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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자신이 키운 아이였기에 임서향은 희영의 표정을 보고 즉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챘다.

허씨 가문이 희영을 찾은 것은 신정훈이 세상을 떠난 지 반년 후였다.

임서향은 희영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가 정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친 듯이 그를 찾아다니며 밥도 먹지 않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모두가 그렇게 계속 지내다가는 희영도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서향은 희영이 새로운 환경과 가족들 속에서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허씨 가문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녀를 G시로 보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희영의 결혼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임서향은 희영이 신정훈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누군가 재벌가의 이익을 위해 희영에게 강제로 결혼을 요구했을까 봐 걱정되어 서둘러 G시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유기현을 보게 되었다. 기현은 정훈과 분위기가 전혀 달랐지만 외모는 꼭 닮아 있었다. 마치 복사한 듯했다.

그때의 희영은 기현을 보며 마지막 희망을 붙잡은 듯, 그가 정훈이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정훈이 잠시 자신을 잊은 것뿐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임서향이 정훈의 죽음을 언급하면 부정하고 감정이 격해졌다. 그러나 오늘, 희영은 그저 슬프고 애달픈 눈으로 임서향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부정하지 않고 있었다.

“너도 그 남자가 정훈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잖아.”

임서향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희영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훈은 너무도 좋은 사람이었기에 기현은 그와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희영은 정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차라리 그와 닮은 사람을 곁에 두고 그가 살아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싶었다. 안 그러면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현은 그런 희영의 바람을 무시했다. 그는 항상 서늘하고 차가운 표정을 지었고, 그에게서 점차 정훈의 모습은 사라져갔다.

임서향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 남자가 너에게 얼마나 못되게 굴었길래...”

‘얼마나 괴롭혔으면 그토록 집착에 빠져 살던 희영을 정신 차리게 만들었을까...’

임서향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한 고통으로 가득 차올랐다.

병상 옆의 기계가 갑자기 경고음을 울렸다.

희영은 당황하여 간호사를 부르려 했다. 그러나 임서향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희영아,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이제 널 묶어둘 사람은 없어. 그 사람들을 떠나... 집으로... 가서 자유롭게 살아가렴...”

희영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긴급 호출 버튼을 눌렀다. 임서향은 숨을 가쁘게 내쉬며 희영을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널 어떻게 두고 떠날 수 있겠어... 내가 애지중지하게 키운 아이를 이 세상에 혼자 남겨두는 건 너무 가혹해.’

“희영아...”

임서향은 마지막 숨을 붙잡으며 희영의 손을 꽉 잡았다.

“한 번만... 한 번만 나를 불러 주렴.”

희영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한 번만... 엄마라고 불러줘...”

마지막 말과 함께 임서향은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희영의 품 안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희영은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실어증을 앓고 있었지만 성대는 멀쩡했다.

어린 시절 겪었던 극심한 두려움이 그녀의 말문을 막아버린 것이었다.

임서향은 그녀를 데리고 여러 의사들을 찾아다녔지만 뚜렷한 효과는 보지 못했다.

희영은 귀가 울리는 상태로 임서향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어 엄마라고 부르려 했지만, 피비린내가 입안에 감돌며 아무리 애써도 한 마디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듯 길게 흘렀다.

의사들이 병실로 들이닥쳐 희영을 옆으로 밀쳐내고 응급 처치를 시작했다. 주위는 온통 혼란스러웠고, 희영의 귀에선 여전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삐-

곧 기계음이 길게 울리더니 그 소리가 천천히 사라져 갔다. 희영은 의사가 임서향의 눈을 덮어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얀 천이 서서히 올라가며 그녀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덮어주었다.

이런 장면을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번, 하늘 마을의 장례식장에서 임서향이 정훈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부르며 오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훈아, 훈아...”

‘정훈아, 네가 날 그렇게 사랑해줬는데 난 네 마지막 길을 함께 해주지도 않았어. 게다가 몇 년이 지났는데도 한 번도 널 보러 가지 않았어.’

‘원장님은 내가 엄마라고 부르는 걸 듣고 싶어하셨는데 난 끝내 부르지 못했어.’

‘나 정말 매정한 사람인 가봐.’

임서향은 이미 자신의 장례 절차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장례식은 생략하고 바로 화장해, 유골과 유품 모두를 희영에게 맡기기로 했다.

임서향이 화장을 할 때, 그녀를 돌봐주던 간병인은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희영은 고요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새하얀 입술이 떨리며 소리 없이 ‘엄마’라는 단어를 반복하고 있었다.

...

G시는 이날 첫눈이 내렸다.

기현이 회의를 마치고 나오자 비서인 장현승이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대표님, 변호사님께서 사모님과 연락이 닿지 않는답니다.”

현승은 조심스럽게 전했다. 오늘 기현의 심기가 매우 불편한 것이 느껴질 정도로 그의 주변 공기는 얼음장 같았다.

보통이라면 기현은 오늘 같은 날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그는 방금 회사의 모든 권한을 되찾고, 고위 임원들을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

“알았어.”

기현이 미간을 찡그렸다. 희영이가 망설일 거라 예상했지만, 너무 빠른 감이 있었다.

이혼 문제가 또다시 번거로워질 거라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현승도 기현의 기분이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을 발견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기현은 컴퓨터를 열어놓고, 회의 전에 다 보지 못한 이혼 협의서를 확인했다.

그 협의서에는 희영을 위한 이혼 보상이 적혀 있었다.

기현은 대단히 관대했다.

희영이 평생 다 써도 모자랄 돈을 제공하는 데다가, 해외와 국내에 그녀 명의의 부동산을 마련해 주었다.

기현은 그녀가 유니국립발레단의 수석 자리를 얻은 것을 알고 P국에 저택을 구입해 두었었다.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최소한의 감사 표시였다.

점심시간, 주아는 정성껏 차려입고 기현의 차에 올랐다.

두 사람은 그녀가 줄곧 가고 싶어 했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오늘 아침부터 갑자기 이곳 음식이 너무 먹고 싶었어요. 역시 오빠가 최고예요!”

주아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기현은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만 좋으면 됐어.”

주아는 고개를 힘껏 끄덕이며 말했다.

“오빠가 이렇게 잘해주니, 정말 행복해요!”

그러다 문득 주저하듯 말했다.

“참, 어제 희영 언니가...”

기현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얼른 먹어.”

주아는 희영의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기현의 얼굴이 싸늘해진 것을 보고, 속으로 더욱 만족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기현은 다시 일하러 회사에 돌아가야 했다.

주아는 순종적인 모습으로 말했다.

“오빠, 일 보세요. 전 친구들과 커피 마시러 가기로 했어요.”

기현의 시선이 그녀의 배에 잠시 스쳤다.

“몸 조심해.”

“알았어요!”

주아는 기현이 떠나자마자 순진해 보이던 미소를 감춘 뒤 전화를 걸었다.

“오늘 밤 허희영도 서씨 가문의 가족 모임에 참석한다고? 정말 확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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