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나는 몇 초 동안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사모님.”“별빛 카페야. 이쪽으로 와.”명령하는 듯한 말투였고 온하나에게 질문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온하나는 이미 끊겨버린 전화를 보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차우빈이 이혼 합의서에 사인했고 가지러 오라는 뜻인 거 같았다.어제저녁에 차우빈의 체면을 깎아버렸다. 여자에게 따귀를 맞았는데 어찌 참을 수가 있겠는가?만약 평소 그에게 여자를 폭행하는 버릇이 있었더라면 어제저녁에 아마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30분 후, 온하나가 카페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심명희와 양지원이 웃으면서 신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이토록 자애로운 심명희의 모습을 온하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랐다.두 사람이 금방 결혼하여 차우빈이 온하나를 아낄 때도 심명희는 그녀를 탐탁지 않아 했다.심명희가 양지원을 대하는 태도를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그냥 야박한 사람이라 생각했을 것이다.온하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다가갔다. 예쁨을 받진 못해도 굽신거리거나 비굴하지 않았다.“사모님.”온하나는 호칭도 바꿔서 인사했다. 이혼 합의서에 이름을 사인한 순간부터 심명희와는 남이라 생각하고 선을 그었다.양지원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하나 씨랑 약속 있을 줄은 몰랐어요.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심명희는 양지원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목에 건 목걸이를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괜찮아. 네가 남도 아닌데. 이모랑 커피 마셔줘서 이모는 너무 좋아.”그러더니 갑자기 온하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정하던 미소와 자애롭던 모습이 눈 깜짝할 사이에 싹 다 사라졌다.“앉아.”심명희는 싸늘하게 그녀를 훑어보았고 차가운 말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이런 그녀의 모습에 온하나는 흠칫 놀랐다. 늘 고귀하고 우아한 심명희는 오늘처럼 싫은 티를 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무슨 일로 절 부르셨죠? 사모님?”온하나는 미소를 잃진 않았지만 속은 말이 아니었다.
차우빈이 동작을 멈추고 싸늘한 눈빛으로 허승준을 째려보았다.허승준은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턱을 어루만졌다.“표정을 보니까 설마 온하나 때문에 이러는 거야?”차우빈이 한때 온하나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정도로 잘해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최근 2년 동안 왜 갑자기 온하나를 못살게 구는지도 여전히 의문이었다.“아니, 대체 어쩌겠다는 거야? 온하나랑 잘 지내고 싶으면 잘해주고 양지원을 멀리해. 만약 같이 살 생각이 없는 거면 왜 이렇게까지 못살게 구는 건데? 그냥 돈 좀 주고 보내면 되잖아. 너한테는 아주 쉬운 일일 텐데.”차우빈은 무표정으로 그를 힐끗거리더니 술잔에 술을 따른 다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네 일이나 잘해. 내 일은 신경 쓸 거 없어.”그러고는 술을 단숨에 마셔버리고 뒤로 기댄 채 미간을 어루만졌다. 표정만 봐도 지금 얼마나 화가 난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그런데 허승준이 뜻밖에도 웃음을 터트렸다.“진짜 온하나 때문이었어? 온하나가 너한테 뭘 어쨌다고 이래? 화를 내도 걔가 내야지. 너랑 양지원이 아직도 실검에 걸려있어.”차우빈이 양지원에게 비싼 선물을 주고 불꽃놀이까지 선물했다는 소식이 인터넷에 쫙 깔렸다.“아, 맞다. 내 기억이 맞다면 온하나도 어제 생일이지?”허승준이 차우빈을 빤히 쳐다보았다. 차우빈은 장난 가득한 허승준을 무섭게 노려보았다.잠시 후 차우빈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난 이혼을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허승준은 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아니, 그럼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양쪽에 여자를 끼고 있으면서 이래도 이혼할 생각이 없다고?”허승준이 술 한잔을 벌컥벌컥 마셨다. 차우빈의 머리가 잘못된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한참이 지나도 차우빈이 아무 말이 없자 허승준이 얼굴을 찌푸리고 물었다.“말 못 할 얘기라도 있는 거야?”그의 질문이 귀찮아진 차우빈이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뭔 질문이 그렇게 많아? 같이 술이나 마시자고 불렀지,
온하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서야 천천히 마음을 진정했다.“차우빈, 네가 왜 여기 있어? 어떻게 들어온 거야?”차우빈이 덤덤하게 말했다.“이런 곳에 들어오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잠이나 자.”“미쳤어? 어젯밤에 깨문 게 아프지 않은가 봐?”차우빈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허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더는 온하나를 못살게 굴지 않고 잠을 자려 했다.“차우빈, 제발 정신과 좀 가봐. 아프면 치료받고. 왜 날 이렇게 괴롭히는 건데?”쥐 죽은 듯이 고요한 안방에 차우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조용히 해. 나 졸려.”“자는 척하지 마, 차우빈.”진짜로 피곤한 건지, 아니면 술 때문인지 차우빈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처럼 이내 잠이 들었다. 온하나가 아무리 밀고 때려도 전혀 깨질 않았다.온하나는 차우빈 때문에 잠을 다 깨고 말았다. 어두운 불빛을 빌려 차우빈의 옆에 누워있는 자신을 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거실로 가서 과일칼 하나를 챙기더니 너무 추운 나머지 부들부들 떨면서 안방으로 들어왔다.과일칼을 차우빈의 목에 가져다 댄 순간 차우빈이 그녀의 허리를 확 잡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수술칼은 잘 잡을 수 있어도 지금은 손이 떨려서 제대로 잡지 못했다. 두려워서 떠는 건지 추워서 떠는 건지 그녀도 알지 못했다. 결국 과일칼을 머리맡 서랍에 내려놓고 이불 안으로 재빨리 들어갔다.온하나는 몇 시에 잠들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잠들기 전에 차우빈을 욕했던 것만 기억이 났다.이튿날 아침 온하나가 깨어났을 때 거의 9시가 되었고 옆자리는 진작 텅 비어있었다.씻으려고 일어났는데 화장실 세탁물 바구니에 남자 옷이 가득했고 세면대 위에 남성용품이 놓여있었다.온하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여기서 살겠다는 거야, 뭐야? 내가 편히 사는 꼴을 못 보겠다는 거야, 아니면 하루라도 날 괴롭히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거야?’차우빈은 식탁 앞에 앉아 메일을 처리하다가 온하나를 보고는 고개를 들었다.“여기 너무 추워. 오늘 신비 캐슬로 들어와.”
송태훈을 배웅한 후 온하나는 소파에 앉아 온라인 상담을 처리했다. 의사 면허증을 딴 이후로 SNS 계정을 열었는데 지금까지도 온라인으로 상담을 진행하고 있었다.환경의 영향을 받아 불임인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어떤 부부는 아이를 가지려고 재산을 탕진하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았다.온하나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질문에 무상으로 대답해 주면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이러면 마음이 편했고 의사라는 호칭에도 부끄럽지 않았다.이렇게 오랜 시간 상담을 받은 게 처음이라 오늘 환자들이 한꺼번에 다 몰려온 것 같았다.환자 유나:[지난번에 해주신 말씀대로 검사를 받았는데 여기 의사 선생님이 자연 임신이 가능하대요.]환자 막대사탕:[선생님, 저 벌써 시험관 세 번이나 했는데 이식 후에는 두 달도 안 돼서 아이 심장이 멈췄어요. 이런 경우에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요? 너무 속상해요.]환자 별빛:[뭐 하나 여쭤볼 게 있는데 출산한 후에 생리가 올 때면 생리통이 엄청 심해요. 대체 왜 이런 거죠? 출산 전에는 생리통이 없었어요.]@유나:[축하드려요. 하루빨리 소원 이루시길 바랄게요.]@막대사탕:[마음이 속상할 땐 닉네임처럼 달달한 막대사탕 하나 사드세요. 환자분 같은 경우가 드문 경우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조금만 속상해하고 다시 힘내서 일어나세요. 일단 몸부터 잘 추스르고 올해는 잠시 아이를 갖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올해는 밖에 나가 돌아다니면서 바람도 쐬고 내년에 다시 생각하세요. 희망은 계속 있으니까 포기하지 마시고요.]@별빛:[병원에 가서 검사받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자궁 내막이 손상됐을 수도 있고 자궁경부 염증이나 유착일 가능성이 있거든요. 구체적인 건 검사를 받아야 알 수 있어요.]일일이 답장을 마치고 나니 벌써 점심이 다 되었다. 라면을 끓여 고작 두 입 먹었는데 진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오늘 저녁에 신비 캐슬로 들어오시라고 합니다. 오후에 짐 챙기시면 저녁에 운전기사한테 모시러 가라고 할게요.”“차우빈
온하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또 왜 이러는 거야?’차우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온하나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온하나의 허리를 잡고 확 끌어안더니 귓가에 대고 싸늘하게 말했다.“죽은 남편이 맨날 벌떡벌떡 일어나서 저녁마다 옆에서 자는데 이러다 양기가 모자라는 거 아닌지 몰라.”온하나는 그제야 어떻게 된 건지 알아챘다. 임다혜가 아침에 했던 얘기를 허승준에게 한 게 틀림없었다.허승준과 차우빈이 또 둘도 없는 사이인데 차우빈에게 말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온하나는 전혀 겁먹은 기색이라곤 없이 차우빈의 검은 두 눈을 빤히 보면서 씩 웃었다.“1년에 몇 번밖에 만나지 못하는 남편이면 있으나 마나 아니야?”차우빈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온하나, 점점 재미있어지네?”그러고는 온하나의 턱을 들고 입술에 키스했다.온하나는 밀어내며 발버둥 쳤지만 차우빈이 품에 꼭 껴안은 바람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남자와 여자의 힘 차이를 또 한 번 느끼게 되었다.너무도 화가 나서 그의 입술을 깨물려고 하는데 차우빈이 갑자기 아래턱을 들었다.“또 깨물려고? 난 귀신이야. 양기를 흡입하러 왔어.”차우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둠 속에서 온하나가 반항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그녀를 벌하기 위한 키스였지만 어느덧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졌고 그동안 참아온 욕망을 드러내곤 했다.한참 후 차우빈은 그녀를 풀어주고는 촉촉해진 입술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작은 얼굴이 참으로 청순했고 시선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이 여전히 고분고분했다.하지만 더는 예전처럼 온순한 고양이가 아니라 가시 돋친 고슴도치라는 걸 차우빈은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그윽하게 쳐다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온하나는 심호흡하면서 마음을 진정한 후 차우빈을 째려보고는 확 밀어버렸다.“차우빈, 아프면 병원에 가봐. 왜 계속 날 괴롭히는 건데?”차우빈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힘껏 빨아들이더니 담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빛에 등골이 다 오싹했다.차우빈은 얼굴도 잘생겼고 이목구비도 아주 뚜렷했다. 온하나는 예전에 이 얼굴에 반해서 참고 살았지만 이젠 정신을 차렸다.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는데 엮여봤자 서로에게 상처만 될 뿐이었다.“날 도와준 건 고맙게 생각해. 그래서 2년 동안 나한테 무슨 짓을 하든 다 참았어. 그런데 나도 사람이야. 상처받기도 하고 마음도 아파. 우리가 처음에는 서로 원해서 한 거래지만 이젠 내가 싫어졌어. 너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고. 그러니까 좋게좋게 끝내자.”온하나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대문이 자동으로 닫혔다.“이모님, 아무도 못 나가게 해요.”그러고는 온하나가 발버둥 치든 말든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진욱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차우빈의 밑에서 일한 지 4년이라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온하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안영자는 차우빈이 온하나를 데려온 걸 보고 바로 심명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차우빈은 그녀를 끌고 서재로 올라갔다. 온하나를 보면 참지 못할까 봐, 또 상처를 줄까 봐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았다.‘서로 원해서 한 거래? 그러니까 나랑 한 결혼이 거래였단 말이야?’그는 홧김에 테이블을 확 엎어버렸다.온하나는 쿵쾅거리는 소리에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만약 살인이 합법이라면 아마 물건을 던진 게 아니라 온하나를 던졌을 것이다.그날 밤, 차우빈은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게스트룸에서 잤다. 두 사람은 별 탈 없이 하룻밤을 보냈다.이튿날 아침 차우빈이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어젯밤에 이성을 잃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다시 차갑고 귀티 나는 모습으로 돌아왔다.“대표님, 아침 준비 다 됐어요.”“하나한테 내려와서 밥 먹으라고 해요.”덤덤한 목소리에 높은 사람의 위엄이 담겨있었다.차우빈이 먼저 식탁 앞에 앉았다. 안영자가 전전긍긍하며 말했다.“사모님 방금 나가셨어요.”차우빈도 뭐라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출근해야 하기에 낮에 집을 못
온하나가 씁쓸하게 웃었다.“엄마, 차우빈이 날 차버리고 내쫓을 때까지 기다려야 해? 2년 동안 내가 그 사람한테 뭐였는데? 그 사람 마음에 내가 있긴 있었어?”온하나는 짐을 예전에 쓰던 방에 두고 아침밥도 먹지 못한 채 부랴부랴 출근했다.나희경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분노를 애써 참았다. 지금 생각나는 거라곤 좋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온하나는 겨우 출근 시간에 맞춰 병원에 도착했다. 회진을 마친 다음에는 온 오전 환자를 봤다. 오늘따라 환자가 많아서 오후 1시가 다 돼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진료 동을 나온 그녀는 피곤한지 관자놀이를 어루만졌다. 식당에 도착했을 때 남은 반찬이 얼마 없었다. 다행히 조수연이 미리 밥을 챙겨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두 사람이 식사하는 중에 심명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를 확인한 온하나는 갑자기 밥맛이 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전화를 받았다.“사모님.”“하나야, 며칠 전에는 내가 말이 너무 심했어. 그런데 다 너랑 우빈이 위해서 하는 말인 거 알지? 둘이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너도 잘 알잖아. 만나기만 하면 얼굴을 붉히고. 그게 부부야? 원수지.”온하나는 입술을 깨물었다.‘원수니까 차우빈이 날 그렇게 괴롭히는 거겠죠.’온하나가 대답이 없자 심명희가 계속 설득했다.“우빈이 요즘 출장이 없으니까 얼른 이혼 절차 마무리하고 각자 편하게 살아.”“사모님 아들이 어떤지 몰라서 이러세요? 나한테 이혼 합의서에 사인하라고 할 때 그 사람 설득하라는 말은 없었어요.”“우빈이가 쉽게 사인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 온하나, 네가 이렇게 꿍꿍이가 많은 사람일 줄은 몰랐어. 이제 와서 밀당을 해? 잘 들어. 우빈이 아내는 지원이 하나야. 난 널 절대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아.”전에 사인하라고 할 때는 사인만 하면 이혼 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더니 이젠...온하나는 할 말이 없었다.두 사람의 통화는 기분만 상한 채 끝나고 말았다. 온하나는 더는 밥이 넘
“엄마, 엄마 카드에 있던 아빠 병원비가 왜 동결됐어요?”집 안 청소를 하던 나희경은 온하나의 말에 걸레도 던져 버리고 휴대폰을 열었다. 온하나에게 40만 원을 송금하려 했지만 은행 카드가 정지되었다는 메시지가 뜨자 나희경은 미쳐버렸다.“어떻게 된 거야, 카드를 도난당한 거야?”온하나가 짐을 싸서 돌아온 날 이미 카드에서 대부분의 돈을 이체했지만 아직 카드에는 몇백만 원이 남아있었다.그래도 자기 남편이고 온하나도 차우빈과 이혼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다지 매정하게 굴지 않았다.온하나는 나희경의 이런 속셈도 모른 채 부드럽게 달랬다.“엄마, 조급해하지 말고 은행에 가서 물어봐요. 난 병원 입원 병동에 가서 며칠 늦출 수 있는지 물어볼게요.”그녀가 막 병원에 돈을 냈는데 나희경의 전화가 걸려 왔다.“엄마, 무슨 일이에요?”“하나야, 은행에서 신고가 들어와서 아직 조사 중이라고 하는데 어떡해?”온하나의 마음에 서늘한 기운이 몰아쳤다. 누가 이유도 없이 엄마의 계좌를 신고하겠나.차우빈 말고는 소리 소문 없이 나희경의 통장을 동결할 수 있는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엄마, 일단 집에 가서 기다리세요. 제가 가서 알아볼게요.”온하나는 전화를 끊고 망할 남편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애인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애정행각을 벌이는 것도 모자라 뒤에서 그녀를 난처하게 만드는 게 사람이 할 짓인가.그 시각 막 신비 캐슬로 돌아온 차우빈은 점심 모임 때 술을 많이 마셔 속이 괴로웠다.온하나의 전화에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 여자가 드디어 남편을 떠올렸나 보다.전화벨이 몇 초간 울리더니 연결이 되고 술에 취한 차우빈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돌아와. 나 집에 있어.”상대를 찾지 못해 짜증이 나 있던 온하나는 곧바로 차를 몰고 신비 캐슬로 향했고 가정부가 그녀를 보고 담담하게 말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취하셨어요. 방금 끓인 해장국인데 갖고 가서 마시라고 하세요. 안 그러면 두통이 올 거예요.”차우빈은 덩치만 크지 쓸모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