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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온하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서야 천천히 마음을 진정했다.

“차우빈, 네가 왜 여기 있어? 어떻게 들어온 거야?”

차우빈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런 곳에 들어오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잠이나 자.”

“미쳤어? 어젯밤에 깨문 게 아프지 않은가 봐?”

차우빈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허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더는 온하나를 못살게 굴지 않고 잠을 자려 했다.

“차우빈, 제발 정신과 좀 가봐. 아프면 치료받고. 왜 날 이렇게 괴롭히는 건데?”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안방에 차우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해. 나 졸려.”

“자는 척하지 마, 차우빈.”

진짜로 피곤한 건지, 아니면 술 때문인지 차우빈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처럼 이내 잠이 들었다. 온하나가 아무리 밀고 때려도 전혀 깨질 않았다.

온하나는 차우빈 때문에 잠을 다 깨고 말았다. 어두운 불빛을 빌려 차우빈의 옆에 누워있는 자신을 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거실로 가서 과일칼 하나를 챙기더니 너무 추운 나머지 부들부들 떨면서 안방으로 들어왔다.

과일칼을 차우빈의 목에 가져다 댄 순간 차우빈이 그녀의 허리를 확 잡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수술칼은 잘 잡을 수 있어도 지금은 손이 떨려서 제대로 잡지 못했다. 두려워서 떠는 건지 추워서 떠는 건지 그녀도 알지 못했다. 결국 과일칼을 머리맡 서랍에 내려놓고 이불 안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온하나는 몇 시에 잠들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잠들기 전에 차우빈을 욕했던 것만 기억이 났다.

이튿날 아침 온하나가 깨어났을 때 거의 9시가 되었고 옆자리는 진작 텅 비어있었다.

씻으려고 일어났는데 화장실 세탁물 바구니에 남자 옷이 가득했고 세면대 위에 남성용품이 놓여있었다.

온하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서 살겠다는 거야, 뭐야? 내가 편히 사는 꼴을 못 보겠다는 거야, 아니면 하루라도 날 괴롭히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거야?’

차우빈은 식탁 앞에 앉아 메일을 처리하다가 온하나를 보고는 고개를 들었다.

“여기 너무 추워. 오늘 신비 캐슬로 들어와.”

“싫어. 이혼 합의서에는 언제 사인할 거야?”

그때 식탁 위에 놓인 온하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차우빈이 휴대전화를 힐끗거리다가 카톡 문자 알림인 걸 확인했다.

[올해는 너랑 같이 새해를 보낼 수 있어.]

그 순간 차우빈은 마음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고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었다.

“급하게 이혼하겠다는 이유가 이거야?”

온하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난 너랑 네 보배둥이가 잘되길 바라서 이혼하는 거라고.”

차우빈은 싸늘하게 웃으며 그녀를 흘겨보았다.

“넌 정말 내가 본 여자들 중에서 가장 매정하고 인정이 없는 여자야. 내 건 버려도 절대 남한테 주지 않아. 그러니까 네 뜻대로 되지 않을 거야.”

그러고는 옷을 챙기고 나가버렸다.

쾅...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진욱은 이미 밑에서 오랫동안 대기하고 있었다. 차우빈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고 화들짝 놀라더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파트 단지를 나가던 그때 차우빈은 송태훈이 꽃다발을 들고 경비원과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무래도 길을 묻는 듯했다.

애써 참고 있던 화가 갑자기 폭발했고 송태훈을 죽일 듯이 무섭게 노려보았다.

...

송태훈은 경비실에서 사인한 후 길을 물어 온하나의 집 앞에 도착했다.

노크 소리에 온하나는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차우빈이 다시 돌아온 줄 알고 싫은 기색으로 문을 열었는데 송태훈을 본 순간 온하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야? 며칠 못 봤다고 그새 잊은 건 아니지?”

송태훈의 장난에 온하나가 웃음을 지었다.

“여긴 어쩐 일로 왔어?”

“병원에 몇 번 찾아갔었는데 네가 요즘 아프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걱정돼서 와봤어.”

송태훈이 집 안을 힐끔거렸다.

“혹시 들어가면 안 되는 거야?”

온하나가 멋쩍게 웃었다.

“아니, 아니. 들어와.”

온하나는 꽃다발을 받고 거실로 안내했다.

“오늘 출근 안 해?”

송태훈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친구랑 법률 사무소 차려서 시간이 좀 자유로워. 늦게 가도 돼.”

온하나는 송태훈이 법을 전공했었다는 걸 떠올렸다. 졸업한 후에 괜찮은 법률 사무소에 출근하기도 했다.

“앞으로는 송 대표라고 불러야겠네.”

온하나가 웃으면서 농담했다.

“또 나 놀린다. 그나저나 몸은 좀 어때?”

온하나는 그에게 물 한잔을 건넸다.

“이미 다 나았어. 이틀 후부터 출근이야.”

“건강이 최우선이야.”

송태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나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이 시간에 누구지? 게다가 왜 이렇게 급해?’

현관문을 열어 경찰복 차림의 남녀를 본 순간 온하나는 그대로 넋이 나갔다.

“이 집 주인인가요?”

남자 경찰관이 온하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경찰관님, 무슨 일이시죠?”

온하나가 의문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경찰관이라는 소리에 거실에 있던 송태훈이 걸어 나왔다. 경찰은 송태훈이 나온 걸 보고 또 아래위로 훑었다.

“아, 어찌 된 거냐면 한 남자가 이 집에 사는 유부녀한테 몹쓸 짓을 하려 한다는 신고를 받아서요. 그런 일이 있었나요?”

온하나와 송태훈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그저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경찰관님. 저는 정훈 법률 사무소의 송태훈이라고 합니다. 온하나와는 동창이고요.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 괜찮나 해서 찾아온 겁니다. 아무래도 무슨 오해가 있는 듯하네요.”

경찰은 집 안으로 들어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테이블 위에 꽃다발이 놓인 것 말고는 이상한 점이 전혀 없었다.

여자 경찰이 온하나에게 물었다.

“진짜 동창 맞나요?”

온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그러자 남자 경찰이 마른기침을 두어 번 했다.

“유부녀면 남편이 집에 없을 때 조심해야죠. 아무래도 이웃이 걱정돼서 신고한 모양입니다. 오늘 이 상황을 계기로 앞으로 좀 조심하세요. 이웃들이 오해하지 않게.”

경찰이 나갈 때까지도 송태훈은 ‘유부녀’라는 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온하나는 경찰을 배웅한 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송태훈을 보면서 민망해했다.

“이런 오해를 받게 해서 미안해.”

송태훈이 정신을 차리고 다급하게 물었다.

“온하나, 너 결혼했어?”

온하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얘기하지 않은 건 송태훈이 그녀에게 다른 생각이 있다는 걸 몰라서였다. 그런데 벌써 여러 번이나 마음을 표현했는데 성인이 돼서 그 마음을 모를 리 있겠는가?

‘차라리 잘됐어. 이젠 태훈이도 알았으니까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네.’

“언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3년 전에 했고 지금 이혼 준비 중이야. 결혼을 하도 급하게 한 바람에...”

그때 차우빈과 결혼한다는 사실을 온하나조차도 믿어지지 않았는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는 이 결혼에 대해 기대 같은 걸 한 적이 없었다.

“그때 상황이 좀 복잡해서 친구들한테 얘기하지 않았어.”

송태훈은 어안이 벙벙했다. 결혼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았는데 곧 이혼할 거라고 했다.

온하나가 웃으면서 말했다.

“많이 놀랐지? 그동안 이 동창을 잊지 않고 챙겨줘서 고마워. 오늘 이런 오해를 받게 해서 정말 미안해. 나중에 내가 밥 한번 살게.”

온하나는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동창을 챙겨줘서 고맙다고 했다. 송태훈도 그녀의 완곡한 거절이라는 걸 알아들었다.

송태훈이 히죽 웃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온하나, 난 항상 다른 애들보다 널 더 챙겨줬잖아.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날 찾아와도 돼.”

아직은 이혼하기 전이기에 가깝게 지내서는 안 된다는 걸 송태훈도 알고 있었다.

“고마워. 밥 같이 먹는 거 말고는 다른 일로 널 찾아가면 안 되지.”

송태훈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하긴. 날 찾는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니까. 오늘은 이만 가볼게. 이웃이 널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야? 여기 계속 있으면 이따가 날 때리러 오겠어.”

온하나는 저도 모르게 제 발 저렸다. 이 아파트에 아는 이웃이 한 명도 없었다. 아침 일찍 출근했다가 늦게 퇴근하는 바람에 이웃과 친해질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이사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아서 그녀가 결혼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송태훈이 올라온 시간으로 추측해볼 때 화를 내면서 나간 차우빈이 송태훈을 봤을 가능성이 컸다.

제정신이 아닌 차우빈이라면 신고 같은 건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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