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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전화를 끊은 후 온하나는 소파에 기댄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혼하고 만나지 않는다면 우빈이는 나라는 사람을 아주 빨리 잊겠지.’

고등학교 3년, 대학교 7년, 10년 동안 차우빈은 온하나를 신경 쓴 적이 없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해도 그의 시선은 그녀에게 머무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밤에 마침 서로에게 맞는 타이밍에 나타났을 뿐이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차우빈은 빠져나갈 준비를 마쳤지만 온하나는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결국에는 뭐든지 다 원했던 지나친 욕심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집 앞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듣고서야 누가 복도의 센서 등을 수리하는 중이라는 걸 알았다.

한 아주머니가 감탄했다.

“지금 젊은이들은 참 괜찮아요. 직접 자기 돈으로 등을 수리하다니. 관리사무소에서는 그냥 돈 받을 궁리나 하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수리해주지 않았어요.”

“맞아요. 그 젊은이도 관리사무소에서 계속 가만히 있으니까 우리한테 연락한 거예요.”

온하나는 덤덤하게 웃어 보였다. 센서 등을 수리하면 야근하고 돌아와도 복도가 어두워서 무서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어두운 것을 무서워했다. 특히 어두운 데다가 조용하기까지 하면 더 무서워서 잠을 잘 때도 스탠드를 켜놓고 자곤 했다. 처음에 차우빈과 함께했을 때 차우빈은 그녀를 놀린 적도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한 후 차우빈 덕에 온하나는 점점 어둠을 무서워하지 않다가 최근에 다시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온하나는 베란다에서 빨래를 걷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다른 집의 불빛이 참 따뜻해 보였다.

‘다들 저 불빛처럼 따뜻하고 화목하게 살고 있을까?’

그러다가 시선을 아래로 늘어뜨렸는데 누군가 작은 나무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 내의 불빛이 어두워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실루엣이 어딘가 익숙했다.

그런데 몇 초 후 남자는 자리를 떠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온하나는 자신을 비웃었다.

‘온하나, 뭔 생각 하는 거야, 너.’

그날 저녁 온하나는 간만에 꿀잠을 잤다. 내려놓기로 마음먹으니 마음에도 고요함이 찾아왔다.

...

온하나는 3일 동안 집에서 쉬면서 매일 차우빈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런데 사흘 내내 이상하리만큼 조용했고 차우빈은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 연락도 없었다.

심명희가 차우빈의 사인을 받아냈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어쨌거나 두 모자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고 서로 만나도 무뚝뚝하기만 했으니까.

머릿속에 차우빈의 까칠했던 모습이 스쳤다. 차우빈은 누가 그의 뜻을 거역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 생각에 온하나는 걱정이 밀려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TV에 마침 인터뷰 하나가 나왔다. 그리고 인터뷰 상대가 바로 며칠 동안 사라졌던 차우빈이었다.

요 며칠 왜 이렇게 조용한가 했더니 경매에 참석하러 성해시로 갔던 것이었다.

도해 그룹 대표인 그는 늘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고 어딜 가나 항상 주목을 받았다. 게다가 경매에서 거금까지 쓰니 더욱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차우빈은 이번 경매에서 거금을 들여 비취 목걸이를 낙찰받았다. 투명하고 맑은 녹색이 별처럼 반짝였다.

“차우빈 씨, 거금을 들여 이 목걸이를 낙찰받았는데 혹시 다른 사람한테 선물할 건가요?”

기자의 질문에 차우빈은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씩 올렸다.

“아주 중요한 사람한테 주려고요. 내일이 그 사람 생일이거든요.”

차우빈의 얼굴에 나타난 미소가 유난히 눈이 부신 것 같았다.

인터뷰를 본 온하나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제 인터뷰인지라 차우빈이 얘기한 내일이 바로 오늘이었고 오늘이 온하나의 생일이었다. 그리고 목걸이도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비취 목걸이였다.

온하나는 옥 중에서도 비취를 가장 좋아했다. 차우빈의 태도에 온하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돼.’

이 소식은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온하나는 온 오후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그런데 저녁이 됐는데도 차우빈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온하나가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 조수연은 이미 귀여운 케이크까지 준비해놓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야, 빨리 와. 일단 소원부터 빌어.”

조수연은 초에 불을 붙인 후 소원을 빌라고 했다.

조금 창피하긴 했지만 온하나는 지금까지 자기만의 생일을 보낸 적이 없었다.

온하나의 오빠 온서후는 그녀보다 세 살 많았고 생일은 그녀 생일 이튿날이었다. 어머니가 둘의 생일을 함께 보내자고 얘기한 후로 온하나는 혼자서 생일을 축하받은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그녀의 생일날에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초코파이를 몰래 사다주긴 했어도 생일 축하와 케이크를 받지 못한 아쉬움은 메꿀 수가 없었다.

그렇게 차우빈과 결혼하고 나서야 누군가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알게 되었다.

케이크도 자신이 원하는 입맛대로 고를 수 있었고 생일 선물도 마음껏 원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하던 일이었는데.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케이크 썰어야지.”

온하나가 넋을 놓고 있자 조수연이 위로했다.

“오늘은 생일이니까 고민이나 걱정 같은 건 오늘 지난 후에 다시 생각해.”

온하나는 몰래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웃었다.

“걱정이 뭐가 있겠어. 그냥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그러지. 또 한 살 먹었잖아.”

“우리 하나는 영원히 18살처럼 예쁠 거야.”

조수연이 말했다.

“그나저나 넌 장미처럼 예쁘고 손유리도 백합처럼 예쁜데 난 왜 다육식물이 됐을까?”

손유리는 두 사람의 대학교 룸메이트였는데 방송학과를 전공했고 집안 환경도 꽤 좋았다. 졸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가서 결혼하여 가정주부로 살고 있었고 남편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고 들었다.

조수연의 말에 온하나가 웃음을 터트리더니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위로했다.

“다육식물이 얼마나 예뻐. 난 다육식물 좋아해. 통통하니 귀엽잖아.”

그러자 조수연이 입을 삐죽거리면서 웃었다.

두 사람이 한창 식사를 하고 있는데 조수연이 갑자기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쾅 하고 내려놓았다.

화들짝 놀란 온하나가 물었다.

“왜 갑자기 호들갑이야?”

조수연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걸 알아챘다. 오늘은 온하나의 생일이기에 절대 속상하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어떤 영상 봤는데 너무 화가 나서. 역시 밥 먹을 때는 휴대전화 보면 안 돼. 밥맛 떨어져.”

그때 레스토랑 창밖에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두 사람이 앉은 룸에서 불꽃놀이가 아주 잘 보였다.

하늘에 ‘생일 축하’라는 글씨가 알록달록하게 나타났다.

조수연이 창가 앞으로 다가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생일을 이렇게 굉장하게 보내는 거야? 하나야, 너랑 같은 생일인 사람을 만난 것도 인연이야.”

“하루에 태어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따지면 인연 있는 사람이 전 세계에 다 널렸지.”

온하나는 덤덤하게 웃으면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X발,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조금 전까지도 참던 조수연은 더는 참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누가 널 건드렸어?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래?”

온하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조수연이 씩씩거리면서 말했다.

“SNS에서 자랑질하는 것도 참았더니 이젠 우리 앞에 나타나기까지 했어. 차우빈 나쁜 자식, 좋아하는 여자랑 생일을 보내겠으면 다른 데 갈 것이지 하필 여길 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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