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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기현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뒤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으며 허리는 날씬했다.

희영은 그의 등을 바라보며, 기억 속에서 점차 흐려져 가는 앳되고 날렵했던 소년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 순간, 아무렇지 않던 그녀의 가슴에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졌다.

“허희영.”

문에 다다른 기현이 갑자기 멈추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난 더 이상 외할아버지의 뜻을 따를 필요가 없으니 너에게 두 번째 기회 같은 건 없을 거야. 그리고 이 이혼은 네가 요구한 거니까, 후회되더라도 주아를 귀찮게 굴지 마. 주아는 이미 너 때문에 충분히 고생했거든.”

희영이 그렇게 타오르듯 쏟아냈던 사랑을 기현이 몰랐을 리 없었다. 그녀의 황량한 삶 속에는 오직 춤과 그만이 전부였다.

기현은 희영의 행동이 주아에게 자극받은 것일 뿐이라, 그녀가 평정심을 되찾으면 반드시 후회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가 오더라도 기현은 절대 희영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희영은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예의 바르지만, 유독 주아에게만은 달랐다.

기현은 자신이 주아를 지키지 못한 탓에 그녀가 겪어야 했던 고난을 떠올리며,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아가 다시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유기현, 그 말은 허주아한테 해주는 게 좋을 거야.”

희영은 평온하게 수화를 하며 말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엔 희미한 안개가 서려 있었지만, 그 눈빛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허주아한테 날 건드리지 말라고 전해줘.”

안 그러면 주아는 더 큰 불행과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

희영은 절대 미련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예전에 기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때는 세상 누구도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필요 없으니, 그를 위해 눈물 한 방울 흘리는 것조차 아까웠다.

기현이 떠난 후, 희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질러진 휴게실을 정리했다. 그리고 찢어진 드레스를 조심스레 챙겼다. 이 드레스는 그녀가 가장 아끼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기현의 손에 망가져 버린 것이다.

이 드레스는 희영이 국제 대회에서 금상을 따며 받은 상품으로, 최고급 디자이너의 손을 거친 작품이었다.

그러니 복구하는 데도 큰 돈이 들 터였다. 분명 이혼 협의서에 포함되어야 했다. 기현이 이걸 찢어버렸기 때문이다.

정리를 마치자, 문 밖에서 조미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영 씨? 일어났어?”

공연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나 있었고, 미나는 이미 한 번 들렀다가 불이 꺼진 휴게실을 보고 그녀가 자고 있는 줄 알고 다시 홀로 돌아갔었다.

희영이 향초를 켜 두었기에 방 안에는 이미 향기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문 앞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다 끝난 거예요?”

희영이 물었다.

“다른 팀들은 다 돌아갔고, 지금은 희영 씨 팀만 남았어요. 모두들 희영 씨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어.”

미나는 마음속의 안타까움을 삼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축하 파티라지만, 사실상 송별회이기도 했다.

“좋아요. 내가 쏠 테니 오늘은 모두 즐겁게 놀아요.”

희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희영은 의아했다. 그녀의 번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다들 그녀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로 연락해 올 일도 없었다.

“유선 전화인가?”

미나는 중얼거리며 빠르게 발신 번호를 검색했다.

“F시 요양원? F시의 요양원에서 이 시간에 무슨 일로...”

미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희영은 전화를 받았다.

[허희영 씨 맞으시죠? F시 요양원입니다. 임서향 환자분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오셔서 마지막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빨리 와주셨으면 합니다. 환자분이 허희영 씨를 보고 싶어 하거든요.]

희영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G시 대극장에서 F시 요양원까지 차로 3시간 거리였다. 희영이 허겁지겁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 한 시였다.

“허희영 씨께서 온다는 소식에 계속 기다리고 계셨어요.”

희영에게 전화를 건 간병인이 그녀를 병실 앞까지 안내했다.

병실 문이 열리자 희영은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임서향은 하늘 보육원의 원장이자, 희영을 발레리나로 키워낸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임서향은 친엄마 같은 존재였다.

3년 전, 허진석은 밖에서 홀로 떠돌던 희영을 찾아냈다.

원래 희영은 허씨 가문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그때 하늘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이 여행 블로거를 통해 널리 알려지며 관광 개발업체들의 눈에 띄기 시작했다.

보육원이 있던 섬은 마치 팔리기 일보 직전처럼 위태로웠고, 그때 임서향은 위암 판정을 받았다.

희영은 섬을 지키고 임서향을 살리기 위해 허진석과 거래를 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서향은 해외의 한 병원에서 치료받게 되었다고 말하며 떠났다.

그 후로 두 사람은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임서향은 치료가 잘 되고 있으며 A국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여생을 보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희영은 그녀의 말에 의심하지 않았다. 임서향의 암은 일찍 발견되었기 때문에 완치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그녀도 임서향이 하늘 마을을 떠나 행복하고 자유롭게 여생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다 희영이 기현과 결혼하기로 결심했을 때, 임서향은 급하게 돌아왔으나 희영과 대판 싸운 뒤 연락을 모조리 끊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희영은 그녀의 행방을 찾아 나섰으나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오는 길에 간병인이 그녀에게 임서향의 진단서를 건넸다. 그때 싸웠을 때 제때 치료하지 못한 탓에 암세포는 이미 전이되어 있었다.

“희영이니?”

낯설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희영은 목이 메어 빠르게 병상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다가가자 임서향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가, 많이 컸구나. 더 예뻐졌네.”

희영은 믿기지 않는 듯 임서향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여위고 변해버린 그녀의 모습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분명 좋은 사람을 만나 A국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희영은 천천히 수화를 했다.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거죠? 왜 곧 죽는 거예요?”

임서향의 눈가가 붉어지며 말을 꺼냈다.

“미안해.”

그녀는 조용히 사과했다.

“내가 널 속였어.”

희영은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손으로 임서향의 마른 손을 꼭 붙잡았다. 그녀는 어린 시절처럼 임서향의 손등에 이마를 대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따스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임서향의 손은 아주 차가웠다.

“아가야, 이제는 어른이 되었으니 죽음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해. 지금의 나는 물론, 훈이의 죽음도 마찬가지야.”

‘훈이...’

희영의 혈관 속 피가 한순간 얼어붙는 듯했다.

햇살이 가득했던 아름다운 추억의 조각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소년은 하얀 파도를 밟으며 희영을 돌아보았고, 그의 미소는 눈부신 태양보다도 찬란했다.

“허희영 어린이, 이리 와서 안길래?”

아프다. 희영은 사지가 찢어질 듯이 아픈 것 같았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채 임서향을 쳐다보았다. 눈 속엔 그녀만이 알 수 있는 고통과 끝없는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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