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해, 서 어르신이 허희영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허희영이 서씨 가문의 모임에 빠질 리가 있겠어?” 핸드폰 너머의 여자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기현의 외가는 서씨 가문으로, 꽤나 유력한 재벌가다. 예전에 기현은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급히 외국에서 돌아왔고, 유씨 가문의 어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쫓겨날 뻔했다. 주아가 허씨 가문의 아가씨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기현처럼 무너진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현은 희영과의 결혼을 통해 외할아버지의 지지를 얻어 빠르게 자리를 되찾았다. 당시 주아가 선택한 그 멍청이는 재산을 모두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위험에 처하게 했다. 만약 기현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주아는 지금 어딘가에서 죽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 번 선택을 잘못했으니,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현을 반드시 붙잡기로 결심했다. 오늘 밤... 주아는 전화를 끊고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서씨 가문의 어르신들 앞에서 희영이 발악하는 모습을 보여줄 계획이었다. ... 그러나 주아가 기대한 일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희영은 서씨 가문의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다. 간병인은 임서향의 유골을 담은 후, 눈물을 흘리며 임서향의 유품을 희영에게 건넸다. 그녀의 물건은 매우 적었다. 10년 넘게 사용한 낡은 핸드폰과 한 묶음의 열쇠, 그것은 그녀들이 하늘 마을에서 살던 집의 열쇠였다. 저녁이 되자, 희영은 임서향과 함께 F시와 멀리 떨어진 하늘 마을로 돌아갔다. 마을 사람들은 희영을 보고 기뻐했지만, 임서향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곧 울음을 터뜨렸다. 하늘 마을에는 바다를 향한 작은 묘지가 있었는데, 보육원의 뒷산에 위치해 있었다. 임서향은 그곳에 묻힐 예정이다. 밤이 깊어가자 하늘 마을에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희영을 도와 장례를 준비했다. 작은 섬의 모든 것은 변하지 않았다. 희영은 길 모퉁이에 서서 불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곳을 바라보
기현은 곧바로 떠났다. 서준모는 창문 앞에 서서 기현이 주아를 위해 보조석 문을 열어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차는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여보.” 뒤에서 송혜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준모는 뒤돌아보지 않고 미간을 찌푸린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희영이가 M시로 돌아갔대.”송혜정은 잠시 놀랐다가 곧 이어 말했다. “어차피 몇 년 동안 돌아가지 않았잖아. 결국 고향이니까...”서준모는 송혜정을 바라보았다. 부부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 후 송혜정이 입을 열었다. “어쩌면 희영이가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돌아가 보려는 걸지도 몰라. 좋은 일일 수도 있어.”송혜정은 말을 하면서 서준모의 세게 찌푸려진 이마를 보며 다소 짜증 섞인 말투로 덧붙였다. “지금은 훨씬 더 시급한 문제가 있어!”서준모는 어리둥절했다. “무슨 문제?” “당신 못 봤어? 허주아가 임신했잖아!” 송혜정은 아이를 낳아본 경험이 있어 주아가 숨기려 애썼지만 처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룻밤 관찰한 결과, 거의 확신에 가까워졌다.“뭐?” 서준모가 소리쳤다. 멀리 서 있던 아주머니들은 그 소리에 모두 움찔했다.“목소리 좀 낮춰!” 송혜정은 낮은 목소리로 꾸짖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현의 차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세상 만만하게 알고 아이가 생기면 우리 서씨 가문에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했나 보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배를 부풀리고, 내 앞에서 까불다니. 희영이 오늘 저녁에 오지 않은 건 분명 실망해서 그런 걸 거야.”송혜정은 다시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허주아 뱃속의 아이는 절대 태어나면 안 돼.”“응.” 서준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예전에 사위가 임신한 여자를 데려온 걸 보고 넘어가 준 적이 있었다. 결국 그의 딸은 미쳐서 스스로 불태워 죽었다. 비록 그는 기현에게 남자답게 행동하라고 세심하게 가르쳤지만, 유씨 가문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더러운 짓을 하고 있었다. 이런
정훈은 사람을 구하다가 물에 빠져 사망한 것이었다. 그의 시체는 무려 보름이 지나서야 해변으로 떠올랐다. 이미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렸기에, 희영은 그것이 정훈이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장례식에서도, 묘비에도 정훈의 사진을 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장인은 정훈의 사진을 받아들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희영을 바라보았다. “이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정훈의 사진이에요. 잘 만들어 주세요.” 희영은 미리 적어놓은 글을 장인에게 보여주었다. 장인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걱정 마세요.” 모든 준비를 마친 후, 희영은 다음 날 G시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그곳의 일들과 사람들을 정리한 뒤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었다. ...비행기 탑승 전에, 희영은 기현의 변호사에게 카톡으로 답장을 보냈다. 장례 기간 동안, 희영은 G시 쪽의 어떤 사람과도 연락하지 않았다. 임서향의 죽음에는 너무나도 이상한 일들이 많았다. 게다가 두 사람은 재회한 시간은 너무 짧아, 제대로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 더 많은 질문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하지만 희영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임서향이 자신에게 병이 나아 A국에 정착했다고 속인 건 분명 G시의 사람들과 연관이 있을 것이었다. 임서향은 수억 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설이 낡고 환경이 열악한 요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그렇게나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죽기 직전에야 희영을 만날 용기를 냈다. 더군다나 임서향이 죽기 전에 한 말도 뭔가 이상했다. ‘날 묶어둘 사람이 없다고?’ ‘원장님이 왜 그런 말을 하신 걸까?’ 희영은 이번에 G시로 돌아간 후 이혼을 하고 이런 이상한 일들을 명확히 파헤칠 것이고 어떤 단서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대화창에는 진수혁 변호사가 며칠 전에 보내온 비난하는 메시지들이 떠 있었다. [허희영 씨, 이혼 계약서의 세부 사항에 관련해 논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더 이상 도망치셔도 소용
“이 서류는 무효야!” 기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법무팀에서 새로운 이혼 서류를 작성할 테니, 그 서류에 서명해.” 비록 이 이혼 서류에 적힌 조건도 만만치 않았지만, 3년 전과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게다가 희영은 그의 생명을 구해주기도 했다.“필요 없어.” 희영은 짜증을 내며 기현이 잡고 있는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기현은 화가 나서 더욱 강하게 그녀의 손을 움켜잡고, 갑자기 그녀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허희영, 도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화를 내는 거야? 네가 1년 전에 나를 구하다가 크게 다쳤으니 이 정도 보상으로는 부족해. 새로운 이혼 서류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자산을 포함할 거야. 그럼 넌 더 안정적이고 보장된 삶을 살 수 있어.” 기현은 분노를 드러내며 말했다. “P국 쪽은...” P국? 희영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가 보낸 카톡을 보지 못한 걸까? 아니면 애인이 먼저 발견하고 삭제해버린 걸까?’ 하지만 두 경우 모두 큰 차이는 없었다. 희영은 더 이상 기현에게 이런 상황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됐어, 어차피 변호사에게 내가 서명한 이 계약서에 새로운 조항을 추가하라고 하면 돼.” ‘돈을 준다는 데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잖아?’ ‘어쨌든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잖아.’ ‘적어도 허주아한테 주는 것보다는 낫지.’ 기현의 목소리는 갑자기 멈췄다. “뭐가 그렇게 급해?” 기현은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 “허주아가 임신했으니까, 내가 서둘러 자리를 비워줘야지.” 희영은 웃으면서 말했다. 기현은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정말로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저 비웃음만이 남아 있었다. “정말 너그럽네, 허희영.” “당연하지.” 기현은 희영을 붙잡던 손을 놓았다. 그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외할아버지에게만 고개를 숙였고, 그 외에는 언제나 자존심을 지켰다. 희영은 뒤도
병원 안. 주아는 출혈이 발생하여 아이를 지키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기현은 병원에서 낯익은 두 사람, 허창석과 김수정, 즉 희영의 삼촌과 숙모를 만나게 되었다. 희영이 실종되었을 때, 두 사람은 주아를 데려와 그녀가 희영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동안 두 사람은 주아를 자신의 자식처럼 사랑하고 소중하게 키웠다. 그러나 나중에 허진석이 희영을 데리고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은 여전히 주아만 예뻐하고 희영에게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기현아, 왔어?” 김수정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주아도 참, 돌아오자마자 이렇게 큰일을 겪고도 우리에게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다니! 너와 이렇게 만나는 게 무슨 소용이겠어? 아무런 명분이 없는데... 희영이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김수정은 울면서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말했다. “희영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거지?” “언니는 사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주아가 말을 꺼냈다. “그래? 어쩐지 잘 지내다가 갑자기 출혈이 일어난 건지 싶었어! 분명히 희영이가 몰래 벌인 일이겠지! 내가 가서 혼내야겠어! 아무리 화가 나도 이건 너무 하잖아!” 김수정은 화를 내며 병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허창석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만해! 기현이가 왔으니, 주아랑 아이가 다치는 건 절대 보고만 있지 않을 거야.” 기현은 이 말이 점점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두 사람은 마치 주아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 듯 말하고 있었다. 기현은 주아를 쳐다보았다. ‘허희영에게 메시지를 보낸 일에 대해서는 아직 물어보지 않았는데, 또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인 거지?’ 주아는 기현의 화가 난 눈빛을 발견하고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기현아, 넌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야?” 김수정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도 주아는...” “숙모!” 주아가 김수정의 팔을 붙잡았다. 최근 들어 허씨 가문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허진석이 세상을 떠나자, 허씨 가문의 무능력한 사람들이 집안의 자산을
주아는 한편으로는 가련하게 울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현의 반응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녀가 그 사건을 언급하기만 해도 기현의 얼굴에는 죄책감과 책임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G시의 재벌가 사이에서 그녀와 기현의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지만, 사고가 발생하기 전, 기현은 주아를 동생처럼 대하며 여자로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주아와 거리를 두고 예의를 지키고 있었다. 기현은 부모님들이 약속한 혼약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 사고 이후 주아는 기회를 잡아 기현의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모든 일이 이상하게 꼬여버렸다. “나는 약속대로 널 지켜주고 네 아이도 내 보호 아래 무사히 자라게 될 거야.” 기현이 한 말은 주아가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다. 주아는 기현의 이혼 소식에 행복하다고 말했지만, 이는 사실 기현과 결혼하고 싶다는 암시였다. 하지만 그는 이를 회피했다. “의사 선생님께서 한동안 푹 쉬어야 한다고 하셨으니,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해.” 기현은 말을 마친 후 일어나며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얼른 쉬어, 내일 다시 보러 올게.” “제가 싫어진 거죠? 맞죠?” 주아는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야.” 기현이 부정했다. “그럼 희영 언니를 사랑하게 된 거예요?” 주아는 더욱 격하게 울며 목소리를 높였다. 기현은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가 말조차 하지 못하는 여자를 사랑하겠어? 주아야, 앞으로는 생각 좀 하고 말을 해.” 기현은 한 마디 위로의 말도 없이 병실을 나섰다. 그가 방을 나가자마자, 김수정과 허창석이 돌아왔다. “주아야, 왜 울고 있어?” 김수정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주아는 슬픈 표정을 거두고 짜증스러운 태도로 휴지를 세게 잡아당기며 눈물을 닦았다. 기현의 마지막 대답과 태도는 그녀를 만족시켰다. ‘허희영은 3년 동안 기현 오빠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나 보네.’ 그러나... 기현은 그녀와 결
선빈은 희영이 말 못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항상 그녀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처음에는 사랑하는 오빠가 첫사랑과 헤어지고 희영 같은 벙어리와 결혼하게 되어 안타까워서 자주 희영을 비난했지만, 나중에는 그런 비난들을 멈추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거는 것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가끔은 유씨 가문의 사람들을 잔인하다고 비난하고, 때로는 명문가의 아가씨들이 위선적이라고 욕하곤 했다.희영은 G시, L시 등 다양한 명문가에 대한 소문들을 강제로 들어야 했다. 지난 몇 달 동안 희영이 투어 일정으로 바빠지자 선빈은 그녀에게 전화를 잘 걸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참아온 그녀는 분명 또 누군가를 욕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온 것임을 알았다. 희영은 단순히 가십 거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를 받았다.[허희영, 너 우리 오빠한테 버림받은 거야? 방금 서씨 가문의 늙은이들이 오빠가 너랑 이혼할 거라고 말했어. 그리고 사생아도 생겼다며! 유씨 가문의 남자들은 왜 다 하나같이 바람을 피지 못해 안달이 난 거야! 빌어먹을 놈들!] 선빈은 핸드폰 너머로 울며 심하게 욕을 퍼부었다. 그녀는 유씨 가문의 남자들을 비난한 뒤, 곧 희영에게로 욕설을 이어갔다.[그리고 너! 전에 대단했었잖아! 예전에는 어른들 앞에서 허주아를 칼로 찌르려고 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그 더러운 년이 오빠의 아이를 가졌다고 하니 왜 더러운 두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버리지 않은 거야?][허희영, 3년 사이에 패기가 다 사라진 거야? 넌 오빠의 장난감이야? 왜 뭐든 오빠의 비위를 맞추는 건데! 너한테 정말 실망이야!] 선빈은 한바탕 소리 지르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소리가 너무 컸기에 희영은 귀가 멍해졌다.희영은 손을 들어 귀를 문지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허주아, 어지간히도 급한가 보네.’ ‘내가 이혼 서류에 서명한 것을 알자마자 소문을 퍼뜨리다니.’ ‘상황이 뒤바뀌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희영은 선빈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선빈 씨, 너무 걱정하지 마. 이혼은 내가
도로 양쪽에 쌓인 눈은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녹아내렸다. 희영이 심리상담센터에 도착했을 때,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20분가량 남았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독특한 인테리어의 카페로 들어가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한 뒤, 구석자리에 여유롭게 앉았다. 그리고 기현이 준 파일 봉투를 열어 대충 훑어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기현을 구해준 것에 대한 경제적 보상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렇게 많은 것을 받을 줄은 몰랐다. 원래의 이혼 계약서에 적힌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적혀 있었다. 부동산, 펀드, 회사 주식, 현금, 그리고 앞으로 매달 수억 원이 넘는 양육비까지, 희영은 손쉽게 많은 돈을 얻게 되었다. ‘유기현의 목숨이 이렇게 비쌀 줄이야.’“202번 고객님, 주문하신 에스프레소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때 카페 직원이 말했다. 희영은 서류를 봉투에 넣고 일어나 커피를 가지러 갔다. 그러나 일어나는 과정에서 누군가와 부딪혔다. 몇 권의 책이 바닥에 떨어졌고, 희영은 급히 쪼그려 앉아 책을 주웠다. 그 중 한 권의 표지를 보자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죄송합니다, 핸드폰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영은 모파상의 단편선을 집어 들고 고개를 들어 자신과 부딪힌 사람을 쳐다보았다. 상대방은 잘생긴 남자로, 날카로운 눈썹과 우아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희영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가리키는 제스처로 말을 할 수 없음을 전한 뒤, 두 손을 모아 사과의 뜻을 전했다. 남자는 그런 희영을 보며 따뜻하게 웃었다. 그리고 희영이 놀란 눈빛 속에서 수화를 이어갔다. “제 잘못이니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희영은 밖에서 수화를 하는 사람을 거의 만나본 적이 없어 깜짝 놀랐다. 그녀는 자신이 들을 수 있지만 말을 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모파상 단편선을 남자에게 건넸다. “이 책은 6년 전에 출판사에서 특별히 나온 판본으로, 수량이 많지 않아요. 이렇게 6년 후에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희영이 먼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