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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 아닌 거래
결혼이 아닌 거래
작가: 묵향속삭

제1화

온하나가 바운드 클럽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이미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상태였고 커다란 룸 안에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차우빈은 무뚝뚝한 얼굴로 센터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술 때문에 얼굴이 조금 빨갛게 달아올랐다. 비싼 셔츠의 단추를 두 개 정도 풀어헤치니 여유로우면서도 노곤해 보였다.

그러나 얼음장같이 차갑던 시선이 옆에 있는 여자에게 닿았을 땐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온하나를 스치는 싸늘한 눈빛과는 사뭇 달랐다.

“우빈 오빠, 나 새우 좀 까줄래?”

차우빈의 두 눈은 무뚝뚝하면서도 애정이 담겨있었다. 그는 남자다운 손으로 양지원이 건넨 새우를 받았다.

온하나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그들에게로 향했다. 꼼꼼하게 새우 껍질을 까는 그 모습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온하나는 차우빈의 비밀 결혼한 아내였고 벌써 3년이 되었다. 하지만 1년에 남편을 만난 날이 거의 손꼽을 정도였다.

그녀는 몰래 한숨을 내쉬면서 마음을 진정하려 했다.

‘이미 익숙해졌잖아. 안 그래?’

“우빈아, 지금까지 동창 모임에 나온 적이 한 번도 없다가 오늘 여자까지 데리고 온 걸 보면 혹시 곧 좋은 소식이 있는 거 아니야?”

반장 송태훈의 말에 친구들은 하나같이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차우빈의 답을 기다렸다.

지금 이 순간 차우빈 말고는 온하나가 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차우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 모습에 온하나는 가슴을 쿡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몇 개월 만에 만나는 남편이 이런 자리에 양지원을 데리고 왔다. 이보다 더한 굴욕이 있을까?

“온하나,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송태훈이 온하나를 발견하고 웃으면서 맞이했다. 온하나가 이 자리에 참석한 건 송태훈이 일부러 병원에 접수까지 해서 그녀를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차우빈 기억하지? 학교 다닐 때 너희 둘이 우리 반에서 공부 제일 잘했잖아.”

차우빈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왼손으로 양지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양지원은 쑥스러운 듯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러고는 온하나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온하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가 아무도 모르게 심호흡했다. 얼굴에 지어졌던 미소도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하도 오래 못 봐서 기억이 잘 안 나.”

차우빈은 온하나를 흘겨보면서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나도 기억이 잘 안 나.”

온하나는 그의 마음속에 그녀의 자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직접 들으니 큰 상처로 다가왔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고 둘 사이가 왜 이렇게 나빠졌는지 친구들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만날 일도 없었을 텐데 왜 저렇게 날이 서 있지?’

송태훈이 멋쩍게 웃었다.

“오랜만에 봐서 기억이 안 날 수도 있지, 뭐. 그런데 이따가 다 생각날 거야.”

그러고는 온하나의 옆에 슬쩍 앉았다.

“배고프지? 얼른 뭐 좀 먹어.”

옆에 있던 남자 동창이 그 모습을 보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반장, 몇 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어? 왜 아직도 솔로인가 했더니 하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구나.”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룸 안에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송태훈이 온하나에게 대시했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동창의 장난에도 송태훈은 거들떠보지 않고 온하나에게 다정하게 반찬을 집어주었다.

“많이 먹어.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더 야위었어.”

온하나는 어색했지만 그래도 웃으면서 말했다.

“고마워. 내가 알아서 먹을게.”

“하나 언니, 내가 술 한잔 따라줄게.”

온하나가 반찬을 입에 넣자마자 양지원이 술잔을 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송태훈이 술잔을 들었다.

“하나 속이 안 좋아서 내가 대신 마실게.”

양지원은 온하나를 훑어보면서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나 언니는 참 복도 많아. 오자마자 이렇게 챙겨주는 사람도 있고.”

“태훈아, 술 한잔 가지고 뭘 이렇게까지 해? 하나 그렇게 연약하지 않아.”

옆에 있던 남자 동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차우빈에게 잘 보이고 싶은 속내를 서슴없이 드러냈다.

차우빈은 교만한 자태로 자리에 앉아 사람들이 그녀에게 술을 권하는 모습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보기만 했다.

온하나는 미안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진짜 술 못 마셔...”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는 건 우리 동창들을 무시한다는 건가?”

차우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의 싸늘한 말투에 룸 전체가 삽시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온하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양지원 때문에 그녀에게 술을 강요했다. 서로의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온하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우빈아, 하나 학교 다닐 때부터 위가 안 좋았잖아. 그래서 술 못 마셔. 이 정도는 봐줘야지.”

송태훈이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 그러자 차우빈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송태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술 한잔은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야?”

“차우빈, 적당히 해...”

온하나는 송태훈을 말리면서 애써 마음을 진정한 후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차우빈이 어쩌다가 동창 모임에 참석했고 미래 사모님마저 술을 따르겠다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사실 온하나가 술을 마시지 않는 건 위병 때문이 아니라 알코올 알레르기 때문이었다. 도수가 아주 낮은 과일주를 마셔도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았기에 고량주 같은 건 입에 대지도 못했다.

결혼한 후 실수로 한번 알코올이 섞인 음료수를 마셨는데 결국 알레르기 때문에 두드러기가 온몸에 돋았다.

그때 차우빈은 무척이나 마음 아파하면서 한밤중에 그녀를 안고 응급실로 달려갔었다. 이 일을 진짜 잊었단 말인가?

온하나는 아픈 마음을 참으면서 술 한잔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차우빈은 술잔을 흔들다가 갑자기 멈칫했다. 덤덤하던 얼굴에 성난 기색이 살짝 스쳤고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목구멍이 타들어 갈 정도의 독한 술도 차가운 마음을 따뜻하게 녹이지 못했다.

온하나는 차우빈을 빤히 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차우빈, 이러면 되겠어?”

차우빈은 감정을 숨기고 양지원을 쳐다보았다.

“얘한테 물어봐.”

양지원은 온하나를 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하나 언니는 역시 시원시원하다니까. 그럼 나도 원샷해야지.”

양지원이 마시려던 그때 차우빈이 술잔을 빼앗아갔다.

“못 마시면서 억지로 마시기는.”

그의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 섞여 있어서 감히 반항할 수가 없었다.

양지원을 보면서 한 말이었지만 사실은 온하나가 들으라고 한 말이라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양지원은 속상한 척 고개를 숙이더니 안색이 창백한 온하나를 힐끗거렸다. 그녀의 두 눈에 행복이 가득했다.

온하나는 이런 일이 익숙해서 마음이 단단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밤에도 역시나 깊은 상처를 받고 말았다.

차우빈은 자기 여자에게는 진심을 다해 챙겨주면서 거론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면 죽든 말든 전혀 상관이 없었다.

온하나는 마음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송태훈은 온하나에게 반찬을 집어주다가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고 몸이 굳은 걸 보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하나야, 어디 안 좋아?”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힘겹게 말했다.

“미안한데 몸이 좀 안 좋네.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그 순간 차우빈은 이미 벌겋게 달아오른 그녀의 쇄골을 몰래 쳐다보았다. 알코올 알레르기 증상이었는데 목부터 시작했다가 심할 경우 온몸에 퍼졌다.

차우빈 때문에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온하나는 마지막 자존심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송태훈의 호의를 거절한 다음 힘겹게 일어나 그 자리를 나왔다. 그들에게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기안시의 겨울 밤바람이 어찌나 날카롭고 차가운지 정말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따로 없었다.

온하나는 코트의 옷깃을 여미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약국을 찾아다녔다.

...

한 시간 후, 온하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얼마 전에 맡은 낡은 아파트로 들어왔다.

가로등이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면서 칠흑같이 어두운 길을 그나마 밝게 비춰주었다.

복도의 센서 등이 고장 난 지 며칠이나 됐는데도 아직도 수리하지 않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집 앞에 도착한 온하나는 가방에서 키를 뒤졌다. 복도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하여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그러다가 계단 쪽에 훤칠한 키의 남자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를 등지고 서 있었고 손가락 사이에 담뱃불이 반짝이고 있었다.

순간 겁이 난 온하나는 재빨리 문을 열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뒤에 있던 남자가 갑자기 담배꽁초를 버리고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살려...”

온하나가 소리를 지르기 전에 누군가의 단단한 가슴팍에 안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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