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양쪽에 쌓인 눈은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녹아내렸다. 희영이 심리상담센터에 도착했을 때,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20분가량 남았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독특한 인테리어의 카페로 들어가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한 뒤, 구석자리에 여유롭게 앉았다. 그리고 기현이 준 파일 봉투를 열어 대충 훑어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기현을 구해준 것에 대한 경제적 보상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렇게 많은 것을 받을 줄은 몰랐다. 원래의 이혼 계약서에 적힌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적혀 있었다. 부동산, 펀드, 회사 주식, 현금, 그리고 앞으로 매달 수억 원이 넘는 양육비까지, 희영은 손쉽게 많은 돈을 얻게 되었다. ‘유기현의 목숨이 이렇게 비쌀 줄이야.’“202번 고객님, 주문하신 에스프레소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때 카페 직원이 말했다. 희영은 서류를 봉투에 넣고 일어나 커피를 가지러 갔다. 그러나 일어나는 과정에서 누군가와 부딪혔다. 몇 권의 책이 바닥에 떨어졌고, 희영은 급히 쪼그려 앉아 책을 주웠다. 그 중 한 권의 표지를 보자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죄송합니다, 핸드폰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영은 모파상의 단편선을 집어 들고 고개를 들어 자신과 부딪힌 사람을 쳐다보았다. 상대방은 잘생긴 남자로, 날카로운 눈썹과 우아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희영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가리키는 제스처로 말을 할 수 없음을 전한 뒤, 두 손을 모아 사과의 뜻을 전했다. 남자는 그런 희영을 보며 따뜻하게 웃었다. 그리고 희영이 놀란 눈빛 속에서 수화를 이어갔다. “제 잘못이니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희영은 밖에서 수화를 하는 사람을 거의 만나본 적이 없어 깜짝 놀랐다. 그녀는 자신이 들을 수 있지만 말을 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모파상 단편선을 남자에게 건넸다. “이 책은 6년 전에 출판사에서 특별히 나온 판본으로, 수량이 많지 않아요. 이렇게 6년 후에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희영이 먼저
일어선 희영은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희영 씨, 또 만나게 되었네요.” 카페에서 우연히 만났던 서준이 흰 가운을 입고 금테 안경을 쓰니 더욱 품위 있고 온화해 보였다. 희영은 놀란 기색을 보인 후 미소 지으며 수화를 했다. “한 선생님, 반가워요.” 서준은 새로 가져온 책을 책꽂이에 놓고,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편안한 모습으로 허리를 펴며 희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희영 씨, 앉으세요. 우선은 자유롭게 이야기해요.” 정말로 자유로운 대화였다.한 시간이 넘게 흘렀지만, 서준은 치료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결국 희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희영 씨, 정말 결정을 내리신 건가요? 치료 과정에서는 과거의 상처를 드러내고 그 안의 썩은 부분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야 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유쾌한 과정은 아니지만, 제가 가능한 한 고통을 줄여드리겠습니다.” 서준은 부드럽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희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젊은 나이에 이렇게 인정받는 전문가가 된 이유가 있구나. 하는 말만 들어도 치유받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결심했어요.” 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했다. “잘하셨어요.” 서준은 아이를 달래듯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결정을 내리기만 하면, 치료의 반은 성공한 셈이에요.” 어릴 적 상처를 치유하려면, 치료의 결단과 의지가 후속 심리치료보다 훨씬 중요하다. 희영은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물었다. “한 선생님, 정말 제가 다시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희영 씨는 말하기를 거부하고 있을 뿐이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서준은 격려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절 믿을 뿐만 아니라 희영 씨 자신도 믿으세요.” 희영은 서준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에너지가 잔뜩 담겨 있었다. 희영은 가볍게 웃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최근에 한가하신가요?” 또 다시 방금 전의 자유로운 대화 분위기로 돌아갔다. “네.” 은퇴했기에 한가할 수밖에 없었다. “
희영은 서준을 쳐다본 후 시선을 다시 책으로 옮겼다. “참 신기하네요.” 희영은 수화로 말했다. “예전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었던 책인데, 이제는 과거를 직면할 용기를 주는 보상이 되었어요.” 그녀는 책을 받아들고 부드러운 미소로 서준에게 감사를 전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한 후, 서준은 사무실로 돌아갔다. “한 선생님, 방금 그 환자분, 선생님께서 정말 좋아하시는 그 발레리나 아닌가요?” 프런트에 있던 여자 직원이 일어나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요? 한 선생님이 특별히 T국에서의 일정을 줄이고 공연을 보러 간 발레리나인가요?” 다른 직원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며칠 전, 서준은 T국의 학술 세미나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희영의 공연을 보기 위해 일정을 조정하고 일찍 돌아왔다. 서준은 웃으며 말했다. “제 앞에서 이야기하는 건 괜찮지만, 희영 씨 앞에서는 함부로 말하지 말아주세요. 제 환자분이거든요.” “알겠어요, 알겠어요!” 두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정말 예쁘더라고요!” “그런데 왜 아쉽게도 벙어리인 건지...” 그 말을 한 직원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서준의 얼굴에 미소가 조금 사라졌다. “희영 씨는 말을 하는 걸 거부하는 것이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서준은 말을 마친 후, 곧바로 치료실로 들어갔다. 말실수를 한 직원은 자신의 입을 몇 번 두드리며 후회했다....희영은 서준의 심리상담센터를 떠난 후 핸드폰을 한 번 보았다. 카톡은 난리가 났다. 김수정은 희영의 답장을 받지 못하자 여러 개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야기 들었어, 유기현과 이혼한다며? 희영아, 너는 어쨌든 허씨 가문의 사람이야. 그러니 허씨 가문은 항상 너의 후원과 안식처야.] [집에 와서 삼촌과 앞으로의 계획을 상의해봐.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건 다 도와줄게.] [희영아, 나는 네 숙모야. 너를 걱정해서 한 말인데, 왜 답장도 차 하지 않는 거야?] [지금 어디 있어? 운전기사를 보낼 테니 주소라도
“이모님, 알겠어요. 하지만 이 일은...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주아야, 너 이미 배가 많이 불렀어. 그러니 아이를 위해서라도 싸워야지. 아이가 아빠조차 없는 자식이 되도록 내버려둘 생각이야?] 서미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못 간다면 차라리 기현에게 가보라고 해!] “네, 알겠어요.” 주아는 전화를 끊자마자 얼굴이 확 바뀌며 핸드폰을 바닥에 내던졌다. “진짜 후회하기라도 한 거야?” “빨리 기현에게 말해!” 김수정이 재촉했다. “그 눈먼 노인네들은 딸에 대한 감정과 아쉬움을 모두 희영에게 쏟고 있으니, 허희영이 애원하며 불쌍한 척하면 모두 받아줄 거야!” 주아는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지만 기현이 경고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현은 그녀와 희영이 엮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 듯했다. 결국 주아는 희영을 괴롭힐 때 사용했던 익명의 번호로 기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유 대표님, 전처께서 이혼을 무르려고 서씨 어르신을 찾으러 갔습니다.]...희영은 실제로 서씨 저택에 갔다. 희영이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송혜정은 기뻐하며 주방에 부탁해 희영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게 했다. 그리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가 천천히 멈추자 송혜정이 다정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희영이 내리자, 그녀는 급히 손을 잡았다. “아가야, 얼마나 오랜만이니? 할머니를 보러 오지 않고 카톡에도 답장이 없어, 할머니가 정말 걱정했단다.” 송혜정은 사랑과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보였는데, 희영이 처음 돌아왔을 때와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희영은 예전처럼 환하게 웃지 않았다. 송혜정은 잠깐 놀랐지만, 여전히 희영을 안으로 안내했다. “최근 공연이 많았니? 왜 이렇게 살이 빠진 거야? 밥은 제대로 먹고 있는 거야?” “잘 지내고 있었어요.” 희영의 반응은 여전히 차가웠다. 정원 쪽으로 지나가던 중, 불길한 예감이 든 송혜정은 나무를 다듬고 있던 서준모를 불렀다. 서로 눈을
“희영아, 그분은 이미 돌아가셨으니 더 이상 알아볼 필요는 없어. 하지만 네가 물으니 대답해주마. 괜히 네가 잘못된 이야기를 듣고 우리를 원망할지도 모르니까.” 송혜정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희영을 바라보았다.“네 부모님이 사고를 당한 곳이 어딘지 알고 있니?” 그녀는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네 부모님은 수원 근처에서 사고를 당했어. 그곳은 M시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부모님과 함께 사고가 났던 넌 M시에서 나타났지!”희영은 부모님이 어디서 사고를 당했는지 잘 몰랐다. 이 이야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귓가에 또다시 시끄러운 윙윙거림이 울렸다.“네 할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주 자세히 조사하셨단다. 너는 임서향이 데리고 간 것이지, 누군가가 보육원으로 보낸 것이 아니란다.” 송혜정이 계속해서 말했다.“예전에 우리가 너를 찾았을 때, 너는...” 송혜정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끝내 정훈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네 상태가 좋지 않았고 임서향만을 믿고 있었으니, 우리는 네가 자극을 받을까 봐 걱정되어 임서향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지켜봤지.”“하지만 그 후에 기현이가 돌아왔고, 너는 곧 회복되었지. 그때 임서향이 다시 나타나서 너와 기현의 결혼을 방해하고 싶어했으니, 내가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겠어?” 송혜정은 힘주어 말했다.“내가 그때 일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그 여자는 끝까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어! 분명히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지. 난 그 여자를 감옥에 보내지 않고 너와 멀리 떨어지라고만 했어.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단다.”송혜정은 매우 흥분하여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그 말을 들은 희영은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희영은 임서향과 함께 자라왔기에, 누구보다도 임서향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임서향은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었다.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자신의 뼈와 피를 쥐어짜내고 싶어할 정도였다. 그러나 송혜정의 입에서 그녀는 의도를 가진 인
“혹시 제 부모님의 사고에 대해 조사해보셨어요? 도대체 타살인지 사고인지 알고 계신가요?” 희영이 물었다. 두 노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침묵했다. 그 당시의 사고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제 부모님이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면서, 오히려 원장님이 저를 해쳤다고 단정짓는 건가요? 힘 없는 사람만 골라서 괴롭히시는 거예요?” 희영은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이런 상황이 너무 터무니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왜 다른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만약 원장님이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면, 제가 죽었을지도 모르잖아요.” 두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희영은 비웃음을 터뜨렸다. 고귀한 사람들은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손에 막대한 권리를 쥐고 있으며, 단순히 임서향에게 화풀이를 하려던 것이다.“당신들은 원장님이 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괴롭히셨던 거잖아요. 곧 죽을 사람인 데다가, 원장님이 절 사랑하는 걸 이용해서...” 희영은 수화를 멈추고 주먹을 쥐었다. 임서향이 조금이라도 이기적이었다면 진작에 희영을 찾아왔을 것이다. 굳이 숨을 거두기 직전에 자신을 만나려 하진 않았을 것이다.“아가야, 그렇게 흥분하지 마.” 송혜정이 당황한 듯 말했다. “저는 당신들의 아이가 아니에요.” 희영은 잠시 진정하고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천천히 수화로 말했다. “원장님은 이미 죽었어요, 잊으셨나요?” 송혜정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희영아!” 서준모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송혜정을 바라보았다. 희영은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오늘 온 이유는 원장님을 위협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 외에도, 두 분께 말씀드릴 게 하나 있어요.”“희영아, 너 지금 너무 흥분한 것 같으니 방에 가서 잘 생각해보고 다시 내려와서 이야기하려무나.” 서준모는 경고하는 눈빛으로 명령했다. 그러나 희영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 사람이 왜 자신에게 잘해주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희영에게서 고인이 된 딸의 그
희영은 그들의 반응에 매우 만족했다. 오히려 임서향이 몇 년 동안 혼자서 겪었던 고통과 비교하면,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희영은 약간의 예의는 갖추었지만 그리 친절하지 않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인사한 뒤,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아가야! 돌아와!” 송혜정이 서둘러 그녀를 쫓았다. 그러나 발을 헛디뎌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서준모가 재빠르게 그녀를 붙잡아주었다. 희영은 몇 걸음 밖에 가지 않았기에 뒤에서 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으나, 고개를 돌리지 않고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 저택을 나서려던 찰나, 기현이 급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표정은 엄청 어두웠다. 희영을 보자 화를 내려고 하는 듯했지만, 그녀의 얼굴에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을 보자 마음이 저릿해졌다. 희영은 기현을 보지 못한 것처럼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를 쳐다보거나 멈출 생각이 없었다. 기현은 희영의 팔을 붙잡고 강하게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힘이 엄청나서, 하마터면 희영의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 희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잘 차려입은 모습과 익숙한 시선이 귀찮기만 했다. “허희영, 이혼은 네가 원해서 한 거잖아. 절차를 밟을 땐 한 번도 주저하지 않았으면서, 지금 와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앞에서 왜 우는 거야? 내가 이혼을 강요한 건 아니잖아?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기현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희영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며 중지를 세웠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햇살이 따뜻하게 비추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기현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희영의 모습에 당황했다. ‘어르신들께 이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러 온 게 아닌가?’ ‘왜 이런 태도를 보인 거지?’ 기현은 주아가 보낸 메시지를 받은 뒤 회의를 중단하고 급히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다급했던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여보!” 그때 거실에서 서준모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현은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 건강했던
“기현아, 희영이는 후회하지 않을 거야.” 서준모가 천천히 말했다. 기현은 놀란 표정을 보이더니,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이혼을 하지 않기 위해 두 분을 찾으러 온 게 아니었나요?” “우리에게 이혼한다고 통보하러 온 거야. 그리고 앞으로는 우리와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말했어.” 서준모는 더 이상 기현을 쳐다보지 않고 피곤한 눈빛으로 그를 내쫓았다. “네가 그동안 늘 못되게 굴었으니 상처받은 거지. 네가 원하는 대로 되었으니, 앞으로는 네가 원하는 상대를 만나 결혼해. 우린 더 이상 간섭하지 않을 거야.” 모두가 서씨 가문의 두 노인이 딸의 죽음으로 유씨 가문의 사람들, 심지어 기현마저 원망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현은 결국 그들의 외손자였다. 딸을 그렇게 사랑했으니, 기현을 미워할 수는 없었다. 결국 서준모는 정훈에 관한 이야기를 기현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대역이라는 건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현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이미 헤어지기로 결정했으니, 이 비밀은 이쯤에서 묻어두기로 했다....서씨 저택을 떠난 희영은 임시로 머물고 있는 호텔로 돌아갔다. 그녀는 차가운 물로 얼굴의 눈물을 씻어냈지만, 가슴이 여전히 아팠다. 희영은 한참이 지나서야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저녁에 무용단 동료들과의 모임이 있어서, 그녀는 울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때 기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희영은 바로 끊어버린 후, 그를 차단했다. ‘멍청한 놈, 내가 말할 줄 모르는 걸 알면서 전화를 해? 그냥 날 혼내려고 걸어온 전화겠지?’ 내일 고급 ‘정신병원’으로 휴가를 가야 하니, 희영은 밤에 늦게 돌아오는 게 걱정되어 미리 짐을 챙겼다. 짐을 다 정리한 후, 기현에게서 카톡이 와 있는 걸 발견했다. [외할머니가 너 때문에 쓰러지셔서 지금 병원에 있어.] 기현이 곧이어 주소를 보내왔다. 그곳은 서씨 가문이 투자한 개인 병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전에 임서향은 희영을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