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또 왜 이러는 거야?’차우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온하나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온하나의 허리를 잡고 확 끌어안더니 귓가에 대고 싸늘하게 말했다.“죽은 남편이 맨날 벌떡벌떡 일어나서 저녁마다 옆에서 자는데 이러다 양기가 모자라는 거 아닌지 몰라.”온하나는 그제야 어떻게 된 건지 알아챘다. 임다혜가 아침에 했던 얘기를 허승준에게 한 게 틀림없었다.허승준과 차우빈이 또 둘도 없는 사이인데 차우빈에게 말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온하나는 전혀 겁먹은 기색이라곤 없이 차우빈의 검은 두 눈을 빤히 보면서 씩 웃었다.“1년에 몇 번밖에 만나지 못하는 남편이면 있으나 마나 아니야?”차우빈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온하나, 점점 재미있어지네?”그러고는 온하나의 턱을 들고 입술에 키스했다.온하나는 밀어내며 발버둥 쳤지만 차우빈이 품에 꼭 껴안은 바람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남자와 여자의 힘 차이를 또 한 번 느끼게 되었다.너무도 화가 나서 그의 입술을 깨물려고 하는데 차우빈이 갑자기 아래턱을 들었다.“또 깨물려고? 난 귀신이야. 양기를 흡입하러 왔어.”차우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둠 속에서 온하나가 반항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그녀를 벌하기 위한 키스였지만 어느덧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졌고 그동안 참아온 욕망을 드러내곤 했다.한참 후 차우빈은 그녀를 풀어주고는 촉촉해진 입술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작은 얼굴이 참으로 청순했고 시선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이 여전히 고분고분했다.하지만 더는 예전처럼 온순한 고양이가 아니라 가시 돋친 고슴도치라는 걸 차우빈은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그윽하게 쳐다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온하나는 심호흡하면서 마음을 진정한 후 차우빈을 째려보고는 확 밀어버렸다.“차우빈, 아프면 병원에 가봐. 왜 계속 날 괴롭히는 건데?”차우빈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힘껏 빨아들이더니 담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빛에 등골이 다 오싹했다.차우빈은 얼굴도 잘생겼고 이목구비도 아주 뚜렷했다. 온하나는 예전에 이 얼굴에 반해서 참고 살았지만 이젠 정신을 차렸다.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는데 엮여봤자 서로에게 상처만 될 뿐이었다.“날 도와준 건 고맙게 생각해. 그래서 2년 동안 나한테 무슨 짓을 하든 다 참았어. 그런데 나도 사람이야. 상처받기도 하고 마음도 아파. 우리가 처음에는 서로 원해서 한 거래지만 이젠 내가 싫어졌어. 너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고. 그러니까 좋게좋게 끝내자.”온하나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대문이 자동으로 닫혔다.“이모님, 아무도 못 나가게 해요.”그러고는 온하나가 발버둥 치든 말든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진욱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차우빈의 밑에서 일한 지 4년이라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온하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안영자는 차우빈이 온하나를 데려온 걸 보고 바로 심명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차우빈은 그녀를 끌고 서재로 올라갔다. 온하나를 보면 참지 못할까 봐, 또 상처를 줄까 봐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았다.‘서로 원해서 한 거래? 그러니까 나랑 한 결혼이 거래였단 말이야?’그는 홧김에 테이블을 확 엎어버렸다.온하나는 쿵쾅거리는 소리에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만약 살인이 합법이라면 아마 물건을 던진 게 아니라 온하나를 던졌을 것이다.그날 밤, 차우빈은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게스트룸에서 잤다. 두 사람은 별 탈 없이 하룻밤을 보냈다.이튿날 아침 차우빈이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어젯밤에 이성을 잃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다시 차갑고 귀티 나는 모습으로 돌아왔다.“대표님, 아침 준비 다 됐어요.”“하나한테 내려와서 밥 먹으라고 해요.”덤덤한 목소리에 높은 사람의 위엄이 담겨있었다.차우빈이 먼저 식탁 앞에 앉았다. 안영자가 전전긍긍하며 말했다.“사모님 방금 나가셨어요.”차우빈도 뭐라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출근해야 하기에 낮에 집을 못
온하나가 씁쓸하게 웃었다.“엄마, 차우빈이 날 차버리고 내쫓을 때까지 기다려야 해? 2년 동안 내가 그 사람한테 뭐였는데? 그 사람 마음에 내가 있긴 있었어?”온하나는 짐을 예전에 쓰던 방에 두고 아침밥도 먹지 못한 채 부랴부랴 출근했다.나희경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분노를 애써 참았다. 지금 생각나는 거라곤 좋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온하나는 겨우 출근 시간에 맞춰 병원에 도착했다. 회진을 마친 다음에는 온 오전 환자를 봤다. 오늘따라 환자가 많아서 오후 1시가 다 돼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진료 동을 나온 그녀는 피곤한지 관자놀이를 어루만졌다. 식당에 도착했을 때 남은 반찬이 얼마 없었다. 다행히 조수연이 미리 밥을 챙겨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두 사람이 식사하는 중에 심명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를 확인한 온하나는 갑자기 밥맛이 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전화를 받았다.“사모님.”“하나야, 며칠 전에는 내가 말이 너무 심했어. 그런데 다 너랑 우빈이 위해서 하는 말인 거 알지? 둘이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너도 잘 알잖아. 만나기만 하면 얼굴을 붉히고. 그게 부부야? 원수지.”온하나는 입술을 깨물었다.‘원수니까 차우빈이 날 그렇게 괴롭히는 거겠죠.’온하나가 대답이 없자 심명희가 계속 설득했다.“우빈이 요즘 출장이 없으니까 얼른 이혼 절차 마무리하고 각자 편하게 살아.”“사모님 아들이 어떤지 몰라서 이러세요? 나한테 이혼 합의서에 사인하라고 할 때 그 사람 설득하라는 말은 없었어요.”“우빈이가 쉽게 사인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 온하나, 네가 이렇게 꿍꿍이가 많은 사람일 줄은 몰랐어. 이제 와서 밀당을 해? 잘 들어. 우빈이 아내는 지원이 하나야. 난 널 절대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아.”전에 사인하라고 할 때는 사인만 하면 이혼 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더니 이젠...온하나는 할 말이 없었다.두 사람의 통화는 기분만 상한 채 끝나고 말았다. 온하나는 더는 밥이 넘
“엄마, 엄마 카드에 있던 아빠 병원비가 왜 동결됐어요?”집 안 청소를 하던 나희경은 온하나의 말에 걸레도 던져 버리고 휴대폰을 열었다. 온하나에게 40만 원을 송금하려 했지만 은행 카드가 정지되었다는 메시지가 뜨자 나희경은 미쳐버렸다.“어떻게 된 거야, 카드를 도난당한 거야?”온하나가 짐을 싸서 돌아온 날 이미 카드에서 대부분의 돈을 이체했지만 아직 카드에는 몇백만 원이 남아있었다.그래도 자기 남편이고 온하나도 차우빈과 이혼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다지 매정하게 굴지 않았다.온하나는 나희경의 이런 속셈도 모른 채 부드럽게 달랬다.“엄마, 조급해하지 말고 은행에 가서 물어봐요. 난 병원 입원 병동에 가서 며칠 늦출 수 있는지 물어볼게요.”그녀가 막 병원에 돈을 냈는데 나희경의 전화가 걸려 왔다.“엄마, 무슨 일이에요?”“하나야, 은행에서 신고가 들어와서 아직 조사 중이라고 하는데 어떡해?”온하나의 마음에 서늘한 기운이 몰아쳤다. 누가 이유도 없이 엄마의 계좌를 신고하겠나.차우빈 말고는 소리 소문 없이 나희경의 통장을 동결할 수 있는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엄마, 일단 집에 가서 기다리세요. 제가 가서 알아볼게요.”온하나는 전화를 끊고 망할 남편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애인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애정행각을 벌이는 것도 모자라 뒤에서 그녀를 난처하게 만드는 게 사람이 할 짓인가.그 시각 막 신비 캐슬로 돌아온 차우빈은 점심 모임 때 술을 많이 마셔 속이 괴로웠다.온하나의 전화에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 여자가 드디어 남편을 떠올렸나 보다.전화벨이 몇 초간 울리더니 연결이 되고 술에 취한 차우빈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돌아와. 나 집에 있어.”상대를 찾지 못해 짜증이 나 있던 온하나는 곧바로 차를 몰고 신비 캐슬로 향했고 가정부가 그녀를 보고 담담하게 말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취하셨어요. 방금 끓인 해장국인데 갖고 가서 마시라고 하세요. 안 그러면 두통이 올 거예요.”차우빈은 덩치만 크지 쓸모가 없었다.
차우빈은 얼굴을 찡그리며 한 손으로 위를 꾹 눌렀다.“온하나, 내가 착한 사람으로 보여?”“차우빈, 경고하는데 우리 둘 사이에 내 가족을 끌어들이지 마. 나한테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게 있어. 하루 종일 옆에 데리고 다니면서 명분도 안 주는 건 너무 쓰레기 짓 아니야?”온하나는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고 가족과의 관계도 늘 소원했지만 그렇다고 가족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온씨 집안은 온하나에게 이타적인 사랑을 베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온하나에게 온전한 집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운명을 바꿀 수 있게 해줬다.특히 온대훈은 나희경 몰래 그녀에게 애정을 베풀어 주었고 그것만으로도 온하나는 감사할 따름이었다.차우빈의 창백한 얼굴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질투가 나면 대놓고 말해도 돼.”온하나는 기가 막혔다.“허, 차 대표님 본인을 참 과대평가하시네. 나보고 매정한 사람이라며.”차우빈은 늘 자기 앞에서는 상냥하고 다정하고 작은 걸로도 기뻐하던 사람이 이제는 위협을 받은 복어처럼 굴자 화가 났지만 두통과 함께 속이 타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머리 아프니까 화나게 하지 마. 위 아파, 약 가져다줘.”“난 너 챙겨줄 의무 없으니까 가서 도우미한테 말해.”온하나가 막 돌아서서 나가려는데 양지원의 나긋한 목소리가 다급한 발걸음과 함께 들려왔다.“오빠, 좀 괜찮아?”낮에 있었던 모임에서 술을 많이 마신 탓에 떠날 때 조금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던 차우빈의 모습을 본 양지원은 기억하고 있다가 숙취해소제를 들고 부랴부랴 찾아왔다.“숙취해소제 사 왔어.”온하나는 그 목소리에 다시 뒤돌아가 차우빈 옆에 누워 몸을 기대었다.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가슴 위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며 살짝 올라가 눈꼬리가 사람을 낚으려는 갈고리 같았다.차우빈은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지만 순간 그녀의 매혹적인 미소와 은근한 눈빛에 멈칫했다.온하나가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드물었다. 금방 결혼했을 때 서로 잘 알지 못
차우빈의 얼굴이 검게 일그러졌다. 그 앞에서 부실하다는 말로 대놓고 창피를 주다니.그리고 부부 사이 일을 왜 외부인에게 말하지? 이전의 온하나라면 절대 할 수 없는 말이었다.온하나는 차우빈이 노려보자 삐딱하게 말했다.“왜, 내 말이 틀려? 아니면 내가 따로 침대 마련해 줄 테니 네 보배둥이랑 해볼래?”“하나 언니, 나에 대해 편견이 있는 건 알지만 난 단지 오빠가 걱정돼서 그래. 힘들게 서로를 찾았는데 최대한 오빠한테 잘해주고 싶어서”양지원의 말을 듣고 온하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그럼 다정한 두 남매 사이 방해하지 않을게. 듣기만 해도 역겨운 게 떠오르거든, 근친상간.”말끝마다 오빠, 오빠 거리는 게 듣기 역겨웠다.떠나는 온하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차우빈은 눈썹을 찡그렸다. “약 내려놓고 가. 난 좀 자야겠어.”양지원은 그의 안색이 좋지 않자 내키지 않았지만 얌전히 숙취해소제를 내려놓고 자리를 떠났다.마당으로 나오자 온하나가 차를 몰고 가려는 모습을 보고 한걸음에 다가가 막고는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양지원, 난 동물 싫어해. 냄새만 맡아도 역겨워, 특히 불여우는. 그러니까 내려.”양지원은 오늘 온하나의 행동에 정말 놀랐다. 평소 조용하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거침없이 욕설을 뱉을 수 있을까.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차우빈을 제외하고 차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잘 대해주었고 특히 심명희는 그녀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기에 양지원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하나 언니, 우빈 오빠가 언니 안 좋아하는데 더 이상 뻔뻔하게 매달리지 마. 언니 미워하는 거 몰라? 안 그러면 일부러 전화해서 언니 엄마 통장 동결시키지도 않았을 거야. 괴롭히고 모욕하기 위해 곁에 두는 건데 이런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이유가 뭐야?”“알려줘서 고마운데 네가 오해하는 게 있어, 양지원. 차우빈이 사인을 안 하는 거야. 못 기다리겠으면 당장 사인하라고 해. 너한테 그럴 매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욱은 상사의 지시를 받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상황을 알아보고는 바로 다시 차우빈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은행장 말로는 여사님께서 시켰다면서 나희경 씨 계좌에 몇백만 원밖에 없어서 별문제는 없대요. 제가 이미 은행장에게 정지 풀라고 했어요.”차우빈은 별로 놀랍지 않은 결과에 낮은 목소리로 당부했다.“카드가 병원에 연동되어 있는지 확인해 봐.”“대표님, 확인할 필요 없이 은행장이 병원에 연동되어 있다고 말했어요.”늘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는 진욱이 이걸 물어보지 않을 리가 없었고 차우빈은 의심했다.‘고작 몇백만 원밖에 없다고?’그동안 온하나가 그에게서 받은 돈은 두 사람에게 나눠줬고 나희경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는데 어떻게 몇백만밖에 없을까.“나희경 명의의 다른 통장도 확인해 봐.”지시를 마친 차우빈은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숙취해소제를 흘끗 쳐다보고는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청소하고 있던 안영자는 그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물건을 정리했다.“대표님, 몸이 안 좋으세요?”“집안 어른이시니까 상황 파악은 하실 줄 알겠죠? 본분을 지키고 집안에 아무나 들이지 마세요.”안영자는 의아해했다. “대표님,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가 말하는 아무나가 누구를 말하는지 몰랐던 안영자가 작게 중얼거리자 안 그래도 굳어 있던 차우빈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이 집 주인이 누구죠?” “당연히 대표님이시죠.”“등본에 제 이름만 적혀 있나요? 내가 여기 이사 왔을 때도 얘기한 것 같은데요.”안영자도 바보가 아니었다. 등본에는 온하나 이름이 있었지만 심명희는 분명 둘이 곧 이혼한다고 했었다.게다가 2년 동안 차우빈은 눈에 띄게 온하나를 싫어하고 여기저기 양지원을 데리고 다녔기에 순간 안영자도 혼란스러웠다.원래도 화가 났던 차우빈은 술기운에 몸도 불편해지자 더 짜증이 났다.“나와 온하나를 챙기라고 부른 거지 다른 일에 멋대로 나서서 결정하지 마세요. 못 하겠으면 그만두고요.”안영자는 차씨 가문에 들어온 지 10년이 다 되었고
온하나는 병원 근처 공원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때때로 변하는 차우빈에 태도를 짐작하고 싶지도,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았다.옆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반은성이 다가와 옆에 앉았다.“멀리서부터 하나 씨인 줄 알았어요.”“반 선생님, 오늘 당직이세요?”“네, 왜 여기 앉아 계세요?”온하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날씨가 좋아서 여기 잠깐 앉았다가 아빠 보러 가려고요.”“아버님 상태는 무척 안정적이고 간병인도 있으니까 걱정 없이 쉬셔도 돼요.”반은성은 온대훈의 주치의로 그동안 온하나도 잘 챙겨주었다.“반 선생님, 고마워요.”“하나 씨, 우린 동료잖아요.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이 있는데 사실 아버님 같은 상황에서는 더 버틸 이유가 없어요.”3년 넘게 식물인간으로 지내면서 전혀 미동이 없었고 인공호흡기와 영양 수액에 의존해 버티고 있었는데 여러 신체 기관은 이미 각기 다른 정도로 무너진 데다가 매달 생명 부지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현재의 온대훈은 심장 박동만 살아있는 시체라고 할 수 있으며 깨어날 가능성은 아주 작았다.이를 온하나도 알고 있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온씨 집안에서 온대훈의 각별한 애정이 아니었다면 나희경은 그녀가 학교 가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그녀는 더더욱 없었을 거다.가족에 대한 이해와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된 것도 모두 온대훈 덕분이었다. 양아버지는 외로웠던 그녀의 삶에 한 줄기 빛이 되어주었고 가족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알려주었다.“호의는 알지만 아직은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아직은 제가 능력이 있으니까 하루라도 더 버티고 싶어요.”반은성은 온하나의 고집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모습은 3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돈은 제가 마련할 테니 제발 우리 아빠 목숨만 살려주세요.”평범한 한마디였지만 그녀는 단호하고 힘차게 말했고 가냘픈 아가씨의 눈에는 무시할 수 없는 확고함이 담겨 있었다.지금까지도 반은성은 온하나를 볼 때마다 그날 밤 온하나의 단호하고 확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