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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G시 대극장.

키가 큰 남자가 차가운 기운을 품고 어둠 속에서 무대 위의 매혹적인 블랙 스완을 쳐다보고 있었다.

흑고니는 우아한 자태로 춤을 추며, 그 움직임은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아름다웠다.

마치 사람의 혼을 빼앗아 가기라도 할 듯, 그 매력에 빠진 사람들은 누구나 그 흑고니를 마음 깊이 간직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공연이 끝나가자 남자는 시선을 거두며 차가운 표정으로 무대 뒤로 발걸음을 옮겼다.

...

공연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희영의 허리가 서서히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아픔을 참으며 무대를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뜨거운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희영은 아쉬운 눈빛으로 무대와 관객을 마지막으로 한번 쓱 바라보고는 무대 뒤로 물러났다.

“많이 아파? 아프면 관객들과의 사진 촬영은 취소해줄게. 좀 쉬어.”

미나는 희영의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희영은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몇몇 관객이 그녀를 만나러 먼 길을 왔기에 희영은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사진 촬영을 마친 후, 미나는 공연장으로 돌아가며 희영에게 잠깐 쉬라고 몇 마디 당부를 했다.

어느새 주변은 고요해졌다.

희영은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발레를 배워왔고, 말하지 못하는 미래를 걱정한 보육원 원장님이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키워주었기에 발레리나로서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다.

이제는 그 무대를 떠나야 한다니, 아쉬움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메이크업을 지운 희영은 아픈 허리를 감싸며 혼자 1인실로 마련된 휴게실로 걸어갔다.

어두운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찰나,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안으로 세게 당겼다. 문이 닫히며 찰칵하고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놀란 희영은 곧 익숙한 기운에 감싸이는 것을 느꼈다. 유기현이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찾아온 거지?’

희영이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기현의 입술이 무자비하게 그녀를 덮쳤다.

희영은 본능적으로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기현의 강한 힘과 분노에 압도되어 실패했다. 그녀는 다급한 마음에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입안에 피 냄새가 느껴졌지만 소용없었다.

주아는 자신의 예상이 틀렸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기현과 희영은 집안 어른들의 부추김 속에서 신혼 초기부터 함께 밤을 보내며 이미 깊은 관계가 되어 있었다.

기현은 희영에게 언제나 경멸 어린 태도를 보였으면서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부인하지 못했다.

3년간의 경험을 통해 두 사람은 서로의 숨소리와 몸짓에까지 익숙해져 있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희영의 정신이 흐려져 갔다. 순간, 희영의 어깨에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기현이 그녀의 어깨를 문 것이었다. 희영은 그가 몹시 화가 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녀는 그를 더욱 싫어졌다. 기현은 언제나 자신의 방식만 고집했으니까.

‘어차피 계속 나랑 이혼하려고 했잖아?’

기현은 신혼 초기에 이미 이혼 서류에 서명해 두었고, 그것을 서재에 보관해 두었다.

‘이제 원하던 대로 첫사랑과 영원히 함께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왜 화를 내는 거지?’

극장 뒤편에서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고, 희영은 그들 중 한 명이 문 뒤를 지나치는 소리를 들었다.

만약 누군가 이 상황을 목격했다면 발레계는 물론 해외에서도 큰 소문이 날 것이 분명했다. 상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희영은 입술을 깨물고 손으로 입을 막으며 절대 소리를 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기현은 더욱 잔인하게 몰아붙였다. 그는 그녀가 말을 못 한다는 사실을 싫어했으면서도, 그녀가 소리를 내는 것에 더욱 집착했다.

...

잠시 후, 밝은 형광등이 켜졌다.

기현은 소파에 앉아 만족스러운 듯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여전히 정중하게 옷을 갖춰 입고 있었지만, 희영의 값비싼 발레 드레스는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희영은 샤워를 마치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왔다. 기현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이혼하고 싶어?”

그의 말투에는 감정이 섞이지 않았다. 희영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기현은 여전히 그녀가 사랑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모습에서 그녀가 사랑했던 소년의 모습을 찾아낼 수 없었다.

희영은 더 이상 사랑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여유롭게 물었다.

“주아 때문이야?”

왠지 모르게, 희영이 진정으로 화를 낸다면 기현은 오히려 기분이 좋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희영은 예쁜 얼굴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평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수화로 말했다.

“아니,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아서 이혼하려는 거야.”

희영의 손짓은 간결하고 분명했다. 더 이상 기현과는 엮이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강렬하게 드러났다.

기현은 짧은 희열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 생각이 멈추더니 갑자기 과거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폭우가 쏟아지던 밤에 그 여자가 기현을 흙탕물에 밀어내며 수화를 했었다.

“그래, 널 사랑하지 않아! 그러니까 엄마라고 부르지 마! 너도 너희 아빠처럼 역겨우니까 꺼져!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다신 널 보고 싶지 않아!”

모든 감정이 그 순간 휩쓸려 사라졌다.

기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갑게 희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좋아, 이 결혼은 원래 네가 주아에게서 빼앗은 거잖아. 이제 다시 주아에게 돌려줄 때가 된 거지.”

“축하해.”

희영은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그를 축복했다.

기현은 잠시 당황했다. 희영이 자신의 차가운 말을 듣고 이토록 간단하고 담담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문득 그는 주아가 희영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을 포기해달라고 애원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희영은 두 집안의 어른들 앞에서 립스틱을 꺼내들고 벽에 큼직하게 썼다.

“유기현은 내 거야. 내 거라고!”

그런데 지금은... 축하한다고? 기현은 희영의 무표정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밀려오는 화를 참았다.

이 결혼은 진작에 끝났어야 했다. 다만 희영이 1년 전의 암살 사건에서 기현을 구하면서 상황이 지연되었을 뿐이다.

희영이 이혼을 먼저 제안한 것이 오히려 그를 도와준 셈이기에 기현이 화를 낼 이유는 없었다.

“내일 오전에 내 변호사가 너한테 이혼 서류를 가져다줄 거야.”

희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외로 아쉬움이나 미련을 느끼지 않았다.

“마침 내일 저녁에 가족 모임이 있으니, 그때 어른들께 우리 이혼 소식을 전해드리자.”

희영은 차분하게 수화로 말했다. 기현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계획마저 세웠나 보네.’

더 이상 자신과 얽매이지 않으려는 희영의 의지에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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