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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차우빈은 온하나를 싫어하기 시작한 후로 매번 관계를 가진 다음에는 돈을 줬다. 게다가 액수도 꽤 커서 생활비로 쓰기에도 아주 넉넉했다.

온하나는 가정 형편이 별로 좋지 않았다. 3년 전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식물인간이 되었고 오빠는 뇌성 마비에 걸렸다. 두 사람 모두 어머니의 손길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무거운 부담은 고스란히 온하나가 짊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그녀는 고작 의대 대학원생일 뿐이었다.

온하나는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 병원에서 병원비를 재촉하던 그날 밤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엄청난 병원비에 온하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지만 아버지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여태껏 아버지의 사랑을 끊임없이 받았으니까.

그녀가 병원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절망스럽게 울고 있을 때 차우빈이 나타났다. 온하나는 아직도 그 장면을 잊지 못했다.

188cm 되는 큰 키의 남자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마치 하늘에서 보내준 구세주 같았다.

“울지 마, 온하나.”

간단한 한마디였지만 엄청난 마력을 지녔다.

온하나는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차우빈의 손을 잡고 그의 차에 올라탔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대학교도 같은 학교를 다녔다.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이긴 했지만 별로 연락이 없었다. 그런데 이럴 때 차우빈을 만날 줄은 몰랐다.

차우빈은 온하나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조건은 그와의 결혼이었다. 차우빈의 가족들이 계속 정략결혼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결혼 후 두 사람은 의외로 성격이 잘 맞았고 서로 호감도 생겨서 한동안은 여느 신혼부부 못지않게 깨가 쏟아졌었다.

차우빈은 온하나를 예뻐했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가장 잘하는 의사를 알아봐 주었으며 오빠를 요양병원에 보냈다. 하여 온하나는 차우빈이 자신을 매우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러다가 나중에 갑자기 지금 같은 관계가 돼버렸다.

그동안의 굴욕들은 온하나에게 그녀는 그저 차우빈의 어장 속 물고기라는 걸 말해주었다.

과거 생각에 온하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창가 앞에 서서 차가운 아침을 내다보았다. 이젠 마음이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상처를 받곤 했다.

‘차우빈이 용서하지 않으면 수연이 어떡하지? 병원에선 수연이가 사과하고 환자 가족이 용서해야 복직할 수 있다고 했어. 수연이는 절대 차우빈한테 사과하지 않을 텐데.’

온하나의 자존심도 이미 짓밟힌 마당에 조수연의 날개마저 꺾어선 안 되었다.

온하나는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시어머니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어머님 말씀대로 할게요.]

...

이른 아침 병원에 온 조수연은 온하나의 모습이 보이질 않자 재빨리 휴대전화를 꺼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온하나, 미쳤어? 너 적어도 3일은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데 이틀도 안 돼서 자꾸 다니면 어떡해.”

온하나는 평소처럼 차분하게 그녀를 달랬다.

“수연아, 나 병원에 곧 도착해.”

몇 분 후, 온하나가 병원에 도착했다. 조수연은 다급하게 달려가 온하나를 부축했다.

“나 때문에 차우빈 찾아간 거 맞지? 그 나쁜 자식은 네가 먼저 가서 사정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오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라고. 내가 병원에서 잘리더라도 절대 찾아가서 부탁하지 마. 겨우 빠져나왔는데 나 때문에 다시 들어갈 수는 없잖아.”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우리가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게 공부해서 의사가 됐는데. 나 때문에 너한테까지 피해를 줄 수는 없어.”

온하나가 병실 침대에 눕자마자 심명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오후에 본가로 오라고 했다. 무슨 일인지는 아주 명확했다. 그러나 조수연이 있는 한 오늘 밖에 나갈 수 없기에 내일 오후 퇴원 후에 가겠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왜 갑자기 오라는 건데?”

“차우빈이랑 이혼하기로 했어. 와서 이혼 합의서에 사인하라는 거겠지.”

온하나가 덤덤하게 웃었다.

“하나야...”

조수연은 온하나의 마음이 괴롭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온하나는 그녀의 팔을 툭툭 쳤다.

“위로할 필요 없어. 내가 바보도 아니고. 남자 하나 때문에 내 남은 인생까지 거는 건 가치가 없다는 거 알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조수연은 온하나가 이 결정을 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고 있었다.

...

이튿날 오후 3시, 온하나는 직접 운전하여 차씨 본가로 향했다.

별장이 하도 웅장해서 위압감이 넘쳤다. 온하나는 이곳이 낯설기만 했다. 지금까지 딱 세 번 와봤으니까.

처음에는 차우빈과 혼인신고 한 후에 같이 왔었다. 두 사람이 혼인신고 했다는 소리에 차씨 가문 어르신은 화가 난 나머지 지팡이로 차우빈의 허벅지를 힘껏 내리쳤다. 첫인사는 그렇게 서로 얼굴을 붉히며 끝났다.

두 번째, 그러니까 지난번에 왔을 때는 차우빈과 헤어지라는 말을 하려고 심명희가 부른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였다.

결혼 3년 동안에 시댁에 총 세 번 왔다. 그녀보다 더 환영받지 못하는 며느리가 있을까?

온하나는 거실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렸다. 귀티가 흐르는 심명희가 위층에서 내려왔는데 손에 얇은 서류 몇 장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온하나를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힐끗거렸고 싫은 티를 팍팍 냈다.

“그래도 제 주제는 아네. 너한테 약속했던 거 다 적었으니까 한번 확인해 봐. 3년 동안 너희 가족을 먹여 살린 것 외에 이렇게도 좋은 보상을 받다니, 넌 전혀 밑질 게 없어.”

온하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확인할 필요 없어요. 어머님 믿어요.”

그러고는 심명희가 건네는 펜과 서류를 받아 맨 마지막 장에 사인했다. 온하나가 흔쾌히 사인하자 심명희도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사실 너도 괜찮은 애야. 그런데 우빈이 짝은 아니야.”

온하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덤덤하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우빈이만 사인하면 언제든지 이혼 절차 마무리할 수 있어요. 그런데 부탁할 일이 하나 더 있어요.”

“뭔데? 여기서 뭐 더 뜯어내려고?”

온하나를 빤히 쳐다보는 심명희의 얼굴에 싫은 기색이 더욱 짙어졌다.

“차우빈이 어제 제 친구를 컴플레인 건 바람에 정직당했거든요. 어머님도 아시잖아요. 의학을 공부하는 게 얼마나 힘들고 병원에 남으려면 남들보다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는지. 지금... 부탁드릴 사람이 어머님밖에 없어요.”

온하나의 솔직한 말투에 심명희는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심명희도 아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전에는 온하나를 아주 끔찍이도 아끼더니 몇 달째 집도 들어가지 않을 줄은 몰랐다.

“그건 내가 원장님한테 잘 얘기할게. 그런데 우빈이랑 이혼한 거 당분간은 우빈이 외할머니한테 비밀로 해. 얘기했다간 빈털터리로 쫓겨나는 수가 있어.”

온하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술을 깨문 채 이혼 합의서를 심명희에게 건넸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양심은 있어요. 우빈이더러 최대한 빨리 사인하라고 해주세요.”

온하나가 차씨 본가를 떠나 집에 도착하자마자 조수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하나야, 방금 병원에서 연락 왔는데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래. 이번 주는 휴가로 처리하겠대.”

심명희가 이렇게 빨리 해결했을 줄은 온하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집으로 오는 사이에 바로 해결해주었다.

그나저나 조수연이 복직할 수 있어서 드디어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잘됐다. 난 며칠 쉬어야 해서 월요일에 출근하지 못할 수 있어. 혼자라도 아침 꼭 사 먹어.”

“알았어. 주말에 네 생일이니까 같이 보내자. 요 며칠 푹 쉬고 있어. 건강이 우선이라는 거 명심해.”

조수연은 일이 이렇게 빨리 해결된 건 차씨 가문 사람이 병원에 말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차씨 가문에서 병원에 많은 투자를 했기에 원장도 차우빈 앞에서는 예의를 차려야 했다.

차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차우빈의 심기를 건드리겠는가?

그리고 온하나의 성격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조수연이 하루라도 복직하지 않으면 온하나는 절대 마음을 놓지 못했다.

‘하나가 오늘 본가로 가서 시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해줬나 보네.’

조수연은 온하나의 아픔을 알고 있었기에 이럴 때일수록 묻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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