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동시에 금방 가라앉았던 아랫배가 다시 은은히 달아오르고, 코끝에 감돌던 여인의 향기도 돌아오는 듯했다.하승우의 잘생긴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렇게까지 자신을 못살게 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늘씬하던 손을 들어 찬물을 미지근한 물로 바꿔가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그날 밤 별일 없이 지냈던 두 사람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서로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다.어젯밤 한밤중에 하승우가 샤워하고도 나오지 않자 남지수는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문 쪽으로 다가서 보았는데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잠시 멈칫거리던 남지수는 그가 온 것을 눈치챈 듯 놀라 돌아보며 침대에 누웠다.남녀 사이는 한번 썸 타는 일이 생기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하지만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적어도 겉으로는 평온을 유지한 채 차를 몰고 하씨가문 저택으로 향했다.그리고 남지수는 하승우가 노발대발하며 하봉주의 서재로 들어가며 문을 쾅 닫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조용했지만 나중에는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꺼져! 꺼져! 하씨 가문엔 너 같은 애가 없어!”그리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것 같더니 곧이어 문이 열렸다. 하승우는 이마가 찢어지고 피가 흐르고 있어 조금 섬뜩하게 느껴졌다.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남지수에게 다가와 말했다.“한 달도 안 남았는데 이혼신청서를 다시 내라고 했어.”그는 졸업 후 하씨 가문을 인수했는데 지난 몇 년 동안 뛰어난 능력으로 인해 은성시에 있는 세력이 하봉주보다 더 커졌다.“할아버지 말씀을 듣고 한 달 기다렸다가 이혼하는 건 할아버지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뿐인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요.”그는 차갑게 말을 뱉고는 남지수의 부쩍 하얗게 질린 얼굴을 눈치채지 못하고 돌아섰다.하봉주는 지팡이를 짚고 나오셔서 그의 앞을 가로막고 크게 욕을 했다.“굳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거야? 그 배우는 뭐가 좋아! 그 여자의 아이는 태어나도 인정하지 않을 거야. 우
“필요 없어요. 할아버지만 잘 보살펴 주면 돼요. 할아버지야말로 지금 치료가 가장 필요해요.”말을 마친 하승우가 돌아서자 할아버지는 호통을 치며 떠나가는 하승우를 가리키며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욕설을 퍼부었다.남지수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어젯밤 뜻밖의 경험에 현혹되어 하승우와의 사이가 이미 다르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럴 리가 있겠는가.하승우가 사랑하는 사람은 허수영인데 말이다.어젯밤에 허수영 때문에 몸을 도사리며 지켰고, 오늘 허수영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생전 처음 매를 맞았는데 도대체 무엇을 꿈꾸고 있는 거란 말인가.남지수는 갑자기 자신이 불쌍해졌고 정말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지수야, 할아버지가 미안하구나. 승우 그 개자식이 돌아오면 할아버지가 잘 다스려 화풀이해줄게...”“할아버지, 그런 거 하지 마세요. 저랑 하승우 씨는 가능성이 없어요. 그 사람 마음에는 허수영 씨뿐이고 우리는 정말 어울리지 않아요. 할아버지... 최대한 빨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허수영 씨를 받아들이세요.”남지수는 말을 뱉고 나서 떠나갔고 하봉주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왜 다들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야?’지친 몸을 이끌고 본가를 나선 남지수는 문득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하승우는 주민우에게 이혼신청서를 다시 제출하라고 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법적으로는 부부지만 명의상으로는 부부가 아니라는 것이다.그녀는 분명 계속 본가에서 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난정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잠시 생각에 잠기던 남지수는 택시를 타고 임연아의 집에 갔다가 임연아가 거실에 혼자 만취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임연아의 발치에는 술병이 일여덟 개 쌓여 있었는데 아직도 계속 마시고 있었다. 남지수는 화가 나서 그녀의 술병을 낚아챘다.“왜 그래, 이렇게 많이 마셔서 죽을 작정이야?”임연아의 몽롱한 눈빛이 차츰 맑아지더니 그녀는 남지수의 손에 든 술병을 빼앗지 않고 찻상 밑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더듬어 능숙하게 불을 붙여 한 모금 들
“그래, 지수야, 슬퍼하지 마. 할아버지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하봉주는 사실 남지수의 용모를 중요하게 생각한 적이 없다.그는 가문의 안주인이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격, 인품, 그리고 업무 능력이라 생각했다. 이 세 가지는 남지수가 모두 갖추고 있는데 외모가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이다.하승우의 아버지는 젊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셨는데 매일 여자한테 매달려서 제대로 된 일을 하나도 못 했다. 그러니 하씨 가문에 시집오는 여자는 너무 예쁘지 않은 게 좋다고 생각했다.“할아버지, 그런 뜻이 없으신 건 알지만 그게 현실이에요.”이 ‘현실'은 하승우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고, 하봉주도 이 사실을 알기에 한숨을 쉬며 남지수를 위로하고 지팡이를 짚고 떠났다.어르신께서 돌아가신 후 남지수는 좀 피곤하다고 생각했다.하봉주는 정말 그녀에게 잘해 주었다. 몇 년 전 계모와 시누이가 찾아와 소란을 피울 때 하봉주가 던져준 꽃병을 막아주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때 꽃병에 머리를 맞아서 어떻게 됐을지 몰랐다.하지만 하봉주는 너무 고집이 세서 꼭 그녀를 하승우의 아내로 삼아야 했다.예전에 남지수는 이것이 하승우에게 의지할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부담스러운 상황이 됐다.‘펑'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다시 열렸는데 남지수는 할아버지가 돌아온 줄 알고 엉겁결에 고개를 돌렸다가 허수영이 턱을 치켜들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벌떡 일어나던 불쾌하게 허수영을 향해 말했다.“허수영 씨 무슨 일이 있으면 노크하고 들어오세요.”허수영은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조롱 조로 말했다.“할아버지를 꼬드겨 승우에게 약을 먹이라고 했어요? 그렇게 못생겼는데 감히 그런 일을 하다니. 창피하지도 않아요?”남지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얘기를 엿들었어요?”“허허, 문도 제대로 닫지 않았는데 누가 엿들을까 두려워요?”“이런 억지 논리는 어디서 배웠어요?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허수영 씨는 예쁘니까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 짓밟혀도 싸죠?”“...”
“승우와 저는 혼인 신고를 한 부부예요. 그러는 당신은 뭐죠? 윤리 도덕으로 보면 당신은 엄연히 내연녀예요! 당신이 뭔데 저를 지적해요?”“이제야 의도를 드러냈어요? 당신은 솔직히 승우를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죠?”허수영은 비아냥거렸다.이 여자가 정말 머리가 나쁜 건지, 아니면 일부러 이런 말로 자기를 자극했는지 남지수는 알 수 없었다.오히려 후자의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허수영은 바보가 아니었고 오히려 남자 앞에서 연약한 척할 줄 아는 똑똑한 여자였다.남지수는 계속해서 말했다.“제가 왜 하승우를 떠나야 하죠? 이혼하면 이렇게 좋은 남자를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수영 씨는 화나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할아버지는 당신 비천한 배우따위 거들떠보지도 않아요.”남지수는 계속해서 말했다.“아무리 하씨 가문에 시집오고 싶어도 당신은 그저 빛을 볼 수 없는 내연녀 노릇밖에 할 수 없어요. 하지만 내연녀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촬영 현장에서 승우를 ‘여보’라고 부를 수 있지만 할아버지 앞에서도 이렇게 부를 수 있을까요?”“하씨 가문에서 이렇게 불러보세요.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요? 없을 거예요. 인정은커녕 당신을 광대로 취급할걸요!”남지수는 그제야 속 시원하게 이 말을 해버렸다.솔직히 이건 남지수의 생각이 아니었지만 허수영이 너무 심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남지수가 발끈했다.매번 허수영이 자신을 괴롭힐 때마다 남지수는 허수영과 같은 여우년이 나타나 똑같은 방식으로 허수영을 욕해주길 바랐다.이제 구미호급 여우년이 된 남지수는 마음속에 묻어둔 말을 내뱉고 나니 정말 후련해졌다.하지만 허수영의 안색이 흐려졌다.남지수 앞에서 줄곧 유지하던 우아함이 사라진 허수영은 주먹을 꽉 쥔 채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남지수를 바라봤는데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 걸 보면 폭발할 한계에 도달한 것 같았다.“시치미 떼는 걸 포기했나봐요? 만약 승우가 여기에 있었다면 당신은 진짜 모습을 드러냈을까요?”허수영의 말을 들은 남지수는 코웃음을 쳤다.기밀을 보호하기
이경진은 그렇다고 대답하며 한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인 후 한 모금 빨더니 말했다.“네 아내가 이렇게 내숭을 떨 줄 생각지도 못했어.”전화기 너머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더 차가워진 말소리가 들렸다.“나도 이럴 줄 몰랐어.”“그럼 어떻게 할 거야? 직접 따져 물어볼래?”이경진이 물었다.“그럼.”이 말을 들은 이경진은 마음이 놓였다.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너무 사랑했던 하승우는 무신론자였지만 3년 전에 액을 막을 수 있다는 말에 결혼했다.하승우가 할아버지를 걱정해 남지수와 이혼하지 못한 줄 알았는데 냉정한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이때 하승우는 녹음 파일을 반복해서 들으며 미간을 찌푸렸다.창가에 기대어 서서 먼 곳의 파란 하늘을 바라봤지만 그의 마음은 오히려 시커먼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처럼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한참 후 하승우는 남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뚜’ 소리가 나자마자 끊어졌다.한편 허수영을 휴식실에서 쫓아낸 후 남지수는 또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하지만 진작에 다 토했고 지금은 위장이 텅 비어 있어 남지수는 더는 아무 것도 토하지도 못한 채 그저 변기를 끌어안고 헛구역질을 했다.몸을 일으키며 화장실을 나서던 남지수는 갑자기 무슨 일이 떠올랐는지 화들짝 놀랐다.오늘은 이미 19일로 생리날짜가 미뤄지고 있었다.최근 그녀는 늘 몸이 불편했고 속이 늘 울렁거렸으나 식량은 예전보다 많아졌다.한 달 전 하승우와 고택의 침대에서 살을 섞었지만 두 사람은 아무런 피임조치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사후 피임약을 먹는 것도 잊었다.모든 징조가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가리키자 화장실 앞에 멍하니 선 남지수는 온몸이 얼음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싸늘해졌고 이 결과를 믿을 수 없었다.잠시 후 임연아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와 함께 병원에 다녀오자고 말하려 했지만 전화를 받지않아 혼자 병원에 다녀왔다.한 시간 후 남지수는 창백한 얼굴로 병원을 나섰다.임신 확인 진단서를 손에 들고 길에 나온 남지수는 막막했고 두려웠다.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아랫
남지수는 그제야 하승우와 이경진이 친한 사이라는 것이 생각났다.이 관계로 임연아가 하승우를 만나는 차수가 오히려 남지수보다 더 많았다.남지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가갔다.“연아야, 왜 그래?”“괜찮아. 오랜만에 남자친구와 밥을 먹는데 갑자기 웬 ‘여동생’이 나타나 아픈 척 꾀병과 함께 애교를 부려 화가 났을 뿐이야. 오늘은 재수가 없었어.”이경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넌 왜 가희를 받아줄 수 없어?”“그래, 난 받아줄 수 없어. 피 한 방울 안 맺힌 ‘여동생’을 어느 여자가 받아줄 수 있어!”임연아는 흥분했다.이경진은 콧방귀를 뀌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그럼 너도 혈연관계가 없는 오빠를 찾으면 돼. 내가 뭐라 했어?”이 말 한마디 때문에 말문이 막힌 임연아는 안색이 창백해졌다.이경진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여태까지 이 점을 그녀에게 숨긴 적이 없었다. 솔직히 임연아와 남지수는 같은 처지다.‘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연아야, 괴로워하지 마.”남지수는 임연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소리로 다독여 주다가 곧 이경진을 향해 냉담하게 말했다.“연아는 휴식해야 하니 이젠 집에서 나가주세요.”미간이 굳어진 이경진의 안색은 흉측해 보였다.그는 하승우의 아내인 남지수를 두 번 만났는데 한 번은 하승우가 그녀와 결혼할 때였고 한 번은 하승우의 할머니가 돌아갈 때였다.인상 속에서 남지수는 외모가 망가져 열등감이 있어서인지 매우 소심하고 말도 잘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주 당당해졌다.“당신이 뭔데 나를 쫓아요? 여긴 저의 여자친구 집이에요.”이경진은 쌀쌀하게 말했다.남지수는 냉랭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여자친구인 걸 번연히 알면서 왜 상처 주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의미가 없어 보였다.문 앞으로 다가간 남지수는 문을 열며 다시 중복해서 말했다.“나가주세요. 안 가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이경진과 하승우는 모두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이 여자 왜 이러지? 성격이 예전과 달라진 것 같은데?’비록 마음속으로는 온갖 불만이 있
“사모님, 이혼 합의서입니다. 한번 훑어보시고 문제없으면 서명해 주세요.”남지수는 눈앞에 있는 이혼 합의서를 보며 뇌에서 윙 하는 소리만 들렸을 뿐 다른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사모님?”그녀가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자 주민우는 손을 뻗어 그녀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정신을 차린 남지수는 망연하게 물었다.“하승우가 나랑 이혼한대요?”마스크를 쓴 채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드러낸 그녀의 얼굴엔 풀리지 않는 슬픔이 가득한 걸 보며 주민우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네, 하 대표님께서 어르신이 돌아가셨으니 이 결혼은 더는 지속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며 사모님과... 이혼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남지수는 심장이 아파져 오는 걸 느꼈다. 곧 머리 위로 높이 솟은 칼날이 마침내 떨어지는 듯한 해탈감이 찾아왔다.3년 전 하승우 할머니의 병세 때문에 외모가 망가진 남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는 하씨 가문에 시집가 하승우의 아내가 되었다.하지만 3년 동안 그녀는 하승우와 두 번 만났을 뿐인데, 한 번은 결혼식 날, 또 한 번은 한 달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였다.지난 3년 동안, 하승우는 단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는데 아내인 그녀가 안중에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하승우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그들이 이혼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사모님...”남지수가 몇 분 동안 침묵하다가 갑자기 아무 말 없이 펜을 들고 깔끔하게 서명하자 주민우는 황급히 주의를 주었다.“합의서 항목을 아직 확인하지 않으셨어요...”“필요 없어요.”남지수는 펜 뚜껑을 덮고 이혼 합의서를 앞으로 밀었다.그녀는 하승우가 그녀에게 얼마를 나누어 주려는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처음에 하씨 가문이 그녀를 찾아가 할머니의 병 때문에 하는 결혼이라고 밝힌 후 그녀에게 많은 보상금을 주었으니 그녀는 평생 먹고 살 걱정이 없었다.게다가 하승우의 돈 때문에 시집간 것도 아니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때 하승우를 좋아하게 되었고 무려 8년 동안 좋아하고 있었다. 3년 전 하승우와 결혼하
“지수야, 속상하지 마. 우리 나가서 쇼핑하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임연아가 말했다.“그래, 정리하고 나갈게.”삶은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한 남지수는 잠시 정리하고 나서 집을 나섰다. 차를 몰고 성화 거리로 간 그녀는 임연아와 함께 명품 쇼핑몰에 들어갔다.남지수는 171의 큰 키에 균형 잘 잡힌 날씬하고 완벽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피부에 공기가 오래 닿을 수 없어 마스크까지 쓰고 있지 않았다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전부 쳐다봤을 것이다.두 사람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 가방 코너에 들어섰다. 임연아는 이혼을 축하하기 위해 가방을 선물하겠다고 했지만 남지수는 이를 거절했다. 그래서 임연아는 그녀를 강제로 끌고 올라갔다.“지수야, 저기서 고르자. 직원 언니가 신상이 많이 나왔다고 하니까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봐봐.”임연아는 앞쪽의 샤넬 코너를 가리키며 명쾌하게 말했다.남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범하게 카운터를 향해 걸어가다 1초 뒤 카운터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춰 섰다.키가 180정도 되는 남자가 검은색 셔츠와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비스듬히 서 있었다.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눈을 지그시 감은 무심한 모습이었지만 이런 시큰둥한 모습은 영화에서나 나올듯했다.남지수는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의아했다. 여러 회사의 모든 일을 관리하고 있는 남편 하승우가 왜 대낮에 백화점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 검은 웨이브 머리를 한 예쁜 여자가 다가와 하승우의 팔을 잡고 진열대에 있는 빨간 가방을 가리키며 애교를 부렸다.“승우 씨, 저거 갖고 싶어. 오늘 입은 치마랑 잘 어울리지 않아?”하승우는 흘끗 쳐다보고는 직원에게 말했다.“저거 포장해.”“...”거의 꽝 소리와 함께 남지수는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그녀는 빨간 치마를 입은 여인의 옆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간 줄도 몰랐다.“저 여자가 누구야?”임연아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하승우가 밖에서 사귀는...”임연아는 ‘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