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우빈은 혐오 가득한 얼굴로 동문서답했다.“가서 씻어. 몸에 알코올 냄새가 진동해.”“몸에 상처가 있어서 샤워 못 해.”온하나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왜 내가 혼자 감당해야 하는데?’차우빈은 그녀를 덤덤하게 힐끗거렸다. 그러다가 긴 눈매에 의미심장함이 스쳤다.온하나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그의 앞에서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지금 날 유혹하는 거야? 오늘은 술을 마시지 않아서 널 터치 안 해.”차우빈은 온하나를 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상처가 되는 말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차우빈을 싸늘하게 쳐다보면서 옷을 벗었다. 얼굴에 부끄럽거나 불안한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고 오히려 확고함과 결연함이 묻어있었다.마지막으로 속옷만 남았을 때 온하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차우빈, 두 눈 똑바로 뜨고 봐봐. 이거 보여?”온하나는 하얀 피부를 드러내고 차우빈의 앞에 서 있었다. 피부가 하얘서 멍 자국들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차우빈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오늘 꾀병은 아니었나 보네.”“수연이 내버려 둬. 수연이는 나한테 진심으로 잘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야.”유일이라는 말에 차우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확 어두워졌다.“지금 당장 눈 감고 자. 너도 알잖아. 내가 기분이 좋을 때면 다 용서하는데 기분이 좋지 않으면...”온하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차우빈은 말한 대로 하는 성격이기에 무턱대고 맞서봤자 좋을 게 없었다.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옷들을 휙 차버리고는 잠옷을 찾으러 옷방으로 들어갔다.차우빈은 그녀의 매혹적인 몸매 라인을 보면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몇 달 못 본 사이에 성격이 더러워졌다, 너?”“내가 어찌 감히 그러겠어. 발에 밟혀서 거슬리니까 그런 거지. 못 보겠으면 다른 방에 가서 자.”온하나가 무덤덤하게 말했다.“집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날 내쫓아?”차우빈은 옷방 문 앞까지 따라와서는 옷을 찾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차우빈은 온하나를 싫어하기 시작한 후로 매번 관계를 가진 다음에는 돈을 줬다. 게다가 액수도 꽤 커서 생활비로 쓰기에도 아주 넉넉했다.온하나는 가정 형편이 별로 좋지 않았다. 3년 전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식물인간이 되었고 오빠는 뇌성 마비에 걸렸다. 두 사람 모두 어머니의 손길이 절실하게 필요했다.무거운 부담은 고스란히 온하나가 짊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그녀는 고작 의대 대학원생일 뿐이었다.온하나는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 병원에서 병원비를 재촉하던 그날 밤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엄청난 병원비에 온하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지만 아버지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여태껏 아버지의 사랑을 끊임없이 받았으니까.그녀가 병원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절망스럽게 울고 있을 때 차우빈이 나타났다. 온하나는 아직도 그 장면을 잊지 못했다.188cm 되는 큰 키의 남자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마치 하늘에서 보내준 구세주 같았다.“울지 마, 온하나.”간단한 한마디였지만 엄청난 마력을 지녔다.온하나는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차우빈의 손을 잡고 그의 차에 올라탔다.두 사람은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대학교도 같은 학교를 다녔다.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이긴 했지만 별로 연락이 없었다. 그런데 이럴 때 차우빈을 만날 줄은 몰랐다.차우빈은 온하나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조건은 그와의 결혼이었다. 차우빈의 가족들이 계속 정략결혼을 원했기 때문이었다.결혼 후 두 사람은 의외로 성격이 잘 맞았고 서로 호감도 생겨서 한동안은 여느 신혼부부 못지않게 깨가 쏟아졌었다.차우빈은 온하나를 예뻐했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가장 잘하는 의사를 알아봐 주었으며 오빠를 요양병원에 보냈다. 하여 온하나는 차우빈이 자신을 매우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러다가 나중에 갑자기 지금 같은 관계가 돼버렸다.그동안의 굴욕들은 온하나에게 그녀는 그저 차우빈의 어장 속 물고기라는 걸 말해주었다.과거 생각에 온하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녀는 창가 앞에
전화를 끊은 후 온하나는 소파에 기댄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이혼하고 만나지 않는다면 우빈이는 나라는 사람을 아주 빨리 잊겠지.’고등학교 3년, 대학교 7년, 10년 동안 차우빈은 온하나를 신경 쓴 적이 없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해도 그의 시선은 그녀에게 머무르지 않았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밤에 마침 서로에게 맞는 타이밍에 나타났을 뿐이었다.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차우빈은 빠져나갈 준비를 마쳤지만 온하나는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결국에는 뭐든지 다 원했던 지나친 욕심 때문이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집 앞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듣고서야 누가 복도의 센서 등을 수리하는 중이라는 걸 알았다.한 아주머니가 감탄했다.“지금 젊은이들은 참 괜찮아요. 직접 자기 돈으로 등을 수리하다니. 관리사무소에서는 그냥 돈 받을 궁리나 하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수리해주지 않았어요.”“맞아요. 그 젊은이도 관리사무소에서 계속 가만히 있으니까 우리한테 연락한 거예요.”온하나는 덤덤하게 웃어 보였다. 센서 등을 수리하면 야근하고 돌아와도 복도가 어두워서 무서울 일은 없을 것이다.그녀는 어릴 적부터 어두운 것을 무서워했다. 특히 어두운 데다가 조용하기까지 하면 더 무서워서 잠을 잘 때도 스탠드를 켜놓고 자곤 했다. 처음에 차우빈과 함께했을 때 차우빈은 그녀를 놀린 적도 있었다.두 사람이 함께한 후 차우빈 덕에 온하나는 점점 어둠을 무서워하지 않다가 최근에 다시 무서워하기 시작했다.저녁 식사를 마친 온하나는 베란다에서 빨래를 걷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다른 집의 불빛이 참 따뜻해 보였다.‘다들 저 불빛처럼 따뜻하고 화목하게 살고 있을까?’그러다가 시선을 아래로 늘어뜨렸는데 누군가 작은 나무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아파트 단지 내의 불빛이 어두워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실루엣이 어딘가 익숙했다.그런데 몇 초 후 남자는 자리를 떠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온하나는 자신을 비웃었다.‘온하나, 뭔 생각 하는 거야,
조수연의 말에 온하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오후에 TV에서 봤던 차우빈이 눈앞에 나타났고 옆에는 행복한 얼굴의 양지원이 서 있었다.그녀가 목에 하고 있는 목걸이가 불꽃과 가로등에 비춰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양지원은 집안 형편이 좋았다. 새아버지가 상장 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어머니 도기영은 한때 잘나가던 여배우였다.그리고 도기영과 심명희는 친구 사이였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양지원과 차우빈이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나 마찬가지였다. 단지 중간에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을 뿐.양지원은 연예계에서도 나름 이름이 있었고 SNS에 행복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곤 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하는 자랑을 온하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봐왔다.그때 차우빈의 시선이 온하나에게 닿았다.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고 불안함과 미안한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갑자기 마음이 서늘해진 온하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었다가 양지원의 SNS에 들어가 보았다.양지원이 올린 사진과 글을 본 순간 온하나는 멈칫하더니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앞으로 남은 인생은 오빠와 함께!]한 글자 한 글자가 온하나의 심장을 쿡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꽉 쥐었지만 손이 여전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그 중요한 사람이 온하나가 아니라 양지원이었던 것이었다. 단지 그녀의 생일이 양지원과 같은 날일 뿐이었다.최고급 비취 목걸이가 불빛에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였고 신비로우면서도 귀티가 흘렀다. 그리고 그 목걸이는 지금 양지원이 목에 걸려있었다.차우빈은 양지원을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그는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양지원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인정했고 양지원도 처음으로 차우빈을 공개했다. 누가 봐도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은 커플이었다.“허허, 중요한 사람. 내가 차우빈한테 중요한 사람일 리가 없지. 난 그냥 장식품이고 노리개일 뿐이야.”온하나는 자신을 비웃었다.온 오후 기다렸지만 목걸이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고 결국에는 현실에 마음
온하나가 얼굴을 찌푸렸다.“차우빈,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싫어하는 여자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한테 상처 주고 싶어?”차우빈은 담배에 불을 붙인 후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남편한테 다른 여자랑 결혼하라고 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야.”그는 담배를 길게 빨아들였다가 다시 뱉었다. 담배 연기가 순식간에 자욱해졌다. 얼핏 보기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지만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지면서 참으로 살벌했다.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을 때면 각진 얼굴이 더욱 무섭게 느껴지는데 지금은 오죽하겠는가?고집불통인 그의 모습에 온하나가 말했다.“할 얘기 없으면 그만 나가. 그리고 이혼 합의서에 이미 사인했으니까 차 대표도 최대한 빨리 사인해.”그러고는 곧장 안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발걸음을 옮기자마자 차우빈이 손목을 꽉 잡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쓰읍... 이거 놔, 차우빈. 계속 이러면 신고할 거야.”차우빈은 담배를 힘껏 빨아들이고는 온하나를 품에 확 잡아당겼다. 옅은 담배 연기가 온하나의 얼굴을 스쳤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면서 더 세게 끌어안았다.‘오늘 내 생일을 까먹은 건 그렇다 쳐도 또 날 모욕하려고?’온하나는 터져 나오는 억울함과 분노를 더는 참을 수가 없어 결국 차우빈의 뺨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잘생긴 이목구비가 잔뜩 일그러졌고 하얀 피부에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났다.“온하나, 죽고 싶어?”기안시에서 차우빈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반박 한마디를 하더라도 망하진 않을지 신중하게 고려해야 했다.온하나는 차우빈의 성난 얼굴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차우빈, 오늘부터 난 두려울 것도 없고 눈치 볼 것도 없어.”그녀는 발끝을 들어 그의 얼굴에 가까이했다.“차 대표, 정신과에 가보는 게 어때? 날 못살게 굴면서 이혼하지 않겠다고 하는 게 정신 분열증일까 봐 걱정돼서 그래. 그러다가 자해라도 하면 큰일이야.”그러고는 차우빈의 목을 확 깨물었다. 차우빈은 이를
온하나는 몇 초 동안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사모님.”“별빛 카페야. 이쪽으로 와.”명령하는 듯한 말투였고 온하나에게 질문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온하나는 이미 끊겨버린 전화를 보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차우빈이 이혼 합의서에 사인했고 가지러 오라는 뜻인 거 같았다.어제저녁에 차우빈의 체면을 깎아버렸다. 여자에게 따귀를 맞았는데 어찌 참을 수가 있겠는가?만약 평소 그에게 여자를 폭행하는 버릇이 있었더라면 어제저녁에 아마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30분 후, 온하나가 카페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심명희와 양지원이 웃으면서 신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이토록 자애로운 심명희의 모습을 온하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랐다.두 사람이 금방 결혼하여 차우빈이 온하나를 아낄 때도 심명희는 그녀를 탐탁지 않아 했다.심명희가 양지원을 대하는 태도를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그냥 야박한 사람이라 생각했을 것이다.온하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다가갔다. 예쁨을 받진 못해도 굽신거리거나 비굴하지 않았다.“사모님.”온하나는 호칭도 바꿔서 인사했다. 이혼 합의서에 이름을 사인한 순간부터 심명희와는 남이라 생각하고 선을 그었다.양지원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하나 씨랑 약속 있을 줄은 몰랐어요.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심명희는 양지원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목에 건 목걸이를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괜찮아. 네가 남도 아닌데. 이모랑 커피 마셔줘서 이모는 너무 좋아.”그러더니 갑자기 온하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정하던 미소와 자애롭던 모습이 눈 깜짝할 사이에 싹 다 사라졌다.“앉아.”심명희는 싸늘하게 그녀를 훑어보았고 차가운 말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이런 그녀의 모습에 온하나는 흠칫 놀랐다. 늘 고귀하고 우아한 심명희는 오늘처럼 싫은 티를 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무슨 일로 절 부르셨죠? 사모님?”온하나는 미소를 잃진 않았지만 속은 말이 아니었다.
차우빈이 동작을 멈추고 싸늘한 눈빛으로 허승준을 째려보았다.허승준은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턱을 어루만졌다.“표정을 보니까 설마 온하나 때문에 이러는 거야?”차우빈이 한때 온하나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정도로 잘해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최근 2년 동안 왜 갑자기 온하나를 못살게 구는지도 여전히 의문이었다.“아니, 대체 어쩌겠다는 거야? 온하나랑 잘 지내고 싶으면 잘해주고 양지원을 멀리해. 만약 같이 살 생각이 없는 거면 왜 이렇게까지 못살게 구는 건데? 그냥 돈 좀 주고 보내면 되잖아. 너한테는 아주 쉬운 일일 텐데.”차우빈은 무표정으로 그를 힐끗거리더니 술잔에 술을 따른 다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네 일이나 잘해. 내 일은 신경 쓸 거 없어.”그러고는 술을 단숨에 마셔버리고 뒤로 기댄 채 미간을 어루만졌다. 표정만 봐도 지금 얼마나 화가 난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그런데 허승준이 뜻밖에도 웃음을 터트렸다.“진짜 온하나 때문이었어? 온하나가 너한테 뭘 어쨌다고 이래? 화를 내도 걔가 내야지. 너랑 양지원이 아직도 실검에 걸려있어.”차우빈이 양지원에게 비싼 선물을 주고 불꽃놀이까지 선물했다는 소식이 인터넷에 쫙 깔렸다.“아, 맞다. 내 기억이 맞다면 온하나도 어제 생일이지?”허승준이 차우빈을 빤히 쳐다보았다. 차우빈은 장난 가득한 허승준을 무섭게 노려보았다.잠시 후 차우빈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난 이혼을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허승준은 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아니, 그럼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양쪽에 여자를 끼고 있으면서 이래도 이혼할 생각이 없다고?”허승준이 술 한잔을 벌컥벌컥 마셨다. 차우빈의 머리가 잘못된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한참이 지나도 차우빈이 아무 말이 없자 허승준이 얼굴을 찌푸리고 물었다.“말 못 할 얘기라도 있는 거야?”그의 질문이 귀찮아진 차우빈이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뭔 질문이 그렇게 많아? 같이 술이나 마시자고 불렀지,
온하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서야 천천히 마음을 진정했다.“차우빈, 네가 왜 여기 있어? 어떻게 들어온 거야?”차우빈이 덤덤하게 말했다.“이런 곳에 들어오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잠이나 자.”“미쳤어? 어젯밤에 깨문 게 아프지 않은가 봐?”차우빈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허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더는 온하나를 못살게 굴지 않고 잠을 자려 했다.“차우빈, 제발 정신과 좀 가봐. 아프면 치료받고. 왜 날 이렇게 괴롭히는 건데?”쥐 죽은 듯이 고요한 안방에 차우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조용히 해. 나 졸려.”“자는 척하지 마, 차우빈.”진짜로 피곤한 건지, 아니면 술 때문인지 차우빈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처럼 이내 잠이 들었다. 온하나가 아무리 밀고 때려도 전혀 깨질 않았다.온하나는 차우빈 때문에 잠을 다 깨고 말았다. 어두운 불빛을 빌려 차우빈의 옆에 누워있는 자신을 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거실로 가서 과일칼 하나를 챙기더니 너무 추운 나머지 부들부들 떨면서 안방으로 들어왔다.과일칼을 차우빈의 목에 가져다 댄 순간 차우빈이 그녀의 허리를 확 잡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수술칼은 잘 잡을 수 있어도 지금은 손이 떨려서 제대로 잡지 못했다. 두려워서 떠는 건지 추워서 떠는 건지 그녀도 알지 못했다. 결국 과일칼을 머리맡 서랍에 내려놓고 이불 안으로 재빨리 들어갔다.온하나는 몇 시에 잠들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잠들기 전에 차우빈을 욕했던 것만 기억이 났다.이튿날 아침 온하나가 깨어났을 때 거의 9시가 되었고 옆자리는 진작 텅 비어있었다.씻으려고 일어났는데 화장실 세탁물 바구니에 남자 옷이 가득했고 세면대 위에 남성용품이 놓여있었다.온하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여기서 살겠다는 거야, 뭐야? 내가 편히 사는 꼴을 못 보겠다는 거야, 아니면 하루라도 날 괴롭히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거야?’차우빈은 식탁 앞에 앉아 메일을 처리하다가 온하나를 보고는 고개를 들었다.“여기 너무 추워. 오늘 신비 캐슬로 들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