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숙도 어리석지 않았다. 마음에 들긴 했지만 받을 수는 없었다. 안 그러면 예쁘고 착한 손주며느리에게 미안했고 게다가 이 물건은 한눈에 봐도 비싸고 싸구려 장난감 따위가 아니었다.“지원아, 혜각 스님께서 널 위해 준 거면 네가 이 물건과 인연이 있다는 뜻이니 가져가렴.”온하나는 웃었다. 역시 김혜숙이다. 쉽게 매수할 수 없는 사람이다.그녀는 차우빈을 향해 고개를 돌려 웃으며 말했다.“여보, 제가 할머니를 위해 준비한 선물 가져와요.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그 말에 김혜숙은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우리 하나가 준비한 건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지.”차우빈은 순간 당황했다. 그녀가 준비한 건 그녀 가방에 있지 않나?그가 준비한 건 차에서 내리기 전까지 그녀의 손에 건네지도 못했는데 이 여자가 지금 무슨 뜻인 걸까.하지만 그녀가 원하니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남자의 돈으로 산 건 무척 불쾌했으니까.게다가 온하나의 여보라는 말이 그의 마음에 잘 먹혀들어 갔다.김혜숙은 온하나가 차우빈에게 화를 내지 않는 것을 보고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입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바라보는 차우빈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이제야 뭘 좀 아네.’그는 느긋하게 코트 주머니에서 선물 상자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며 눈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었다.빠르게 그를 쳐다보는 온하나의 눈엔 경멸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가자 차우빈이 멈칫했다.‘싫으면서 왜 가져가, 이 여자가 진짜!’그동안 온하나가 참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사람에게 매섭게 쏘아붙일 줄도 알았다.온하나는 그가 자신을 쳐다보는 걸 알면서도 못 본 척하며 김혜숙에게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얼마 전에 이 팔찌가 성해 경매에 나온다고 해서 우빈 씨한테 특별히 낙찰받으라고 시켰어요. 마음에 드시는지 한번 보세요.”김혜숙은 팔찌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했다.“정말 예쁜 팔찌네. 내가 좋아하는 색이야. 너도 참, 경매에 나오는 물건은 엄청 비싼데.”“할머니, 이건 값을 측정할 수가 없어요. 이 팔찌 누구 손에서
“엄마, 어제 점원에게 직접 물어봤는데 분명 틀림없었어. 아마 오빠가 선물이 너무 저급하다고 생각해서 이 팔찌를 준 것 같아.”“이 정도 일도 못 해내면서 우빈이 아내가 될 수 있겠어?”도기영의 질책에 양지원은 억울했다. 차우빈이 즉석에서 선물을 바꿨을 수도 있는데 이게 왜 그녀의 탓인가.양지원은 가끔 차우빈에 대한 자신의 집착이 사위로서 차우빈에 대한 도기영의 집착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온하나가 곁눈질로 낮게 수군거리는 두 모녀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문득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복수는 즉석에서 빠르게 돌려줘야 하는 법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만만하게 굴면 남의 손에 멋대로 휘둘리고 만다.연회가 시작될 때까지 김혜숙의 시선은 팔찌를 떠나지 않았고 차우빈은 온하나의 귀에 속삭였다.“온하나, 할머니 기분이 좋으니까 망치진 않았네. 하지만 이러고도 어떻게 출연료를 달라고 해?”온하나가 입꼬리를 올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차 대표님, 사랑 연기와 할머니 기쁘게 해드리는 것 두 가지 다 해냈잖아. 내 연기가 부족한 것 같으면 그쪽 보배둥이한테 하라고 해. 저렇게 당신만 바라보고 있는데 불쌍하지도 않아? 저 여자가 누릴 수 있게 내가 자리라도 비켜줄까?”김혜숙이 자리에 있어서 겉으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던 차우빈은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두 사람은 애정이 가득해 보여도 사실 이건 차우빈을 도발한 것에 대한 벌이라는 걸 온하나만 알고 있었다.간지럼을 못 참는 그녀인데 차우빈 이 개자식이 손바닥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온하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행복해서가 아니라 간지러움 때문이었다.그녀는 너무 웃지 않으려고 입 안쪽 여린 살을 꽉 깨물었다. 진짜 웃음이라도 터지면 민망한 상황이 된다.김혜숙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봐, 얼마나 보기 좋아. 너희 둘이 제일 잘 어울려. 우빈아, 하나 배에 더 소식이 없으면 병원에 가봐. 우리 손주 생기는 데 방해되지 않게.”김
온하나가 바운드 클럽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이미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상태였고 커다란 룸 안에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차우빈은 무뚝뚝한 얼굴로 센터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술 때문에 얼굴이 조금 빨갛게 달아올랐다. 비싼 셔츠의 단추를 두 개 정도 풀어헤치니 여유로우면서도 노곤해 보였다.그러나 얼음장같이 차갑던 시선이 옆에 있는 여자에게 닿았을 땐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온하나를 스치는 싸늘한 눈빛과는 사뭇 달랐다.“우빈 오빠, 나 새우 좀 까줄래?”차우빈의 두 눈은 무뚝뚝하면서도 애정이 담겨있었다. 그는 남자다운 손으로 양지원이 건넨 새우를 받았다.온하나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그들에게로 향했다. 꼼꼼하게 새우 껍질을 까는 그 모습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온하나는 차우빈의 비밀 결혼한 아내였고 벌써 3년이 되었다. 하지만 1년에 남편을 만난 날이 거의 손꼽을 정도였다.그녀는 몰래 한숨을 내쉬면서 마음을 진정하려 했다.‘이미 익숙해졌잖아. 안 그래?’“우빈아, 지금까지 동창 모임에 나온 적이 한 번도 없다가 오늘 여자까지 데리고 온 걸 보면 혹시 곧 좋은 소식이 있는 거 아니야?”반장 송태훈의 말에 친구들은 하나같이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차우빈의 답을 기다렸다.지금 이 순간 차우빈 말고는 온하나가 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차우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 모습에 온하나는 가슴을 쿡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몇 개월 만에 만나는 남편이 이런 자리에 양지원을 데리고 왔다. 이보다 더한 굴욕이 있을까?“온하나, 왜 이렇게 늦게 왔어?”송태훈이 온하나를 발견하고 웃으면서 맞이했다. 온하나가 이 자리에 참석한 건 송태훈이 일부러 병원에 접수까지 해서 그녀를 설득했기 때문이었다.“차우빈 기억하지? 학교 다닐 때 너희 둘이 우리 반에서 공부 제일 잘했잖아.”차우빈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왼손으로 양지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양지원은 쑥스러운 듯 입을 가리고 웃었
남자는 튼실한 팔로 온하나를 안은 채 방 안으로 들어와 문 뒤로 몰아붙였다.온하나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남자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고 사정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마치 그동안 억눌렀던 분노를 전부 쏟아내기라도 하듯 뜨거운 키스가 그녀의 목에까지 전해졌다.남자는 뜨겁고 커다란 손으로 옷깃을 잡아당기더니 쇄골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키스하면서 그녀에게 숨 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빠르고 사정없는 움직임에 온하나는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차우빈의 몸에 밴 짙은 술과 담배 냄새가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온하나가 반응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한데 엉켜있었고 야릇한 공기 속에 짙은 술 냄새가 풍겼다.그녀는 몸이 점점 나른해졌고 더는 반항하지 않았다.“쓰읍.”갑자기 밀려온 아픔에 온하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아파.”온하나의 위에서 키스하며 깨물던 차우빈이 갑자기 멈칫하더니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파묻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한참 후 그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몇 달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내 냄새를 기억하고 있다니. 이거 고마워해야 하나?”목소리가 어찌나 싸늘하지 온하나는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차우빈은 고개를 들어 코를 그녀의 코에 대고 비비적거렸다. 겁에 질린 온하나의 모습에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새어 나왔다.“내가 무서워? 온하나, 무서운 게 뭔지 알기나 알아?”어둠 속 그의 차가운 얼굴에 분노가 가득했다.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모습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 같았다.“여긴 어떻게...”온하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우빈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반항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그러고는 안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던져버린 후 그녀를 덮쳐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에게 적응할 시간이라곤 전혀 주지 않았다.차우빈은 2년 전부터 온하나를 미워했다. 그 미움이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점점 깊어져서 이젠 뼛속까지 파고들었다.온하나도 예전에는 차우빈의 아낌없는
평소 부부의 모습이긴 하지만 그녀에게도 존엄이 있었다. 도저히 제삼자 앞에서 자신의 상처를 들춰낼 수 없었다.온하나는 아픔을 참으며 허리를 곧게 편 채 다가갔다.“하나 언니, 미안해. 배가 너무 아파서 하나 언니를 예약했는데 오늘 환자를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민폐 끼쳤다면 사과할게.”양지원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긴 했지만 아픈 탓인지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그 모습이 참으로 가여워 보였다.“여긴 산부인과야. 배가 아프면...”온하나의 말이 끝나기 전에 조수연이 차갑게 말했다.“하도 귀한 분이라 생리통 때문에 차 대표님이 직접 모시고 왔지, 뭐야.”조수연의 한마디에 양지원의 두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러면서 쑥스러워하며 차우빈의 눈치를 살폈다.“하나 언니, 오해하지 마. 우빈 오빠 아침밥을 가져다주려고 갔는데 오빠가 내가 아픈 걸 알고 병원에 데리고 온 거야.”온하나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어젯밤 동창 모임에서 애정 과시한 게 모자라서 아침부터 찾아와서 과시하는 거야?’조수연은 양지원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맨날 유부남을 따라다니면서 오빠라고 부르니까 사람들이 오해하지. 저런 말을 대체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지? 정말 여우가 따로 없어.’차우빈은 무뚝뚝하게 앉아 있기만 할 뿐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온 선생, 왔으면 빨리 환자 봐줘야지. 이미 오래 기다렸어.”아무런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말투와 얼음장 같은 눈빛이 더해져 냉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지금 온하나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걸 아예 모르는 듯했다. 아니면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는 건가?‘차우빈이 어떤 사람인데 여자를 데리고 산부인과에 온 걸 보면 모르겠어? 양지원한테는 아주 지극정성이지만 나한테는...’그는 어젯밤에 맹수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양지원의 가족인 듯 온하나를 거의 낯선 사람 취급했다.온하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괜찮다는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긴 꿈이라도 이젠 깰 때가 됐다. 그녀는 복부의 아픔을 참으며 양지원
차우빈은 혐오 가득한 얼굴로 동문서답했다.“가서 씻어. 몸에 알코올 냄새가 진동해.”“몸에 상처가 있어서 샤워 못 해.”온하나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왜 내가 혼자 감당해야 하는데?’차우빈은 그녀를 덤덤하게 힐끗거렸다. 그러다가 긴 눈매에 의미심장함이 스쳤다.온하나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그의 앞에서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지금 날 유혹하는 거야? 오늘은 술을 마시지 않아서 널 터치 안 해.”차우빈은 온하나를 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상처가 되는 말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차우빈을 싸늘하게 쳐다보면서 옷을 벗었다. 얼굴에 부끄럽거나 불안한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고 오히려 확고함과 결연함이 묻어있었다.마지막으로 속옷만 남았을 때 온하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차우빈, 두 눈 똑바로 뜨고 봐봐. 이거 보여?”온하나는 하얀 피부를 드러내고 차우빈의 앞에 서 있었다. 피부가 하얘서 멍 자국들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차우빈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오늘 꾀병은 아니었나 보네.”“수연이 내버려 둬. 수연이는 나한테 진심으로 잘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야.”유일이라는 말에 차우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확 어두워졌다.“지금 당장 눈 감고 자. 너도 알잖아. 내가 기분이 좋을 때면 다 용서하는데 기분이 좋지 않으면...”온하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차우빈은 말한 대로 하는 성격이기에 무턱대고 맞서봤자 좋을 게 없었다.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옷들을 휙 차버리고는 잠옷을 찾으러 옷방으로 들어갔다.차우빈은 그녀의 매혹적인 몸매 라인을 보면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몇 달 못 본 사이에 성격이 더러워졌다, 너?”“내가 어찌 감히 그러겠어. 발에 밟혀서 거슬리니까 그런 거지. 못 보겠으면 다른 방에 가서 자.”온하나가 무덤덤하게 말했다.“집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날 내쫓아?”차우빈은 옷방 문 앞까지 따라와서는 옷을 찾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차우빈은 온하나를 싫어하기 시작한 후로 매번 관계를 가진 다음에는 돈을 줬다. 게다가 액수도 꽤 커서 생활비로 쓰기에도 아주 넉넉했다.온하나는 가정 형편이 별로 좋지 않았다. 3년 전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식물인간이 되었고 오빠는 뇌성 마비에 걸렸다. 두 사람 모두 어머니의 손길이 절실하게 필요했다.무거운 부담은 고스란히 온하나가 짊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그녀는 고작 의대 대학원생일 뿐이었다.온하나는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 병원에서 병원비를 재촉하던 그날 밤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엄청난 병원비에 온하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지만 아버지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여태껏 아버지의 사랑을 끊임없이 받았으니까.그녀가 병원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절망스럽게 울고 있을 때 차우빈이 나타났다. 온하나는 아직도 그 장면을 잊지 못했다.188cm 되는 큰 키의 남자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마치 하늘에서 보내준 구세주 같았다.“울지 마, 온하나.”간단한 한마디였지만 엄청난 마력을 지녔다.온하나는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차우빈의 손을 잡고 그의 차에 올라탔다.두 사람은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대학교도 같은 학교를 다녔다.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이긴 했지만 별로 연락이 없었다. 그런데 이럴 때 차우빈을 만날 줄은 몰랐다.차우빈은 온하나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조건은 그와의 결혼이었다. 차우빈의 가족들이 계속 정략결혼을 원했기 때문이었다.결혼 후 두 사람은 의외로 성격이 잘 맞았고 서로 호감도 생겨서 한동안은 여느 신혼부부 못지않게 깨가 쏟아졌었다.차우빈은 온하나를 예뻐했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가장 잘하는 의사를 알아봐 주었으며 오빠를 요양병원에 보냈다. 하여 온하나는 차우빈이 자신을 매우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러다가 나중에 갑자기 지금 같은 관계가 돼버렸다.그동안의 굴욕들은 온하나에게 그녀는 그저 차우빈의 어장 속 물고기라는 걸 말해주었다.과거 생각에 온하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녀는 창가 앞에
전화를 끊은 후 온하나는 소파에 기댄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이혼하고 만나지 않는다면 우빈이는 나라는 사람을 아주 빨리 잊겠지.’고등학교 3년, 대학교 7년, 10년 동안 차우빈은 온하나를 신경 쓴 적이 없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해도 그의 시선은 그녀에게 머무르지 않았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밤에 마침 서로에게 맞는 타이밍에 나타났을 뿐이었다.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차우빈은 빠져나갈 준비를 마쳤지만 온하나는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결국에는 뭐든지 다 원했던 지나친 욕심 때문이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집 앞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듣고서야 누가 복도의 센서 등을 수리하는 중이라는 걸 알았다.한 아주머니가 감탄했다.“지금 젊은이들은 참 괜찮아요. 직접 자기 돈으로 등을 수리하다니. 관리사무소에서는 그냥 돈 받을 궁리나 하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수리해주지 않았어요.”“맞아요. 그 젊은이도 관리사무소에서 계속 가만히 있으니까 우리한테 연락한 거예요.”온하나는 덤덤하게 웃어 보였다. 센서 등을 수리하면 야근하고 돌아와도 복도가 어두워서 무서울 일은 없을 것이다.그녀는 어릴 적부터 어두운 것을 무서워했다. 특히 어두운 데다가 조용하기까지 하면 더 무서워서 잠을 잘 때도 스탠드를 켜놓고 자곤 했다. 처음에 차우빈과 함께했을 때 차우빈은 그녀를 놀린 적도 있었다.두 사람이 함께한 후 차우빈 덕에 온하나는 점점 어둠을 무서워하지 않다가 최근에 다시 무서워하기 시작했다.저녁 식사를 마친 온하나는 베란다에서 빨래를 걷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다른 집의 불빛이 참 따뜻해 보였다.‘다들 저 불빛처럼 따뜻하고 화목하게 살고 있을까?’그러다가 시선을 아래로 늘어뜨렸는데 누군가 작은 나무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아파트 단지 내의 불빛이 어두워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실루엣이 어딘가 익숙했다.그런데 몇 초 후 남자는 자리를 떠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온하나는 자신을 비웃었다.‘온하나, 뭔 생각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