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은 권희연을 둘러맨 로건과 함께 앞에서 걸어갔고 총을 든 조 사장은 그들을 말없이 뒤따랐다.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그녀 앞에 일여덟 정도 되는 사람들이 막아섰다.조 사장의 사람인 걸로 봐서 아까의 총성을 듣고 몰려든 듯했다.그들이 있는 한 기회를 봐서 도망치려던 권하윤의 계획도 실행할 수 없었다.일반 사람이라면 스틱스에 올 때 이렇게 많은 경호원을 데려오지 않을 텐데 민도준한테 당한 적 있는 조 사장은 또 불상사라도 있을까 봐 만반의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그렇게 그들은 무리를 지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엘리베이터와 가까워질수록 권하윤의 심장은 평온한 표정과 달리 미친 듯 뛰었다.‘왜 조 사장이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지? 설마 오늘 진짜로 도준 씨랑 맞서기라도 하려는 건가?’만약 그렇다면 그녀가 아까 허장성세를 부렸다는 게 들통나고 말 거다.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몇 발짝은 마치 낭떠러지로 걸어가는 듯 무겁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만 방심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권하윤은 겁을 먹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땀에 흠뻑 젖은 손을 들어 아무렇지 않은 듯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그녀의 태연한 행동에 조사장의 미간이 오히려 구겨졌다.‘설마 민도준이 정말 따라왔나?’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권하윤은 먼저 안으로 들어가 닫히는 문을 손으로 막으며 조 사장을 향해 미소 지었다.“들어오시죠.”하지만 조 사장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어두운 눈동자로 권하윤을 빤히 바라보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갑자기 일이 생겨 홍옥정에 가봐야 해서 민 사장은 다음에 만나 뵙도록 하지.”“대신 전해드리죠.”권하윤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야 그녀는 긴장이 풀린 듯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하지만 아직은 마음을 놓을 때가 아닌지라 심호흡을 한 뒤 로건을 바라봤다.“로건 씨.”이름이 불린 당사자는 마치 머리가 백지장이 된 듯 멍하니 서 있다가 화들짝 놀랐다.“네
“민…… 민 사장님?!”그제야 반응한 조 사장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뗐고 겨우 공기를 들이켜게 된 권하윤은 숨을 헐떡이며 기침을 해댔다.민도준이 온 걸 본 그녀는 조 사장 못지않게 놀랐다.때문에 표정도 덩달아 멍해졌다.민도준은 그녀의 빨간 가발과 아직 가시지 않는 얼굴의 붉은 기를 힐끗 보다가 야릇한 치마로 눈길을 돌리더니 눈썹을 치켜올렸다.그의 그런 의미심장한 표정에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고 큰 재앙이 닥쳤다는 생각이 뇌리를 세게 때렸다.그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건 그녀가 자기 이름을 팔고 다니며 왕행세를 하고 다닌 일이 발각됐다는 뜻이었기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이에 민도준은 가볍게 피식 웃더니 다시 눈길을 조 사장에게로 돌렸다.이윽고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그에게 다가간 민도준은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조 사장이 날 이렇게 보고 싶어 하는 줄 몰랐네. 이제 내가 왔으니 하고 싶은 말 해보시죠?”“…….”조 사장의 낯빛은 여러 차례 변하더니 끝내 핏기 없이 창백해졌다.세상을 발아래 두고 무시하는 듯한 민도준의 건방진 얼굴을 보자 그는 오늘 죽지 않더라도 죽기 직전까지 괴롭힘당하겠다는 직감이 들었다.하지만 민도준에 대한 원한이 치밀어 오르더니 순간 혼자 온 민도준에 비해 사람도 있고 총도 있는 자기가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그가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커다란 손이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형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나도 좀 들어봅시다.”“그게…….”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려 하던 찰나 어깨에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은 비명으로 변해버렸다.“아아!”부러진 팔이 아래로 축 늘어짐과 동시에 그의 입에서 처참한 비명이 흘러나왔다.하지만 민도준은 눈치채지 못한 듯 그의 빠진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농담을 던졌다.“왜 그래요? 오랜만에 만났다고 노래라도 한 곡조 뽑는 겁니까?”이윽고 그는 여전히 총을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조 사장의 똘마니들을 보며
민도준이 자기들의 말을 안중에도 두지 않자 현장에 있던 조 사장의 똘마니들은 순간 울컥했다.일촉즉발인 상황 속에서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았다.하지만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점점 그들에게 가까워지더니 경찰들이 나타나 사람들은 일순 얼어붙고 말았다.“움직이지 마! 무기 버리고 손들어!”그들이 아무리 법을 무시하며 산다고는 하지만 현행범으로 잡히는 건 골치 아픈 일이었기에 할 수 없이 총을 내려놓고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그때 놈들의 총을 회수한 경찰이 주위를 매의 눈으로 훑어봤다.“신고하신 분이 누구십니까?”“저요.”권하윤은 사람들 사이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올리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민도준이 올 줄 모르고 그저 퇴로를 만들어 두려고 신고한 거다. 조 사장이 단념하지 않고 60층에 올라갔다가 뒤따라올까 봐. 그렇게 되면 진짜 위험한 상황이 닥친다 해도 눈앞의 곤란은 해결할 수 있었다. 조 사장이 아무리 난다긴다해도 경찰 앞에서 그들을 죽이지는 못할 테니까.그녀가 그렇게 승인하자 분노 섞인 눈빛들이 그녀를 당장 죽이기라도 할 듯 노려봤다.하지만 권하윤은 그들 시선을 무시한 채 핸드폰을 꺼내며 미리 준비해 둔 말을 뱉어냈다.“저 사람들이 저를 저를 협박해서 강제로 잠자리를 가지려고 했어요. 이것 보세요. 이게 증거예요.”재생된 영상은 마침 조 사장네 똘마니들이 총을 들고 그들 앞을 막아서던 장면과 조 사장이 그녀의 목을 조르는 장면을 담고 있었다.증인과 증거가 버젓이 드러나자 팀장으로 보이는 형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연행해!”그리고 조 사장과 그 똘마니들에게 수갑을 채운 뒤 골치 아픈 듯 민도준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민 사장님.”그 시각 민도준은 이미 조 사장을 놓은 채로 손을 벌리며 좋은 시민의 모습을 연기했다.“전 피해자입니다.”자기를 피해자라고 말하는 민도준의 모습에 장 형사의 표정은 마치 똥이라도 씹은 표정이었다.경성에서 민도준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하면 간첩이나 다름없다.
권하윤은 민도준이 말한 똑똑하다는 말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때문에 잠깐 머리를 굴리던 끝에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도준 씨가 오지 않았다면 제가 위험한 일을 당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고마워요.”평소의 화장기 없던 얼굴이 짙은 화장에 가려져 마치 화려한 가면을 쓴 듯 그녀의 모든 정서를 가려주었다.민도준은 재밌는 듯 피식 웃으며 그녀의 가발을 손가락에 돌돌 감으며 빨간색 머리 때문에 더욱 하얗게 보이는 권하윤의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봤다.“그런데 하윤 씨 빨간색이 잘 어울리네.”갑자기 전환된 화제에 권하윤은 방심하지 않고 낮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민도준의 욕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보고 있자니 하고 싶어졌어.”“콜록콜록-”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쪽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시각 장 형사는 자기의 예민한 청각을 탓하며 서둘러 라디오를 켰다.이러한 일이 있고 난 뒤라 그런지 참고자 신분으로 민도준과 권하윤을 조사할 때 장 형사는 극도로 불편했다.다행히 증인과 증거가 확실하고 더욱이 동영상까지 있는 터라 조 사장 일행은 곧바로 구속되었다.그렇게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경찰서에서 나왔을 때 날은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하지만 계단을 두 개쯤 내려갔을 때 민도준이 뒤따라오지 않는 걸 발견한 권하윤은 잠깐 멈춰서서 그를 돌아봤다.“왜 그래요?”민도준은 담배를 손에 든 채 그녀를 내려다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풍경이 아름다워서 구경 좀 하느라고.”‘풍경?’권하윤은 의아한 듯 주위를 둘러봤지만 주위에는 그저 평범한 주택가뿐이었다.이윽고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민도준이 마침 내려오며 한 손으로는 불에 타들어 가는 담배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만지며 농담조로 말했다.“하윤 씨 말이야.”말이 끝나기 무섭게 덮쳐오는 입술에 권하윤은 잠시 멍해 있더니 반사적으로 민도준을 밀어냈다.하지만 민도준은 힘을 쓰지 않은 터라 그녀의 손에 쉽게
민도준의 이름을 팔아 어느 정도 원하는 목적을 이루었기에 할 말이 없어진 권하윤은 눈치껏 동작을 멈췄다.이에 만족한 민도준은 그녀의 등을 가리고 있던 긴 머리카락을 앞으로 넘기며 그녀의 훤히 드러난 등에 입을 맞췄다.등줄기를 따라 점점 더해지는 상대의 뜨거운 숨결에 권하윤은 몸을 흠칫 떨다가 끝내 자기의 배를 문지르는 민도준의 손을 꽉 잡았다.“도준 씨.”“응?”민도준의 낮고도 욕망이 가득한 목소리에 위기감을 느낀 권하윤은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이야깃거리를 찾았다.“조 사장 징역 살 수 있나요?”권하윤의 말에 민도준은 재밌다는 듯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진동이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전해져 더욱 안절부절못했다.그러던 그때 민도준이 그녀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이렇게 귀여워?”권하윤은 그제야 자기가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는 걸 알아차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행히 작은 오프닝이 있은 뒤 민도준은 더 이상 그녀를 아까처럼 괴롭히지는 않고 그저 가끔씩 그녀의 등을 어루만졌다.조용한 차 안 때문에 밖에서 들리는 경적이 더욱 요란하게 들렸다.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길거리에는 차가 막혀 움직임이 매우 더뎠고 가다가 자꾸만 멈추며 조금씩 흘들리는 데다가 민도준이 자꾸만 등을 문지르는 바람에 권하윤은 잠이 솔솔 몰려왔다.민도준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권하윤의 머리가 의자에 부딪히기 전 때마침 손을 뻗어 그녀의 의마를 받들었다.손바닥에 닿은 권하윤의 얼굴은 조금 차가웠지만 잠든 그녀는 눈을 떴을 때처럼 경계하지 않아 새끼 고양이처럼 귀엽기만 했다.그런 그녀를 흐뭇하고 바라보며 어떻게 놀려먹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핸드폰 화면을 확인해 보니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한민혁: 도준 형, 지금 통화 가능해?]-멀리에서 들리는 자동차 경적 권하윤은 그제야 조금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어둑어둑한 차 안에서 손을 더듬거리며 일어나려고 할 때 귓가에 나지막
손바닥 아래에 느껴지는 피부는 차갑고 매끄러웠으며 눈앞의 여인은 다른 때보나 순종적이었다.하지만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억울함도 서러움도 참고 자기 몸을 도구로 사용하면서까지 그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려고 애쓰는 권하윤을 보자 민도준은 씁쓸한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이윽고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권하윤의 어깨에 올려놓았던 손을 움직여 그녀의 목을 조르며 자기 쪽으로 당겨왔다. 그러더니 상대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자 그녀의 나시끈을 끊어버렸다.“좋아, 그렇게 원한다면 어디 확인해 보자고.”-병원.“제 동생과 함께 저 구해주러 와줘서 고마워요.”“아닙니다. 마침 가던 길이었습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하윤 씨를 따라간 건 우연이었지만 희연 씨 구한 건 우연 아닙니다. 네. 바로 이겁니다.”권희연의 감사 인사에 로건은 연신 손을 젓던 로건은 점점 이상해지는 말에 당황하는가 싶더니 겨우 제대로 해명한 뒤에야 확신에 찬 듯 고개를 끄덕였다.순수한 그의 행동에 권희연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붕대를 감은 고개를 푹 숙이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그러고 보니 죄송해요. 못 볼 꼴 보여드렸네요…….”“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로건은 연신 손을 저으며 또렷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민 사장님이 말씀하셨는데 본인 의지로 한 게 아니면 본인이 한 게 아니래요.”말도 안 되는 억지를 너무나 순수한 표정으로 부리는 로건의 모습에 권하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난감하기만 했다.하지만 남의 의견을 반대하는 성격이 아닌지라 그녀는 오히려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냐고 되물었고 로건은 그녀의 물음에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민 사장님이 말씀하셨는데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한 일은 자기가 한 일이 맞지만 할 수 없이 한 일은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했어요. 희연 씨도 할 수 없이 그런 일에 휘말렸으니 자기 자신을 괴롭힐 필요 없어요.”그의 말에 권희연은 순간 멍해졌다.
러시아워로 찾아온 교통 체증도 어둠이 깊어지자 점점 완화되었고 집집마다 불빛이 켜지기 시작하며 밤하늘을 알록달록하게 수놓기 시작했다.하지만 환한 불빛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수풀 사이에서 불쌍하게 갈라진 애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만하면…… 안 돼요?”붉은색 가발은 자꾸만 덜컹거려 마구 흐트러졌고 질감 좋지 않은 머릿결이 땀에 젖어 어깨와 얼굴에 들러붙었다.분명 야릇하고 섹시했지만 원래의 모습보다는 조금 아쉽다는 생각에 민도준은 큰 손으로 그녀의 가발을 벗겨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칼을 해방해 주었다.그리고 검은 비단결 같은 머리가 양옆으로 흘러내린 순간 민도준의 두 눈은 마침 어둠 속에서 반짝 빛났다.이윽고 그는 다섯 손가락으로 권하윤의 머리카락 사이로 깊이 파고들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나더러 확인해 보라며? 아까는 자신 있게 말하더니 이제는 안 되겠어?”권하윤은 머리를 의자에 기대며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콧속을 파고드는 야릇한 밤꽃 냄새에 원래도 맑지 않던 머리가 점차 무거워졌다.“저 힘들어요…….”하지만 어렵사리 한마디를 내뱉은 순간 그녀의 얼굴을 강제로 민도준 쪽으로 돌려졌다. 민도준은 그녀의 쓰러질 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야릇하고도 잔인한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경고하는데, 나 만족 안 하면 다른 짓 저지를 수도 있어. 예를 들면 하윤 씨와 함께 오늘 일을 벌인 로건에게 벌을 준다던가.”남자의 말에 권하윤의 등은 순간 뻣뻣하게 두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체념하기라도 한 듯 민도준의 가슴에 기댄 채 고개를 들며 순종적인 자세를 취했다.“착하네.”“…….”그렇게 권하윤과 몸을 섞은 민도준은 밤이 깊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선심을 쓰듯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었다.차가 문 앞에 도착했을 때 권하윤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그녀의 몸은 남자의 커다란 외투에 의해 가려져 오히려 눈물법벅이 된 얼굴이 더욱 가련해 보였다.두 번 불렀지만 권하윤이 여전히 움직이지 않자 민도준은 그녀의 볼을 꼬집으며 낮게 속삭였다.“그래, 계
민도준이 방에서 나왔을 때 민승현은 마침 방문 앞에 서 있었다.하지만 고작 몇 분 사이에 그는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잘생긴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고 온몸에서 광기를 뿜어내며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하고 말이다.하지만 민도준은 그를 가볍게 무시한 채 좋은 형처럼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가자, 내려가서 얘기해.”거실.민도준은 털털하게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하지만 민승현은 오히려 여유로운 그와는 달리 잔뜩 얼어붙은 채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분명 그의 집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손님처럼 안지도 서지도 못한 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기 집인 것처럼 자유롭게 행동하는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그때 민도준이 건너편 소파를 향해 고개를 까딱거리며 입을 열었다.“멍하니 서 있지 말고 앉아.”“두 사람 언제부터야?”민승현은 끝내 참지 못 하고 낮게 소리쳤다.하지만 민도준은 귀찮은 듯 고개를 돌리며 거리를 조금 유지하더니 그를 힐끗 바라봤다.“승현아, 너도 이젠 어린애가 아닌데 매사에 그렇게 감정조절 못하면 어쩌겠다는 거야? 할 말 있으면 해, 소리치지 말고.”그런데 이미 이성을 잃은 민승현은 민도준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새 던져버렸는지 높게 소리쳤다.“둘이 진작부터 붙어먹었지? 그렇지?”자기의 형과 약혼녀가 자기 몰래 뒤에서 붙어먹으며 한민혁을 내세워 그를 바보로 만든 것만 생각하면 그는 사람을 죽이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하지만 잔뜩 흥분한 그와 달리 민도준은 여유롭게 담뱃재를 털어버리며 조금의 미안함도 없는 미소를 지었다.“같은 식구끼리 붙어먹는다니, 듣기 좀 거북하네. 네가 바쁜 것 같아 내가 대신 제수씨 돌봐준 것뿐이야.”그 말에 민승현은 피가 거꾸로 솟았고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라 당장이라도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돌봐줬다고? 돌봐준다는 사람이 침대에까지 끌어들여? 형! 권하윤은 형 제수씨야. 내 약혼녀고 내 여자라고!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쯧.”참을성을 잃은