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집이 우람짐 하승우가 담벼락처럼 남지수를 가로막자 그녀는 꼼짝달싹 못 했다.남지수는 하승우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눈길을 옆의 벽지에 고정했다.“무슨 얘기를 해?”남지수는 하승우가 무슨 얘기를 할지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허수영을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하승우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던졌다.“나랑 수영의 일이 마음에 걸렸어?”남지수는 말문이 막혔다.불빛 아래 하승우의 피부는 백옥처럼 매끄러웠고 윤곽도 더 또렷해 보였다. 그는 그윽하지만 또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지수를 지켜봤다.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남지수의 주먹을 움켜쥔 손바닥에는 땀이 조금 났다.그녀는 절대로 하승우가 자신의 감정을 발견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마음먹었다. 자존심마저 잃는다면 그녀는 자신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그래서 남지수는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우리는 아직 명색이 부부인데 허수영이 사람들 앞에서 ‘여보’라고 불렀을 때 나는 모욕당하는 것 같아 화냈을 뿐 다른 뜻은 없었어.”‘그래서일까?’하승우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찡그리다가 이내 풀었다.“우리 일은 곧 끝날 테니 조만간 자유로워질 수 있어. 조금만 참아줘.”차분하게 말한 후 하승우는 곧 몸을 돌려 떠났는데 남지수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욱신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남지수는 있어서는 안 될 생각을 애써 눌러버렸다.‘하승우가 허수영을 보호하는 태도가 분명하니 더는 착각하지 마. 아니면 점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어...’고택을 떠난 하승우는 은성시 중심에 있는 고급 아파트 단지로 갔다.지하실에 차를 세운 후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승우야, 왔어! 지문을 입력했는데 왜 그냥 들어오지 않았어?”허수영은 기뻐하며 말했다.“익숙하지 않아.”거실에 들어간 후 허수영이 붙잡고 있는 자기 팔을 보며 하승우가 물었다.“좀 나아졌어?”“응, 많이 좋아졌어. 아이를 임신했는데 촬영을 하니 힘들어서 갑자기 쓰러졌어.
그래서 하승우는 어떤 사람일까.허수영은 눈은 내리깔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다음날 허수영은 아침 일찍 비서 은아를 데리고 촬영장에 갔다. 은아는 동그란 안경을 쓴 통통한 여자아이로 밀크티 10여 잔을 들고 힘들어했다.선글라스를 벗은 허수영은 대범하게 입을 열었다.“어제 돌봐주셔서 고마워요. 저의 남편이 쏘는 거니까 다들 와서 한 잔씩 가져가요.”“와, 대표님 친절하게 밀크티까지 사주셨네요.”“하 대표님은 정말 언니를 예뻐하시네요. 언니를 도와줬던 사람들도 챙겨주시네요.”스태프들은 기뻐하며 밀크티를 가지러 갔는데 순식간에 혼자 남은 남지수는 홀로 대본을 들고 의자에 앉아 몸을 가늘게 떨었다.어제 자신에게 이런 일로 화내고 괴로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지만 감정과 이성은 별개다.허수영이 공공연히 하승우를 남편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그녀는 괴로워졌다.그녀는 허수영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데 그 눈빛은 그녀를 바늘방석에 앉게 할 정도로 아이러니해 자기도 모르게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그때 나른하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허수영 씨, 하 대표님과 결혼하셨어요?”허수영은 갑자기 묻는 소지성에게 고개를 돌렸다.소지성은 잘생긴 남자로 하승우에 비해 성숙하지 못한 편이지만 그래도 눈에 띄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은 아니지만 곧 결혼할 거예요.”“허허.”소지성이 웃자 귀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의 목소리의 조롱을 알아챘고, 허수영은 얼굴을 찡그리며 그가 왜 이렇게 웃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럼 허수영 씨는 하 대표님의 여자친구인가요?”소지성은 차갑게 또 한마디 했다.“하지만 하 대표님은 아내가 따로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허수영 씨는 내연녀가 된 거예요?”“...”이 말에 밀크티를 들고 있던 직원들은 허수영을 쳐다보며 의아해했다.이 말을 다른 사람이 한 말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어쨌든 진위는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소지성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달랐다.소지성은 명문가 출신으로 분명히 상속받
말을 마친 후 소지성이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내는 걸 무시하고 남지수는 그를 밀어냈다.하씨 가문의 고택, 하봉주가 소파에 앉아 뭔가 생각하고 있었다.장영자가 차를 가져다주러 왔을 때 하봉주는 장영자를 불러세워 물었다.“요즘 승우와 지수가 여전히 그저 그래?”‘그저 그렇다'는 말은 바로 그 두 사람이 각방을 쓰고, 평소에 각자 바빠서 거의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장영자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는데 며칠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이 못난 놈, 정말 쓸모없어!”장영자는 눈동자를 굴리며 다가갔다.“제가 보기에 지수 씨는 아주 좋은 아이예요. 만약 그 두 사람이 더 자주 만난다면 승우가 분명 지수 씨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남지수는 하씨 가문 고택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른 채 며칠 동안 촬영장을 돌기도 하고 틈틈이 대본을 쓰며 알차게 지냈다.그러나 이날 오후 하승우가 그녀를 찾아왔다.“저녁에 시간 돼? 나랑 디너쇼에 참석해야 해.”남지수는 의아하게 물었다.“무슨 디너쇼?”하승우와 비밀결혼한 사이라 평소 하승우는 저녁 식사에 혼자 참석하거나 비서실에서 아무나 데리고 가지만 남지수에게 같이 가자고 한 적은 없다.“둘째 삼촌 쪽 파티인데 가족 몇 명만 참석해.”이 말을 들은 남지수는 이내 이해했다.하씨 가족은 모두 두 사람의 결혼 상황을 알고 있고, 그 사람들도 모두 몰래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얼굴이 망가졌다고, 결혼 3년 동안 남편을 만나지 못한다고 웃고 있다는 걸 남지수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아까 하승우와 함께 디너쇼 참석할 수 있다는 기쁨이 곧 하씨 가족을 만난다는 사실로 말끔히 사라졌다.남지수는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알았어.”하승우를 동반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직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았기에 아내의 역할은 모두 하고 있었다.그러나 마음속에서는 허수영이 남편이라고 부르도록 내버려 둔 채 남편 노릇도 못하는 하승
“아니...”하승우는 뜻밖에도 남지수가 말대꾸하자 화가 나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왜 그렇게 공격적으로 변했어요?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예요?”그 말에 남지수는 어이없어 웃어 버렸다.“난 가정교육은 잘 받았는데 하은우 씨는 보아하니 아무도 사람 되는 법을 안 가르쳐줬나 보죠? 20세 넘었는데 사람다운 말도 못 하고 어떻게 자랐는지도 모르겠네요.”그녀의 말은 둘째 삼촌과 숙모도 함께 몰아붙인 셈이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둘째 삼촌과 숙모는 모두 감히 화를 내지도 못하는 모습이었다.‘하승우가 옆에 있어서인가?’같은 생각을 한 하은우는 화를 내며 말했다.“남지수, 형이 옆에 있다고 무법천지야? 형의 전 여자친구인 허수영과는 비교도 안 돼! 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허수영 누나의 상대가 아니야! 언젠가 형이 널 버리고 수영 누나를 데려와 내 형수가 되게 할 거야!”하은우는 허수영의 팬이라는 걸 남지수는 이전에는 몰랐지만 이제 알게 되었다.하지만 하승우는 그녀가 반박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가 반박하면 하승우의 체면을 깎는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하지만 그때 하승우는 싸늘하게 하은우를 힐끗 보더니 두 눈에는 어두운 빛이 피어올랐다.“네 형수 말이 맞아. 가정교육이 안 돼 있긴 해. 왜 이렇게 자란 거야?”하씨 가문의 손자들은 하승우를 빼면 하나같이 쓸모가 없었는데 하씨 가문이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하은우는 이 말을 듣고 시무룩해져서 말했다.“형, 왜 남의 편을 들어!”이 ‘남’이라는 말은 분명 남지수를 가리켰다. 남지수는 그를 싸늘하게 힐끗 쳐다봤고 하승우는 눈살을 찌푸렸다.하승우가 뭔가 말하려 하자 남지수가 먼저 가로챘다.“제가 남이에요? 하씨 가문으로 시집간 사람들은 모두 남이라는 뜻인가요? 둘째 숙모님을 그렇게 말씀하시면 얼마나 속상하실까요?”그녀는 둘째 숙모를 동정 어린 눈빛으로 힐끗 보았는데 그 순간 둘째 이모의 안색은 정말 보기 흉했다.하은우는 이 말을
“내가 왜 고맙다고 해야 해?”남지수는 냉정하게 말했다.“하씨네 가족인 하은우가 나를 괴롭혔으니 당신이 나를 보호는 건 당연한 거야. 어쨌든 우리는 명색이 부부니 내가 모욕을 당하면 당신도 체면을 잃게 돼. 그래서 나를 보호하는 건 당신에게도 유리해.”말을 마친 남지수는 조금 긴장해졌다.남지수는 도리를 따져가며 말을 하지만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억지’ 부리기를 좋아한다. 허수영을 지켜줄 때의 태도 역시 ‘억지’였다.‘이 일 때문에 나에게 화 내지 않겠지?’하승우는 남지수를 지켜보았다. 당당하게 말을 꺼낸 뒤 갑자기 미간을 찌푸린 채 안절부절못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지수를 보며 그는 이 여자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궁금했고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하승우는 남지수의 눈빛을 보려고 그녀의 턱을 잡아들었지만 이 애매한 행동에 두 사람은 동시에 놀랐다.하승우의 손이 닿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린 남지수는 그 목적이 궁금한 듯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하승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솔직히 남지수는 놀랐기 때문이지 다른 목적이 없었다.순간적으로 자신이 추태를 부렸음을 알아차린 하승우는 손을 거둬들였다.‘우리는 계약 부부일 뿐인데 왜 이렇게 친밀한 행동을 했을까?’“네 말이 맞아. 내가 널 지켜야 했어.”“응.”긴장해서 벌렁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남지수는 침착한 척했지만 소매 밑에 숨겨진 손은 주먹을 움켜쥐었다.‘하승우의 한마디 말 때문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다니. 남지수, 넌 왜 이렇게 못났어?’“너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남지수는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키 차이 때문에 그녀의 정수리만 보일 뿐 눈길조차 볼 수 없었던 하승우는 남지수의 생각을 추측했다.그러던 중 갑자기 남지수의 얼굴이 떠올랐고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어도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 물었다.하승우의 이 말을 들은 남지수는 깜짝 놀랐다.“내 사진을 봤잖아.”남지수가 말했다.“오래전에 봐서 잊었어.”하승우가 덤덤하게 말했다.그에게 있어 남지수는 중요한
하승우와 등진 채 침대의 한편에 누운 남지수는 가장자리지만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자리를 일부러 택한 것 같았다.흠잡을 데 없이 예의가 바른 남지수를 보면 볼수록 하승우는 그녀의 속마음도 보여지는 것과 같은 지 궁금했다.하승우는 침대 옆에 서서 남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침대에 누웠지만 마음이 더 근질거렸고 몸이 달아올랐다.이불을 아랫배까지 끌어내렸으나 여전히 숨이 막힌 그는 단추를 두 개 더 풀어헤치며 에어킨 온도를 좀 낮춰야 할지 망설였다.이때 근질거리는 느낌이 커지면서 몸이 굳어진 하승우는 문득 눈을 떴다.비록 그런 일을 겪어보지 못했지만 남자로서 하승우는 당연히 몸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알았다.이불을 젖히고 몸을 벌떡 일으켜 앉은 하승우를 본 남지수는 깜짝 놀랐다.“왜 그래?”남지수는 고개를 돌려 몽롱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하승우는 그제야 남지수의 두 눈이 살짝 붉어진 것을 알아차렸다.물을 머금은 듯 초롱초롱한 눈동자, 부드럽고 애교스러운 목소리, 이불속에서 꼬인 두 다리... 이 이상한 반응들은 그녀가 무엇을 견디고 있는지 말해준다.꾹 참은 채 심지어 꿈쩍도 안 하는 이 여자는 예의가 교과서 급 수준으로 바른 것 같았다.그런 남지수를 보며 하승우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불빛 아래 그의 피부는 조금 붉어졌고 조각한 듯 정교한 윤곽은 촉촉한 눈빛에 중화되어 풍류스럽게 보였는데 사람을 은근 현혹했다.검은색 실크 잠옷 단추를 두 개 풀어헤쳐 섹시한 쇄골과 보일 듯 말 듯 단단한 가슴을 드러낸 모습은 마치 소설 속에서나 나올법했다.마음이 아까보다 더 세게 근질거렸던 남지수는 이불을 꽉 잡은 채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싶었다.남지수는 너무 더워서 옷을 다 벗어버리고 싶었다. 몇 분 전부터 들었던 이런 이상한 느낌은 하승우를 보자 더 커졌다.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하승우는 그녀의 이불 위로 덮치더니 남지수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너도 하고 싶어?”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남지수는 당황스러워
하승우는 마른 침을 삼키며 반응도 더 커졌다.그 사납게 생긴 것은 옷에 가려졌어도 남지수는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부끄러웠고 또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던 남지수는 순간적으로 이불을 잡아당겨 눈을 가렸다.하승우에게 나가라고 말하려다가 여기가 그의 집인 것이 떠오른 남지수는 이불속에 몸을 숨긴 채 불안에 떨며 말했다.“아니면 내가 먼저 나갈 테니 쉬어.”이쯤 되니 두 성인은 모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오늘 먹은 음식이거나 마신 술에 무언가가 들어있어 그 짓을 하고 싶게 만들었을 것이다.그러면 누가 한 짓일까?하승우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어디 가?”남지수는 자신의 아내인데 섹시하고 예쁜 이런 모습이 다른 남자에게 보이는 것이 싫었다.남지수는 입술을 깨물었다.“그럼 너 욕실에 갈래?”욕실에 가서 스스로 해결하라는 뜻이었다.하지만 이때 하승우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나와 지수의 음식이나 술에 약을 탄 사람은 누구일까? 삼촌과 숙모들은 그럴만한 담력이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는데... 혹시 할아버지가 그랬을까?’하승우는 휴대전화를 꺼내 하봉주에게 전화를 했는데 전화기 너머로 전원이 꺼졌다는 안내음이 들려왔다.‘이 순간에 할아버지께서 전원을 껐어. 너무 이상해. 이게 과연 우연일까?’하승우의 두 눈에는 음험한 기색이 엿보였다.“할아버지는 너무 담대해!”미간에도 눈빛에도 모두 정욕을 갈망하는 기색이 가득했지만 하승우의 목소리는 극도로 차가워졌다. 두 사람을 억지로 맺어주려는 하봉주에 대해 극도로 분노한 것이 분명했다.하승우와 이런 일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의 태도가 갑자기 변한 것을 본 남지수는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이때 하승우는 하봉주가 보낸 문자를 받았다.[손자야, 절대 참지 마. 참다가 몸이 망가질 수 있어. 알았지?]하봉주는 남지수에게도 비슷한 문자를 보내 그녀를 난감하게 했다.아까는 좀 애매했지만 문자를 본 하봉주는 이젠 완전히 정신이 든 것 같았다.몸은 여전히 반응을 보였지만 눈빛은 이미 차갑게
거의 동시에 금방 가라앉았던 아랫배가 다시 은은히 달아오르고, 코끝에 감돌던 여인의 향기도 돌아오는 듯했다.하승우의 잘생긴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렇게까지 자신을 못살게 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늘씬하던 손을 들어 찬물을 미지근한 물로 바꿔가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그날 밤 별일 없이 지냈던 두 사람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서로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다.어젯밤 한밤중에 하승우가 샤워하고도 나오지 않자 남지수는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문 쪽으로 다가서 보았는데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잠시 멈칫거리던 남지수는 그가 온 것을 눈치챈 듯 놀라 돌아보며 침대에 누웠다.남녀 사이는 한번 썸 타는 일이 생기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하지만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적어도 겉으로는 평온을 유지한 채 차를 몰고 하씨가문 저택으로 향했다.그리고 남지수는 하승우가 노발대발하며 하봉주의 서재로 들어가며 문을 쾅 닫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조용했지만 나중에는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꺼져! 꺼져! 하씨 가문엔 너 같은 애가 없어!”그리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것 같더니 곧이어 문이 열렸다. 하승우는 이마가 찢어지고 피가 흐르고 있어 조금 섬뜩하게 느껴졌다.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남지수에게 다가와 말했다.“한 달도 안 남았는데 이혼신청서를 다시 내라고 했어.”그는 졸업 후 하씨 가문을 인수했는데 지난 몇 년 동안 뛰어난 능력으로 인해 은성시에 있는 세력이 하봉주보다 더 커졌다.“할아버지 말씀을 듣고 한 달 기다렸다가 이혼하는 건 할아버지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뿐인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요.”그는 차갑게 말을 뱉고는 남지수의 부쩍 하얗게 질린 얼굴을 눈치채지 못하고 돌아섰다.하봉주는 지팡이를 짚고 나오셔서 그의 앞을 가로막고 크게 욕을 했다.“굳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거야? 그 배우는 뭐가 좋아! 그 여자의 아이는 태어나도 인정하지 않을 거야.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