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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널 사랑하지 않아
더는 널 사랑하지 않아
작가: 향소리

제1화

결혼 3년 차. 허희영은 산부인과에서 몇 달 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남편 유기현을 마주쳤다. 기현의 곁에는 그가 숨겨왔던 애인이 있었다.

매혹적인 외모에 다정다감한 여자는 희영과 어딘가 닮아 보였다. 그녀는 바로 과거 허씨 가문의 아가씨였던 허주아였다.

반년 전부터 희영은 기현이 외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 상대가 주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G시 재벌가 사이에서는 허주아가 유기현의 첫사랑이자 소꿉친구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영은 두 사람 사이에 억지로 끼어든 나쁜 여자로 낙인찍혔다.

이제 더는 이상 마음 졸일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그녀는 평온한 눈빛으로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기현이 고개를 숙이고 다정한 눈빛으로 주아에게 나긋나긋 말을 건네는 모습은 희영에게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주아는 그의 말을 들으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살짝 부푼 아랫배를 조심스레 감싸며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닮은 두 사람이었지만, 희영은 주아의 요염함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때 주아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희영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주아는 겁에 질린 사슴처럼 몸을 움츠리며 재빨리 기현의 품에 파고들었다.

희영은 그 장면을 보며 무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모든 상황이, 어쩌면 이제야 그녀가 억지로 붙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을 순간이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현 오빠...”

‘여전히 연기를 잘하네.’

기현은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희영 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인 후, 기현은 다시 차갑고 혐오감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희영을 내려다보았다.

희영은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그에게 언제나 불편하고 불필요한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희영과 기현의 결혼은 두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양가 부모님들이 약속한 것이었다. 그러나 희영이 세 살일 때 부모님이 사고로 사망하고, 그녀는 실종되었다. 그 이후 주아가 허씨 가문의 아가씨 자리를 대신해 16년간 그 집에서 살아왔다.

시간이 흘러 희영이 다시 허씨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 기현의 마음속에는 이미 주아가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기현은 희영과의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 오직 양가 어른들의 강요로 인해 마지못해 결혼식을 올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희영은 기현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좋아했던 것은 기현의 얼굴뿐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희영은 점점 그 얼굴이 낯설고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혔다. 희영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아침 드라마 같은 상황이네.’

‘방금 유기현에게 다가가 따귀라도 날리고, 허주아와 머리끄덩이를 잡았다면 얼마나 볼 만한 장면이 됐을까.’

“희영 씨, 내가 약 가지러 간 사이에 왜 산부인과로 온 거야?”

뒤에서 매니저 조미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영은 고개를 돌려 미소 지으며 수화로 대답했다.

“도움이 필요한 임산부가 있어서요.”

미나는 눈앞의 세련되고 아름다운 희영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성격이 온화하고 얼굴도 예쁜 데다 무용 실력까지 뛰어난 사람이 왜 하필이면 말을 못하는 걸까.’

한때 희영은 이름난 발레단의 수석무용수였다.

그러나...

“여기, 진통제야.”

미나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희영을 바라보며 눈가가 붉어졌다.

“왜 하필 척추를 다쳤는지... 유니국립발레단의 수석 자리까지 따냈었는데, 이번 순회 공연만 끝날 수 있으면...”

미나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희영은 그런 미나를 보며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유니국립발레단의 수석무용수 자리. 그것은 수많은 무용수들의 꿈이었다.

그러나 희영은 단 한 번의 오디션으로 파격적으로 그 자리에 채용되었다.

미나는 희영의 불행에 속상함을 숨기지 못했다.

희영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집안 상황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미나는 항상 혼자 겉돌고 다니는 희영의 이력서를 보고서야 그녀가 보육원에서 자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미나는 늘 희영을 불쌍한 아이로 생각하며 남몰래 그녀를 챙겨주었다.

‘하늘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 거야!’

미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그러나 희영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미나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차분한 표정으로 진통제를 건네받았다. 그녀의 미소 속에는 어떠한 불행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강인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

...

1년 전, 기현이 친삼촌의 암살 음모에 휘말렸을 때, 희영은 목숨을 걸고 그를 구하다가 척추에 큰 부상을 입었다.

당시 기현은 최고의 의사와 최신 치료 장비를 동원해 희영의 치료에 전념했고, 의료팀도 완치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두 달 전, 올해의 순회 공연 준비 중에 희영의 부상이 다시 악화되었고, 통증은 마치 칼로 베이는 듯 그녀를 괴롭혔다.

재검사 결과, 희영은 결국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척추 신경에 병증이 생겨 더 이상 무대 위에서 춤을 출 수 없게 된 것이다. 치료 후 일상생활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춤을 못하게 된 사실은 희영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희영은 결과를 들은 후 바로 기현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기현은 여태껏 희영의 메시지에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희영은 혼자 집으로 돌아와 한바탕 울고 난 후,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아직 살아갈 날이 많으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심 끝에 희영은 보존적 치료를 받으며 이번 순회 공연만큼은 무사히 마치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커리어에 완벽한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무대에서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고, 화려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목표였다.

오늘이 바로 순회 공연의 마지막 날이었다.

희영은 아침에 약이 떨어진 것을 깨닫고 병원을 찾았다.

희영은 약이 든 봉지를 꼭 쥐었다. 그녀의 눈가가 조금씩 메말라 갔다. 방금 전의 상황은 마치 신이 그녀에게 또 다른 시련을 주는 듯했다.

척추가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희영은 1년 전 그날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구하지 말 걸 그랬어.’

‘그날 그 사람이 죽었더라면, 내 마음속에도 영원히 첫사랑으로 남아 있었을 텐데. 적어도 오늘처럼 내 앞에서 이렇게 썩어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겠지.’

그녀가 한때 사랑했던 그 얼굴로 그런 짓을 벌인 기현을 보자 희영은 속이 울렁거렸다.

희영은 진통제를 외투 주머니에 넣고 핸드폰을 꺼냈다. 반쯤 내려간 눈동자가 그녀의 차가운 감정을 감추고 있었다.

희영은 기현의 카톡을 열어 간단하게 한 마디 적고 나서 곧바로 전송했다.

‘오늘 이후로,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어.’

그녀의 손끝이 잠시 떨렸지만, 곧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제 더 이상 후회도 미련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

병원 주차장.

“오빠, 허희영이 왜 산부인과에 있는 거죠? 설마 허희영도...”

주아는 자신의 배를 움켜잡으며 불안한 듯 물었다.

“그럴 리 없어.”

기현은 단호한 말투로 확신했다.

주아는 고개를 숙이며 눈빛속에 담긴 놀라움과 은근한 기쁨을 감추었다.

‘허희영은 어떻게 결혼한 지 3년이 지나도록 남편과 몸조차 섞지 못한 걸까?’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G시 사람들은 모두 기현이 어릴 적 벙어리였던 친엄마에게 목 졸려 죽을 뻔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현은 벙어리였던 친엄마를 비롯해 모든 벙어리를 미친 듯이 혐오했다.

희영과의 결혼은 오로지 기현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그를 골탕 먹이기 위해 성사시킨 일이었기에, 기현은 당연히 희영을 건드리지 않았다.

희영은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웃음거리였다.

아무리 예쁘든, 아무리 발레를 잘 하든, 기현에게는 그저 버림받을 운명이었다.

‘허희영 주제에 감히 나와 기현 오빠의 사이를 가로막으려 하다니.’

주아는 희영이 아무리 노력해도, 기현은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을 거라는 자신삼이 있었다.

주아는 기쁜 마음을 숨기며 한편으로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기현 오빠, 희영 언니는 제 출신 때문에 저를 엄청 미워해요. 처음 집에 돌아왔을 때도 저한테 죽일 듯이 달려들었던 거 기억하죠? 지금 이렇게 산부인과에서 오빠와 있는 걸 봤으니, 오해할 게 뻔해요... 제가 가서 잘 설명할게요. 만약 언니가 오해해서 큰일이라도 생긴다면...”

“걱정하지 마.”

기현이 주아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희영은 늘 기현의 말을 잘 들었다. 지난 1년 동안 기현과 여러 연예인들의 스캔들을 불거지고, 심지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지만, 희영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마치 모든 걸 받아들인 듯, 그저 웃으며 기현에게 아부하는 그녀가 소란을 피울 리가 없었다.

“넌 지금 임신 중이니까 괜한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허희영이 널 귀찮게 할 일은 없을 거야. 차 준비해 뒀으니까 돌아가서 좀 쉬어.”

주아는 여전히 눈물을 글썽이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안에 숨겨진 희미한 만족감은 감출 수 없었다.

차에 막 오르려던 순간, 그녀는 우연히 지나가던 희영을 발견했다.

주아의 눈이 반짝였다.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고?’

주아는 희영이 칼을 휘두르며 자신에게 미친 듯이 덤벼들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그게 저 년의 진짜 모습이야. 감히 유기현 앞에서 얌전한 척하는 거야?’

‘네가 지금 가진 것들을 모조리 내놓아야 할 거야.’

“언니!”

주아는 희영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희영은 주아가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는 걸 싫어했다.

주아가 이렇게 부를 때마다 희영은 예민하게 반응하며 발끈하곤 했었다.

기현은 주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잠깐 스쳐보았지만, 기현은 그녀가 이전보다 많이 야위었음을 알아차렸다.

햇빛 아래에서 드러나는 희영의 가녀린 몸매는 더더욱 연약해 보였다.

희영은 주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던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두 사람과는 전혀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옆에 있던 사람에게 수화로 말을 전했다. 그리고 발레단의 차에 올라타 그대로 떠나버렸다.

주아는 희영의 태도에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그 속에는 억눌린 불쾌감이 느껴졌다. 희영의 평온한 모습은 마치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주아는 이를 악물었다.

‘저 벙어리가 왜 덤벼들지 않은 거지?’

곧 주아는 불안한 표정으로 기현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눈물을 참지 못한 채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기현 오빠, 희영 언니가 진짜로 오해한 것 같아요. 모두 제 탓이에요. 아무리 급했었도 오빠를 찾지 말았어야 했어요. 저희는 예전에 약혼할뻔한 사이잖아요... 저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나빠지기라도 한다면 정말 죄책감에 시달릴 것 같아요.”

주아는 계속 흐느꼈지만, 기현은 그녀의 말에 전혀 집중하지 않았다. 희영이 방금 수화로 한 말이 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잘 못 보셨겠죠.”

“오빠, 전 괜찮으니 얼른 가서 오해를 푸세요!”

주아는 두 사람의 사이를 걱정하는 듯 애타게 말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기현은 소매를 잡고 있는 주아의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기현은 문득 자신이 입고 있는 외투가 희영이 사준 것임을 깨달았다.

이 외투는 희영이 대회에서 금상을 받은 상금으로 애지중지하며 선물했던 옷이었다. 그때의 희영은 기현을 위해 최선을 다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현은 서늘한 표정으로 주아의 손을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

“말했잖아. 허희영은 신경 쓰지 않을 거야.”

그가 말이 끝나자마자, 주머니 속 핸드폰이 두 번 진동했다.

기현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짙고 차가운 눈매는 한층 더 싸늘해졌다.

[유기현, 우리 이혼해.]

희영의 짧고 단호한 문장은, 기현의 마음속에 얼음처럼 차가운 무언가를 남겼다.

그는 핸드폰을 꽉 쥔 채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치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그리고 그 빈 공간을 서서히 차가운 공기가 채워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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