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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차우빈은 혐오 가득한 얼굴로 동문서답했다.

“가서 씻어. 몸에 알코올 냄새가 진동해.”

“몸에 상처가 있어서 샤워 못 해.”

온하나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

‘왜 내가 혼자 감당해야 하는데?’

차우빈은 그녀를 덤덤하게 힐끗거렸다. 그러다가 긴 눈매에 의미심장함이 스쳤다.

온하나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그의 앞에서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지금 날 유혹하는 거야? 오늘은 술을 마시지 않아서 널 터치 안 해.”

차우빈은 온하나를 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상처가 되는 말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차우빈을 싸늘하게 쳐다보면서 옷을 벗었다. 얼굴에 부끄럽거나 불안한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고 오히려 확고함과 결연함이 묻어있었다.

마지막으로 속옷만 남았을 때 온하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차우빈, 두 눈 똑바로 뜨고 봐봐. 이거 보여?”

온하나는 하얀 피부를 드러내고 차우빈의 앞에 서 있었다. 피부가 하얘서 멍 자국들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차우빈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오늘 꾀병은 아니었나 보네.”

“수연이 내버려 둬. 수연이는 나한테 진심으로 잘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야.”

유일이라는 말에 차우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확 어두워졌다.

“지금 당장 눈 감고 자. 너도 알잖아. 내가 기분이 좋을 때면 다 용서하는데 기분이 좋지 않으면...”

온하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차우빈은 말한 대로 하는 성격이기에 무턱대고 맞서봤자 좋을 게 없었다.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옷들을 휙 차버리고는 잠옷을 찾으러 옷방으로 들어갔다.

차우빈은 그녀의 매혹적인 몸매 라인을 보면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몇 달 못 본 사이에 성격이 더러워졌다, 너?”

“내가 어찌 감히 그러겠어. 발에 밟혀서 거슬리니까 그런 거지. 못 보겠으면 다른 방에 가서 자.”

온하나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집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날 내쫓아?”

차우빈은 옷방 문 앞까지 따라와서는 옷을 찾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길고 곧은 두 다리, 그리고 잘록한 허리가 눈에 들어왔다. 차우빈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의 촉감이 떠올랐고 허리부터 엉덩이의 라인이 아주 매혹적으로 보였다.

온하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말했다.

“얹혀사는 주제에 주인도 없는 집에 어떻게 혼자 있겠어. 안 그래?”

“이 집 명의에 네 이름은 없어?”

차우빈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온하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 집은 두 사람의 신혼집이었다. 결혼할 때 차우빈은 모든 재산을 전부 두 사람의 명의로 했다.

하여 이 신혼집도 온하나는 일전 한 푼 보태지 않았지만 그녀의 명의도 있었다.

옛날 생각에 온하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잠옷을 입은 후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차우빈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건 고맙지만 사람은 그래도 주제를 알아야지. 자기 것이 아닌 것은 욕심내선 안 돼.”

차우빈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잠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이불을 덮더니 차가운 한마디를 던졌다.

“잠이나 자. 안 자면 나도 어찌할지 몰라.”

차우빈이 자리에 눕자 온하나가 다급하게 물었다.

“차우빈, 대체 어떻게 해야 수연이를 놔둘 건데?”

돌아오는 건 이 무뚝뚝한 한마디였다.

“네가 하는 거 봐서.”

예전에는 그저 차갑고 까칠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야 매정하고 무자비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온하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면서 생각했다.

‘수연이가 나 때문에 피해를 보게 해선 안 돼.’

두 사람은 한 침대에 양쪽으로 나란히 누웠다. 차우빈은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돌아누우면서 그녀의 허리를 어루만졌다.

이건 두 사람이 지내는 방식이자 차우빈이 정한 규정이었다. 차우빈은 온하나를 터치하지 않아도 되지만 온하나는 절대 외박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온하나는 가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은 다 옆에 여자를 두고 마음속으로는 다른 여자를 생각하나?’

한 달 반 전 차우빈의 어머니 심명희가 처음으로 온하나를 찾아왔을 때 목적이 아주 명확했다. 차우빈에게 좋아하는 여자가 따로 생겼다면서 이혼 합의서에 사인하라고 했다. 다시 말해 온하나가 눈치 없이 계속 매달린다는 뜻이었다.

차우빈도 그녀를 싫어한다는 생각에 온하나는 그 이튿날에 바로 병원 근처의 아파트를 맡고 아무 말 없이 신비 캐슬을 나왔다.

모임에서 당한 괴롭힘, 어젯밤의 고통, 그리고 조수연의 정직까지. 온하나는 이 모든 게 다 차우빈의 복수이고 벌이라 생각했다.

온하나가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나가면서 차우빈의 뜻을 거역했기 때문에 알아서 집에 다시 들어오라고 이렇게 괴롭히는 것이라고 여겼다.

온하나는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렸고 결심이 더욱 확고해졌다.

‘절대 돌아보지 않을 거야.’

차우빈이 이때 들어왔다는 건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혼 얘기를 했을 가능성이 컸다.

차우빈은 양지원을 끔찍이도 아꼈고 또 두 집안이 정략 결혼하면 회사에도 좋은 점이 많았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온하나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그의 싸늘한 숨결에 섞인 담배 냄새가 고스란히 전해졌고 마치 그처럼 까칠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에 뒤척이다가 저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녀는 꿈속에서 자꾸 깊은 곳으로 빠지는 것만 같았다. 절망과 두려움에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면서 뭐라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어둠 속에서 누군가 온하나의 손목을 잡았고 온하나는 본능적으로 그 사람을 잡았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녀의 손목을 부러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꽉 잡았다. 밀려오는 고통에 온하나는 얼굴을 찌푸렸고 귓가에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나, 죽고 싶어?”

하도 아파서 온하나는 정신을 점점 차렸다. 멍한 얼굴로 차우빈을 쳐다보았는데 깊은 두 눈이 차갑기 그지없었고 얼굴도 매우 어두웠다.

“차우빈, 미쳤어? 아프다고.”

온하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면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만약 기억이 맞다면 차우빈이 꿈을 꾸고 있는 그녀를 깨운 게 네 번째였고 깨운 뒤에는 아주 무섭게 노려보곤 했다.

“내가 미쳤다고? 온하나, 네가 바람기가 많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일편단심이라고 해야 할까?”

차우빈의 질문에 온하나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차우빈은 그녀를 무섭게 째려보다가 한참 후 갑자기 씩 웃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일어나 침대 머리맡의 휴대전화를 들었다.

“다른 뜻은 없고 그냥 그저께 저녁에 한 거 아직 입금하지 않았다고.”

말을 마친 그는 온하나의 안색이 창백하든 어떻든 거들떠보지도 않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바지를 입는 모습이 오늘따라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검은 셔츠의 맨 위쪽 단추 두 개를 잠그지 않았는데 가슴팍의 할퀸 자국이 보이면서 남성미가 더욱 넘쳤다.

“나쁜 놈, 네가 이러고도 인간이야?”

입술을 깨문 온하나의 두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차우빈은 다시 평소 같은 도도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넌 정말 별로야.”

그러고는 휙 돌아섰다. 곧게 선 뒷모습에 온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 자동차 엔진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온하나는 자신을 비웃었다.

‘날 못살게 굴 생각인 것 같던데 쉽게 놓아줄 리가 있겠어?’

그런데 휴대전화에 도착한 입금 문자를 본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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