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우와 저는 혼인 신고를 한 부부예요. 그러는 당신은 뭐죠? 윤리 도덕으로 보면 당신은 엄연히 내연녀예요! 당신이 뭔데 저를 지적해요?”“이제야 의도를 드러냈어요? 당신은 솔직히 승우를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죠?”허수영은 비아냥거렸다.이 여자가 정말 머리가 나쁜 건지, 아니면 일부러 이런 말로 자기를 자극했는지 남지수는 알 수 없었다.오히려 후자의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허수영은 바보가 아니었고 오히려 남자 앞에서 연약한 척할 줄 아는 똑똑한 여자였다.남지수는 계속해서 말했다.“제가 왜 하승우를 떠나야 하죠? 이혼하면 이렇게 좋은 남자를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수영 씨는 화나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할아버지는 당신 비천한 배우따위 거들떠보지도 않아요.”남지수는 계속해서 말했다.“아무리 하씨 가문에 시집오고 싶어도 당신은 그저 빛을 볼 수 없는 내연녀 노릇밖에 할 수 없어요. 하지만 내연녀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촬영 현장에서 승우를 ‘여보’라고 부를 수 있지만 할아버지 앞에서도 이렇게 부를 수 있을까요?”“하씨 가문에서 이렇게 불러보세요.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요? 없을 거예요. 인정은커녕 당신을 광대로 취급할걸요!”남지수는 그제야 속 시원하게 이 말을 해버렸다.솔직히 이건 남지수의 생각이 아니었지만 허수영이 너무 심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남지수가 발끈했다.매번 허수영이 자신을 괴롭힐 때마다 남지수는 허수영과 같은 여우년이 나타나 똑같은 방식으로 허수영을 욕해주길 바랐다.이제 구미호급 여우년이 된 남지수는 마음속에 묻어둔 말을 내뱉고 나니 정말 후련해졌다.하지만 허수영의 안색이 흐려졌다.남지수 앞에서 줄곧 유지하던 우아함이 사라진 허수영은 주먹을 꽉 쥔 채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남지수를 바라봤는데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 걸 보면 폭발할 한계에 도달한 것 같았다.“시치미 떼는 걸 포기했나봐요? 만약 승우가 여기에 있었다면 당신은 진짜 모습을 드러냈을까요?”허수영의 말을 들은 남지수는 코웃음을 쳤다.기밀을 보호하기
이경진은 그렇다고 대답하며 한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인 후 한 모금 빨더니 말했다.“네 아내가 이렇게 내숭을 떨 줄 생각지도 못했어.”전화기 너머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더 차가워진 말소리가 들렸다.“나도 이럴 줄 몰랐어.”“그럼 어떻게 할 거야? 직접 따져 물어볼래?”이경진이 물었다.“그럼.”이 말을 들은 이경진은 마음이 놓였다.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너무 사랑했던 하승우는 무신론자였지만 3년 전에 액을 막을 수 있다는 말에 결혼했다.하승우가 할아버지를 걱정해 남지수와 이혼하지 못한 줄 알았는데 냉정한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이때 하승우는 녹음 파일을 반복해서 들으며 미간을 찌푸렸다.창가에 기대어 서서 먼 곳의 파란 하늘을 바라봤지만 그의 마음은 오히려 시커먼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처럼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한참 후 하승우는 남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뚜’ 소리가 나자마자 끊어졌다.한편 허수영을 휴식실에서 쫓아낸 후 남지수는 또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하지만 진작에 다 토했고 지금은 위장이 텅 비어 있어 남지수는 더는 아무 것도 토하지도 못한 채 그저 변기를 끌어안고 헛구역질을 했다.몸을 일으키며 화장실을 나서던 남지수는 갑자기 무슨 일이 떠올랐는지 화들짝 놀랐다.오늘은 이미 19일로 생리날짜가 미뤄지고 있었다.최근 그녀는 늘 몸이 불편했고 속이 늘 울렁거렸으나 식량은 예전보다 많아졌다.한 달 전 하승우와 고택의 침대에서 살을 섞었지만 두 사람은 아무런 피임조치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사후 피임약을 먹는 것도 잊었다.모든 징조가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가리키자 화장실 앞에 멍하니 선 남지수는 온몸이 얼음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싸늘해졌고 이 결과를 믿을 수 없었다.잠시 후 임연아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와 함께 병원에 다녀오자고 말하려 했지만 전화를 받지않아 혼자 병원에 다녀왔다.한 시간 후 남지수는 창백한 얼굴로 병원을 나섰다.임신 확인 진단서를 손에 들고 길에 나온 남지수는 막막했고 두려웠다.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아랫
남지수는 그제야 하승우와 이경진이 친한 사이라는 것이 생각났다.이 관계로 임연아가 하승우를 만나는 차수가 오히려 남지수보다 더 많았다.남지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가갔다.“연아야, 왜 그래?”“괜찮아. 오랜만에 남자친구와 밥을 먹는데 갑자기 웬 ‘여동생’이 나타나 아픈 척 꾀병과 함께 애교를 부려 화가 났을 뿐이야. 오늘은 재수가 없었어.”이경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넌 왜 가희를 받아줄 수 없어?”“그래, 난 받아줄 수 없어. 피 한 방울 안 맺힌 ‘여동생’을 어느 여자가 받아줄 수 있어!”임연아는 흥분했다.이경진은 콧방귀를 뀌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그럼 너도 혈연관계가 없는 오빠를 찾으면 돼. 내가 뭐라 했어?”이 말 한마디 때문에 말문이 막힌 임연아는 안색이 창백해졌다.이경진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여태까지 이 점을 그녀에게 숨긴 적이 없었다. 솔직히 임연아와 남지수는 같은 처지다.‘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연아야, 괴로워하지 마.”남지수는 임연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소리로 다독여 주다가 곧 이경진을 향해 냉담하게 말했다.“연아는 휴식해야 하니 이젠 집에서 나가주세요.”미간이 굳어진 이경진의 안색은 흉측해 보였다.그는 하승우의 아내인 남지수를 두 번 만났는데 한 번은 하승우가 그녀와 결혼할 때였고 한 번은 하승우의 할머니가 돌아갈 때였다.인상 속에서 남지수는 외모가 망가져 열등감이 있어서인지 매우 소심하고 말도 잘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주 당당해졌다.“당신이 뭔데 나를 쫓아요? 여긴 저의 여자친구 집이에요.”이경진은 쌀쌀하게 말했다.남지수는 냉랭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여자친구인 걸 번연히 알면서 왜 상처 주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의미가 없어 보였다.문 앞으로 다가간 남지수는 문을 열며 다시 중복해서 말했다.“나가주세요. 안 가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이경진과 하승우는 모두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이 여자 왜 이러지? 성격이 예전과 달라진 것 같은데?’비록 마음속으로는 온갖 불만이 있
“사모님, 이혼 합의서입니다. 한번 훑어보시고 문제없으면 서명해 주세요.”남지수는 눈앞에 있는 이혼 합의서를 보며 뇌에서 윙 하는 소리만 들렸을 뿐 다른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사모님?”그녀가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자 주민우는 손을 뻗어 그녀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정신을 차린 남지수는 망연하게 물었다.“하승우가 나랑 이혼한대요?”마스크를 쓴 채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드러낸 그녀의 얼굴엔 풀리지 않는 슬픔이 가득한 걸 보며 주민우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네, 하 대표님께서 어르신이 돌아가셨으니 이 결혼은 더는 지속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며 사모님과... 이혼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남지수는 심장이 아파져 오는 걸 느꼈다. 곧 머리 위로 높이 솟은 칼날이 마침내 떨어지는 듯한 해탈감이 찾아왔다.3년 전 하승우 할머니의 병세 때문에 외모가 망가진 남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는 하씨 가문에 시집가 하승우의 아내가 되었다.하지만 3년 동안 그녀는 하승우와 두 번 만났을 뿐인데, 한 번은 결혼식 날, 또 한 번은 한 달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였다.지난 3년 동안, 하승우는 단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는데 아내인 그녀가 안중에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하승우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그들이 이혼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사모님...”남지수가 몇 분 동안 침묵하다가 갑자기 아무 말 없이 펜을 들고 깔끔하게 서명하자 주민우는 황급히 주의를 주었다.“합의서 항목을 아직 확인하지 않으셨어요...”“필요 없어요.”남지수는 펜 뚜껑을 덮고 이혼 합의서를 앞으로 밀었다.그녀는 하승우가 그녀에게 얼마를 나누어 주려는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처음에 하씨 가문이 그녀를 찾아가 할머니의 병 때문에 하는 결혼이라고 밝힌 후 그녀에게 많은 보상금을 주었으니 그녀는 평생 먹고 살 걱정이 없었다.게다가 하승우의 돈 때문에 시집간 것도 아니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때 하승우를 좋아하게 되었고 무려 8년 동안 좋아하고 있었다. 3년 전 하승우와 결혼하
“지수야, 속상하지 마. 우리 나가서 쇼핑하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임연아가 말했다.“그래, 정리하고 나갈게.”삶은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한 남지수는 잠시 정리하고 나서 집을 나섰다. 차를 몰고 성화 거리로 간 그녀는 임연아와 함께 명품 쇼핑몰에 들어갔다.남지수는 171의 큰 키에 균형 잘 잡힌 날씬하고 완벽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피부에 공기가 오래 닿을 수 없어 마스크까지 쓰고 있지 않았다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전부 쳐다봤을 것이다.두 사람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 가방 코너에 들어섰다. 임연아는 이혼을 축하하기 위해 가방을 선물하겠다고 했지만 남지수는 이를 거절했다. 그래서 임연아는 그녀를 강제로 끌고 올라갔다.“지수야, 저기서 고르자. 직원 언니가 신상이 많이 나왔다고 하니까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봐봐.”임연아는 앞쪽의 샤넬 코너를 가리키며 명쾌하게 말했다.남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범하게 카운터를 향해 걸어가다 1초 뒤 카운터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춰 섰다.키가 180정도 되는 남자가 검은색 셔츠와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비스듬히 서 있었다.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눈을 지그시 감은 무심한 모습이었지만 이런 시큰둥한 모습은 영화에서나 나올듯했다.남지수는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의아했다. 여러 회사의 모든 일을 관리하고 있는 남편 하승우가 왜 대낮에 백화점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 검은 웨이브 머리를 한 예쁜 여자가 다가와 하승우의 팔을 잡고 진열대에 있는 빨간 가방을 가리키며 애교를 부렸다.“승우 씨, 저거 갖고 싶어. 오늘 입은 치마랑 잘 어울리지 않아?”하승우는 흘끗 쳐다보고는 직원에게 말했다.“저거 포장해.”“...”거의 꽝 소리와 함께 남지수는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그녀는 빨간 치마를 입은 여인의 옆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간 줄도 몰랐다.“저 여자가 누구야?”임연아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하승우가 밖에서 사귀는...”임연아는 ‘애인
3년 동안 그녀는 하승우에게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열심히 요리를 연구해 일 끝나면 따뜻한 음식을 먹으라고 매일 하승우 회사에 들러 도시락을 배달했지만 하승우는 그 음식은 손도 대지 않았고 얼굴도 보기 싫어했다.그녀는 힘들게 번 원고료로 하승우에게 옷을 여러 벌 사주었지만 나중에 주민우가 그녀에게 그 옷들을 한 번도 입지 않아서 구석에 먼지가 쌓일 정도로 쌓아두었다고 돌려서 말해주었다.이런 일들에 남지수는 낙담했고 자신이 못생겨서 하승우가 그러는 줄 알았다.결혼 전 그녀의 사진을 본 하승우는 수수한 얼굴에 흉악한 칼자국을 가지고 있는 자신을 보기도 역겨워하는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좀 예뻐져서 다시 하승우를 찾아가려 했다.하승우 자신은 모든 것이 톱급이었는데 그와 비슷한 여자만이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3년 동안의 노력이 모두 헛수고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승우에게는 이미 다른 사람이 있었다.“남지수 씨도 쇼핑하러 왔어요?”허수영은 손을 거두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남지수가 대답하려 할 때 임연아가 끼어들었다.“남지수 씨 아니고 사모님이에요. 자중해 주세요.”남지수가 오전에 합의서에 서명했지만 아직 법원에 가지 않았으니 임연아의 말이 맞긴 했다. 순간 허수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하승우는 남지수에게 덤덤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이리 와봐.”남지수는 하승우가 그녀를 찾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 잔뜩 긴장한 채 하승우와 함께 옆 복도로 나왔다.그녀를 내려다보던 하승우의 목소리는 한껏 차가웠다.“친구 관리 잘해.”남지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임연아에게 아주 무례한 말이었지만 방금 임연아가 그 여자를 계속 겨냥했고, 하승우는 사랑하는 여자가 천대받는 걸 보았으니 기분 나빠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대답했다.“알아. 아까 연아가 오해해서 그래. 다른 뜻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말을 마친 남지수는 평온한 자태를 유지하며
저택에 돌아와 저녁을 먹으라는 하봉주의 전화를 받은 남지수는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집에 들어와 보니 하승우도 있었다. 매번 돌아올 때마다 그를 만나지 못한 것은 아마 그녀를 피했기 때문일 것이다.남지수는 하승우를 본체도 하지 않은 채 곧장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할아버지, 저 왔어요.”“아이고, 우리 지수 왔어. 어디 좀 보자...”하봉주는 손을 내밀었다.“아까 오종훈 할아버지가 애가 생기는 부적을 가져왔어. 너랑 승우는 언제쯤 아이를 가질 예정이야? 할아버지는 증손자를 안고 싶어...”‘아이?’심리적 작용 때문인지 남지수는 갑자기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어 가까스로 가라앉혔다.테이블에 놓인 송자 관세음보살을 보며 남지수의 입가에는 쓴맛이 돌았다.‘곧 이혼할 텐데 아기가 있을 수가?’“할아버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마침 하승우도 있었고 또 결판내야 할 일인 걸 번연히 알기에 남지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솔직히 우리 둘은 이미 이...”“콜록, 콜록콜록...”하봉주는 마치 폐를 뱉어낼 것처럼 갑자기 심하게 기침을 했다,깜짝 놀란 남지수와 하승우는 하봉주를 부축해 침실로 들어갔다.“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어디가 불편하세요?”남지수는 걱정스러워 물었다.“난 괜찮아. 그저 너무 외로워서 그래. 너의 할머니가 떠난 후 이 텅 빈 저택에 홀로 남게 되니... 너희들은 임신 준비를 할 겸 여기서 한동안 나랑 함께 지내...”하봉주의 간절한 눈길을 보며 바로 앞에서 거절하지 못한 남지수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방으로 돌아온 후 남지수는 하승우에게 물었다.“우리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언제 할아버지께 말씀드릴 거야?”전에는 주민우가 이혼 합의서를 가지고 남지수에게 사인하라고 한 적이 있지만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언급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문에 기대어 서 있는 하승우의 얼굴은 불빛에 드리워져 희미해 보였다.“할아버지의 검사 결과가 나온 후 상황을 보면서 얘기하도록 해. 지금은 몸이 안 좋아.”“알았어.”하씨 가문에 시집온 지
남지수는 이불을 움켜쥐고 조용히 말했다.“다 버린 줄 알았어.”남지수는 고개를 돌려 하승우를 바라볼 용기조차 없었지만 조용한 분위기에서 그의 놀란 기색을 알아볼 수 있었다.잠시 후 그의 의문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멀쩡한데 왜 버렸겠어.”남지수는 입을 꼭 다물고는 대꾸하지 않았다.도시락을 줄 때마다 그는 남지수를 만나주지도 않았고 심지어 비서들이 그녀가 만든 음식을 쏟아버리는 것도 직접 보았었다.“왜 말이 없어?”하승우의 목소리는 야밤의 첼로처럼 감미롭게 들려왔다.남지수도 조용히 말했다.“별거 아니야. 그냥 자.”남지수는 하승우가 왜 그녀가 만든 국을 먹었는지 고민하기 싫었다. 어쨌든 이혼을 앞둔 그들에게 있어 이런 고민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생활을 잘 준비하는 것이다.아침, 날이 훤히 밝았다.남지수가 얼떨결에 깨어났을 때 침대 위에서 윙 하는 휴대전화 진동소리가 들려왔다.자기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보니 주영배 감독이 보내온 카톡 문자였다.[여주인공 맡을 배우가 결정됐어요. 새로 데뷔한 배우인데 괜찮은지 확인해 보세요.]남지수는 시나리오 작가였는데 새로 쓴 ‘효의전’이 촬영을 앞두고 캐스팅 작업 중이다.사진을 열어보니 웨이브 머리를 한 예쁜 여자가 보였는데 바로 어제 백화점에 만난 하승우의 첫사랑, 허수영이였다.몸을 휘청거리던 남지수는 하마터면 휴대전화를 놓칠 뻔했다.윙 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 저편 하승우의 휴대전화도 울렸다.개인 휴대전화여서 기밀이 없다 보니 화면 내용을 한눈에 볼 수 있어 남지수는 허수영이 보낸 문자를 봤다.[승우야, 나 임신했어. 우리 곧 아기 가질 거야!]남지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이를 가졌어?’명치끝에서는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졌다.욕실 문이 펑하고 열리며 아랫도리에 수건을 두른 하승우가 물기를 머금고 걸어 나왔다.황급히 등을 돌리며 손가락으로 이불을 꽉 움켜쥔 남지수는 하승우에게 붉어진 눈시울을 보이지 않으려고 어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