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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평소 부부의 모습이긴 하지만 그녀에게도 존엄이 있었다. 도저히 제삼자 앞에서 자신의 상처를 들춰낼 수 없었다.

온하나는 아픔을 참으며 허리를 곧게 편 채 다가갔다.

“하나 언니, 미안해. 배가 너무 아파서 하나 언니를 예약했는데 오늘 환자를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민폐 끼쳤다면 사과할게.”

양지원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긴 했지만 아픈 탓인지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그 모습이 참으로 가여워 보였다.

“여긴 산부인과야. 배가 아프면...”

온하나의 말이 끝나기 전에 조수연이 차갑게 말했다.

“하도 귀한 분이라 생리통 때문에 차 대표님이 직접 모시고 왔지, 뭐야.”

조수연의 한마디에 양지원의 두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러면서 쑥스러워하며 차우빈의 눈치를 살폈다.

“하나 언니, 오해하지 마. 우빈 오빠 아침밥을 가져다주려고 갔는데 오빠가 내가 아픈 걸 알고 병원에 데리고 온 거야.”

온하나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어젯밤 동창 모임에서 애정 과시한 게 모자라서 아침부터 찾아와서 과시하는 거야?’

조수연은 양지원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맨날 유부남을 따라다니면서 오빠라고 부르니까 사람들이 오해하지. 저런 말을 대체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지? 정말 여우가 따로 없어.’

차우빈은 무뚝뚝하게 앉아 있기만 할 뿐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온 선생, 왔으면 빨리 환자 봐줘야지. 이미 오래 기다렸어.”

아무런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말투와 얼음장 같은 눈빛이 더해져 냉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금 온하나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걸 아예 모르는 듯했다. 아니면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는 건가?

‘차우빈이 어떤 사람인데 여자를 데리고 산부인과에 온 걸 보면 모르겠어? 양지원한테는 아주 지극정성이지만 나한테는...’

그는 어젯밤에 맹수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양지원의 가족인 듯 온하나를 거의 낯선 사람 취급했다.

온하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괜찮다는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긴 꿈이라도 이젠 깰 때가 됐다. 그녀는 복부의 아픔을 참으며 양지원에게 능숙하게 약을 처방했다.

“하루 세 번, 약 받아서 먹으면 돼.”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가끔 얼굴을 찌푸렸다. 양지원은 씩 웃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고마워. 그런데 진짜 몸이 안 좋아 보여. 푹 쉬어.”

그러고는 온하나가 건네는 처방을 받으려는데 차우빈이 확 낚아챘다.

“배가 아프면 여기저기 다니지 말고 밖에 앉아서 기다려. 약은 내가 가져올게.”

온하나는 차우빈의 부드러운 말투와 따뜻한 눈빛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전에 그녀도 똑같은 대접을 받았으니까.

그녀는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참았다. 표정은 큰 변화가 없었고 심지어 미소도 잃지 않았다.

“차우빈, 우리도 이젠 정리할 때가 된 것 같아. 너희 가족이 날 찾아왔었어. 돌아온 김에 이혼 절차 진행하자.”

진료실을 나가려던 차우빈이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날카로운 두 눈에 냉기만 가득했다.

“온하나, 방금 한 말 한 번 더 말해봐.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내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알 텐데?”

‘우리 관계?’

온하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차우빈은 온하나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더니 양지원과 함께 진료실을 나섰다.

그 순간 겨우 버티고 있던 온하나가 와르르 무너졌다. 절망적인 눈빛으로 차우빈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놓아주지 않는 건데? 2년 동안 못살게 굴었는데도 모자라?’

“하나야, 저런 사람 때문에 울지 마. 일단 병실에 가서 쉬어. 지금 중요한 건 건강이야.”

조수연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제 조금 회복하려고 하는 상황에서 무리해서는 절대 안 되었다.

병실로 가는 길, 조수연이 참다못해 말했다.

“하나야, 사실 진작...”

조수연은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온하나에게 차우빈이 어떤 존재인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온하나는 천천히 마음을 여는 스타일이었다. 예전에 차우빈이 줬던 넘치는 사랑은 온하나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사랑과 따뜻함이었다.

이젠 그녀가 차우빈을 뼛속까지 사랑하는데 되레 차우빈의 마음이 돌아섰다.

그것도 아무런 조짐도, 설명도 없이 말이다. 한때 얼마나 사랑을 쏟아부었으면 지금 그만큼 냉랭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온하나가 입을 열었다.

“사실 진작 생각하긴 했어. 그냥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뿐이야.”

차우빈과 완전히 헤어지는 생각을 할 때면 온하나는 칼로 찌르듯 가슴이 아팠다. 그런데 오늘 용기 내어 그 말을 내뱉고 나니 사실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

두 사람이 병실로 돌아온 후 온하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상사의 전화인 걸 본 온하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교수님, 무슨 일이시죠?”

“온 선생, 몸이 안 좋으면 쉴 거지, 환자는 왜 받아? 게다가 컴플레인까지 당하고.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휴대전화 너머로 교수의 호통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에 있던 조수연은 통화 내용을 똑똑히 다 들었다.

전화를 끊은 다음 온하나는 조수연에게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수연아, 나 때문에 너까지 피해를 보게 해서 미안해.”

“네 탓이 아니야. 어쩌다가 저런 놈을 만나서는.”

조수연은 차우빈 얘기만 꺼내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온하나는 할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차우빈을 거역한 결과가 어떤지 보여주려는 건 줄 알았는데 병원에 컴플레인을 걸어서 조수연이 정직당하게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날 밤 소식을 전해 들은 후 온하나는 병원을 나와 두 사람의 신혼집인 신비 캐슬로 돌아왔다.

도우미 안영자가 그녀를 보고 깍듯하게 말했다.

“사모님, 대표님 위층에 계세요. 저녁은 이미 드셨고요. 사모님 식사하시겠어요?”

안영자는 차씨 가문에서 나이가 많은 도우미였고 눈치도 아주 빨랐다. 차우빈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미 떠났을 것이다.

“괜찮아요.”

온하나는 안영자를 신경 쓸 겨를이 없어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차우빈, 화난 거 있으면 나한테 풀어. 내 친구한테 그러지 말고.”

마침 샤워를 마치고 나온 차우빈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힐끗거렸다. 그러고는 침대 옆에 앉아 아무렇지 않게 수건으로 머리를 닦았다.

“웬일로 집에 다 들어왔네?”

그의 조롱에 온하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문 앞에 서 있었다. 급하게 걸은 데다가 실내외 온도 차가 커서 창백했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온하나는 초롱초롱한 검은 눈망울로 차우빈을 쳐다보았다. 그는 탄탄한 가슴 근육을 드러낸 채 샤워타월로 몸을 감쌌다. 이목구비도 아주 완벽했고 웃을 때면 입가에 싸늘함이 전해졌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다.

“차우빈, 네가 상대할 사람은 나야. 그러니까 수연이는 내버려 둬.”

“환자더러 접수를 취소하라고 한 건 이해할 수 있어. 어쨌거나 의사마다 의사가 갖추어야 할 도덕과 품성이 있는 건 아니니까. 근데 네 친구는 날 짐승이라고 욕했어. 이래도 억울해?”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그지없었고 전혀 조급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하면 수연이 놔줄 건데?”

‘정리하자’는 말이 차우빈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걸 온하나는 알고 있었다. 차우빈은 그녀를 마음껏 짓밟으면서 그녀가 그의 뜻을 거스르는 건 용납하지 못했다.

이혼은 절대 그녀가 먼저 꺼내선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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