그녀는 절대로 하승우가 자신의 감정을 발견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마음먹었다. 자존심마저 잃는다면 그녀는 자신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그래서 남지수는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우리는 아직 명색이 부부인데 허수영이 사람들 앞에서 ‘여보’라고 불렀을 때 나는 모욕당하는 것 같아 화냈을 뿐 다른 뜻은 없었어.”‘그래서일까?’하승우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찡그리다가 이내 풀었다.“우리 일은 곧 끝날 테니 조만간 자유로워질 수 있어. 조금만 참아줘.”차분하게 말한 후 하승우는 곧 몸을 돌려 떠났는데 남지수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욱신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남지수는 있어서는 안 될 생각을 애써 눌러버렸다.‘하승우가 허수영을 보호하는 태도가 분명하니 더는 착각하지 마. 아니면 점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어...’고택을 떠난 하승우는 은성시 중심에 있는 고급 아파트 단지로 갔다.지하실에 차를 세운 후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승우야, 왔어! 지문을 입력했는데 왜 그냥 들어오지 않았어?”허수영은 기뻐하며 말했다.“익숙하지 않아.”거실에 들어간 후 허수영이 붙잡고 있는 자기 팔을 보며 하승우가 물었다.“좀 나아졌어?”“응, 많이 좋아졌어. 아이를 임신했는데 촬영을 하니 힘들어서 갑자기 쓰러졌어.
그래서 하승우는 어떤 사람일까.허수영은 눈은 내리깔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다음날 허수영은 아침 일찍 비서 은아를 데리고 촬영장에 갔다. 은아는 동그란 안경을 쓴 통통한 여자아이로 밀크티 10여 잔을 들고 힘들어했다.선글라스를 벗은 허수영은 대범하게 입을 열었다.“어제 돌봐주셔서 고마워요. 저의 남편이 쏘는 거니까 다들 와서 한 잔씩 가져가요.”“와, 대표님 친절하게 밀크티까지 사주셨네요.”“하 대표님은 정말 언니를 예뻐하시네요. 언니를 도와줬던 사람들도 챙겨주시네요.”스태프들은 기뻐하며 밀크티를 가지러 갔는데 순식간에 혼자 남은 남지수는 홀로 대본을 들고 의자에 앉아 몸을 가늘게 떨었다.어제 자신에게 이런 일로 화내고 괴로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지만 감정과 이성은 별개다.허수영이 공공연히 하승우를 남편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그녀는 괴로워졌다.그녀는 허수영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데 그 눈빛은 그녀를 바늘방석에 앉게 할 정도로 아이러니해 자기도 모르게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그때 나른하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허수영 씨, 하 대표님과 결혼하셨어요?”허수영은 갑자기 묻는 소지성에게 고개를 돌렸다.소지성은 잘생긴 남자로 하승우에 비해 성숙하지 못한 편이지만 그래도 눈에 띄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은 아니지만 곧 결혼할 거예요.”“허허.”소지성이 웃자 귀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의 목소리의 조롱을 알아챘고, 허수영은 얼굴을 찡그리며 그가 왜 이렇게 웃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럼 허수영 씨는 하 대표님의 여자친구인가요?”소지성은 차갑게 또 한마디 했다.“하지만 하 대표님은 아내가 따로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허수영 씨는 내연녀가 된 거예요?”“...”이 말에 밀크티를 들고 있던 직원들은 허수영을 쳐다보며 의아해했다.이 말을 다른 사람이 한 말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어쨌든 진위는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소지성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달랐다.소지성은 명문가 출신으로 분명히 상속받
말을 마친 후 소지성이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내는 걸 무시하고 남지수는 그를 밀어냈다.하씨 가문의 고택, 하봉주가 소파에 앉아 뭔가 생각하고 있었다.장영자가 차를 가져다주러 왔을 때 하봉주는 장영자를 불러세워 물었다.“요즘 승우와 지수가 여전히 그저 그래?”‘그저 그렇다'는 말은 바로 그 두 사람이 각방을 쓰고, 평소에 각자 바빠서 거의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장영자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는데 며칠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이 못난 놈, 정말 쓸모없어!”장영자는 눈동자를 굴리며 다가갔다.“제가 보기에 지수 씨는 아주 좋은 아이예요. 만약 그 두 사람이 더 자주 만난다면 승우가 분명 지수 씨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남지수는 하씨 가문 고택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른 채 며칠 동안 촬영장을 돌기도 하고 틈틈이 대본을 쓰며 알차게 지냈다.그러나 이날 오후 하승우가 그녀를 찾아왔다.“저녁에 시간 돼? 나랑 디너쇼에 참석해야 해.”남지수는 의아하게 물었다.“무슨 디너쇼?”하승우와 비밀결혼한 사이라 평소 하승우는 저녁 식사에 혼자 참석하거나 비서실에서 아무나 데리고 가지만 남지수에게 같이 가자고 한 적은 없다.“둘째 삼촌 쪽 파티인데 가족 몇 명만 참석해.”이 말을 들은 남지수는 이내 이해했다.하씨 가족은 모두 두 사람의 결혼 상황을 알고 있고, 그 사람들도 모두 몰래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얼굴이 망가졌다고, 결혼 3년 동안 남편을 만나지 못한다고 웃고 있다는 걸 남지수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아까 하승우와 함께 디너쇼 참석할 수 있다는 기쁨이 곧 하씨 가족을 만난다는 사실로 말끔히 사라졌다.남지수는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알았어.”하승우를 동반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직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았기에 아내의 역할은 모두 하고 있었다.그러나 마음속에서는 허수영이 남편이라고 부르도록 내버려 둔 채 남편 노릇도 못하는 하승
“아니...”하승우는 뜻밖에도 남지수가 말대꾸하자 화가 나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왜 그렇게 공격적으로 변했어요?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예요?”그 말에 남지수는 어이없어 웃어 버렸다.“난 가정교육은 잘 받았는데 하은우 씨는 보아하니 아무도 사람 되는 법을 안 가르쳐줬나 보죠? 20세 넘었는데 사람다운 말도 못 하고 어떻게 자랐는지도 모르겠네요.”그녀의 말은 둘째 삼촌과 숙모도 함께 몰아붙인 셈이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둘째 삼촌과 숙모는 모두 감히 화를 내지도 못하는 모습이었다.‘하승우가 옆에 있어서인가?’같은 생각을 한 하은우는 화를 내며 말했다.“남지수, 형이 옆에 있다고 무법천지야? 형의 전 여자친구인 허수영과는 비교도 안 돼! 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허수영 누나의 상대가 아니야! 언젠가 형이 널 버리고 수영 누나를 데려와 내 형수가 되게 할 거야!”하은우는 허수영의 팬이라는 걸 남지수는 이전에는 몰랐지만 이제 알게 되었다.하지만 하승우는 그녀가 반박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가 반박하면 하승우의 체면을 깎는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하지만 그때 하승우는 싸늘하게 하은우를 힐끗 보더니 두 눈에는 어두운 빛이 피어올랐다.“네 형수 말이 맞아. 가정교육이 안 돼 있긴 해. 왜 이렇게 자란 거야?”하씨 가문의 손자들은 하승우를 빼면 하나같이 쓸모가 없었는데 하씨 가문이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하은우는 이 말을 듣고 시무룩해져서 말했다.“형, 왜 남의 편을 들어!”이 ‘남’이라는 말은 분명 남지수를 가리켰다. 남지수는 그를 싸늘하게 힐끗 쳐다봤고 하승우는 눈살을 찌푸렸다.하승우가 뭔가 말하려 하자 남지수가 먼저 가로챘다.“제가 남이에요? 하씨 가문으로 시집간 사람들은 모두 남이라는 뜻인가요? 둘째 숙모님을 그렇게 말씀하시면 얼마나 속상하실까요?”그녀는 둘째 숙모를 동정 어린 눈빛으로 힐끗 보았는데 그 순간 둘째 이모의 안색은 정말 보기 흉했다.하은우는 이 말을
“내가 왜 고맙다고 해야 해?”남지수는 냉정하게 말했다.“하씨네 가족인 하은우가 나를 괴롭혔으니 당신이 나를 보호는 건 당연한 거야. 어쨌든 우리는 명색이 부부니 내가 모욕을 당하면 당신도 체면을 잃게 돼. 그래서 나를 보호하는 건 당신에게도 유리해.”말을 마친 남지수는 조금 긴장해졌다.남지수는 도리를 따져가며 말을 하지만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억지’ 부리기를 좋아한다. 허수영을 지켜줄 때의 태도 역시 ‘억지’였다.‘이 일 때문에 나에게 화 내지 않겠지?’하승우는 남지수를 지켜보았다. 당당하게 말을 꺼낸 뒤 갑자기 미간을 찌푸린 채 안절부절못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지수를 보며 그는 이 여자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궁금했고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하승우는 남지수의 눈빛을 보려고 그녀의 턱을 잡아들었지만 이 애매한 행동에 두 사람은 동시에 놀랐다.하승우의 손이 닿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린 남지수는 그 목적이 궁금한 듯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하승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솔직히 남지수는 놀랐기 때문이지 다른 목적이 없었다.순간적으로 자신이 추태를 부렸음을 알아차린 하승우는 손을 거둬들였다.‘우리는 계약 부부일 뿐인데 왜 이렇게 친밀한 행동을 했을까?’“네 말이 맞아. 내가 널 지켜야 했어.”“응.”긴장해서 벌렁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남지수는 침착한 척했지만 소매 밑에 숨겨진 손은 주먹을 움켜쥐었다.‘하승우의 한마디 말 때문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다니. 남지수, 넌 왜 이렇게 못났어?’“너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남지수는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키 차이 때문에 그녀의 정수리만 보일 뿐 눈길조차 볼 수 없었던 하승우는 남지수의 생각을 추측했다.그러던 중 갑자기 남지수의 얼굴이 떠올랐고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어도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 물었다.하승우의 이 말을 들은 남지수는 깜짝 놀랐다.“내 사진을 봤잖아.”남지수가 말했다.“오래전에 봐서 잊었어.”하승우가 덤덤하게 말했다.그에게 있어 남지수는 중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