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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온하나는 몇 초 동안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사모님.”

“별빛 카페야. 이쪽으로 와.”

명령하는 듯한 말투였고 온하나에게 질문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온하나는 이미 끊겨버린 전화를 보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차우빈이 이혼 합의서에 사인했고 가지러 오라는 뜻인 거 같았다.

어제저녁에 차우빈의 체면을 깎아버렸다. 여자에게 따귀를 맞았는데 어찌 참을 수가 있겠는가?

만약 평소 그에게 여자를 폭행하는 버릇이 있었더라면 어제저녁에 아마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30분 후, 온하나가 카페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심명희와 양지원이 웃으면서 신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토록 자애로운 심명희의 모습을 온하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랐다.

두 사람이 금방 결혼하여 차우빈이 온하나를 아낄 때도 심명희는 그녀를 탐탁지 않아 했다.

심명희가 양지원을 대하는 태도를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그냥 야박한 사람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온하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다가갔다. 예쁨을 받진 못해도 굽신거리거나 비굴하지 않았다.

“사모님.”

온하나는 호칭도 바꿔서 인사했다. 이혼 합의서에 이름을 사인한 순간부터 심명희와는 남이라 생각하고 선을 그었다.

양지원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모, 하나 씨랑 약속 있을 줄은 몰랐어요.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

심명희는 양지원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목에 건 목걸이를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아. 네가 남도 아닌데. 이모랑 커피 마셔줘서 이모는 너무 좋아.”

그러더니 갑자기 온하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정하던 미소와 자애롭던 모습이 눈 깜짝할 사이에 싹 다 사라졌다.

“앉아.”

심명희는 싸늘하게 그녀를 훑어보았고 차가운 말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이런 그녀의 모습에 온하나는 흠칫 놀랐다. 늘 고귀하고 우아한 심명희는 오늘처럼 싫은 티를 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로 절 부르셨죠? 사모님?”

온하나는 미소를 잃진 않았지만 속은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켜야 할 예의는 지켰다.

“하나 씨, 이모는 우빈 오빠 어머니야. 어떻게 사모님이라 부를 수 있어?”

양지원은 온하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말리는 척하긴 했지만 우쭐거리는 기색이 얼굴에 스쳤다.

“이렇게 부르면 사모님께서 좋아하셔. 왜? 불만 있어?”

옆에 있던 심명희는 다정하게 웃으며 양지원의 손등을 어루만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다.

온하나가 심명희에게 물었다.

“사모님, 차우빈 사인했나요?”

줄곧 우아하던 심명희의 눈빛이 갑자기 싸늘해졌다.

“온하나, 너 아주 겉과 속이 다르더라? 교양이 있고 사리에 밝은 애인 줄 알았는데 나랑 우빈이 모자 사이를 이간질해? 원하는 게 있으면 대놓고 말해. 뒤에서 수작 부리지 말고.”

온하나는 순간 멍해졌다.

‘내가 언제 수작을 부렸다는 거지? 모자 사이를 이간질했다는 건 또 뭔 소리야?’

“이모, 혈압도 높은데 화내시면 안 돼요.”

양지원은 심명희를 달래면서 온하나에게 다급한 말투로 말했다.

“온하나 씨, 이모 건강도 좋지 않은데 자꾸 이렇게 화내게 하면 어떡해?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책임질 수 있어? 우빈 오빠 와이프라는 사람이 참.”

온하나는 그녀를 힐끗거렸다.

“내가 차우빈 와이프라는 거 알긴 아네?”

“지원이한테 뭐라 하지 마. 어릴 적부터 우빈이랑 관계가 좋았고 우빈이도 지원이 좋아해. 지원이 잘못이 아니야.”

심명희가 양지원의 편을 들자 온하나는 어이없기만 했다.

‘죽마고우면 선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사실 생각해 보면 안 될 것도 없었다. 양지원이 그녀 앞에서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건 다 차우빈과 심명희가 양지원의 편에 섰기 때문이었다.

이혼 합의서를 가지러 왔는데 상황을 보니 아무래도 차우빈이 아직 사인하지 않은 듯했다.

차우빈이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온하나는 생각하기도 귀찮았고 두 모자 사이에 끼고 싶지도 않았다.

“사모님, 전 이미 사인했으니 차우빈한테 빨리 사인하라고 해주세요. 다른 일이 없다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온하나가 일어나려 하자 심명희가 얼굴을 붉혔다.

“경고하는데 수작 부리지 마. 너랑 우빈이는 절대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없어. 내가 이혼 조건을 더 양보할 수는 있어. 그러니까 눈치 있으면 알아서 적당히 해.”

온하나는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이유도 모른 채 이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사모님, 돈이 좀 많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사모님네 돈 때문에 달려든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3년 전에 이 집 돈을 보고 결혼한 건 맞지만 지금은 돈 때문에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가만히 있고 싶진 않아요. 그러니까 차우빈한테 사인받은 다음에 다시 절 부르세요.”

말을 마치고 돌아서자마자 뒤에 서 있는 남자와 부딪혔다.

온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아주 익숙한 그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고 표정이 말이 아니게 어두웠다.

차우빈이 갑자기 온하나의 턱을 잡고 싸늘하게 말했다.

“그걸 못 참아서 여기까지 쫓아왔어?”

양지원이 쪼르르 다가와 그를 말렸다.

“오빠, 이러지 마. 사람들이 봐.”

양지원은 공인이었다. 어제저녁에 SNS에 애정을 과시했는데 오늘 남자 친구가 다른 여자의 턱을 잡고 있는 장면이 찍히기라도 한다면 또 화제를 모을 것이다.

그건 둘째치고 만약 누군가 온하나와 차우빈의 진짜 관계를 까발리기라도 한다면 양지원이 내연녀라는 수식어가 평생 따라다닐지도 모른다.

차우빈의 싸늘한 두 눈과 두려움이라곤 전혀 없는 온하나의 두 눈이 마주한 순간 주변의 공기마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우빈아, 지원이도 있는데 조심해야지.”

심명희가 다급하게 말했다. 양지원은 차우빈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면서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며 부탁했다.

차우빈은 천천히 손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무서울 정도로 어두웠다.

온하나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그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뿌리부터 썩어 문드러진 결혼 생활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렸고 살짝만 건드려도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이런 상처는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손을 내려놓자 온하나가 씩 웃으며 말했다.

“차우빈, 이렇게 사는 게 재미있어?”

차우빈은 얼굴을 찌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마음 정리할 시간 이틀 줄게. 이틀 후에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결과가 어떨지 알아서 책임져.”

그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고 있다는 걸 온하나는 알고 있었다.

온하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면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

“우빈아, 너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심명희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자기 아들이지만 정말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지원이 말만 듣고 온하나가 우빈이한테 매달리는 줄 알았는데 아무리 봐도 우빈이가 하나를 놓지 않는 것 같은데?’

그리고 심명희가 병원 원장에게 전화했을 때 차우빈이 이미 컴플레인을 취소했다고 했다.

차우빈은 온하나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심명희를 돌아보았다.

“어머니, 다시는 저 사람 불러내지 말아요.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해결할 겁니다.”

“네가 해결한다고? 어떻게? 어르신 며칠 후면 돌아오셔.”

차우빈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냥 휙 가버렸다.

“이모, 우빈 오빠.”

양지원은 입술을 깨물면서 속상한 기색을 드러냈다.

“괜찮아. 우빈이가 하나를 대하는 태도가 어떤지 너도 알잖아. 나중에 내가 얘기해볼게. 나한테 며느리는 너 하나뿐이야.”

심명희는 양지원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위로했다. 자상한 눈빛에 그녀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카페에서 나온 차우빈은 도무지 화가 가라앉지 않아 차에 타자마자 허승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늘 만나던 데서 보자.”

허승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라이터를 돌리는 차우빈을 보고는 그의 옆에 앉았다.

“대낮부터 뭔 술이야? 지원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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